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蔚州 大谷里 盤龜臺 岩刻畫)
대한민국 대한민국국보
종목 국보 제285호
(1995년 6월 23일 지정)
수량 1기
시대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 까지
소유 국유
위치
울주 대곡리반구대 암각화 (대한민국)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주소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반구대안길 285 (대곡리)
좌표 북위 35° 36′ 13.5″ 동경 129° 10′ 38.17″ / 북위 35.603750° 동경 129.1772694° / 35.603750; 129.1772694좌표: 북위 35° 36′ 13.5″ 동경 129° 10′ 38.17″ / 북위 35.603750° 동경 129.1772694° / 35.603750; 129.1772694
정보 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
암각화가 있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의 모습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蔚州 大谷里 盤龜臺 岩刻畫[1], 영어: Bangudae Petroglyphs)는 울산광역시 태화강 상류의 지류 하천인 대곡천의 절벽에 새겨진 그림이다.

그림이 새겨진 바위는 너비가 약 8m, 높이 약 5m로 주변 10여개의 바위에도 암각화가 확인 된다.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새겨진 것으로 추정한다. 반구대 암각화는 지금까지 지구상의 알려진 가장 오래된 포경유적이다.[2] 2010년 1월 울주 천전리 각석과 함께 '대곡천 암각화군'이란 이름으로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하지만 암각화가 사연댐의 완공된 1965년 이후인 1971년 12월에 발견되면서 문제가 되었다. 수위가 상승하여 1년 중 6~8개월 동안 잠기면서 훼손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문화재청과 울산시가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보존 방법을 놓고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발견[편집]

1971년 12월 25일 동국대학교 문명대 교수, 고려대학교 김정배 교수, 충북대학교 이융조 교수는 1년전 발견된 울주 천전리 각석을 재조사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으로 부터 천천리 각석에서 대곡천 하류로 좀더 내려간 곳의 절벽에 호랑이 그림을 새긴 것 보았다는 제보를 받은 것이다. 그렇게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가 발견되었다.[3][4]

그림[편집]

대곡천 계곡에 병풍처럼 늘어선 바위 중 위가 지붕처럼 튀어나온 바위그늘 아래 널따란 바위표면에 그려져 있다. 지붕 처럼 튀어나온 바위 아래 그린 이유는 비와 바람을 피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림이 새겨진 바위는 너비가 약 8m, 높이 약 5m이며, 주변 10여개의 바위에도 암각화가 확인 된다. 바위의 성질은 진흙이 퇴적되어 형성된 셰일로 그림이나 글씨를 새기기 좋은 무른 암질이다.[5][6]

바위에 새겨진 그림의 수는 조사방법이나 표현물의 인식 차이에 따라 다르다. 문화재청 자료에서 형상을 알아 볼 수 있는 것은 237점이다. 전문가들은 형상을 알아 볼 수 없는 것까지 포함해 약 300여점의 표현물이 그려져 있다고 본다. 종류로는 육지동물 97점, 해양동물 92점, 사람 17점, 배 6점, 그물·작살 등의 연장류 6점이 있다. 전체 237점 중 고래 그림이 62점으로 전체에서 26%로 제일 많으며, 해양동물 중에서도 75%나 차지한다.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개체는 36점인 사슴류와 22점인 호랑이이다.[5][6]

그림은 단단한 석기로 새겼으며, 새긴 방법은 2가지로 구분된다. 그림의 윤곽을 새긴 후 내부를 고르게 쪼거나 긁어낸 면새김 방법이 있고, 윤곽이나 동물의 특징적 요소를 선이나 점으로 새긴 선새김 방법이 있다. 면새김 방법은 신석기 시대의 방법이며, 선새김 방법은 청동기 시대의 방법으로 추정한다. 고래 중심의 해양동물 부분과 사슴, 호랑이 중심의 육지동물 부분은 고래나 육지동물의 종류와 생태, 사냥방법 등을 표현하였다. 이를 통해 집단의 사람들이 오랜 세월 세대를 거듭하며 이들의 종류와 사냥방법에 관한 지식을 새겨넣고 가르쳤던 것으로 추정한다.[5][6][7]

훼손[편집]

반구대 암각화는 1965년 완공한 울산지역 공업용수와 식수 공급을 위한 사연댐으로 인해 대곡천 수위가 상승하면서 1년 중 6~8개월 동안 잠기어 훼손되고 있다. 암각화가 댐 건설 이후에 발견되면서 문제가 된 것이다. 암각화에는 물이끼가 들러붙어 있을 때가 많았다. 조사에서 물에 잠기지 않은 반구대의 암석에 비해 물에 잠긴 부분은 10배 가량 빨리 풍화가 사실도 확인되었다.[8][9][4]

국보 지정 당시인 1995년에는 반구대 암각화에서 300여 개의 그림이 육안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2016년 최근 조사에서는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그림은 20~30점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9년 문화재청의 조사에서도 암각화의 풍화 단계가 6단계 중 5단계인 '흙 상태 진입 직전'인 것으로 들어났다.[8][9]

이런 상황에서 암각화의 문화재 지정도 뒤늦게 이루어졌다. 발견된 후 24년 동안 방치되다 시피 하다가, 지난 1995년에야 비로소 국보 285호로 지정된 것이다. 이는 암각화에 대한 가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문화재 보존에 대한 인식이 충분치 못하던 시기였기에 발생한 일이였다.[8][9][10]

보존 갈등[편집]

문화재청과 울산시는 다각적인 보존 노력을 하고 있으나 보존 방법을 놓고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울산시는 2009년과 2011년에 임시제방 설치안을 문화재청 소속 문화재위원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두 번 모두 공사로 인해 암각화 주변의 원형이 훼손되고, 굴착·폭발·진동 등으로 암각화의 훼손 가능성이 있기에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어렵게 된다는 이유로 부결하였다. 더불어 훼손의 주범인 사연댐의 수위를 낮출 것을 주문하였다.[11] 그러나 울산시는 식수 확보를 위해 수위를 놔두고 생태 제방을 쌓자는 주장을 고수한다.[8][4]

그러다 2013년 국무조정실 주도의 투명판 160개를 붙이는 가변형 임시 물막이 댐(키넥틱댐) 방식의 절충안에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울산시가 합의하게 된다. 그런데 문화재청의 3차례 모의 실험에서 모두 실패하고 만다. 수압을 견디지 못해 투명판 이음새 부근에서 물이 새는 것이 모의실험에서 밝혀진 것이다. 이로써 3년이 넘는 시간과 실험에 투입된 28억 원의 예산이 모두 낭비된채 2016년 7월 중단된다.[8]

2017년 울산시는 과거의 임시제방 축조안과 비슷한 생태제방 축조안을 문화재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암각화에서 30m 떨어진 지점에 357m, 높이 65m의 제방을 쌓아 물길이 암각화에 닿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2017년 5월 18일 축조안 심의는 일단 보류됐다. 현장조사를 한 뒤 재심의하기로 한 것이다.[11]

사진[편집]

국립경주박물관의 복제품 1  
국립경주박물관의 복제품 2  
국립경주박물관의 복제품 3  
국립경주박물관의 복제품 4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관보 제17413호 2010년 12월 27일. 291-318쪽. 304쪽. 문화재청고시제2010-133호(국가지정문화재<국보·보물/석조문화재> 지정명칭 변경). 문화재청장. 2016년 5월 10일 확인함.
  2. “자료실, 반구대암각화”. 《울산암각화박물관》. 2016년 5월 11일에 확인함. 
  3. 최영희 (1986년 6월 5일). “그터 최영희 교수의 한국사기행, 45 선사시대 신비 풀 거대한 암각화”. 《경향신문》. 
  4. 최우리 (2013년 8월 16일). “반구대 암각화의 슬픔”. 《한겨례》. 
  5. 정동찬 (2015년 2월 12일). “다시 읽는 반구대암각화, 3. 대곡천 바위에 그림으로 쓴 역사책”. 《경상일보》. 
  6. 《반구대 암각화가 품은 비밀, 1부 이 땅 최초의 화가들》. 문화유산채널. 
  7. 《반구대 암각화가 품은 비밀, 3부 고대인들은 왜 고래를 사랑했나?》. 문화유산채널. 
  8. 감일상 (2016년 7월 30일). “반구대 암각화의 암울한 미래”. 《KBS》. 
  9. 윤민용 (2010.07.07). “‘반구대 암각화’ 발견부터 논쟁까지”. 《경향신문》. 
  10. 임형두 (2015년 8월 17일). “반구대 암각화 국보 지정 20주년 맞아 축제”. 《연합뉴스》. 
  11. 도재기 (2017년 5월 18일). “반구대 암각화 ‘생태제방’ 일단 보류”. 《경향신문》. 

바깥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