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영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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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영(李海英, 1925년 - 1979년)은 대한민국의 인구학자, 통계학자이다. 조선 왕족과 대한제국 황족의 후예로 흥선대원군의 종증손이다. 이달용의 아들이며 완순군 이재완의 손자이자 흥완군의 증손이다. 본관은 전주.

생애[편집]

이해영은 조선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1925년 흥선대원군의 두 번째 형인 흥완군의 증손이자 이달용의 4남으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38년 경기중학교에 입학, 1943년에 경기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 예과에 진학했다. 1946년에 서울대학교 예과 문과 2년을 수료한 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한국 전쟁을 거쳐 1952년 9월부터 1955년 9월까지 만 3년 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로서 강단에 섰고, 1955년 미국 유학, 1955∼1956년 1년 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58년 10월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전임강사로 부임한 후 1962년 9월까지 조교수, 부교수로 재직하였다.[1]

1962년 미국의 펜실바니아 대학으로 유학, 펜실바니아 대학에서의 유학 중 인구통계학을 접하고 한국의 인구 문제에 대해서 더욱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귀국 후 Vincent H. Whitney 교수의 격려와 조언, 자문을 받아 1964년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부설로 인구연구소를 설립하게 된다.[1] 이후 이해영 교수는 인구 및 발전문제연구소의 소장으로 12년간 재직하면서 우리나라의 인구학 분야를 개척하였다. 연구소의 또 다른 역점사업은 이 분야의 신진학자들을 양성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위해서 매년 우수한 성적과 품행을 갖춘 5∼6명의 서울대 대학생 및 대학원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고, 외국 유학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예컨대 1966년부터 1972년까지만 보더라도 모두 23명의 대학원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여 고학생들을 후원하였다.[1]

그는 1968년부터 2년 간 서울대학교의 교무처장으로 재직하면서 대학발전 10년 계획을 수립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 계획의 일환으로 서울대학교가 현재의 관악캠퍼스로 통합 이전하게 되었다. 그는 또 1974년부터 1년간 문리과대학의 마지막 학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관악캠퍼스로 이전 후 문리과대학은 사회과학대학으로 통합됐다. 그가 대학의 보직을 수행하면서 보여준 행정 능력과 공정성 그리고 정직함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의 경륜과 능력은 또 정부 정책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 우리나라의 고등교육 개혁이라든가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인구정책 부문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76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장으로 부임하였다.[1]

그러나 아깝게도 이해영 교수는 1979년 11월 18일 갑자기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54세였다.

평가[편집]

대부분의 사람들[모호한 표현]이 가장 왕성하게 일할 시기에 타계하여 수많은 동료, 선·후배 학자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기타[편집]

그는 평소 엄격하고 공사가 분명하고 사리·원칙이 엄정하여 제자들과 동료 교수들 사이에서도 평소 매우 엄하고 무서운 교수로 정평이 나 있었다. 아마 그의 가까운 제자라면 한 번 이상씩은 그로부터 호된 꾸중을 들은 기억들을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인들의 평에 의하면 그러나 이와 같은 엄격함 뒤에는 깊은 정이 배어 있어 제자들의 문제나 어려움을 끝까지 기억하여 이를 해결해 주는 자상한 분이었다. 많은 제자들이 그의 도움과 주선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고, 취직을 할 수 있었으며 또 많은 이런 저런 도움을 받았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최진호 (2002년 1월 10일). “한국 인구학 연구의 지평을 연 농석(儂石) 이해영 교수”. 《대학교육》. 115호. 대학교육 제115호(PDF). 69-72쪽. 2012년 12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