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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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망(李台望, 1653년 9월 9일 - 1728년 9월 7일)은 조선 후기의 무신, 군인으로 병마절도사 충장공 이복남의 증손이다. 본관은 우계(羽溪)이고 자(字)는 현경(鉉卿)이다. 다른 이름은 태망(太望)이다. 1676년(숙종 2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은 절충장군 수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생애[편집]

본래는 이복남의 손자이자 이경수의 아들 이흥우(李興雨)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숙부뻘 되는 호조참의 이세구(李世龜)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이복남의 아들 이경여의 아들 이세구는 해주최씨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없었고 사촌 이흥우의 아들 태망을 양자로 들였다.[1]

1676년(숙종 2년) 무과에 급제 1677년(숙종 3년) 도정부장(都政部將), 1678년(숙종 4) 1월 3일 다시 부장(部將)에 임명되었다. 11월 9일의 별시위(別試射)에 참가, 박신규(朴信圭)가 작성한 별시위 참여한 관원 명단에서 과녁 명중에 그는 관일중으로 보고되었다. 1680년(숙종 6) 1월 20일 훈련주부(訓鍊主簿)에 임명되었다. 1680년 보사원종공신 3등(保社原從功臣三等)에 녹훈되었다.

그 뒤 1680년 9월 28일 도총도사(都摠都司), 1681년(숙종 7) 1월 27일 오위도총부 경력, 그해 7월 22일 병이 발병하여 이인환(李寅煥)의 상소로 감군에서 면직되었다.

1682년(숙종 8년) 도정부장, 훈련원 부정, 1683년(숙종 9년) 6월 21일 창원부사로 임명되었다. 1685년 10월 17일 도총경력이 되었다가 다시 그해 11월 15일 혜산첨사(惠山僉使)로 나갔다. 동시에 당상관으로 가자되자 송창(宋昌)이 같은 날 이의를 제기하였지만 숙종이 듣지 않았다. 그날 숙종으로부터 친히 궁시를 선물받고 사은숙배하였다.

1688년(숙종 14) 명천부사를 거쳐 그 해 12월 2일 태안군수로 발령받았다. 1690년(숙종 16) 4월 17일 충청도암행어사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고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1692년 1월 17일 남원영장(南原營將)으로 나갔다가 1693년 행부호군으로 돌아왔다. 그해 4월 27일 관고(官庫)의 물건을 잃어버렸다는 하리(下吏)의 말만 믿고 군병을 소집했다는 이유로 사헌부로부터 충청수사 이광진(李光震) 등과 함께 탄핵당했지만 숙종이 듣지 않았다. 4월 28일 다시 사헌부가 탄핵하자 숙종이 허용하여 파면되었다.

1694년(숙종 20년) 3월 6일 삭주부사(朔州府使), 1696년(숙종 22년) 9월 12일 정주목사로 부임했다가 1699년(숙종 25) 무신으로 춘추관기주관에 임명되어 서강에 참여하였다.1700년(숙종 26) 3월 6일 백령 첨사(白翎僉使)로 부임하였다. 1701년(숙종 27년) 1월 26일 도총부내승이 되었다가 2월 25일 장연부사로 나갔다. 1702년 10월 18일 서용의 명이 내려졌다.

1703년(숙종 29년) 4월 3일 무신으로 서강에 참여하였다. 그해 부산첨사로 나갔다가 우림위장(羽林衛將)이 되었다. 1703년 7월 18일 영변부사로 나갔다. 1705년 3월 25일 다시 부산첨사가 되었으며, 4월 27일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무신으로 경연참찬관이 되어 서강에 참여하였다. 1706년(숙종 32) 기사관(記事官)으로 서강에 참여하였고, 5월 22일의 서강에도 참여하였으며 5월 25일 우림위장이 되었다. 1709년(숙종 35년) 호위위장, 그해 3월 10일 부호군, 3월 18일에는 무신으로 경연관을 겸하여 서강에 참여하였다. 3월 25일 도총부내승이 되고 6월 1일의 서강에 무신자격으로 경연관을 겸하여 서강에 참여하였다. 9월 3일에는 숙종이 선정전에 입시하여 진강했을 때 예기단궁에 대하여 강하였다.

1710년(숙종 36년) 12월 21일 자성부사로 부임하였고 1711년 11월 2일 흉년기에 쌀 대신 기장으로 분진(分賑)하여 평안도관찰사로부터 탄핵을 당했다. 11월 7일 의금부에서 계를 올려 그가 임지에 있으므로 현장에서 나래할 것을 상주, 11월 26일 한성의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곧 전옥서로 이감되었다가 12월 16일 방면되었다. 1711년(숙종 37) 12월 25일 부호군에 임명되고, 1712년(숙종 38년) 2월 27일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발령되었다. 그해 6월 16일 승정원에서 전최(殿最)를 엄격하게 하지 않은 지방관과 절도사를 탄핵할 때 추고받았다. 12월 2일 승정원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2월 10일 승정원에서 다시 탄핵하였다.

1713년(숙종 39) 2월 20일 경상좌수사에서 면직되고 호군으로 전임되었다. 6월 23일 부호군에 임명되고, 9월 19일에는 무신으로 경연관을 겸하여 서강에 참여하였다. 1714년 6월 16일 무겸선전관이 되었다. 1714년(숙종 40) 10월 23일 강현(姜現), 이천근(李天根) 등과 함께 그해의 무과 과거시험의 1소의 시험관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1716년(숙종 42) 8월 7일 사포서별제, 12월 26일 사역원 찰방, 1717년(숙종 43) 1월 29알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다.

1717년(숙종 43) 8월 27일 그해의 과거시험에 무과의 감시관(監試官)으로 시험을 주관하였고, 9월 17일에는 18일의 정시 무과 초시의 1소의 시관의 한사람으로 선발되었다.

1718년(숙종 44년) 3월 27일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4월 5일 언양현감으로 개차되었지만 다시 충청병사로 개차되거 4월 12일에 임지로 부임하였다. 1719년(숙종 45) 5월 16일에는 충청도의 호랑이를 잡은 포수들을 상줄 것을 청하는 계를 올려 포수들에게 상을 받게 했다. 그러나 그해 6월 12일 그의 상소문에 글자가 틀린 글자가 발견되어 승정원으로부터 지적을 당했다. 충청병사 재직 중 상당성을 중수하였다.

1720년(숙종 46) 5월 13일 처조카 조명국이 회덕현감으로 부임하자, 조명국은 동성 숙모의 남편이 현임 충청병사라 하여 상피를 청하는 상소를 이조에 올려, 조명국은 면직되었다.[2]

1720년(경종 즉위) 7월 22일 사간원헌납 홍우전(洪禹傳), 정언 서종섭(徐宗燮) 등으로부터 연로하고 비루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했지만 경종이 듣지 않았다. 7월 25일과 7월 29일 헌납 홍우전은 다시 계를 올렸지만 경종이 듣지 않았다. 1720년(경종 즉위) 8월 17일 부호군으로 돌아왔다가 언양현감으로 나갔다.

9월 27일 승정원으로부터 언양현에서 대동전을 받아 중간에 써버린 차재원(車載遠) 등을 엄하게 다스리지 못한 못한 죄로 나문정죄할 것을 청하여 경종이 허락하였다. 9월 29일 회령부사로 부임하면서 경종이 그를 가자시켰지만 이조에서 가자가 부당하다는 지적이 나왔고, 10월 7일 그의 집 노비가 그가 나이가 68세 고령이라 지방관에 부임하기 어렵다며 개정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왕이 허용하였다. 같은 날 가자된 작첩도 환수 상소가 올라와 12일 가자된 직급도 환수되었다. 1721년(경종 1) 10월 26일 이유민(李裕民), 민제장(閔濟章) 등과 함께 정시무과 초시의 2소의 시험관으로 선발되었다. 1722년(경종 2) 9월 14일 선전관, 1723년(경종 3) 3월 7일 훈련도감의 좌부천총(左部千摠)으로 무과 시관이 되었다.

1723년(경종 3) 6월 6일 병상소를 올려 요통으로 직무수행이 어렵다며 면직을 청하여 선전관에서 면직되었다. 6월 9일 부호군에 임명되었다.

1723년(경종 3년) 6월 29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 12월 10일 의금부의 김시경으로부터 근무태만을 이유로 탄핵당했고 나수를 청하였다. 12월 12일 어사를 통해 언양현감 재직시의 실책을 추고받았다. 1724년(경종 4) 2월 4일 정언 조상경(趙尙慶)으로부터 나이가 많고 포탐하며 일처리를 잘못한다는 이유로 파면 탄핵을 당했지만 경종이 듣지 않았다. 2월 5일 조상경은 다시 상소를 올려 그를 탄핵했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 2월 15일에는 헌납 심준(沈埈)이 그가 인근 군민들에게 피해를 입혔다며 탄핵하였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 1724년(경종 4) 3월 25일 홍중우(洪重禹)로부터 그가 상부로 보낼 군병세소계본(軍兵歲抄啓本)에 직인을 찍지 않았다며 추고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1725년 7월 5일 정동후(鄭東後)는 감사, 병사가 임금에게 친히 전달하는 밀부(密符)를 타인을 시켜 대신 바치게 했다 하여 추고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 영조가 윤허하였다. 1728년 9월 27일에 사망하였다.

병마절도사 재직 중 1724년 진주 촉석루(矗石樓)를 중수하였다.[3]1728년 9월 7일 75세로 사망했다.

사후[편집]

묘는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북운리 양좌에 매장되었다가 1994년 3월 17일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지곡리 산 2번지 인좌로 이장했다. 묘지는 계비 능성구씨와 합장되었고, 본부인 남원윤씨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내곡리(현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안장되었다.

다른 부인인 양주조씨의 묘소는 실전되었다.

가계[편집]

  • 고조부 이준헌
  • 고조모 전주이씨, 병마절도사 이구침의 딸
  • 고조모 평산신씨, 신직의 딸
  • 증조부 이복남, 충장공
  • 증조모 청주한씨, 한곤의 딸
  • 생 조부 이경수, 숙부 인남의 양자로 입양, 출계하였다.
  • 양 조부 이경여
  • 친 아버지 이흥우
  • 양 아버지 이세구(1614.11.10 - 1697.2.8)
  • 양 어머니 해주최씨(1613.7.17-1665.2.29), 찰방 최산휘(崔山輝)의 딸
  • 부인 숙부인 증 정부인 양주조씨(楊州趙氏), 참봉 조상우(趙相禹)의 딸, 조명국의 고모[4]
  • 부인 숙부인 증 정부인 남원윤씨, 윤자의 딸, 1748년 6월 24일 - 1731년 7월 6일
  • 부인 숙부인 증 정부인 능성구씨, 부위전력 구섭(具涉)의 딸, 1652년 5월 9일 - 1727년 11월 14일
  • 아들 이봉지, 통덕랑
  • 아들 이봉채, 숭록대부 지중추부사
  • 아들 이봉래, 무과 통정대부 갑산부사,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관련 항목[편집]

참고 문헌[편집]

  • 숙종실록
  • 영조실록
  • 승정원일기
  • 비변사등록

각주[편집]

  1. 이흥우에게는 태망 외에도 문망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2. 숙종 46년/ 05월/13일(기묘), 趙鳴國의 改差를 청하는 吏曹의 달
  3. 운남선생의 여행기-진주성 답사기 함양뉴스 2009년 10월 28일자
  4. 숙종 46년/ 05월/13일(기묘), 趙鳴國의 改差를 청하는 吏曹의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