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암 (고려)
이암 李嵒 | |
|---|---|
| 본명 | 이군해 |
| 출생 | 1297년 |
| 사망 | 1364년 |
| 성별 | 남성 |
| 국적 | 고려 |
| 경력 | 승문원 학사, 판밀직사사 감찰대부, 문한학사, 진현관 대제학 |
| 직업 | 문신, 서예가, 시인, 화가 |
| 종교 | 불교 |
이암(李嵒, 1297년 ~ 1364년)은 고려 말의 문신이다. 본관은 고성(固城), 호는 행촌(杏村),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행촌이란 호는 자신이 유배되었던 강화도의 마을 이름을 따서 지었다. 원래 이름은 이군해(李君侅), 자는 익지(翼之)이며 후에 이름을 암(嵒), 자를 고운(古雲)으로 고쳤다.
그는 고려 고종 때 문과에 합력하여 승문원 학사를 지낸 진(瑨)의 증손자이며, 고려국 판밀직사사 감찰대부(高麗國 判密直司事監察大夫), 문한(文翰)학사, 진현관(進賢館) 대제학(大提學) 등을 역임한 존비(尊庇)의 손자로, 경상도 김해와 강원도 회양 부사를 지낸 철원군(鐵原君) 우(瑀)의 장남이다. 도촌(桃村) 이교(李嶠)가 그의 동생이고, 각진국사(覺眞國師) 복구(復丘, 1270~1355)는 숙부이다.[1][2] 이들의 가문은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누대공신재상지종(累代功臣宰相之種) 문벌가였으며, 조선 개창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후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와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관과 무관을 배출하면서 조선의 명족이 되었다.
이암은 백이정(白頤正, 1247년∼1323년) 문하에서 수학하며 당시 최고 서체로 추앙받던 조맹부의 송설체를 터득하여 13세에 명필이 되었다. 2년 후 이 소식을 들은 원나라의 무종(武宗)이 이암에게 불교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써서 바치라고 명하자 이암은 10첩을 써서 보냈다. 무종이 ‘천하일필(天下一筆)’이라 칭찬하고 1첩을 돌려주었다. 현재 그 연화경의 반쪽이 후손에게 전해지고 있다. 근래에 일제 강점기 반출 문화재 환수 등 사회적 관심에 따라 그의 글씨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암은 서예가로서뿐만 아니라 시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그와 그의 집안은 불교와도 관련이 많아서 숙부는 어릴 때 출가하여 왕사(王師)를 지내고 국사로 추증된 각진국사(覺眞國師) 복구(復丘)이며,[1][2] 막내동생도 출가하여 장성의 백암사(白巖寺)에 머물렀던 운암(雲菴) ()징([]澄) 청수(淸叟)이다.[3][4][5][6] 백암사(白巖寺)는 정토사(淨土寺)라고도 했으며 오늘날의 백양사(白羊寺)인데, 행촌과 그의 숙부 각진국사가 발원하여 중창한 원찰(願刹)이었다고 하며, 그의 동생 청수(淸叟)에 이어 조선 초까지도 손자대의 중호(中皓), 외증손 송은 몽(松隱 蒙) 등 그의 자손 중에 출가한 사람들이 절을 맡았다고 한다.[7][8] 그는 또한 식영암(息影庵)[9] 노승과도 친하여[10][11] 그가 주석하던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의 경내에 해운당(海雲堂)을 짓고 머물며 왕래하기도 했다.[12][13][14] 나옹 혜근(懶翁 惠勤, 1320~1376)과도 친분이 있었던 것 같다.[15][16] 이곡(李穀, 1298~1351)이 "향 피우고 불경을 베끼는(焚香寫佛經)" 그의 생활이 부럽다고 한 것으로 보아[17] 그는 불교를 독실하게 믿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가 1363~1364년간에 사경(寫經)한 화엄경이 일본에 남아 있다.[18] 이는 그가 《환단고기》 중의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지었다는 시기인 1363년에[19] 실제로는 화엄경을 사경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의 행적은 학계에서 위서로 판정난 후손 이유립이 펴낸 환단고기[20] 때문에 근래에 많이 오염되어 전한다. 정확한 행적은 목은 이색이 지은 묘지명이나[12][21]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22][23] 또는 행촌선생실기(杏村先生實紀)[24]에 실린 연보(年譜) 등 1970년 이전 문헌을 참조하는 것이 좋다.
특히 단군과 관련된 사안이나, 강화도 관련 행적은 대부분 환단고기 간행 이후 부가된 것으로 근거가 없으며 믿기 어렵다. 강화도에서는 선원사 경내에 해운당을 짓고, 식영암 노승과 교유했다는 기록만 그의 묘지명에 나올 뿐이다. 은퇴후 강화도 홍행촌(紅杏村)에 살아서 호를 행촌(杏村)이라 했다는 말도 이전에 없던 것으로, 동생들의 호가 도촌(桃村),[25] 매촌(梅村)[6]인 것을 감안하면 사실로 보기 어렵다. 봄에 꽃피는 유실수 살구(杏), 복숭아(桃), 매실(梅)을 번갈아 채택해 형제들의 호를 지은 것이다. 더구나 그가 홍행촌에 살며 행촌이라 호를 지었다고 주장하는 연대는 1363년인데, 1351년에 졸한 이곡(李穀)의 문집에도 그를 행촌(杏村)이라 지칭하고 있다.[17] 그가 머물렀다는 마을 이름 홍행촌(紅杏村)은 그의 호에 착안하여 만들어낸 가공의 지명으로 보인다. 이색의 묘지명에 의하면 해운당(海雲堂)은 홍행촌(紅杏村)이란 마을이 아니라 선원사(禪源寺)의 경내에 있었다.[12]
생애
[원본 편집]- 10세 강화도 마리산 보제사(普濟寺)에 들어가 학동초당(鶴洞草堂)을 짓고 3년 동안 유가 경전과 우리 고대사 기록을 탐독함
- 17세 충선왕 즉위년(1313년)에 과거(문과) 급제
- 18세 경전을 비롯한 여러 문헌을 관리하는 비서성(秘書省)의 교감(校勘)에 임명
- 36세 강화도 귀양
- 39세 유배에서 방면. 천보산 태소암에서 1년간 거하면서 《태백진훈(太白眞訓)》과 《단군세기(檀君世紀)》[19] 지음
- 44세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임명
- 56세 철원군에 봉해짐. 서연(書筵)에서 경서와 예법에 관한 시독(侍讀)을 맡음
- 57세 공민왕 2년(1353년)에 청평산에 입산
- 62세 공민왕 7년(1358년) 수문하시중(중守門下侍中)에 임명
- 63세 공민왕 8년(1359년) 서북면(西北面)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되어 4만 명의 홍건적을 물리침
- 67세 공민왕 12년(1363년) 윤03월 개경까지 침입한 홍건적이 평정되자 호종(扈從) 1등 공신에 녹선(錄選)되어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짐.[26][27]
- 67세 관직에서 물러나 강화도 홍행촌(紅杏村)에 해운당(海雲堂)이라는 집을 지음
- 68세 병으로 사망 (1364년)
가족관계
[원본 편집]- 증조모 : 남포 백씨(藍浦 白氏) 예부낭중(禮部郞中) 증(贈) 우복야(右僕射) 백경선(白景瑄)의 딸
- 조부의 외숙: 백문절(白文節, ? ~ 1282년)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 조부 : 이존비(李尊庇, 1233년 ∼ 1287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 부 : 이우(李瑀)
- 부인 : 홍승서(洪承緖)의 딸
- 장녀 : 김광우(金光雨)
- 장남 : 이인(李寅)
- 차남 : 이숭(李崇)
- 3남 : 이음(李蔭)
- 차녀 : 조신(趙愼)
- 외손 : 조안평(趙安平) - 후손에 풍양조씨 세도가문이 있음.
- 4남 : 이강(李岡, 1333년 ~ 1368년) 밀직부사[29]
- 손자 : 이원(李原, 1368년 ~ 1429년)
- 손녀 : 권근(權近)[30]
- 동생 : 이교(李嶠, ? ~ 1361년), 호 도촌(桃村)
- 동생 : 이군보(李君保), 호 매촌(梅村)[6] - 출가 : 운암(雲菴) ()징([]澄) 청수(淸叟)[3][4][5]
- 누이 : 하즙(河楫, 1303~1380)
- 누이 : 이사정((李思正)[31]
- 아들 : 이경(李坰)
- 손자 : 이숙번(李叔蕃, 1373~1440)
- 아들 : 이경(李坰)
- 부인 : 홍승서(洪承緖)의 딸
- 숙부 : 각진국사(覺眞國師) 복구(復丘, 1270~1355)[1][2]
- 부 : 이우(李瑀)
저서 및 유물
[원본 편집]- 원(元)의 농서(農書)인 《농상집요(農桑輯要)》를 고려에 소개[32][33]
- 문수사시장경비 (文殊寺施藏經碑) - 31세(1327년) 때 이제현이 지은 비문의 글씨를 씀. 춘천 청평사에 있던 비석은 없어지고 탁본만 전함.
- 《태백진훈(太白眞訓)》 : 후세의 위작 혐의가 짙음.
- 《단군세기(檀君世紀)》[19] : 후세의 위작 혐의가 짙음.
같이 보기
[원본 편집]참고 문헌 및 링크
[원본 편집]- 이색,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 문정공(李文貞公)의 묘지명 병서(幷序) 목은집 > 목은문고 제17권 > 비명(碑銘)
- 묘지명 실물의 이미지 : 高麗 朝鮮墓誌 新資料 : 韓國史料叢書 50 果川 : 國史編纂委員會, 2006
- 고려사 권111 열전(列傳) 권제24 제신(諸臣) : 이암(李嵒)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이색, 원암(元巖)의 연회(宴會)에서 창화(唱和)한 시의 서문 목은고 > 牧隱文藁卷之九 > 序 : 1362년 8월의 일임.[34]
- 백문보, 삼가 공북루 응제시에 차운하다 병서○공북루는 청주 고을 북쪽 3리 지점에 있다. 〔伏次拱北樓應製詩韻 幷序○樓在淸州州北三里〕 담암일집(淡庵逸集) 제1권 / 시(詩) : 1362년 8월의 일임.[35]
- 이륙(李陸) 編,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 성종(成宗) 7年(1476) 간행
- 李嵒(高麗, 1297 - 1364)等撰,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 純祖 4(1804)
- 행촌선생실기(杏村先生實紀) 이암(李嵒) 著; 이상의(李象義) 編, 군자정(君子亭, 1960)
- <행촌 회보>, “행촌 이암 연보”, 2001.5.
- 이익주, ‘행촌 이암의 생애와 정치활동’, 『행촌 이암의 생애와 사상』 1집
- <경향신문>, “서예가열전 ⑤, 고려후기 이암”, 2006.8.18.
각주
[원본 편집]- 1 2 3 이달충, 고려 왕사 대조계종사 일공정령 뇌음변해 홍진광제 도대 선사 각엄 존자 증시 각진 국사 비명 병서 〔高麗王師大曹溪宗師一邛正令雷音辯海弘眞廣濟都大禪師覺儼尊者贈諡覺眞國師碑銘 幷序〕, 제정집(霽亭集) 제3권 / 묘지명(墓誌銘)
- 1 2 3 이존비(李尊庇), 寄曹溪晦堂和尙 時長男宿衛闕庭。次男新投晦堂剃度。 동문선(東文選) 卷之十四 > 七言律詩 : 둘째 아들을 원오국사(圓悟國師) 천영(天英, 1215~1286)에게 데려가 출가시킬 때 지은 시
- 1 2 정도전, 白巖山淨土寺橋樓記,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全羅南道之部 - 조선총독부(1911) : 1377년 작
- 1 2 이색, 목은고 > 牧隱文藁卷之三 > 記 > 長城縣白巖寺雙溪樓記 한국고전번역원 : 1381년 작
- 1 2 정몽주, 장성 백암사 쌍계에 시를 지어 부치다〔長城白嵒寺雙溪寄題〕 포은집 제2권 / 시(詩)
- 1 2 3 속명 이군보(李君保), 호 매촌(梅村) : 固城李氏世譜, (고성이씨세보소 編, 1753) p.92
- ↑ 선덕 칠년 임자 사월 초팔일 의정부관자 전서(宣德七年壬子四月初八日 議政府關字傳書) : 1432년 『조선사찰사료』 ○全羅南道之部
- ↑ 서거정, 백암사(白庵寺)로 돌아가는 도암 상인(道庵上人)을 보내다 5수. 병서(幷序) 사가집 > 사가시집 제45권 / 시류(詩類) : 서거정은 권근의 외손자로 행촌의 외현손이다.
- ↑ 식영암(息影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이암(李嵒), 기식영암선로(寄息影菴禪老) 동문선 제21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 ↑ 민사평, 어제 행촌과 선방에서 어울렸는데 그가 요사이 지은 게송 한 수를 보여 주자 식영암 대화상이 여기에 화답했다. 이 노인이 오래도록 시를 짓지 않다가 이 작품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신조를 어긴 것이니 어찌 매우 즐거워한 것이 아니랴. 내가 요사이 다소 이 법에 마음을 두고 있지만 공부해야 할 곳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화운하여 화상께 바치노니 지도해 주시기 바란다〔昨諧杏村禪室蒙示近所作伽它一首息影菴大和尙和之矣此老久不作詩見此不覺破戒豈深肯之邪予近稍留心此法但未知用功夫處玆用賡韻錄呈左右幸乞指南〕 급암시집 제4권 / 시(詩)
- 1 2 3 이색,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 문정공(李文貞公)의 묘지명 병서(幷序) 목은집 > 목은문고 제17권 > 비명(碑銘)
- ↑ 이색, 마니산 기행(摩尼山紀行) / 重過禪原寺。途中望海雲堂 목은고 > 牧隱詩藁卷之四 > 詩
- ↑ 徐居正, 《東人詩話》 卷下:“杏村李文貞公嵓[嵒] 再入台鼎 晩年乞骸 與息影庵禪老 爲方外友 扁舟往還 至輒忘返 嘗有詩曰 浮世功[虛]名是政丞 小窓閑味即山僧 箇中亦有風流處 一朶梅花照佛燈.”
- ↑ 백문보, 《나옹어록》의 서문〔懶翁語錄序〕 담암일집(淡庵逸集) 제2권 / 서(序);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 普濟尊者語錄序
- ↑ 示杏村李侍中嵒 : 나옹화상가송(懶翁和尙歌頌)
- 1 2 이곡, 이행촌(李杏村)에게 부치다 가정집(稼亭集) 제18권 / 율시(律詩)
- ↑ 백지묵자 대방광불화엄경 권68 사경 발문 (白紙墨字 大方廣佛華嚴經 卷六十八 寫經 跋文) 고려시대 금석문·문자자료 > 사경 발원문(寫經 發願文)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1 2 3 桓檀古記/檀君世紀 : 維基 文庫 : 서문의 "上之十二年癸卯"는 공민왕 12년(1363년)이다.
- ↑ 桓檀古記 : 維基 文庫
- ↑ 묘지명 실물의 이미지 : 高麗 朝鮮墓誌 新資料 果川 : 國史編纂委員會, 2006
- ↑ 李陸(朝鮮) 編,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 成宗7年(1476) 간행
- ↑ 李嵒(高麗, 1297 - 1364)等撰,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 純祖 4(1804)
- ↑ 행촌선생실기(杏村先生實紀) 李嵒 著; 李象義 編, 君子亭, 1960
- ↑ 민사평, 도촌 학사가 찾아왔는데 취중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있어 이암의 아우 이교이다. 〔桃村學士見訪醉中其喜有不言之處 李嵓弟李嶠〕 급암시집 제2권 / 율시(律詩)
- ↑ 고려사 > 열전 권제24 > 제신(諸臣) > 이암 > 이암이 충혜왕의 폐행이라는 이유로 유배되다
- ↑ 피난에 호종했던 공신들을 녹훈하다 : 고려사 세가 권제40 공민왕(恭愍王) 12년(1363년) 윤03월 15일, 1363년 04월 29일 (양)
- ↑ 김성환, 고려 말 조선 초죽정(竹亭) 최유경(崔有慶)의 생애와 활동 포은학연구 2014 vol.13, pp.223 - 256
- ↑ 이색, 문경(文敬) 이공(李公)의 묘지명 병서(幷序) 목은고 > 牧隱文藁卷之十八 > 墓碑銘
- ↑ 양촌집(陽村集) 해제의 가계도 한국고전번역원
- ↑ 固城李氏世譜, (고성이씨세보소 編, 1753) p.96
- ↑ 이색, 《농상집요(農桑輯要)》 후서(後序) 목은집 > 목은문고 제9권 > 서(序)
- ↑ 원조정본농상집요(元朝正本農桑輯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고려사 > 세가 권제40 > 공민왕(恭愍王) 11년 > 8월 > 왕이 머문 원암역에 수재가 나다
- ↑ 고려사 > 세가 권제40 > 공민왕(恭愍王) 11년 > 8월 > 원에 하정사와 천추절 하례사신을 보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