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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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왕(日本國王) 또는 왜왕(倭王)은 역사적으로 중국과의 책봉 관계로 성립되는 국제적인 조공 체제에서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막부정이대장군을 지칭하는 호칭이었다. 한국중국 등지에서 일본군주천황을 낮추어 부르는 말로도 쓰여오고 있다.

무로마치 막부 이전[편집]

서기 8세기에 이르러 일본이라는 이름이 쓰이기 이전의 (倭)에서는 최고 통치자를 가리켜 오오키미(大君)이라고 불렀으며, 대외적으로는 《삼국지 위지 왜인전》등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왜왕(倭王) 등으로 불렸다. 야마토 정권 초기에 이르기까지의 군주들은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중국의 책봉을 이용하려 했으며, 왜왕에 대한 책봉 기록은 《남제서》 등에 남아있다. 하지만 중세에 이르러 일본의 군주가 스스로를 천황이라 칭하기 시작하고 중국 중심의 책봉 체제에서 이탈하면서 왜왕에 대한 책봉 기사는 사라지고, 이후로는 일본 국왕의 호칭이 일반적이 되었다.

무로마치 막부[편집]

이후 일본 국왕의 칭호는 무로마치 막부 시기에 이르러 천황이 아닌 막부의 쇼군을 일컫는 용어로 그 의미가 변하게 된다. 일본의 남북조 시대 후기에 남조의 가네나가 친왕(懐良親王)이 으로부터 왜구를 진압하는데 협력하는 조건으로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지만 이후 북조에 의해 남조가 멸망하면서부터는 규슈다이묘나 막부에서 그 이름만을 칭하며 대명무역을 행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후 요시아키라의 뒤를 이은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대명무역을 막부에서 독점하고자, 1374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한다. 명나라는 당시 해안 지역을 괴롭혀던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과의 교류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교적인 책봉 관계에서 볼 때 막부에서 파견한 사절은 이미 일본 국왕으로 책봉되었던 가네나가 친왕의 명의가 아니었으므로 처음에는 사절의 입조를 허락하지 않았다. 요시미쓰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천황의 신하가 아닌 실질적인 일본의 지배자가 자신임을 인정받으려 했고, 수 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사신을 파견한 끝에 결국 1401년 명의 건문제로부터 일본 국왕 원도의(日本國王源道義)의 칭호를 하사받게 된다. 요시미쓰는 이를 매우 기뻐해, 자신이 파견했던 사신단과 함께 입국하는 명의 사절단을 직접 정중히 맞이하며, 몸을 굽혀 배궤(拜跪)하며 황제의 조서를 받들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명에서 정난의 변에 의해 영락제가 즉위하고 요시미쓰가 다시 사절을 보내자 영락제는 일본국왕지인(日本國王之印)의 인부(印符)를 하사했다. 이로써 요시미쓰는 일본 국왕의 칭호를 획득하는 동시에 일본은 중국에 대해 외번으로 인정받아 조공 체제에 편입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무로마치 막부가 대중국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요시미쓰의 뒤를 이은 요시모치 시기에 잠시 명과 단교했던 적이 있지만 6대 쇼군인 요시노리에 이르러 다시 일본 국왕의 호칭으로서 명과의 관계를 회복했으며, 조선과의 국교에 있어서도 쇼군이 일본 국왕을 칭하는 전통이 확립되었다.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서도 쇼군을 일컬어 국왕이라 하고 있으며 천황은 국정과 무관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무로마치 시대 이후[편집]

무로마치 시대 이후 쇼군이 국왕을 칭하는 일은 없어졌다. 요시미쓰가 하사받은 금인은 전란에 의해 소실되었고, 이를 모조한 목제 도장이 만들어져 대명 무역을 도모하였던 다이묘인 모리 씨에 의해 사용되었으나 이것이 인정받지는 못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직전인 1590년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부사였던 김성일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대한 알현 형식에 대한 논의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관직이었던 관백(關白)을 가리켜 위황(僞皇)의 정승(政丞)이라 했다. 다만 일본에서 직접 천황을 지칭할 때는 '천황'이라 불러 일본의 예를 따랐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강화 회담의 와중에 명으로부터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았으나 히데요시는 이를 거부하고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이후 형식적으로 천황의 신하를 자칭하게 된 에도 막부에 이르러서는 조선과의 국교를 수복하면서 일본국 대군(日本國大君)을 칭했으며 이후 이 호칭을 사용하게 되어 일본 국왕의 칭호는 없어졌다.

한반도에서의 호칭[편집]

한반도에서는 전통적으로 일본의 천황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 초기까지는 명나라의 예를 따라 막부의 쇼군을 일본 국왕이라 불렀으며, 이후 천황에 대한 개념이 알려진 조선 중기 이후에는 천황을 종교적·의례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자리만 있을 뿐 정사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함께 쇼군에 대한 호칭도 관백으로 변화하였다.[1]

국립국어원표준국어대사전에는 ‘천황(天皇)’이 ‘일본에서 그 왕을 이르는 말’로 설명되어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된 《한국사》에는 ‘일본왕’으로 표기되었다. 대한민국의 신문, 뉴스 등 매체에서는 ‘천황’ 대신 ‘일왕’(日王)이라는 호칭으로 낮추어 부르고 있다.[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과거 일본 외부에서 부르던 호칭이자, 비하하는 말인 ‘왜왕’(倭王)이라고도 불린다.[3][4]

각주[편집]

  1. 〈조선시대 日本天皇觀의 유형적 고찰〉, 손승철, 《사학연구》 제50호, 한국사학회, 1995. 12, pp. 217 ~ 250
  2. 일례로 히로히토 “야스쿠니 전범 합사 뒷날 화근 될것”(동아일보, 2007년 8월 6일)을 참조.
  3. 일례로 6자회담 北, 日과 관계정상화 나설까(중앙일보)를 참조.
  4. 北, 일본을 왜나라로 표기 파이낸셜 뉴스 (익스플로러 이외의 웹브라우저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