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1세
![]() | 이 문서는 자연스럽지 않게 번역되었으며, 기계 번역을 통해 작성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2022년 4월) |
찰스 1세
Charles I | |
---|---|
![]() | |
![]() | |
스코틀랜드 국왕 | |
재위 | 1625년 3월 27일 ~ 1649년 1월 30일 |
대관식 | 1633년 6월 18일 |
전임 | 제임스 6세 |
후임 | 찰스 2세 |
잉글랜드 국왕 | |
아일랜드 국왕 | |
재위 | 1625년 3월 27일 ~ 1649년 1월 30일 |
대관식 | 1626년 2월 2일 |
전임 | 제임스 1세 |
후임 | 잉글랜드 호국경 추밀원 |
이름 | |
휘 | 찰스 스튜어트 |
신상정보 | |
출생일 | 1600년 11월 19일 |
출생지 | 스코틀랜드 왕국 던펌린 |
사망일 | 1649년 1월 30일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런던 화이트홀 |
가문 | 스튜어트 |
부친 | 제임스 6세/1세 |
모친 | 덴마크의 앤 |
배우자 | 헨리에타 마리아 |
자녀 | 7명 (찰스 2세, 제임스 2세 포함) |
종교 | 성공회 |
묘소 | 런던 윈저 성 성 조지 예배당 |
찰스 1세(Charles I, 1600년 11월 19일 ~ 1649년 1월 30일)는 1625년 3월 27일부터 1649년 자신의 처형까지 잉글랜드의 국왕이자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국왕을 겸하였다. 그는 유명하게 잉글랜드 의회와 권력 투쟁에 참여하였다. 그가 왕권신수설의 옹호자로서 잉글랜드에서 많은이들은 그가 절대 권력을 얻는 데 시도하고 있었다는 것에 두려워했다. 많은 그의 활동들, 특히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 부과에 광범위한 반대가 있었다.
종교적 갈등은 찰스의 군림에 스며들었다. 그는 의회와 여론의 반대에 가톨릭 공주 헨리에타 마리아와 결혼하였다. 챨스는 성직자 리처드 몬터그와 자신이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한 윌리엄 로드를 포함한 다른 논쟁적 종교인들과 자신을 제휴하였다. 로드는 많은 찰스의 많은 주제가 잉글랜드 성공회를 가톨릭에 너무 가깝게 가져온 것을 느꼈던 잉글랜드 성공회의 전례에 변화를 일으켰다. 스코틀랜드에 종교 개혁을 강요하는 찰스의 이후의 시도들은 잉글랜드를 약하게 하고 그의 몰락을 제촉하는 도움을 준 전쟁으로 이끌었다.
찰스의 군림의 마지막 세월들은 그의 권력을 키우는 시도를 도전한 의회의 군대와 그의 종교 정책들과 명백한 가톨릭 동정에 적대적이었던 청교도들에 의하여 자신이 반대되었던 잉글랜드 내전에 의하여 표시되었다. 제1차 내전 (1642년 ~ 1645년)은 의원들이 헌법적 왕정을 위한 자신들의 요구들을 그가 받아들이는 것을 기대했던 찰스의 패배로 끝났다. 대신 그는 도전적으로 제2차 내전 (1648년 ~ 1649년)을 일으켰다. 이 일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숙고되었고, 찰스는 즉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이 내려져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그러고나서 왕정은 폐지되었고 잉글랜드 연방으로 불린 공화정이 선언되었다. 찰스의 아들 찰스 2세가 1660년 왕정복고 후에 국왕이 되었다.
찰스는 또한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 이래 잉글랜드 성공회에 의하여 시성된 단 하나의 사람이다.
초기 생애[편집]

스코트인의 왕 제임스 6세와 덴마크의 앤의 둘째 아들로 파이프 던펌린궁에서 태어났다. 그는 3세의 나이에 아직도 걷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미성숙한 아이 (기네스북에 국가의 제일 키가 작은 국왕으로 명단에 들어있음)였다. 1603년 3월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고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었을 때 찰스는 원래 여행이 자신의 연약한 건강을 손상시킬 위협 때문에 간호사와 하인들의 보살핌에 스코틀랜드에 남겨졌다. 그는 1604년 7월 여행을 이루어 그후 자신에게 어떻게 걷고 말을 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그의 약한 발목들을 강화시키는 도움을 준 스페인산 가죽과 황동으로 만든 부츠를 신는 것을 주장한 로버트 캐리 경의 네덜란드 출신 부인 알레타 호헨호버의 책임하에 배치되었다. 성인으로서 찰스는 신장 5 피트 4 인치 (162cm)였다.
찰스는 자신의 형 웨일스 공 헨리 프레더릭 만큼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으며 찰스 자신은 헨리를 숭배하고 그를 모방하려고 했다. 1605년 왕의 둘째 아들의 경우에 당시 관습대로 그는 잉글랜드에서 요크 공작으로 만들어졌다. 2년 전 1603년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올버니 공작으로 만들어졌다. 1612년 자신의 형이 장티푸스로 사망했을 때 찰스는 상속인이 되어 그후 1616년 11월 웨일스 공과 체스터 백작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누이 엘리자베스는 1613년 프리드리히 5세 폰 데어 팔츠 선제후에게 결혼하여 하이델베르크로 이주하였다.
새로운 웨일스 공은 자신을 어울리는 신부감을 찾는 원정에 스페인으로 데려가 국왕 펠리페 3세의 딸 마리아 아나 데 에스파냐 왕녀에 정착했던 자신의 부친이 좋아했던 조신 제1대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즈에 의하여 거대하게 영향력을 받았다. 하지만 스페인이 웨일스 공의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을 요구하면서 결혼식은 일어나지 않았다. 10월 자신들의 귀국에 웨일스 공과 버킹엄 공작은 제임스 1세가 스페인에 전쟁을 선언하는 것을 요구하였다.
자신의 개신교 고문들의 장려와 함께 제임스는 자신의 전쟁 노력에 대한 보조금을 요청할 수 있도록 의회를 소집하였다. 제임스는 웨일스 공과 찰스가 스페인에 가는 동안 파리에서 만난 헨리에타 마리아 사이에 결혼을 승인해 줄 것을 의회에 요청하였다. 그녀가 루이 13세의 누이 동생이었던 이래 잘 일치하였다 (루이와 헨리에타 마리아의 부친 앙리 4세는 헨리에타의 어린 시절에 사망하였다). 의회는 결혼으로 동의하였으나 스페인과 결혼을 주선하는 사전 시도의 극도로 비판적이었다. 제임스는 늙어가고 있었고 결과로서 이후에 찰스의 군림 동안 그를 괴롭힐 같은 문제인 의회를 통제하는 데 극도로 어려운 것으로 찾아내고 있었다. 그의 군림의 마지막 세월 동안 실질적 권력은 자신이 아닌 그의 장남과 버킹엄 공작에 의하여 잡혔다.
초기 군림[편집]
1625년 3월 27일 찰스는 왕위에 오르고 그해 6월 13일 대리로 9세 연하의 헨리에타 마리아에게 결혼되었다. 5월에 열린 그의 첫 의회는 찰스가 가톨릭에 대한 제한을 해제하고 개신교의 공식적 설립을 훼손할 것에 두려워 했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인 헨리에타 마리아에게 그의 결혼으로 반대하였다. 거부자와 관련하여 제한을 그가 완화하지 않을 것을 의회와 동의했어도 그는 루이 14세와 비밀 결혼 조약에 있었던 것대로 정확히 하는 것을 약속하였다. 1625년 6월 13일 부부는 캔터베리에서 결혼하였다. 찰스는 1626년 2월 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논란으로 인하여 자신의 곁에 부인 없이 왕위에 올랐다. 그들은 9명의 자녀 (3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이 유아기에서 살아남으면서)을 두었다.
찰스의 종교 정책들의 불신은 성직자 리처드 몬터그를 둘러싼 논쟁에 의하여 증가되었다. 팜플렛에 몬타그는 장 칼뱅의 가르침에 대해 논쟁하여 즉시 자신을 청교도들 중에 악평으로 가져왔다. 하원의 청교도 의원 존 핌은 토론이 있던 동안 몬터그의 팜플렛을 공격하여 "Appello Caesarem" (사도 바울에 의하여 만들어진 유대인 박해에 맞선 항소로 참조된 라틴어로 "나는 황제에게 항소한다")의 타이틀이 달린 팜플렛에서 찰스의 도움을 요청하는 데 몬터그를 촉발하였다. 찰스는 성직자에게 자신의 보호를 제공하여 많은 청교도들이 그를 적대시하는 데 이끌었다.
그의 초기 군림 동안 찰스의 주요 근심은 외교 정책이었다. 누이 엘리자베스의 남편 프리드리히 5세 폰 데어 팔츠 선제후는 팔츠 선제후국에서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에게 자신의 세습 대지들을 잃어 30년 전쟁으로 이끌었다. 원래 가톨릭 합스부르크가의 패권을 보헤미아의 선출된 국왕들로서 지키는 것 뿐인 전쟁은 유럽에서 개신교도와 가톨릭 교도들 사이에 시민과 고해성사의 전쟁으로 통제 불능으로 소용 돌이 쳤다. 자신이 황제를 대신하여 강제로 중재할 수 있는 것을 희망한 가톨릭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와 전쟁을 일으켜 자신의 자형이 팔츠를 다시 얻는 도움을 주는 데 약속하였다.
의회는 신대륙에서 스페인의 식민지들에 저렴한 해군의 공격을 오히려 좋아하여 스페인의 보물 함대들의 포획이 전쟁에 자금을 조달할 것을 희망하였다. 하지만 찰스는 대륙에서 더욱 공격적인 활동을 오히려 좋아했다. 의회는 찰스를 위하여 부족한 금액인 14만 파운드의 보조금을 부여하는 것만으로 투표하였다. 게다가 하원은 국왕이 톤수와 중량을 거두는 허용을 했으나 1414년 이래 이전의 왕들이 생명권을 부여했어도 한해의 기간 만을 위해서다. 이 매너에 하원은 해마다 보조금 갱신을 추구하는 데 찰스를 강요하면서 그의 권력에 확인하는 것으로 희망하였다.
버킹엄 공작에 의하여 이끌어진 상원에서 찰스의 제휴자들은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거부하였다. 톤수와 중량의 부과금을 위하여 의회의 권한이 얻어질 수 없었어도 찰스는 그래도 지속적으로 의무들을 징수하였다.
폭정 혹은 개인적 지배?[편집]
1629년 1월 찰스는 지난해 6월에 정회된 의회의 두번째 회의를 열었다. 버킹엄 공작의 최근 암살 사건으로 찰스는 업무에서 음모를 보아 그의 하원들을 "선동"으로 불렀다. 하원의 의원들은 롤 사건의 견지에서 자신들의 반대를 표명하게 시작하였다. 롤은 톤수와 중량을 지불하지 않은 것으로 압수된 물건들을 가졌던 의원이었다. 이 일은 많은 의원들에 의하여 체포 특권으로부터 자유가 물건들로 넓혔던 것을 논의한 권리청원의 위반으로 보였다. 3월 그가 의회의 보류를 요청했을 때 찰스에 대한 3개의 결의안들이 큰소리로 읽혀졌던 동안 발표자 존 핀치를 그의 의자에 앉혔다. 3개의 결의안들의 마지막은 의회에 의하여 승인되지 않은 톤수와 중량을 지불한 자는 "잉글랜드의 자유주의자들의 배신자와 같은 적으로 평판을 받을 것을 선언하였다. 다수의 의원들이 의회에서 억류되어야 했던 사실은 국왕을 향하여 보편적 반대가 없었던 것을 이해하는 것에 관련되었다. 후에 하원이 불쾌하게 만드는 추가 조치를 통과시켰을 때 그는 의회를 해산하였다.
찰스는 더욱 나가서의 금전적 원조를 위하여 의회에 억지로 의존하지 않도록 해결하였다. 즉시 그는 프랑스와 스페인과 화해하였다. 의회없이 찰스가 다스렸던 이어진 동안 이어진 11년은 11년의 폭정, 그리고 단순하게 개인적 지배 둘다로서 알려져 왔다.
의회없이 마저 찰스는 아직도 자신의 국고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금을 확보해야 했다. 그러므로 "기사 작위의 절제"로 불린 잊혀진 봉건 법령에 의존이 1278년에 통과되어 해마다 40 파운드 혹은 이상을 벌은 자들을 국왕이 기사로서 왕립 군대에 아마 가입할 그의 대관식에서 자신을 대표하는 요구하였고 찰스는 1626년 자신의 대관식에 불참한 자들에게 전부 벌금을 물었다. 그는 또한 더욱 인기가 없었던 조함세로 알려진 구식 봉건세를 재소개하였다. 1634년에 발부된 영장은 전쟁 동안을 제외한 그럼 세금의 부과를 금지한 에드워드 1세와 에드워드 2세의 법령들에 불구하고 평시에 조함세의 징수를 명령하였다. 하지만 1634년의 이 첫 영장은 법적 근거에 많은 반대를 부추기지 않았으나 1635년의 두번째 영장은 그렇게 했다. 1636년에 발부되어 조함세를 요구한 찰스의 3번째 영장은 평시 동안 조함세 징수에 고대의 금지가 휩쓸어졌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많은이들이 지불에 저항하는 데 시도하였으나 그의 "좋은 기쁨"에 임기가 달려있던 찰스의 재판관들은 세금은 국왕의 특권에 있었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평시에 모을 조함세를 요구하는 활동은 지배 계급 중에서 근심의 주요 원인이었으며 하지만 그것은 성공회와 1640년에 개인적 지배를 끝낸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에 참여한 로드 아래 더욱더 아르미니우스주의 스타일의 공동기도서의 시도된 집행이었다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종교적 갈등[편집]
찰스는 더욱 전통적이고 성례의 방향으로 잉글랜드 성공회를 칼뱅주의로부터 멀리 옮기고 싶었다. 이 목표는 그의 주요 정치 고문 대주교 윌리엄 로드에 의하여 나누어졌다. 로드는 1633년 캔터베리 대주교로서 찰스에 의하여 임명되어 그것을 더욱 의식으로 만드는 데 교회에서 인기없던 개혁들의 일련을 시작하였다. 로드는 비국교도 성직자들을 해고하고 청교도의 조직들을 폐쇄하면서 종교적 획일성을 보장하는 시도를 하였다. 이것은 많은 찰스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주제들의 혁신주의 경향들에게 활동적으로 적대였다. 그의 정책은 칼뱅주의 이론으로 불쾌하였고, 잉글랜드 성공회의 예배식이 성공회 기도서에 의하여 요청된 전체의 의식과 예복과 함께 축하될 것을 주장하였다. 로드는 또한 구원을 거부하는 노력에 강조가 엄격한 칼뱅주의자들에 의하여 이단적이고 사실상 "가톨릭"으로 보였던 아르미니우스주의 이론의 주창자이기도 했다.
자신의 개혁들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한 자들을 처벌하는 데 로드는 대지에서 2개의 가장 두렵고 자의적인 법원들 - 고등판무관과 성실청을 이용하였다. 후자들이 죽음의 유일한 예외와 함께 고문을 포함한 아무 처벌을 가할 수 있었던 동안 전자들은 자책하는 증언을 마련하는 데 개인을 강요할 수 있었다.
찰스 1세의 아래 성실청의 불법은 아무 그의 전임자들 아래 것을 더욱 초과하였다. 찰스의 군림 아래 피고인들은 기소, 적법 절차 혹은 증인을 대면하는 권리 없이 정규적으로 법원으로 끌려갔고 그들의 증언들은 광범위한 고문을 통하여 국왕과 그의 조신들에 의하여 일상적으로 추출되었다.
개인적 지배의 5년은 더욱 엄격한 중앙적 통제의 이유로 어느 정도 잉글랜드에서 평화에 의하여 표시되었다. 몇몇의 개인들은 찰스의 세금과 로드의 정책들을 반대하였으나 일찍이 개인적 지배 기간의 전반적인 추세는 평화의 하나이다. 하지만 찰스가 스코틀랜드에서 자신의 종교 정책들을 부과하는 시도를 했을 때 그는 다수의 어려움들을 향했다. 국왕은 스코틀랜드의 주교들에 의하여 지지되었어도 새로운 기도서를 자신들이 스코틀랜드로 성공회를 소개하는 수단으로 본 장로교 스코트인들에 의하여 저항된 잉글랜드의 성공회 기도서을 모델로 한 새로운 기도서의 이용을 명령하였다.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가 1638년 성공회 정부 (주교들에 의한 통치)를 폐지하여 장로교 정부 (장로와 집사들에 의한 통치)와 대체했을 때 찰스는 자신의 권위에 대항하는 반란으로 본 것을 진압하려고 했다.
1639년 제1차 주교 전쟁이 터졌을 때 찰스는 더욱 나가서 양보를 거부했던 자신의 주제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기로 추구하였다. 찰스의 전쟁은 동년 6월 굴욕적인 휴전으로 끝났다. 버릭 강화 조약에서 찰스는 자신의 스코틀랜드 주제 시민과 교회의 자유를 부여하는 데 동의하였다.
차례로 제1차 주교 전쟁에서 찰스의 군사적 실패는 찰스를 위하여 재정적과 군사적 위기를 일으켜 개인적 지배의 종말로 이끌었다. 자신의 재정적 약점으로 인하여 찰스는 기금을 모으는 시도에 1640년까지 개회로 의회를 소집하는 데 강요되었다. 개인적 지배 기간 동안 정부와 재정으로 변화들이 스코틀랜드 반란에서 공헌한 사실이면서 지배 계급이 불만을 품고 있는 동안 그 일은 주로 11년의 세월에 처음으로 의회에서 지배 계급들을 찰스가 강제로 맞선 종교의 주요 문제로 인하였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폭정의 11년"으로서 휘그당 역사가들이 참조한 것을 끝낸 대립적인 종교적 수정이었다.
단기와 장기의회들[편집]
찰스와 스코틀랜드 교회 사이에 평화 조약의 해석에 관한 논쟁이 더욱 나가서의 갈등으로 이끌었다. 스코트인들을 정복하는 데 찰스는 더 많은 돈을 필요하여 그는 1640년 4월 의회를 재소집하는 운명적인 단계를 택하였다. 찰스가 조함세를 폐지하는 제안을 하고 하원이 전쟁을 위한 기금을 모으는 데 찰스를 허용하는 데 동의했어도 의회가 개인적 지배 동안 각종 권력의 남용에 관한 논의를 요구했을 때 교착상태가 도달되었다. 양쪽이 이 문제에 근거를 제시하는 데 거부하면서 의회는 소집된 후 1달 적게 5월에 해산되었다. 그러므로 의회는 "단기의회"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동안 찰스는 스코트인들을 꺾는 시도를 했으나 비참하게 실패하였다. 굴욕적인 리폰 조약이 10월 제2차 주교 전쟁의 말기 후에 맺어져 국왕이 방금 싸웠던 스코틀랜드 군대의 비용을 지불하도록 요청하였다. 찰스는 국왕의 유전 상담사들로 숙고되었던 전체 "영역의 동료"의 고대 의회 대원칙을 소환하는 비정상적인 단계를 택하였다. 대원칙은 수 세기동안 소환되지 않았다. 동료들의 충고에 찰스는 전작에 비하여 "장기의회"오 알려지게 된 또다른 의회를 소환하였다.
장기의회는 1640년 11월 존 핌의 리더십 아래 모여지고 찰스에게는 단기의회 만큼 어려운 것을 증명하였다. 하원의 의원들이 종교에서 혁신들과 찰스의 고문들의 전제정치에 대항하여 국왕, 교회와 의회 정부를 방어하는 보수주의자들로서 자신들을 생각했어도 찰스는 많은 그들을 자신의 지배를 훼손하려는 위험한 폭군들로 보았다.
마음대로 해산하는 것으로부터 국왕을 방지하는 데 의회는 1641년 2월 왕의 동의 (재가)가 부여되었던 것으로 삼년 법령을 통과시켰다. 법령은 의회가 최소한 한번에 3년마다 소환되고 만약 국왕이 적절한 소환장을 발행하는 데 실패했다면 의원들은 자신들 소유에 모일 수 있었다는 것을 요구하였다. 5월 그는 의회가 그 동의없이 해산될 수 없었던 것을 증명한 더욱 더 원대한 법령으로 동의하였다. 찰스는 차례로 양보를 강요받았다. 그는 윌리엄 로드와 토머스 웬트워스의 실행들을 승인한 달성 청구서에 동의하였다. 조함세, 기사작위의 절제에 벌금과 강제 대출은 불법으로 선언되었고 증오의 성실청과 고등판무관은 폐지되었다. 자신이 몇몇의 중요한 양보를 만들었어도 찰스는 스코트인들의 호의를 확보하면서 자신 소유의 군사 직위를 향상시켰다. 그는 결국 장로 제도의 공식 설립으로 동의하여 댓가로 그는 숙고적인 의회 반대 지지자들을 입대시킬 수 있었다.
11월 하원은 대간주를 통과시켜 찰스의 군림의 시작 이래 그가 저지른 모든 권력 남용을 고발하였다. 긴장은 아일랜드인들이 개신교 잉글랜드의 지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고 찰스의 공모의 소문들이 의회에 도달했을 때 높아졌다. 군대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요구되었으나 하원의 많은 의원들은 찰스가 이후에 그것을 의회 자신에 이용할 것에 두려웠다. 시민군 법령은 국왕으로부터 군대의 통제를 씨름할 작정이었으나 찰스는 그것으로 동의하는 데 거부하였다. 하지만 의회는 항의를 갈등을 줄이는 시도로서 선언하였다.
의회가 그의 가톨릭 여왕 헨리에타 마리아를 탄핵할 작정이었다는 소문들이 찰스에 도달했을 때 그는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그의 부인은 반역죄로 반스튜어트파를 이끌었던 하원의 의원 5명을 체포하는 데 그를 설득했으나 국왕이 결정을 만들었을 때 그녀는 차례로 의회에 경고했던 친구에게 알리는 실수를 하였다. 찰스는 1642년 1월 4일 무장군과 함께 하원으로 들어갔으나 자신의 상대들이 이미 탈출했다는 것을 찾아내었고, 그는 연설가 윌리엄 렌솔이 유명하게 "폐하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장소에서 보는 데 눈 혹은 연설하는 데 혀도 없으나 내가 여기 하인인 하원은 나를 지도하는 데 기쁘다."라고 답변했던 것으로 그에게 그들의 행방을 물었다. 무장군과 의회를 위반하면서 찰스는 위반을 영구적으로 만들었다. 의회에서 많은이들은 가족을 의회의 뒤로 옮긴 기업과 런던이 그랬던처럼 찰스의 활동들이 터무니 없다고 생각했다. 찰스는 런던에서 더이상 안전을 느끼지 않았고 의회에 대항하는 군대를 키우러 북부로 갔다. 동시에 여왕은 그것을 위하여 지불하는 데 돈을 모으러 해외로 갔다.
잉글랜드 내전[편집]
잉글랜드 내전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나 양쪽이 무장하기 시작하였다. 효과 없는 협상들 후에 찰스는 1642년 8월 22일 왕실의 품격을 (시대착오적인 중세 몸짓) 높였다. 그러고나서 그는 자신의 궁정을 옥스퍼드에 세워 의회가 런던과 남부와 동부의 통치에 남아있던 동안 그의 정부는 거칠게 북부와 서부를 통치하였다. 찰스는 배열의 임무의 낡은 방법을 이용한 군대를 키웠다. 내전은 결정적이지 않은 에지힐 전투와 함께 1642년 10월 25일에 시작되어 네이즈비 전투가 의회의 호의에 결정적으로 군사 균형을 기울였을 때까지 우유부단하게 1643년과 1644년을 통하여 지속되었다. 거기에 왕당파들을 위한 패전들의 거대한 수를, 그러고나서 찰스가 1646년 4월에 탈출했던 것으로부터 옥스퍼드 포위 공격을 따라갔다. 그는 잉글랜드 뉴어크온트렌트에서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군대의 손에 자신을 놓았고, 그의 무리들이 그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했던 동안 노팅엄셔주 사우스웰 근처로 데려가졌다. 그는 기병대 기수 조지 조이스는 신식 모델 군대의 이름에 뉴마켓으로 그를 강제로 데려갔다. 이때 신식 모델 군대와 의회 사이에 상호 의심이 생겼고 찰스는 그것을 이용하는 데 열망했다.
그는 처음에 오틀랜즈로, 그러나서 더욱 연루되었으나 무익한 협상들이 일어난 햄프턴 궁정으로 옮겨졌다. 그는 그것이 아마 해외로, 아마 프랑스로 혹은 아일오브와이트주의 의회 총독 앨버트 하몬드 대령의 보호로 탈출하는 데 자신의 최고 흥미들에 있을 것이라고 설득되었다. 그는 마지막 과정에 결정하여 하몬드를 동정한다고 믿어 11월 11일에 달아났다. 하지만 하몬드는 자신이 캐리스브룩 성에서 가둔 찰스에게 반대되었다.
캐리스브룩으로부터 찰스는 다양한 당사자들과 거래하는 데 지속적으로 노력하여 결국적으로 재판 기간을 위하여 스코틀랜드는 물론 잉글랜드에서 장로 제도의 설립을 허용할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들과 합의에 이르렀다. 왕당파들은 1648년 7월 일어나 제2차 내전을 촉발하였고, 찰스와 동의했으면서 스코트인들이 잉글랜드를 침입하였다.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봉기들의 대부분은 약간의 교전 이후 의회에 충성한 군대에 의하여 진압되었으나 켄트주, 에섹스 주와 컴벌랜드 주에서 봉기들, 웨일스에서 반란과 스코틀랜드의 침입은 총력전과 장기간의 포위를 연루하였다. 그러나 프레스턴 전투 (1648년)에서 스코틀랜드 군대의 패배와 함께 왕당파들은 전쟁을 이기는 아무 기회를 잃었다.
재판과 처형[편집]
1648년의 말기에 찰스는 허스트 성으로, 그후에 윈저 성으로 이주하였다. 1649년 1월 패전과 포로 상태에 그의 제2차 내전 장려 이후 마저 찰스의 반항으로 의회의 응답에 하원은 찰스의 재판을 위하여 법원을 창조한 의회제정법을 통과시켰다. 제1차 내전 후에, 의회파들은 국왕이 잘못되었어도 자신의 싸움을 정당화할 수 있고 새로운 헌법적 해결 아래 국왕으로서 제한된 권력들로 여전히 자격이 있을 전제를 아직도 받아들였다. 그것은 패전과 포로 상태에 있던 동안 마저 제2차 내전을 일으키면서 찰스가 교정할 수 없고, 불명예스럽고 정당하지 못한 유혈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이제 느꼈다.
국왕을 재판할 아이디어는 소설이었고, 이전의 군주들은 폐위되었으나 군주들로서 재판으로 전혀 데려오지 않았다. 법령에 의하여 설립된 고등 법원은 135명의 위원들 (전체 완고한 의회파들)로 이루어졌다. 검찰은 법무장관 존 쿡에 의하여 이끌어졌다.
반역죄와 "다른 중범죄"에 관한 찰스의 재판은 1649년 1월 20일에 시작되었으나 찰스는 변명을 입력하는 데 거부하여 아무 법원도 군주에 관할권이 없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통치권이 자신이 왕관이 씌어지고 기름이 부어졌을 때 하나님에 의하여 자신에게 주어지고 그를 재판한 자들에 의하여 휘둘러진 권력은 단순하게 화약통에서 자랐다는 것을 믿었다. 대조적으로 법원은 누구도 법의 위에 있지 않다고 제안하였다. 1주의 기간에 철수거 3번이나 탄원을 부탁받았을 때 그는 거절하였다. 그것은 검찰이 그 경우에 증인들을 부를 수 없었던 것을 의미한 유죄 인정으로서 당시 변호를 거부해는 데 당시 정상적인 관행이었다. 하지만 재판은 증인들을 듣지 않았다. 1월 29일 59명의 위원들은 찰스의 사망 영장에 서명하였다. 판결 후에 그는 자신이 갇혀 있던 세인트제임스 궁전으로부터 연회장 앞에서 사형 교수대가 세워진 화이트홀로 이끌어졌다.
1649년 1월 30일 찰스가 참수되었을 때 그것은 관중이 두려움 혹은 약점으로 착각할 수 있었던 눈에 띄는 떨림을 유발한 추운 1월의 날씨를 방지하는 데 그가 무거운 면 셔츠를 입고 있었던 평판이 좋았다. 그는 기도를 한 후 블록에 자신의 머리를 놓고 그가 준비되었던 사형 집행인에게 신호를 보내자 그러고나서 그는 하나의 깨끗한 타격에 참수되었다.
필립 헨리는 처형 후에 모인 군중에게서 신음 소리가 들렸고 그러고나서 그들 중 어떤이들은 그들의 손수건을 그의 피에 담가 순교자 국왕의 의식을 시작했던 순간들을 기록한다. 하지만 새뮤얼 페피스의 것을 포함한 다른 목격자 출처들은 이것을 기록하지 않는다. 헨리의 계정은 사건이 일어난 어떤 12년 후에 왕정복고가 있던 동안 작성되었다. 헨리는 국왕이 처형되었을 때 19세였고, 그와 그의 가족은 왕당파 선전 작가들이었다.
거기에는 사형 집행인이 장면에 가면을 쓴 것으로 국왕을 참수했던 남자의 정체에 어떤 토론이 있다. 그것은 위원들이 런던의 일반 교수형 집행인 리처드 브랜던에게 접근하였으나 그는 거부하였고 같은 시대의 출처들은 정통적으로 그를 국왕의 사형 집행인으로 그를 식별하지 않는다. 하지만 〈Ellis's Historical Inquiries〉(엘리스의 역사 조사)는 그를 사형 집행인으로 임명하여 죽기 전에 그가 그렇게 말했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그가 뉘우치고 수수료를 받는 데 동의했다는 가능성이 있으나 식별된 다른이들이 있었다. 거닝으로 불린 아일랜드 남성이 찰스를 참수했던 것으로 넓게 믿어졌고, 아일랜드 골웨이에서 사형 집행인이 쇼에 나온 것처럼 평판이 그를 명명하였다. 윌리엄 휼렛은 왕정복고 후에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661년 "데이본과 비커스태프"로 식별된 2명이 체포되었으나 그러고나서 석방되었다. 혁명 저널리스트 헨리 워커 혹은 그의 동생 윌리엄은 의심되었지만 기소되지 않았다. 잉글랜드를 주위로 다양한 지방 전설들은 지역의 가치있는 사람을 지명한다. 윈저에서 1813년에 시행된 시험은 처형은 경험을 가진 사형 집행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배신자의 머리를 보라!"라는 말과 관중들에게 들어져 전시되는 데 배신자를 위하여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찰스의 머리가 전시되었어도 말들은 이용되지 않았다. 전례없는 몸짓으로 혁명 지도자들 중의 하나인 올리버 크롬웰은 가족이 경의를 표할 수 있도록 국왕의 머리를 그의 시신에 다시 꿰맬수 있도록 하였다. 찰스는 윈저 성에 있는 세인트조지 예배당 내부 헨리 8세의 금고에 2월 7일 밤에 은밀히 묻혔다. 국왕의 아들 찰스 2세는 후에 정교한 왕릉을 계획했으나 전혀 지어지지 않았다.
찰스의 처형이 있던 10일 후에 판매를 위하여 찰스의 손에서 나왔다고 회고록이 나왔다. 〈Eikon Basilike〉 (그리스어로 왕실의 생생한 묘사)라 불리는 이 책은 왕실의 정치를 위한 변명서를 담았고 왕당파의 선전의 효과적인 조각을 입증하였다. 찰스의 처형의 날에 그를 동행했던 찰스의 침실의 궁내관 윌리엄 레벳은 이후에 국왕이 그 책을 쓴 것을 목격했다는 것을 진술에서 맹세할 것이었다. 의회가 존 밀턴을 답변 〈Eikonoklastes〉(우상파괴자)를 쓰는 데 위임했던 동안 존 쿡은 만약 변명을 입력했다면 자신이 할 연설을 펴냈으나 응답은 왕당파의 책의 예절감에 대한 약간의 진전을 만들었다.
다양한 신동들은 처형으로 관련된 것에 같은 시대의 대중 언론에 기록되었으며 도버에서 해변에 있던 고래가 국왕의 시간 안에 사망하고, 그날 밤 화이트홀에 떨어진 별이 나타났고 국왕이 죽을 자격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 남성은 까마귀에 의하여 눈이 뽑혔다고 한다.
유산[편집]

왕정이 무너지면서 권력은 당시 의회파 군대의 장군 올리버 크롬웰을 포함한 잉글랜드 호국경 추밀원에 의하여 가정되었다. 1640년 찰스 1세에 의하여 불러졌던 당시 잔부의회로 알려졌던 장기의회는 크롬웰이 1653년 강제로 해산했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존재하였다. 그러고나서 크롬웰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호국경이 되었고 이름이 아닌 전체에서 군주로 그는 심지어 왕립 대관식 의자에 부여되었다. 1658년 그의 사망에 크롬웰은 잠시 자신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에 의하여 승계되었다. 리처드는 무능한 통치자였고 장기의회가 1659년에 회복되었다. 장기의회는 1660년 자신을 해산하였고, 20년 만에 첫 선거는 찰스 1세의 맏아들을 찰스 2세로서 군주에 복직시킨 대회 의회의 선거로 이끌었다.
왕정복고에 찰스 2세는 성공회 기도서에 부친의 사망의 날짜인 1월 30일에 관찰되는 데 그의 기념을 추가하였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시간에 이것은 교회의 주요 축일과 함께 사망한 군주의 기념과 대중의 불만으로 인하여 제거되었으며 이제 1월 30일은 "작은 축제" 만으로서 명단에 들어와있다. 잉글랜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에서 찰스 1세를 "왕과 순교자"로서 헌신한 몇몇의 영국 성공회/미국 성공회의 교회들이 있다. 순교자 찰스 국왕회는 런던 세인트마거릿 패튼의 교구 목사 제임스 피시에 의하여 원조된 그레빌-네전트 여사에 의하여 1894년에 설립되었다. 순교자 찰스 국왕회의 목표들은 잉글랜드 교회와 영국 성공회의 친교를 위한 기도를 포함하여 찰스 국왕의 "순교"를 기념하는 것에 1월 30일의 더 넓은 준수와 성공회 기도서에 그의 축일의 회복을 흥행하였다. 찰스 국왕은 "기독교 왕권"에 관한 그의 관념으로 어떤 성공회교도들에 의하여 순교자로서, 그리고 "성공회 신앙의 옹호자"로 여겨졌다.
북아메리카에서 캐롤라이나 식민지는 찰스 1세의 이름을 땄다. 캐롤라이나는 이후에 미국의 형성 동안 결국적으로 잉글랜드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던 노스캐롤라이나주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로 갈라졌다. 북부로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케이프찰스, 찰스 강, 찰스 시티 샤이어 등도 그의 이름을 땄다. 찰스 시티 샤이어는 거의 40년 후에 버지니아주 찰스 시티 카운티로서 생존하였다. 버지니아 식민지는 이제 버지니아 커먼웰스 (커먼웰스로 불리는 미국의 4개 주들 중의 하나)이고 잉글랜드 내전이 일어난 동안 찰스 1세에게 충성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찰스 2세에 의하여 주어진 "Old Dominion" (오래된 지배)의 공식적 별명을 유지하고 있다.
가족[편집]
형제자매[편집]
자녀[편집]
헨리에타 마리아(1609년 11월 25일 ~ 1669년 9월 10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사진 | 이름 | 생일 | 사망 | 기타 |
---|---|---|---|---|
찰스 | 1629년 5월 13일 | 1629년 5월 13일 | 요절. | |
![]() |
찰스 | 1630년 5월 29일 | 1685년 2월 6일(54세) | 후임 잉글랜드 왕국 국왕. 적자 없고 서자만 있음. |
![]() |
프린세스 로열 메리 | 1631년 11월 4일 | 1660년 12월 24일(29세) | 빌럼 2세 판 오라녜 공작와 결혼. 슬하 1남. |
![]() |
제임스 | 1633년 10월 14일 | 1701년 9월 26일(67세) | 후임 잉글랜드 왕국 국왕, 퇴위 앤 하이드와 결혼, 사별 모데나의 메리와 결혼 |
![]() |
엘리자베스 | 1635년 12월 29일 | 1650년 9월 8일(14세) | 요절. |
앤 | 1637년 3월 17일 | 1640년 11월 5일(3세) | 요절. | |
캐서린 | 1639년 6월 29일 | 1639년 6월 29일 | 태어나자마자 사망. | |
![]() |
헨리 | 1640년 7월 8일 | 1660년 9월 13일(20세) | 글로스터 공작, 요절. |
![]() |
헨리에타 | 1644년 6월 16일 | 1670년 6월 30일(26세) | 요절. |
외부 링크[편집]
![]() |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
- (영어) 찰스 1세 - 영국 국가기록원
- 찰스 1세 연대기
- 찰스 1세 공식 사이트
- 의회 공문서 보관소에 찰스 1세에 대한 사형 집행 영장이 있다.
-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찰스 1세
전임 아버지 제임스 1세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 1625년 - 1649년 |
후임 잉글랜드 공위시대(잉글랜드 연방) |
전임 제임스 6세 |
스코틀랜드의 왕 1625년 - 1649년 |
후임 찰스 2세 |
전임 제임스 6세 |
제10대 스튜어트 왕실 당주 1625년 ~ 1649년 |
후임 찰스 2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