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잠 (15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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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잠(李埁, 1581년(선조 14년) 10월 16일 ~ 1655년)은 조선 광해군 때의 문신, 외교관으로,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여첨(汝瞻)이다. 다른 이름은 이령(李令), 또는 이령(李坽), 이잠(李岑)이고, 호는 창암(蒼巖)이다.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효린(孝麟)이며, 어머니는 영천 이씨로 이여량(李汝樑)의 딸이다.

1606년(선조 39) 식년문과 급제 후 삼사의 언관으로 재직했고, 홍문관부교리 재직 시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을 겸하며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명나라, 청나라에 보내는 자문을 지었으며, 홍문관 수찬과 교리 등을 지냈고, 이이첨과 친하여 언관으로 있으면서 그의 활동을 비호하였다. 1623년 풍기군수로 재직 중 인조 반정 이후 서인의 집단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당색으로는 대북이었다. 경상도 영주(榮州) 출신.

생애[편집]

창암 이잠은 1581년(선조 14년) 10월 16일경상북도 영주 부석면 감곡에서 태어났으며, 도촌 이수형의 4대손으로, 그의 넷째 아들 참봉 이준근(李峻根)의 증손이었다. 할아버지는 참봉 이은이고,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첨추 이효린이며, 어머니는 영천이씨로, 장악원 직장 찰방 이현준(李賢俊)의 넷째아들 생원 이여량(李汝樑)의 딸이다.

유학으로 1606년(선조 3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외직인 현령(縣令) 등을 지냈다. 1614년(광해군 6) 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614년(광해군 6) 홍문록(弘文錄[1])에 선발되었다. 1615년(광해군 9년) 사간원 정언이 되고 그해 2월 다시 정언에 임명되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幽閉) 논의에 이원익(李元翼)의 언사가 왕에 대해 무례함을 이유로 비판하였다. 이어 사당을 심고 다투며 사치 풍조가 극심해지는 등 국가가 혼란에 빠졌다는 상소와 남이공을 함께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고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해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7월 사헌부지평이 되어 조정 관원들이 사당을 심고 다투며 사치 풍조가 극심해짐을 간하고 체직을 청하였다. 같은 달 체직되었다가 곧 부수찬이 되었다. 1616년(광해군 8)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가, 홍문관 부교리로 지제교 경연 시독관(知製敎兼經筵侍讀官), 춘추관기주관(記注官)을 겸하여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6년 5월 홍문관교리가 되고 그해 10월 부교리가 되었다가, 상수연 때에 옥당의 관원으로서 까닭없이 불참했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1617년 홍문관교리가 되어 인목대비의 유폐 논의에 찬성 측에 참여하였으며, “쟁리(爭利)와 예의를 절충하면 은(恩)과 의(義)의 경중을 따라 스스로 대처할 바가 있다.”고 하여 빨리 결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가 인목대비 폐모론에 동조한 일로 1621년(광해군 13) 7월 퇴계문하와 한강문하생이 모여 김응조, 김시추를 소두로 한 이이첨 탄핵상소를 준비할 때 개최 시 유적에서 삭적당하였다.[2] 이때 이이첨과 정인홍을 비난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스승인 남명 조식도 비판하는 구절이 있자 한강 정구의 문인들은 조식에 대한 부분은 거둘 것을 요청하여 논쟁이 벌어졌고, 일부 북인 인사들이 현장에 나타나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그에 대한 제명처분을 막지는 못했다.

1617년(광해군 9) 명나라에 파견되는 성절사의 재자관(齎咨官)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1618년(광해군 9) 5월부터 8월에는 명나라에 파견되는 진주사(陳奏使) 박정길(朴鼎吉)의 재자관으로 요동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그밖에 명나라, 청나라로 보내는 자문을 작성하였다.

1618년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조선군을 파병할 때[3] 그는 강홍립(姜弘立)을 수행하였으며, 강홍립이 적당히 군사를 이끌고 회군할때 함께 귀국했다. 돌아와 그해 12월 예조정랑이 되었다. 그 뒤 외직인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나갔다. 1623년(인조 1) 풍기군수로 재임 중 인조반정이 발생하자, 흉도들과 결탁하여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였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일찍이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과 친하게 지내, 그의 정치적 행위에 언관으로서 비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1623년(인조 1) 3월 28일 영천의 일부 유림이 장정 수백명을 모아 이강(李茳), 이잠(李藏), 이영구(李榮久), 금대아(琴大雅), 이광계(李光啓), 이광렬(李光烈) 등의 집을 허물고 훼가출향조치를 할 때 그의 집도 훼손되었다.[4]

1623년 4월 강원도 영월군으로 유배되었다가 편하고 좋은 곳으로 유배되었다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35년(인조 13) 봄 석방의 명령이 내려지자, 사간원의 거듭된 탄핵을 받았으나 인조가 듣지 않았다. 1649년 서용의 명이 내려졌으나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다.

사후[편집]

순흥부 화천면 가리(花川面 加里) 장선동(長善洞, 장생이) 부락(현, 영주시 풍기읍 금계2리)에 매장되었다. 뒤에 후처 양천허씨와 쌍분으로 매장되었다. 본부인 함양박씨는 부석면 감곡리 석남 해좌(亥坐)에 묘가 있다.

가족[편집]

안정구가 쓴 재향지(梓鄕誌)에 의하면 조부 이은은 86세, 조모 공주이씨는 90세로 해로하였다 하며, 백부 이복린은 86세, 아버지 이효린은 83세까지 살았다 한다.

  • 할아버지 : 이은(李隱)
  • 할머니 : 공주이씨(公州李氏)
  • 아버지 : 이효린(李孝麟)
  • 어머니 : 영천이씨, 이여량의 딸
    • 형 : 이채(李埰)
    • 형 : 이평(李坪, 1572년 ~ 1612년)
    • 형 : 이환(李土+奐)
    • 동생 : 이룡(李土+龍)
    • 매부 : 송시영(宋時詠)
      • 외조카 : 송세백(宋世伯)
      • 외조카 : 송세필(宋世弼)
    • 매부 : 손기양(孫起陽, 1559년 ~ 1617년)
      • 조카사위 : 권수(權燾)
      • 조카사위 : 이돈(李墩)
      • 외조카 : 손현(孫𦆴)
    • 매부 : 조임원(趙任遠)
  • 부인 : 함양박씨(咸陽朴氏, 참의 박수서(朴守緖)의 딸)
  • 부인 : 양천 허씨(陽川許氏, 참찬 허호(許昊)의 딸
    • 아들 : 이성윤(李成玧, 1609년 ~ ?), 장사랑
    • 며느리 : 선성김씨, 김우인(金友仁)의 딸
  • 외조부 : 이여량(李汝樑, 영천 이씨)
  • 처부 : 박수서(朴守緖, 호는 우계(尤溪), 1567년 ~ 1627년)
  • 처부 : 허호(許昊)

관련 항목[편집]

참고 자료[편집]

  • 《계암일록》
  • 《광해군일기》
  • 《연려실기술》
  • 인조실록
  • 국조방목
  • 사마방목

각주[편집]

  1. 홍문과 교리·제학 등을 선발하기 위한 홍문관의 제1차 인사기록
  2. 박현순, 《16~17세기 예안현 사족사회 연구》 (서울대학교, 2006) 110쪽
  3. 조선은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석성, 이여송 등의 파병의 공로로 파병해야 되는 위치였으나, 청나라의 세력과 대항하느냐를 놓고 고민하였다.
  4. 박현순, 〈17세기 지방 儒生들의 士林儒罰〉,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한국문화 .42》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08) 12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