장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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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쭤린

장쭤린 (중국어 정체: 張作霖, 병음: zhāng zuò lín, 장작림[*], 1873년 3월 19일 ~ 1928년 6월 4일)은 중국 만주 지역의 북양군벌계열의 봉계군벌이자 정치가이다. 둥베이 3개 성(省)을 지배하고 친일적 성향을 띠었다.

생애[편집]

장쭤린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중국 성경성(盛京省: 지금의 랴오닝 성) 하이청(海城)에서 태어났다. 군에 입대해서 청일전쟁러일전쟁에도 참여했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자체적인 군대를 조직했고, 당시 다른 많은 군벌들이 그러하듯이 일종의 의적(義賊)질을 하였다. 당시 몰락해가던 청나라 조정은 이미 강력해진 장쭤린의 부대를 펑톈 성의 정규군으로 편입시켰다.

만주 전역으로 세력 확장[편집]

장쭤린은 펑톈은 물론 만주까지 자신의 세력을 넓혀 1918년 중화민국 정부는 장쭤린을 만주의 3개 성을 관할하게 하였고, 그 이후 사실상 만주를 자신의 통치국가와도 같이 지배했다. 이후 다른 북양군 출신 군벌들과 다툼을 벌이면서 그는 점차 세력을 더욱 키워갈 수 있었고 민국 정부에서 다른 사령관으로 교체하려고 시도했을 때 장은 이를 분쇄하고 오히려 세력을 더욱 넓혔갔으며 일본 제국으로부터 무기 및 물자, 보급품 등 지원받아가면서 성장해 나아가 1924년에는 지위가 막강해져서 수도 베이징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결국 1926년에는 베이징에서 대원수직에 취임했다.

장개석의 북벌[편집]

그러나 1927년 장제스(蔣介石)가 지휘하는 국민혁명군은 '북벌운동'을 개시하면서 점차 그를 압박해왔고 장쭤린은 이에 밀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조만간 베이징을 점령할 것이 분명해진 것이었다. [1] 그러자 막후에서 그를 지원하던 일본 정부도 결국 그에게 베이징을 국민당에 넘겨주고 퇴각하도록 권고했다. 다나카는 중국 북부에서 만주로 철수하도록 장쭤린에게 압력을 가했다. [1] 만주에서는 일본군이 그를 보호할 수 있었다. [1]장쭤린은 마지못해 동의하였다. [1]

최후[편집]

그렇지만 일부 관동군 참모들은 이 조치에 계속 불만이었고, 괴뢰 군벌이 제공하는 것 이상의 직접 지배권을 만주에 요구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1] 그 중 한 사람이었던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 대좌는 일을 벌일 구실을 꾸미기로 결심하였다.[1] 고모토는 장쭤린이 더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장쭤린을 제거하기로 하고, 직속 부하를 시켜 베이징에서 톈진으로 돌아오는 장쭤린의 남만주 철도기차를 폭파하여 그를 암살한다. 그가 탄 열차가 봉천 교외 철교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열차감시초소에서 도화선을 당겨 열차가 폭발했다. [2] 장쭤린은 목숨을 간신히 부지하고 봉천의 병원으로 실려왔으나 치료를 받다가 죽었다.(장작림폭살사건) [2] 향년 55세. 경비를 서던 일본 군인들이 현장에서 북벌군 두 사람의 시체를 찾아냈다. [2]시체에서 3통의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국민당 이름으로 폭파를 지령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2] 그런데 사실은즉 두 사람은 아편중독자로 관동군이 북벌군의 옷을 입혀 현장에 데려와 사살하고는 위조한 편지를 옷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2]

사후[편집]

  • 그가 암살된 날은 1928년 6월 4일이었는데 몇주 동안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지고, 그의 지위와 권력은 그의 장남인 장쉐량(張學良)에게 계승되었다. 사건에 세계의 모든 관심이 쏠렸고, 조선의 독립지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2] 일제와 손을 잡고 조선독립군을 압박하던 장쭤린이 죽었기 때문이다. [2]
  • 이 사건은 사실상 고모토가 의도했던 일본의 만주 개입을 유발하지는 못했다.[1] 왜냐하면 고모토의 상관이나 도쿄의 내각이나 그러한 행동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1] 실제 고모토는 간신히 군법 회의를 면했다.[1]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W.G. 비즐리 저, 장인성 역, 《일본 근현대사》을유문화사 (2004) 279쪽 ISBN 89-324-6125-2
  2.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21: 해방 그날이 오면》한길사(2004) 1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