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녕 (17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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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의 이재명 편
2번째 칸에 그의 이름이 있다.

이봉녕(李鳳寧, 1793년 9월 21일 - 1871년 5월 5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외교관, 시인이다. 본관은 우계(羽溪), 자(字)는 주경(周經), 호는 분서(汾西)이다. 이현상의 아들이다. 경기도 포천 출신.

1819년(순조 19)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교하여 유생이 되었다. 그 뒤 음서로 관직에 올라 금부도사, 사헌부감찰을 거쳐 1826년(순조 26)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절의 동지부사 신재식(申在植)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5년(헌종 1) 이문학관 등을 지내고, 부사맹이 되어 1836년(헌종 2) 동지사 신재식(申在植)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7년(헌종 3) 다시 승문원 이문학관이 되고, 1839년 평시서주부, 1840년 선공감주부, 1841년 서부령(西部令) 등을 거쳐 1842년(헌종 8) 하양현감, 1846년 영천군수를 지냈다. 이후 제감감찰 등을 거쳐 1858년(철종 9) 행돈녕부판관 등을 역임했다. 1860년 사옹원주부를 거쳐 고양군수로 나갔다가 1861년 지평현감 등을 지내고 다시 고양군수가 되었다.

생애[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1793년(정조 17년) 9월 21일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이현상(李顯相)이고, 어머니는 풍양조씨(豊壤趙氏)로 관찰사 조성보(趙聖輔)의 5대손 조기영(趙基永)의 딸이다.

이봉녕의 5대조 이상우(李商雨) 역시 포천에 살던 먼 일가인 이영구(李英久)의 양자로 입양갔지만[1], 다시 이봉녕의 생가 7대조 할머니이자 이상우의 생조모 전주이씨는 재상 이홍주(李弘胄)의 측실 소생 서녀로[2], 고령신씨 신순복(申福順) 소생이었다. 이상우의 양부 이영구와 양조부 이규(李規), 이여추(李汝樞)는 모두 후대에 세계가 실전되어 우계이씨 족보에서 누락되었다. 1910년 이후에 편찬된 족보에서 이상우는 생가 쪽 족보에 편입되었다. 생가쪽 8대조는 이희헌(李希憲)으로 선조~인조 때의 한의사이며, 임진왜란 직후 허준선조의 명으로 의서들을 저술, 편찬할 때 의서인출감교관으로 의서들의 영인과 발행을 감독했다.

어머니 풍양조씨는 조기영의 딸이며, 승지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한 조성보(趙聖輔)의 6대손이다. 그러나 어머니 풍양조씨의 5대조 조상만(趙尙萬)은, 그의 6대조 조성보의 서자였다.

형제으로는 형 이학령(李鶴寧), 이기령(李騏寧)과 동생 이인령(李麟寧)이 있었다. 이학령은 일찍 죽고, 둘째 형 이기령은 1861년(철종 12년) 76세의 고령에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고, 후에 노인직으로 자헌대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다. 동생 이인령승문원 이문학관과 군직, 돈녕부도정 등을 역임했다.

관료 생활[편집]

1819년(순조 19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성균관에 들어가 관학 유생(館學儒生)이 되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의 1833년 9월 9일조 기사에는 그가 생원으로 나타난다.[3] 이후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하였다. 1822년 어머니 풍양조씨와 아버지 이현상이 연이어 사망하여 3년상을 치렀다. 이후 음서로 관직에 올라 금부도사로 시작, 사헌부감찰을 거쳐 다시 금부도사가 되었다. 1826년(순조 26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冬至使)에 자제군관(子弟軍官)에 임명되어 부사 신재식(申在植)의 수행원으로 홍양후(洪良厚)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그는 왕희손(汪喜孫), 왕균(王筠), 이장욱(李璋煜) 등을 만나보았다.

1835년(헌종 1) 12월 23일 승문원의 천거로 이문학관이 되었다.[4] 1836년(헌종 2년) 1월 3일 부사맹(副司猛)이 되었다가[5], 그해 10월 16일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 신재식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6년청나라 연행길에는 청나라에서 만난 중국인 학자 황작자(黃爵滋), 예인원(倪印垣) 등이 조선 사절과 시문을 주고받았다. 이때 동지사 신재식과 이봉녕 외 5명이 황작자와 주고받은 시문은 《상간편(相看編)》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간행되었다. 특히 예인원은 그와 신재식을 따로 찾기도 했다.

1837년(헌종 4년) 3월 17일 귀국, 그 해에 다시 승문원 이문학관이 되고, 그해 6월 27일 6품으로 승진 영전한 안영(安泳)을 대신하여 제술관(製述官)에 임명되었다.[6] 1839년(헌종 5년) 12월 22일 평시서주부가 되고[7], 12월 23일 승문원도제조의 건의로 제술관으로 다녀온 것을 시상하여 승륙하였다.

1840년(헌종 7년) 5월 1일 선공감주부[8], 1841년 1월 8일 서부령(西部令)에 임명되었다. 1842년(헌종 8) 8월 29일 하양현감(河陽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9월 21일에 하직인사를 하고 출발하였으나, 병으로 10월 7일에 도임, 경상감영에서 계를 올렸다. 1846년 음력 윤5월 2일 영천군수(榮川郡守)로 임명되고, 1847년(헌종 13) 5월 18일 다시 영천군수에 유임되었다.

1850년(철종 1) 금부도사, 제감감찰(祭監監察)을 거쳐 그해 12월 26일 금부도사, 1851년의금부 형방색도사(刑房色都事)가 되었다. 1851년(철종 2) 1월 15일 어영청에서 지방 수령(守令)에 적합한 3인을 추천할 때 추천받았다.[9] 1852년 2월 7일 수령 별천(守令別薦) 3인을 추천할 때 한 사람으로 추천되었다.[10] 1852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의금부도사(行義禁府都事), 서부령(西部令), 1855년(철종 6년) 제감감찰을 거쳐 형조좌랑, 1857년(철종 8) 사헌부감찰, 1858년 1월 5일돈령부판관(行敦寧府判官)이 되었다.

생애 후반[편집]

1859년(철종 10) 9월 15일 사재감주부에 임명되었다가 뒤에 다시 돈녕부판관이 되고 1860년 음력 윤 3월 사옹원주부가 되었다. 그해 8월 고양군수(高陽郡守) 겸 양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楊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로 나갔고, 1861년(철종 12) 5월 지평현감(砥平縣監)을 지내고, 1864년(고종 1) 2월 고양군수양주진관 김직선(金直善)과 보직이 변동되어 다시 고양군수양주진관으로 부임하였다가 그해 6월 4일 사직하였다.

그가 주로 교류하던 인물로는 1834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절 때 수행한 신재식(申在植)과 김익동(金翊東), 우산(愚山) 또는 산가(山佳) 최헌수(崔憲秀), 현풍현감, 풍기군수 등을 지낸 소북계열인 남상교(南尙敎), 무관 출신으로 한문백화문에 두루 능통했던 권시형(權時亨) 등이 있다. 이 중 신재식은 그의 아버지 이현상과도 교류가 있었는데, 신재식은 1804년(순조 4)에 그의 아버지 이현상이 편찬한 역대언사의 발문을 써주기도 했다. 그밖에도 청나라에 두 번째로 다녀올 때 만난 중국인 황작자(黃爵滋), 예인원(倪印垣) 등과도 편지서신을 주고받으며 시문과 간찰, 성리학 등에 관련된 주제를 주고받았다. 황작자와 주고받은 서신 중 조선의 역사를 설명한 한 소책자에서 그는 조선의 역사는 단군에서 시작된다 하였고 성리학의 법통은 이황의 뒤를 이이가 정통을 계승하였다고 보았다.

저서로는 《분서집(汾西集)》과 미간행 유고 《분서고(汾西稿)》 등이 있다. 분서고는 자신이 부임한 부임지의 선생안, 명사들과의 교류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1871년(고종 8) 5월 5일에 한성에서 사망했다.

사후[편집]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내곡동 자좌(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북쪽 자좌(子坐)에 부인 광주이씨와 합장되었다.

1907년(광무 10) 7월 8일 손자 이휘선의 영귀로 정3품 통정대부 규장각부제학(贈正三品 通政大夫奎章閣副提學)에 추증되었다.

저서[편집]

  • 분서집(汾西集)
  • 분서고(汾西稿)

가족 관계[편집]

  • 할아버지 이한운(李漢雲, 1735년 6월 22일 ~ 1806년 6월 8일)
  • 할머니 밀양 박씨(1735년 6월 12일 ~ 1813년 11월 27일), 동지중추부사 박성희(朴聖希)의 딸
  • 아버지 : 이현상(李顯相, 1770년 6월 14일 - 1822년 7월 14일)
  • 어머니 풍양 조씨(1767년 4월 1일 ~ 1822년 6월 24일), 조기영(趙基永)의 딸
    • 형 이학령(李鶴寧)
    • 형 이기령(李麒寧 1786년 9월 6일 ~ 1876년 2월 13일)
    • 동생 이인령(李麟寧, 1800년 8월 28일 ~ 1883년 11월 5일), 다른 이름은 일녕(馹寧)
    • 누이 : 우계이씨
    • 매부 : 한석동(韓奭東, 청주한씨)
  • 부인 : 광주이씨(1791년 1월 4일 ~ 1860년 1월 14일), 장사랑 이세복의 딸, 외조부는 한양인 조선(趙鐥)
    • 아들 : 이재승(李在升, 1809년 10월 13일 ~ 1853년 4월 16일)
    • 며느리 : 연안이씨(1808년 10월 1일 ~ 1829년 4월 23일), 이정계(李鼎季)의 딸
    • 며느리 : 전주이씨(1810년 8월 23일 ~ 1879년 윤 3월 24일), 임영대군 예천부수 이언형(醴川副守 李彦亨) 8대손 이진방(李鎭邦)의 딸
      • 양 손자 : 이교선(李敎善)
    • 아들 : 이재응(李在應, 1812년 12월 10일 ~ 1878년 3월 28일)
    • 아들 : 이재긍(李在兢, 1818년 11월 2일 ~ 1876년 윤 5월 11일)
    • 며느리 : 전주이씨(? ~ 1850년 3월 16일), 효령대군강성정 이견손(江城正 李堅孫) 9대손 이용구(李龍九)의 딸, 외조부는 동래정씨 성균관전적 정완(鄭浣)
    • 며느리 : 진주류씨, 이재긍의 후처
    • 아들 : 이재성(李在星, 1823년 11월 9일 ~ 1867년 6월 9일)
    • 며느리 : 해주오씨(1819년 9월 7일 ~ 1879년 8월 24일), 진사 오언용(吳彦鏞)의 딸, 조부 좌랑 명철(命哲), 추탄(楸灘) 오윤겸의 후손, 외조부 무안박씨 박겸빈(朴謙彬)
      • 손자 : 이돈선(李敦善)
    • 아들 : 이재흥(李在興)
    • 아들 : 이재명(李在明, 1830년 11월 20일 ~ 1891년 5월 14일)
    • 며느리 : 동래정씨(1829년 12월 5일 ~ 1901년 10월 12일), 장사랑 정기홍(鄭基弘)의 딸, 정태화의 장남 정재대 7대손

관련 항목[편집]

외부 링크[편집]

관련 서적[편집]

  • 임영길,〈청(淸) 문인 황작자(黃爵滋)와 조선(朝鮮) 문인의 교유:선병서옥초집연기(仙屛書屋初集年記)를 중심으로〉, 한국한문학회, 《한국한문학연구 64권 (2016년 12월호)》(한국한문학회, 2016) pp.333-369
  •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세기 조선 지식인의 문화 지형도》 (한양대학교 출판부, 2006)

참고 자료[편집]

  • 승정원일기
  • 각사등록
  • 상간편(相看編), 申在植
  • 우촌시고(雨村詩稿)
  • 경상감영계록(慶尙監營啓錄)
  • 경상좌병영계록(慶尙左兵營啓錄)
  • 직재집(直齋集)

각주[편집]

  1. 문과방목에는 양아버지 이영구의 아들로, 거주지는 포천으로 나타난다.
  2. 국조방목, 이홍주 묘갈명편
  3. 승정원일기 2294책(탈초본 115책) 순조 33년 9월 9일 병자 17번째기사
  4. 승정원일기 2325책 (탈초본 116책) 1835년(헌종 1년, 도광 15년) 12월 23일 정축 14번째기사
  5. 승정원일기 2326책 (탈초본 116책) 1836년(헌종 2년, 도광 16년) 1월 3일 정해 18번째기사, 兵批의 관원현황
  6. 승정원일기 2343책 (탈초본 117책) 1837년(헌종 3년, 도광 17년) 6월 27일 계유 17번째기사
  7. 승정원일기 2374책 (탈초본 118책) 1839년(헌종 5년, 도광 19년) 12월 22일 갑신 17번째기사, 李翊會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8. 승정원일기 2379책 (탈초본 118책) 1840년(헌종 6년, 도광 20년) 5월 1일 경인 16번째기사, 吏批의 관원현황
  9. 어영청등록 철종 2년(1851, 신해) 1월 15일자
  10. 어영청등록 철종 3년(1852, 임자) 2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