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우 (16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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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우(李商雨, 1648년 7월 26일 ~ 1742년 8월 22일)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자(字)는 성택(聖澤) 또는 설지(說之), 택보(澤甫), 본관은 우계(羽溪)이다. 경기도 포천 출신. 이희헌의 증손자였으며 할머니는 충정공 이홍주의 서녀였다.

1681년(숙종 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에서 재임하다 최종 관직은 통훈대부 광주군 경안찰방에 이르렀으며, 만년에 노인직으로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에 올랐다. 송곡 이서우와는 8촌간이고, 태화 이현상의 고조부가 된다.

생애[편집]

8대조 이경연이 강원도 강릉에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낙생동)으로 이주하여 광주 언주에서 거주했지만, 포천 출신 이영구(李英久)의 양자가 되어 포천군 일동면으로 이주하였다. 양아버지 이영구의 가계는 조부 이규(李規), 증조부는 이여추(李汝樞)이다. 그러나 양자로 갔던 이영구와 이여추 이전의 가계는 실전되었다. 출생년대는 불분명하여 1648년생 설 외에도 1651년생 설, 1652년생 설 등이 있다.

그의 본생가는 내의원 의관 이희헌의 4대손인데, 생가 할아버지 이원빈은 통덕랑으로 사마시에 합격한 뒤 동몽교관을 역임했으며, 생가 할머니는 정종의 서자 선성군 무생의 5대손 이홍주의 서녀였다. 생부 이경태는 사후 통훈대부 장악원정에 증직되었다.

1677년(숙종 3) 12월 15일 숙종이 친히 전강을 실시할 때 유학으로서 전강에 8등하여 종이 4권, 필 4병, 먹 3개를 선물로 하사받았다. 송곡 이서우와는 8촌간으로 1680년 경신환국 당시에는 연좌되지 않았다.

통덕랑으로 재직 중 1681년(숙종 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찰방을 지냈다. 1682년 7월 2일 교서관정자, 9월 6일 교서관저작이 되었으며 1683년 1월 11일 문신 전강에 나오지 않은 허지(許墀) 등을 파직할때 팜께 파직되었다. 1684년(숙종 10) 6월 2일 서용의 명이 내려졌다. 7월 2일 다시 교서관저작에 임명되고 1684년 9월 14일 교서관박사가 되었다.

1684년(숙종 10) 의영고주부, 1685년 3월 10일 경연윤대관(輪對官)이 되었다. 1685년 7월 주부로 재직 중, 사직기우제에 참석하여 기우제 참석 관원들을 포상할 때 아마 1필을 선물로 받았다. 1686년(숙종 12년) 1월 10일 성균관전적이 되었다가 10월 5일 교서관검교로 임명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면직되었다가 곧 서용의 명령이 내려졌지만 한동안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1705년(숙종 31) 교서관검교로 복직되고 그해 3월 2일 승문원검교, 8월 30일의 경연윤대관에 선발되었다. 1709년(숙종 35) 4월 12일 제주도교수(濟州道敎授)에 임명되었지만 4월 18일 이조(吏曹)에 신병으로 부임하기 어렵다는 정장을 내 숙종이 윤허하여 해임되었다. 1709년 7월 27일 승문원검교로 복직되었다. 1711년(숙종 37) 6월 29일 경안찰방(慶安察訪)으로 부임하였다가 2년만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1728년(영조 5) 그의 서(庶) 9촌조카 이순관, 이익관, 서9촌조카사위 민관효 등이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여 사형당했지만 그는 고령이라는 이유로 연좌되지 않았다.

그뒤 노인직으로 수계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사후 손자 성석과 원석이 노인직으로 가선대부에 올랐으므로 증직으로 (贈)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가족 관계[편집]

관련 항목[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