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석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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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석(柳麟錫, 1842년 ~ 1915년)은 대한제국의 학자, 의병장이다.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庵)이다.

생애[편집]

헌종 8년(1842)에 강원도 춘성군 남면 가정리(柯亭里)에서 류중곤(柳重坤)과 고령 신씨(高靈 申氏)의 3남 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유생 시절[편집]

고종 13년(1876)에 강화도 조약 체결 때 문하의 유생을 이끌고 상소하여 반대하였다. 조선시대 후기 화서학파의 대유학자인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의 수재자이자 그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재당숙인 성재 류중교(省齋 柳重敎, 1821-1893)가 고종 25년(1888) 강학(講學)을 하며 제자를 양성하던 중 고종 30년(1893)에 작고하자, 향리(고향)인 춘성군 가정리(柯亭里)을 떠나 제천 장담(長潭: 충북 제원군 봉양면 공전리)으로 류중교의 유업을 잇기위해 이거하였다.

의병 활동[편집]

당시 화서 문하에는 금천(錦川) 임규직(任圭直), 단구(丹邱) 이인구(李寅龜), 괴원(槐園) 이준(李埈; 이항로의 장자),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 성재(省齋) 류중교(柳重敎) 등 걸출한 인물들이 운집해 있었다. 의암은 이때에 바로 제천을 거점으로 항일의병항전을 전개하였다.

고종 31년(1894)에 김홍집 내각이 구성되자 의병을 일으켜 충주음성ᆞ제천ᆞ단양 등지에서 활발한 항일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의병항전은 을미변복령(단발령)이 내려진 직후 이 '변고(變故)'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고종 32년(1895) 윤 5월 2일과 3일 양일간에 원근의 문인사우(門人士友) 수백명을 모아놓고 장담에서 대규모의 강습례(講習禮)와 향음례(鄕飮禮[1])를 거행한 것에서부터 유래한다.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이 행사는 이후 11월 거의(擧義) 직전까지 대개 10일의 간격을 두고 정기적으로 열렸다. 이는 곧 의병항전의 준비단계였으며 후일의 거의(擧義)에서도 여기에 참석한 인물들이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때 열린 향음례, 강습례에서 유인석은 당시와 같은 '만고소무지대변(萬古所無之大變)'에 정당하게 처신할 수 있는 다음의 세 가지 행동방안, 곧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하였다.

  1. 거의소청(擧義掃淸) :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는 안(案)
  2. 거지수구(去之守舊) : 국외로 망명해서 대의(大義)를 지키자는 안(案)
  3. 자정치명(自靖致命) : 의리(義理)를 간직한 채 치명(致命)하는 안(案)

이때 의민공이 적극적인 행동방안인 거의나 자정을 택하지 않고 거수(去守)를 결심한 이유는 당시 그가 양모(養母)인 덕수 이씨(德水 李氏)의 상중에 있어 처신에 일정한 제약이 가해졌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호좌의병진(湖左義兵陳))

의병장으로 취임한 의민공은 즉시 항일의병전투를 전개하였고, 친일개화파 관리로 이름높던 단양군수 권숙(權潚)과 청풍군수 서상기(徐相耆) 등 소위 토왜(土倭)들을 참수하고, 친일개화정책을 펼치던 관리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다음으로 관찰사가 있는 충주 관찰부를 공격하려 했는데, 충주는 관군이 400명, 일본군이 수백명, 지방군이 400명이나 집결해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매우 의미가 큰 지역이었다. 고종 33년(1896) 음력 2월 16일호좌의병진(湖左義兵陳)은 충주 관찰부를 공격하였는데 의외로 쉽게 점령되었다. 이는 승정원승지(承旨) 우기정(禹冀正)이 3천명을 지원하고, 이호승(李鎬承)이 5백명을 이끌고 의병진을 원조하여 군사수로는 관군ᆞ일본군측에 비해 우세하기도 하였기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총을 가진 의병은 4백 여명에 불과해, 신식병기로 무장한 관군ᆞ일본군에 비해 의병진이 전력면에서는 절대 열세였기때문에 의병진 모두 죽음을 각오한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충주성을 점령하였다. 이때에 친일파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삭죄ᆞ처단하는 한편,〈격고내외백관 (檄告內外百官)〉을 발표하여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도주한 관군ᆞ일본군은 성곽외부를 포위하고 공성작전을 펼쳤고, 보급로를 차단당하여 호좌의병진은 20 여일뒤인 음력 3월 4일에 제천으로 철군하였다고 한다.

망명 후의 활동[편집]

그 뒤 만주로 망명했으며, 대한 광무 11년(1907)에 헤이그 특사 사건·고종 강제퇴위 사건·대한제국 군대해산 조작사건 후, 전국의 의병·해산 군인들이 원주등에 모여 13도 창의군(倡義軍)을 조직하여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해 나갈 때, 의민공은 평안()도 순천군에서 김여석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2]

13도의군[편집]

융희 3년(1909)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13도의군 도총재(大韓十三道義軍都總裁)에 추대되었다. 융희 4년, (1910) 6월 연해주에서 국내외 의병을 단일 지휘계통으로 통합할 목적으로 하는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조직하였다. 대한제국의 국권피탈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였고 이상설 등과 두만강 연안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1915년펑톈성(奉天省)에서 병사했다.

사후[편집]

가족 관계[편집]

  • 부친 : 류중곤(柳重坤)
  • 모친 : 고령 신씨
    • 형제 자매 : 3남 2녀
    • 본인
    • 첫째부인 : 여흥 민씨(?~1867)
    • 둘째부인 : 경주 정씨
      • 아들 : 류해동(柳海東, 1891.11.12 ~ 1981.2.25)
      • 아들 : 류제함(柳濟咸, 1884.10.26 ~ 1964.5.13)
    • 재종형 : 류홍석(柳弘錫, 1841 ~ 1913)

저서[편집]

  • 《의암집(毅菴集)》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향음례, 경서(經書)를 중심으로 옛글을 강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유생들의 일종의 부정기적인 집회를 말한다. 강송(講訟)의 유무에 따라 강습례와 향음례가 구별되었던 듯하다. 장담(長潭)의 강습례 때에는 강장(講長), 빈장(賓長), 중빈(衆賓), 제생(諸生), 사례(司禮), 독홀(讀笏), 사강(司講), 사정(司正)의 순서로 강송이 진행되었다.
  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1권 : 의병항쟁사 , 1970년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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