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방 (14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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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방 (1466년)
출생 1466년 10월 15일
조선 강원도 강릉부
사망 1537년 12월 11일
조선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사인 병사(풍증, 이질, 소갈 등)
거주지 조선
국적 조선
별칭 자(字)는 자화(子華)
학력 1489년(성종 20년) 무과 급제
직업 무신, 정치인, 군인, 외교관
종교 유교 (성리학)
부모 아버지 이징, 어머니 양천허씨
배우자 청송심씨
자녀 아들 이광식, 딸 이씨
친척 동생 이지영, 조카 이형손, 매부 정현조, 이오, 당숙 이수형, 사돈 정인지, 사돈 정숭조, 사돈 윤지임, 사돈 윤원형, 윤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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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방(李之芳)
생애 1466년 10월 15일 ~ 1537년 12월 11일
출생지 조선 강원도 강릉부
사망지 조선
별명 자는 자화(子華)
복무 조선
복무 기간 1489년 ~ 1531년
최종 계급 병마절도사
근무 조선 육군, 수군
지휘 경상좌수영, 전라우수영, 함경남도병영, 평안도병영, 충청도병영
주요 참전 1491년 북정부원수 이계동의 군관(軍官)으로 출정
기타 이력 1489년(성종 20년) 무과(武科)에 급제

이지방(李之芳, 1466년 10월 15일 - 1537년 12월 11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무신, 정치인, 군인이자 외교관이다. 본관은 우계(羽溪)이고 자(字)는 자화(子華)이다. 과거 급제 후 평안도병마절도사와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등을 지냈으며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변방 군사를 거느리고 오랑캐를 여러번 치는 공을 세웠다.[1]

1489년(성종 20년)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종성, 회령부사를 역임했으나 연산군의 비리 사실을 잘 안다는 이유로 한때 파면당하였다. 그 뒤 의주목사 재직 중 1509년(중종 4) 2월 모친상으로 사직했다가, 상중에 반인을 때려죽였다 하여 다시 파면당했다. 이후 보석을 내고 풀려나고 1513년(중종 8) 복직, 1517년(중종 12) 11월에는 문정왕후의 책봉 주청사로 명나라를 방문하고 1518년 4월 귀국했다.

1518년(중종 13)부터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며 변방에 출몰하는 여진족 및 야인들과 교전하였으며, 중종의 명으로 함경남도를 약탈하는 여진족 속고내를 기습 토벌하려고 출정 도중, 기습공격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부제학 조광조의 반대로 회군하였다. 1523년(중종 18) 왕명으로 평안도병마절도사여연(閭延)의 야인을 국경 밖으로 축출하였다. 1524년(중종 19) 삼둔야인 추방을 건의했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1528년(중종 23) 명나라효결숙황후 상 때 진향사로 가던 중 이질, 소갈에 걸려 의주목사에게 발병 통고하고 되돌아왔으나, 무단히 되돌아왔다는 이유로 황해도 남포로 유배되었다. 명나라의 선례통사 이순종이 황제 가정제의 선물을 들고 조선을 방문하여 그에게 줄 때도 삼사가 반대했으나, 황제의 선물이라 하사되고 곧 풀려났다. 도촌 이수형의 5촌 조카가 된다. 그밖에 가까운 친족 중 내시가 있었다 하며, 그의 누이 중 한명은 하성부원군 편정공 정현조의 후처가 되었다.

1518년(중종 13) 4월 정조사북경을 방문 중일 때 《대명회통》을 구입하여 조선으로 가지고 왔다.[2] 그 당시에도 여전히 이성계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되어있다는 소문이 조선에 확산되었으나 그가 대명회통을 구입해옴으로서 사실로 밝혀졌고 조선 조정은 종계변무를 재개한다. 이광식(李光軾)의 아버지이며, 도촌 이수형의 5촌 조카가 된다. 강원도 출신.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남보(조선후기 남인 주요 가문 가계도를 정리한 책) 79a페이지 맨윗줄 1단 좌측 4줄 이지방

이지방(李之芳)은 1466년(세조 12) 10월 15일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소위장군충좌위부사정과 호군을 지낸 이경연(李景衍)이고, 선무랑 목청전직, 충찬위를 역임한 이징(李徵)과 사헌부장령, 의정부사인을 지낸 허적(許迪)의 딸 양천허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5대조는 고려말의 밀직부사강계원수를 지낸 이의이고, 고조부 이만(李蔓)은 고려말 홍로부사, 인진사를 거쳐 중추원부사를 지냈는데 조선 건국 후 봉렬대부 호분위경력, 검찰부사로 내려갔다. 할아버지는 이경연으로 소위장군 행충좌위부사정과 호군을 역임하였고, 아버지 이징은 충찬위에 입대하여 복무하다가 나중에 선무랑 목청전직에 이르렀다. 동생은 이지영(李之英)인데 이름만 전하고 행적이 전하지 않는다. 동생 이지영의 아들 이형손(李亨遜) 역시 무과에 급제하여 가산군수(嘉山郡守)를 지냈으나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그의 누이 중 한명은 정인지(鄭麟趾)의 아들인 하성위 정현조(鄭顯祖)의 후처가 되었고[3], 다른 누이는 이오에게 출가한 누이와 조효돈에게 출가한 누이가 있었다.

부인은 봉사 심안신(沈安信)의 딸 청송심씨로, 처조부는 망세당 심선(忘世堂 沈璿)이었며 심온, 심정의 형 인수부윤 심징의 5대손이다. 딸 중 한명은 윤확에게 출가했는데 그는 윤사흔의 4대손으로 윤지임의 5촌 조카였으며, 손녀딸 한 명은 다시 윤지임의 손자이자 윤원개의 아들 윤강(尹綱)에게 출가했다.

그의 당숙 이수형(李秀亨)은 세조의 찬탈에 반발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으나 그는 무과에 입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또한 족보상에는 등장하지 않아 촌수 확인이 어려우나, 연산군일기에 의하면 당시 내시로 있던 친척도 존재하였다.

변방 도적 토벌 활동[편집]

1489년(조선성종 20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1491년(성종 22) 11월] 여진족 토벌 당시 북정부원수 이계동(李季仝)의 군관(軍官)으로 출정하여 승전하였다.

북정부원수 이계동을 따라 경성(鏡城)에서 여진족과 교전 중 장군 육한(陸閑)이 도적에게 포위되자, 그는 정은부(鄭殷富)·구현휘(具賢輝) 등 10여 인과 일제히 활을 쏴서 육한을 구출해냈다. 그가 한 도적의 어깨를 쏘아 맞힌 것을 도적이 스스로 뽑아 땅에 버렸는데, 싸움이 끝나고 이계동이 화살을 줍자 살대에 손가락만한 살점에 묻어 있었다 한다. 이때 여진족 수급 5구를 베어오기도 했다. 다시 선전관이 되어 1495년(연산군 1) 3월 연산군의 밀명을 받아 팔도를 순회하였다.

1496년(연산군 2)에 무사 장정(張珽)·이원종(李元宗) 등과 함께 서정군장수(西征軍將帥)에 임명되었다. 1496년(연산군 2) 8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으로부터 서정군 장수 적임자의 한사람으로 천거되었다. 1497년(연산군 3) 5월 여진에 귀화인 출신 선위사 동청례(童淸禮)를 파견할 때, 선위사의 군관이 되어 여진을 다녀왔다. 1498년(연산군 4) 선전관이 되었다. 1499년 9월 4일 도적이 산양회 친라올(山羊會親羅兀)을 습격하여 교전, 도적의 머리 한 급(級)을 베었다. 변방에는 오가작통법이 시행되지 않았는데 1503년(연산군 9년) 1월 28일 이지방은 변방에도 5가 혹은 10가를 일통으로 하고 매 통에 통장 혹은 호수를 두는 제도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4] 1503년(연산군 9년)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으로 경연시강관을 겸하여 경연에 참여하였다.

지방관 생활[편집]

1504년(연산군 10) 5월 종성부사(鍾城府使)로 부임했다가 얼마 뒤 회령부사로 전보되었다. 1505년에는 연산군내관과 족친이라는 이유로 파직당했다. 실록에 의하면 '연산군은 내관의 족친인 종성 부사 李之芳 등을 파직 하였다. 이것은 왕의 더러운 행실과 악한 덕이 누설될까 두려워 하여 , 관직이 있는 족친을 모두 먼 지방으로 쫓아내었다 (「燕山君 日記」권 58 , 11년 7월 기축).[5]' 한다.

회령부사로 있을 때인 1509년(중종 4) 1월 29일 어머니 양천허씨의 3년상을 당하여 그해 2월 2일 사직하였다. 그러나 1511년 3년상 상중에 반인(伴人)을 타살했다가 양사로부터 탄핵당하고 파직, 의금부에 투옥당했다. 의금부에서 삭탈관직과 (杖) 1백대에 도형(徒刑) 3년으로 구형하자, 중종보석금으로 속(贖)하게 했다. 이어 사헌부가 율에 의해서 단죄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보석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중종이 무마시켰다.

그 뒤 1513년(중종 8) 서용의 명령이 내려졌고, 양사의 거듭된 반대에도 복관되었다. 그해 3월 16일 다시 의주목사(義州牧使)로 부임하였으나, 양사에서 거듭 논핵하였다. 그해 3월 12일 사헌부지평 지평 김희수(金希壽)로부터 장재(將才)가 있으나 상중에 살인을 하여 지방관으로서 부적합하다는 논핵을 당했지만 왕이 무마시켰다. 1515년 무렵까지도 계속 상중에 살인한 이유로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16년(중종 11년) 1월 25일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부임했다가 그해 9월 13일 장수로서의 적임자이며 서로(西路)를 잘 안다는 이유로 정광필의 천거를 받아 상경, 9월 21일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이때, 경상좌수사로 재직 중 백성에게 동물의 모피 1장씩 징수한 것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경차관이 서면추고하게 했다. 1516년 평안도관찰사 안윤덕의 차사원(差使員)이 되어 의주성을 개보수하였다.

관료 생활[편집]

명나라 파견과 대명회통[편집]

이듬해 11월 왕비 윤씨(尹氏, 문정왕후)의 책봉에 대한 주청사가 명나라에 파견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정조사 겸 왕비책봉 주청사, 종계변무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종계변무 허락은 받지 못하고, 왕비 책봉 승인만 받게 되었다.

1518년(중종 13) 4월북경을 방문한 정조사(正朝使) 이지방은 《대명회전》을 구입하여 조선으로 가지고 왔다.[2] 이지방 등은 4월 4일문정왕후의 조선 왕비 책봉 승인을 받아 회국하면서, 《정덕회전 (正德會典)》을 북경에서 구입, 조선 국내로 반입한다.

그런데 그가 구입해 온 《대명회전》 에는 '조선의 태조가 이인임(李仁任)의 후예로 고려의 네 왕을 살해(弑害)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이 여전히 있어 양국 간의 중요한 외교 현안이 되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대명회전 의 왜곡된 기록을 바로잡기 위해 활발한 외교 활동을 벌였는데, ‘宗系辨誣’라 불리는 조선의 외교활동은 1588년(선조 21)에 조선의 요구가 반영된 만력본 대명회전 을 가지고 종묘에 고유제(告由祭)를 올릴 때까지 계속되었다.[2] 그는 그동안 소문으로만 돌던 대명회통이성계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됐다하더라 는 소문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조선 정부는 이 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 70년 동안 총 16차에 걸쳐 대명회전의 수정을 요청했는데, 명나라가 가정본과 만력본 대명회전 을 편찬할 때마다 사신을 파견하여 내용을 일일이 확인했다.[2] 그해 4월 4일 북경을 출발, 귀국하였다.

1518년(중종 13) 전라우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무재가 있어 지방에 둘 수 없다는 이유로 체직되어 그해 6월 19일 다시 소환되고, 이권(李卷)을 대신 전라우수사로 보냈다. 그해 7월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비변사에 참여하였다.

여진족 토벌[편집]

1518년(중종 12) 회령성(會寧城) 밑에 있는 야인(野人, 여진족) 속고내(束古乃)가 몰래 먼 곳에 있는 야인들과 함께 갑산부(甲山府)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많이 약탈해갔다.[6] 이에 남도 병사(南道兵使)가 비밀리 장계를 올렸다. [6] 임금이 명하여 세 정승과 해당되는 조(曹)를 불러 이것을 의논하고 먼저 본도(本道[7])에 밀지(密旨)를 내리고 또 무기를 보내 이지방을 파견하여 틈을 엿보아 법에 따라 처치하려고 하였다.[6]

이때 병조판서 유담년은 구체적인 계책을 제시했다.[8] 그가 구체적 계책을 제시하자 중종은 적임자를 거론하였고, 유담년이 그를 천거하였다.

  • 중종 : 좋은 생각이오. 그러면 누구를 보내면 가히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겠소?
  • 유담년 : 장군 이지방이 적임자인 줄로 아옵니다.[8]

중종이 이지방을 명하여 특별히 어의(御衣)와 활과 화살을 주며 그날로 떠나게 하고,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전송의 연회를 베풀었는데, 승지 김정국(金正國)이 아뢰기를, “부제학 조광조가 입대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곧 윤허하였다.[9] 조광조가 나아가 아뢰기를, “이것은 곧 도적이 기미를 노려 속임수를 쓰는 모의와 같습니다. 당당한 대 조정으로써 한 일개 조그만 추한 오랑캐 때문에 도적의 모의를 행한다는 것을 신은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합니다.” 하니, 임금이 중의를 물리치고 파견할 것을 철회해버렸다.[9] 이에 병조판서 유담년이 반발했다. "밭을 가는 일은 남자 종에게 묻고, 짜는 일은 계집종에게 묻는다고 했다. 나는 젊어서부터 북방에 출입하여 오랑캐의 실정을 잘 알고 있다. 조광조는 세상물정을 모르는 선비다. 논리는 그럴듯하지만 있을 수 없는 것이다."[10] 논란이 거듭되었고 찬반 의견이 맞섰다. 그렇지만 중종은 조광조를 신임하고 있었다. 조광조의 손을 들어줬다.[10] 도성을 나갔던 이지방은 명령을 받고 다시 회군하였다.

1519년(중종 14) 함경남도병마절도사북청도호부사로 부임하고, 그해 2월 여연(閭延) 근처에 몰려와 생활하는 야인 20여 호의 처리를 조정에 건의, 조정의 동의를 얻어 야인을 멀리 쫓아냈다. 1520년에는 의주성의 대대적인 개축 및 확장 공사가 진행되어 평안도 차사원이 되어 의주읍성곽을 개보수하고 돌아왔다. 1521년(중종 16) 8월 26일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되었다. 1522년 특별 가자하여 지사(知事)로 임명되었으나 대간의 논계로 취소되었다.

변경 수비 활동[편집]

1522년(중종 17) 4월 무너진 의주성곽 복구, 중건공사를 수행하다가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영변도호부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계속 의주성의 중건을 청하였다가 양사로부터 탄핵을 당했다. 1522년(중종 17) 5월에는 만포진 첨사(滿浦鎭僉使) 반석평(潘碩枰)의 휴가를 허락하고 우후(虞候) 허광필(許光弼)은 면천(沔川)의 집으로 보냈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 1523년 3월 허물어진 의주성의 복구를 청하였으나, 복구 인원 동원의 어려움을 청하였다.

1523년(중종 18년) 윤 4월에 평안도 병사 이지방이 계문(啓聞)한 여연·무창 지방 야인의 구축사(驅逐事)를 비변사 당상 고형산 등은 중대한 사안이어서 비변사에서 결정할 수 없으니 정부와 함께 논의하자고 요구하자, 중종은 매사 마다 정부와 동의할 필요 없이 대책을 마련하여 정부에 보고하고 정부 에서는 그 시행에 대한 가부만을 결정토록 지시했다.[11] 그해 5월에는 경차관(敬差官) 이환(李草+丸) 등과 함께 여연(閭延), 무창(茂昌)의 지형(地形)을 지도로 그려 올렸다. 그해 10월 지위 높은 중신(重臣)과 병력을 보내줄 것을 상소하였으나 거절당했다.

1523년(중종 18년) 12월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왕명을 받고 여연(閭延)의 야인(野人)을 국경 밖으로 축출하였다.[12] 이에 앞서 야인 김아(金阿), 송가(宋可) 등이 부령(富寧)으로부터 여연, 무창(茂昌)으로 옮겨와 살면서 땅을 개간하고 성책(城柵)을 설치하여 점차 제어하기 어렵게 됐다. 이에 변신(邊臣)이 군사를 내어 내쫓기를 청하자 중종이 조정 신하에게 논의할 것을 명하여, 비변사 당상 고형산(高荊山) 등이 일찌감치 도모해야 한다고 하였다. 중종이 경차관(敬差官) 이환(李芄) 등을 파견하여 가서 오랑캐의 정세를 살피고 오도록 하였는데, 이환 등이 돌아와 변신이 말한 대로 아뢰었다. 마침내 함경도 도순변사 조윤손(曺潤孫), 관찰사 허굉(許硡), 남도 절도사 반석평(潘碩枰), 평안도 관찰사 김극성(金克成) 및 이지방 등에게 하유하였다.[12]

주성합(主成哈) 등이 일찍이 우리에게 귀순하였으므로 무창의 강 건너편에 거주하도록 허락하여 국가의 울타리로 삼았는데, 저 오랑캐가 우리의 은혜를 생각지 않고 다른 종족들을 끌어들여 강 연안에 줄지어 거주하여 부락이 갈수록 늘어났다. 누차 유시하여 멀리 물리치라고 했는데도 도리어 가증스러운 말을 함부로 하니, 이때를 놓치고 도모하지 않는다면 훗날 계책을 세우기 어려울 것이다. 실로 그렇지 않다면 어찌 차마 우리 백성들을 몰아 위험한 지역으로 내보내겠는가. 경들은 사졸들과 더불어 나의 뜻을 잘 새기도록 하라.[12]

이어 중종으로부터 모의(毛衣), 궁시(弓矢), 고건(櫜鞬)을 하사받았다.[12]< 그해 12월 그는 김아(金阿), 송가(宋可) 등을 국경 밖으로 구축하였다.[13] 1524년 1월에는 변방으로 쳐들어온 여진족과 교전하였다가 패하여 양사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1524년 1월 9일 허공교(虛空橋)에서의 야인과 교전 중 패한 일로 논공시상 때 병사 50여명의 희생을 이유로 우의정 권균(權鈞)의 비판을 받았다. 그해 1월부터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할 때에 삼둔(三屯)의 야인과의 교전에서 병력 손실을 이유로 여러차례 대간의 탄핵을 받고 그해 3월 파직,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의금부에 투옥된 상태에서도 그는 다시 삼둔의 야인을 구축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허공교(虛空橋) 등은 지세가 좁아서 혹 적이 저지하는 변고가 있으면 지름길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는 형세였습니다. 당시의 형세를 계교하지 않고 조금도 변통하지 않으면 만전을 기하는 계책에 어그러질 듯하므로, 당초 발군(發軍)할 때에 감사 김극성(金克成)과 반복하여 계획해서, 회군(回軍)할 때에 변고가 있으면 지레 자성(慈城)의 옛길로 들어가기로 정녕히 밀약(密約)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김극성이 허공교의 적변(賊變)을 듣고 곧 강계 판관(江界判官) 이경지(李敬智)를 시켜 거느리고 달려가서 지령괴(地寧怪)·삼천기이(三千岐伊) 등의 땅을 점거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처음에 김극성과 면대하여 약속하지 않았다면 대군(大軍)의 행지(行止)를 어떻게 미리 헤아려서 원군(援軍)을 보내어 요해지(要害地)를 점거하게 하였겠습니까? 관찰사가 이경지를 보낼 때에도 치계(馳啓)가 있었으니, 그 계본(啓本)을 상고하면 그 허실(虛實)이 곧 가려지고 지레 돌아온 정상도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虛空橋等處地勢隘窄, 脫有賊虜阻截之變, 則由徑路回還, 勢不得不爾。 若不較時勢, 膠柱不變, 則恐乖萬全之計。 當初發軍時, 與監司金克成反覆籌畫, 而回軍時, 如有變故, 則徑入慈城舊路事, 丁寧密約。 以此, 金克成聞虛空橋賊變, 卽令江界判官李敬智率軍馳據地寧恠、三千岐伊等地。 臣初不與金克成面約, 則大軍行止, 何得逆料, 而送援軍, 據要害之地乎? 觀察使發送李敬智時, 亦有馳啓, 考此啓本, 則其虛實立辨, 而徑還之情, 亦可露矣。

1523년(중종 18) 4월 9일 투옥은 과하다는 왕명으로 풀려나 벼슬만 면직되었고, 그후 다시 복직되었다. 1524년(중종 19) 2월 사헌부로부터 주장(主將)으로서 세 부락의 야인을 쫓아내지 않고 다른 길로 돌아왔으므로 겁을 내어 나라의 위엄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지만 왕이 무마시켰다. 그해 4월 그가 야인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농사짓는 땅을 밟고 내려온 일로 삼정승의 논계를 당하여 직책만 면직되었다. 그 해 복직하여,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할 때에 삼둔(三屯)의 야인을 국경 밖으로 구축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오히려 대간의금부로부터 탄핵당하고 파직당하였다.

1524년 11월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이 되고, 그해 11월 의주성에 파견되어 성곽의 상태를 점검하라는 명을 받자 스스로 사직을 청하였다. 같은 해 의주성을 순찰하고 돌아왔으며, 훈련원도정으로 비변사당상을 겸직하였다.

훈련원도정으로 재직 중 1524년(중종 19) 12월 19일 중종이 친히 낸 응제시에서, 무신(武臣)의 관사(觀射)에서 세번 1등하여 아마(兒馬) 1필(匹)을 상으로 받았다.[14]

생애 후반[편집]

1528년(중종 23) 동지중추부사로 비변사 당상을 겸하였고, 함경남도평안도의 야인, 도적 토벌을 논의하였다. 3월 경연특진관이 되었다.

1528년(중종 23) 4월 5일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그해 7월 황해도에 도적을 신고하고 상을 받은 윤세필(尹世弼)에게 도적이 보복으로 활을 쏘고 달아나자, 우포도장에 임명되어 좌포도장 심순경과 같이 황해도 배천으로 파견되었다.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비변사당상이 되었다. 1528년 9월 26일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심정, 우참찬 손중돈(孫仲暾) 등과 함께 입시하여 변방의 야인 정벌의 시기를 논하였다. 1528년 11월 특진관(特進官)으로 경연에 참여하였다.

1528년(중종 23년) 10월에는 명나라의 황후인 효결숙황후 진씨(孝潔肅皇后 陳氏)가 죽자 그해 12월 진위사(陳慰使) 이봉(李芃)과 함께 진향사(進香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가던 도중에 행산역(杏山驛)에서 발병하여 의주목사에게 통보하고 되돌아왔다. 사헌부사간원에서는 그의 귀국을 허용하지 말라고 탄핵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환국 이후, 대국을 섬기는 예를 행함에 있어 무단히 돌아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장 1백대에 유 2천리에 파면이 내려졌으나, 속(贖)으로 장 1백대는 면하고 고신을 전부 박탈하고 충청도 남포에 유배되었다.

1529년(중종 24) 5월 명나라 선례통사 이순종(李順宗)이 조선에 방문, 명나라 황제 가정제의 친서와 선물을 전달받았다. 이때 선물 받을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대간와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허용하였다. 선례통사 이순종(李順宗)은 이지방이 병으로 오지 못한 것을 가정제가 알고 있다며, 명나라 황제의 뜻임을 내세워 이지방에게 선물을 수여하였다.

1530년 3월 며느리 함안이씨가 상소를 올려 시아버지 이지방에게 지병인 풍증(風症)과 소갈병이 있고 이질(痢疾)에 걸린 것과, 아들인 이광식은 원지에 외직으로 부임해 있어 봉양할 수 없음을 들어 유배지를 옮겨줄 것을 청하여 다시 충청도 수안(遂安)으로 이배되었다. 병으로 돌아온 것이 밝혀져 1530년(중종 25년) 3월 14일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풀려나온 뒤 1531년(중종 26년) 7월 26일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얼마 뒤 병으로 부임할수 없음을 들어, 대간이 체직을 청하여 8월 7일 체직되었다. 그 뒤 동지돈녕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이 되었다.

중종조에 여러 번 북문 수위로 있었으며, 야인들을 누차 첩승을 거두어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경외하며 따랐다. 각 지방의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를 역임하면서도 집에는 재산이 없이 청렴하였다. 1536년(중종 31년) 6월 공회에 불참하였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사후[편집]

사후 증직으로 병조판서추증되었다.

후일 신사대동보의 그의 후손 이재정(李在正) 편의 에 의하면 증 병판 이지방 12세손(贈兵判 李之芳 十二世孫)이라 하는데, 그가 언제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묘는 처음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대장리(현. 경기도 성남시 대장동)에 매장되었다가 뒤에 헌릉 언덕 내동(內洞) 인좌, 서울특별시 강남구 내곡동 산 29번지(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 29번지) 인좌(寅坐)에 이장되었다.

후일 5대손 이경항 내외의 묘소가 이 곳 근처 맞은편 언덕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으로 이장된다.

선조권문해(權文海)가 지은 당대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의 인물편에 그도 수록되었다.

한때 남사고(南師古)가 그의 묘소가 제왕의 산지에 적합하다고 했다 한다.[15] 인조 때인 1630년(인조 8) 3월에는 선조의 능침을 이장할 장소를 관상감에서 선정할 때, 그의 묘소 주변도 이장지 후보지로 추천되었었다.[16]

작품[편집]

  • 여연,무창 형세도 (閭延茂昌形勢圖)

가계[편집]

  • 외할아버지 : 허적(許迪) - 양천허씨, 사인,사헌부장령 역임
  • 처조부 : 심선(沈璿, ? ~ 1467년 9월 20일, 호는 망세당)
  • 장인 : 심안신(沈安信, 봉사)
  • 장모 : 고성이씨(固城李氏), 주부 이희진(李希振)의 딸

기타[편집]

1518년말 이지방을 방어사로 삼았다가 곧 파직하고 보내지 않았다. 처음에 야인(野人) 속고내(速古乃)가 겉으로는 우리나라를 섬기는 척하면서 속으로 딴마음을 품고 여러 야인 부락들과 몰래 모의하고 결탁하여 갑산부(甲山府)를 침범하여 사람과 가축을 상당수 잡아가지고 갔다. 변장(邊將)이 체포하려고 하자 속고내가 이름을 바꾸고 남도(南道)에 출몰하였다. 병사(兵使)가 군대를 내어 불시에 체포하기를 청하니, 상이 삼공 및 지변 재상(知邊宰相)을 불러 의논하였는데, 모두 아뢰기를,“지금 통절히 징계하지 않으면 후에 장차 더욱 날뛰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마침내 이지방을 파견하기로 하고, 또 본도에 비밀리에 하유하여 몰래 군사와 무기를 보내어 불시에 체포하게 하였다. 출발하기에 앞서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이지방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궁시(弓矢)와 갑옷을 하사하였다. 장수와 재상, 여러 신하들이 좌우에서 둘러싼 채 시위하고 있을 적에 부제학 조광조가 청대하여 아뢰기를,“이 일은 옳지 못한 속임수로써,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막는 도리가 아닙니다. 어찌 당당한 조정에서 볼품 없는 작은 오랑캐 때문에 도둑과 같은 계책을 쓴단 말입니까. 신은 삼가 부끄럽게 생각합니다.”하니, 이에 상이 다시 논의하도록 명하고 보내지 않았다.[18]

좌우가 번갈아가며 간하기를,“병법(兵法)에는 기발한 방법과 바른 방법이 있으며, 적을 막는 데는 상도(常道)와 권도(權道)가 있는 법입니다. 지금 여러 사람들의 논의가 모두 일치하였으니,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유담년(柳聃年)이 아뢰기를,“밭을 가는 일은 머슴에게 물어야 하고 길쌈하는 일은 계집종에게 물어야 합니다. 신이 젊어서부터 북문(北門)에 출입하여 오랑캐의 정상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정에 어두운 저 유자(儒者)의 말은 예로부터 이러했으니, 지금 묘당의 방침이 이미 정해진 마당에 갑자기 변경해서는 안 됩니다.”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고 이지방이 가는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18]

관련 항목[편집]

각주[편집]

  1. 〈구묘문(丘墓文) 첨정 이공의 묘갈명〉 허목, 《미수기언》 제20권(민족문화추진회, 1978)
  2. 김문식, 〈조선시대 國家典禮書의 편찬 양상〉, 한국학중앙연구원, 《藏書閣 제21집》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87페이지
  3. 또한 정현조의 동생 정숭조의 증손녀는 그의 고손자 이길남과 결혼한다.
  4. 경향신문 1947년 1월 28일자 1면, "금일"(今日)
  5. 장희흥,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경인문화사, 2006) 176페이지
  6. 이황,《퇴계문선》 (한국고전번역원 역, 두산동아, 2010) 801페이지
  7. 함경남도를 말한다.
  8. 신봉승, 《조선왕조 500년:12. 조광조의 죽음》 (금성출판사, 2010) 104페이지
  9. 〈해동잡록 1, 본조 조광조〉《국역 대동야승》
  10. 조광조의 '대외정책' 데일리안 2006.07.21
  11. 이재철, 《조선후기 비변사연구》 (집문당, 2001) 27페이지
  12. 《국조보감 제20권》 중종조 3, 중종 18년(계미, 1523)
  13. 김정호, 대동지지, 강계편
  14. 중종실록 52권, 중종 19년 12월 19일 기유 6번째기사 1524년 명 가정(嘉靖) 3년, 응제시에서 으뜸을 한 김협·이지방에게 상물을 내리다
  15. 원광대학교 동양학연구소, 《東洋學硏究 第1輯》 (원광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05) 307페이지
  16. 인조실록 22권, 1630년(인조 8년, 명 숭정 3년) 3월 18일 무술 2번째기사, "관상감이 선조릉을 옮길 장소에 관해 아뢰다"
  17. 윤번(尹璠)의 후손으로 윤사흔의 4대손(尹士昕), 윤계겸(尹繼謙)의 증손
  18. 《국조보감 제19권》 중종조 2, 중종 13년(무인, 1518)

참고 문헌[편집]

  • 연산군 일기
  • 중종실록
  • 대동야승
  • 국조보감
  • 연려실기술
  • 증수임영지

관련 서적[편집]

  • 강릉문화원, 《강릉시사》 (강릉문화원, 1996)
  • 강릉문화원, 《증수임영지》 (강릉문화원 국역, 1997)
  • 박도식 편, 《강릉의 역사인물 자료집》(강릉문화원, 2003)
  • 백산학회, 《백산학보 14호》 (백산학회, 1973) 116페이지
  • 도현신, 《왕가의 전인적 공부법》 (미다스북스, 2011)
  • 朝鮮総督府 平安北道道庁, 《平安北道史》(平安北道道庁, 1938)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