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성 (건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울산성 전투를 그린 일본의 병풍화

왜성(倭城, 일본어: わじょう 와조 [ウェソン →웨손[*]]) 혹은 일본이 쌓은 성 일본왜성(일본어: 日本倭城)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일본군(日本軍)에 의해 한반도 남부 각지에 축조된 일본성곽을 말한다.

개요[편집]

왜성은 일본군이 남해안 일대 혹은 그 외 지역을 점거하고 그들의 근거지를 확보하거나 일본군내 상호 연락 등을 위해 축조한 일본성곽으로써, 그 성격으로 보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연결성(連結城)[1]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령에 의해 부산에서 서울까지, 나중에는 의주까지 히데요시 자신이 명나라로 들어갈 때의 거처(御座所)와 군수물자의 보급로 확보를 목적으로 쌓은 성곽이다. 이것은 일명 “쓰타이노시로”(つたいの城)라고도 하는데, 군대가 거의 하루에 행군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쌓았으며, 주로 조선의 읍성을 고쳐서 사용하거나 적당한 읍성이 없는 곳에서는 새로이 간단하게 축성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그 유구의 위치가 확실하지 않으며, 함경도길주안변 사이 등에도 쌓여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길목마다 이 연결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둘째는 통치성(統治城)[2]인데, 대한민국 남해안(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남도전남 순천) 지역에 쌓은 성곽이다. 임진왜란기인 1592년부터 2년간에 걸쳐 일본으로부터의 수송로 확보와 일본군이 내륙에서 후퇴한 뒤 전세를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쌓은 23여 개의 성곽정유재란 기에 신규로 축성한 10개 등 33 여개의 성이다. 멸실된 성을 포함해서 40여 개의 왜성이 발견되었다.[3] 곤양, 광양, 목창, 영춘 등 멸실된 왜성을 포함하면 그 수는 40여 개로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4]

개설[편집]

왜성은 남해안뿐만 아니라 내륙 지역에서도 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 그 유구(遺構)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실상은 알 수 없다. 남해안 일대에서는 이미 조사된 것만도 32개소에 달하였다.

내용 및 특징[편집]

왜성은 일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침략지인 조선에 축조된 매우 특수한 사례에 속하는 성곽이었다. 왜성은 외견상으로나 축조수법, 혹은 시설에서 당시 일본의 성곽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침략지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방어기능 강화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거의 모두 항(港)의 확보를 위하여 총구(惣構) 시설 같은 것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것 등 몇 가지 차이점이 있을 뿐이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왜성은 부산진성을 비롯하여 서생포왜성·가덕도왜성·창원 진해 웅천왜성 등 32개소에 달한다. 이 가운데 1592~1593년 사이에 축조된 것이 부산일본성·부산진성·임랑포왜성·기장 죽성리왜성·구포왜성·김해 죽도왜성·가덕도왜성·가덕도 왜성지성·서생포왜성 등 19개이고, 정유재란 당시인 1597년에 축조된 것이 견내량왜성·울산왜성·양산 증산리 왜성·마산일본성·고성왜성·사천선진리성·남해 선소왜성·순천왜성 등 8개이다. 그리고 마산일본성(창원시 마산합포구), 마사왜성(김해시 생림면), 울포산성, 탑포산성등 5개의 성은 그 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왜성은 거의 대부분 전시 상황에서 축조되었기 때문에 방어상 유리한 산성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입지상으로는 강과 바다에 인접한 독립된 구릉, 혹은 야산을 택하고 있다. 왜성은 일본군이 선박을 통한 침략이었기 때문에 보급이나 연락 관계는 배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배가 아니고서는 보급·연락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왜군 입장에서는 일본에 있는 후방기지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손쉽게 배를 이용할 수 있는 조건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아울러 일본의 산성이 대체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듯이 왜성 역시 주곽부(主郭部)를 중심으로 지형을 이용하여 다중(多重)의 곽(郭)과 곡륜(曲輪) 배치 등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출입구는 하나같이 출입구를 통과하는 적에게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성 아래에 호즉·해자가 시공된 흔적이 남아 있다.

구조[편집]

남해안 일대 왜성은 40여 개(통계 32여 개)로 약간의 차이점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일본의 성곽축조양식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이들 왜성은 16세기 일본에서 축조되기 시작하는 평성이 아니라 대부분 산성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정치적 지배 거점에 중점을 둔 평성보다는 전시 상황에 맞게 방어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진과 후퇴, 보급이 원활할 수 있는 강이나 바다에 인접한 곳에 축조하였다. 또, 성의 구조는 일본의 성에서 볼 수 있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구루와의 배치와 해자, 이중문으로 된 마스가타와 마스가타에 딸린 우마다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일본의 성의 모습은 당시 중국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과 일본인 화가가 울산성 전투를 그린 병풍화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이들 그림에서는 담에 난 총안인 사마를 통해 조명연합군에게 사격하는 일본병사와 겹겹으로 된 일본의 성곽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5]

구루와[편집]

일본의 산성이 대체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듯이 왜성 역시 마찬가지로 주곽부를 중심으로 지형을 이용하여 다중의 구루와의 배치 등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구루와의 배치는 지형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하고 있지만 구조적 원리를 간략화한다면 흔히 말하는 윤곽식(輪郭式)ㆍ제곽식(梯郭式)ㆍ와곽식(渦郭式)ㆍ연곽식(連郭式) 등으로 나눌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 변형인 경우가 많다.

고구치[편집]

일본의 성에서 출입구를 통상 고구치(虎口)라고 칭하는데, 왜성 또한 그 모양은 다양하지만 기능은 하나같이 출입구를 통과하는 적에게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한국의 경우는 옹성(甕城)이나 적대(敵臺)에 의해 주로 출입구인 성문이 보호되는 것과 비교가 된다. 그리고 구루와에 여러 모양의 각도(角度)를 주어 성벽으로 오르는 적을 원근(遠近)ㆍ좌우(左右) 등 다양한 위치에서 궁시 등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요코야가카리(일본어: 橫矢 횡시[*])이다. 이런 직선(直線)과 각(角)으로 이루어진 구루와형태는 일본 성곽의 독특한 점 가운데 하나이며, 한국의 경우 성벽이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일본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많지 않고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요코야가카리처럼 구루와에 각도를 주는 방식보다는 성곽 외각으로 사각모양의 치성(雉城)을 만드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석벽, 성루[편집]

일본의 경우 축성에 석벽방식을 도입한 것은 중세이후로 볼 때는 전국 시대 후반기이다. 물론 고대에는 조선식산성과 같은 석축성이 있지만 중세이후로는 거의 석벽이 사용되지 않았다. 석재확보나 기술적인 문제 등도 있겠지만 성곽의 항구성이나 방어력 증강의 필요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왜성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바이지만 일본성곽은 석축에 있어서 직선을 중시하는 경향이 현저하다. 따라서 구루와가 꺽이는 모서리 부분이 매끄럽게 처리되면서 전체적으로 상하석축선이 곡사선형태로 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자연석을 난적(亂積)하고 그 틈을 잔돌로 메우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또한 성루의 경우는 중세이래 산성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시설 가운데 하나이다. 구루와위에 시설하고 그위에 다시 목책이나 판벽을 설치하여 방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노보리이시가키[편집]

왜성에는 일본의 근세성곽에서 보이지 않는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라는 장대한 장벽도 설치되었다. 이것은 왜성만의 특징적인 구조로, 산성부의 본성과 산기슭부의 지성이나 부속시설을 하나로 연결하여 방어선을 확고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측된다. 서생포왜성이나 웅천왜성 등에서는 이 노보리이시가키가 잘 보존되어 있다.[6]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성에서도 간혹 보이는 축성방법으로 마쓰야마 성, 히코네 성, 스모토 성 등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왜란에 참전했다 귀국한 다이묘들의 성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중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등이 쌓은 성이 대표적이다.

해자[편집]

왜성은 일본의 성과 마찬가지로 성 아래에 해자가 시공되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중국의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에 나타난 전투장면을 보면 왜성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왜성을 공격하는 장면을 보면 담에 뚫린 사마(?間)으로 공성군을 사격하는 모습이 있고, 넘어에는 목책이 이중으로 세워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천수각이 보이고, 그외에 숙사(宿舍)가 그려져 있으며, 안쪽에는 군데 군데 방패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판벽(板璧)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해전(海戰)을 그린 것에서는 바닷가에 목책이 세워져 있고 곳곳에 판벽으로 가설하여 이곳에 몸을 은폐하고 공격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목책과 판벽을 세운 곳이 구(構)의 일부로 추정한다.

특징[편집]

왜성은 배를 접선하기 좋은 해안가와 강안에 위치하면서도, 여차하면 서로를 돕기 쉽게 서로를 조망하기 좋게 밀도있게 배치되었다. 또, 동래성 같은 경우는 기존의 조선성곽에 붙여서 왜성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타지에서 조달한 자재를 썼지만 전국시대의 오랜 전란에서 얻은 축성기술과 건축기술을 동원해 빠르게 올렸다. 이러한 왜성들은 적을 지연시키고 고립시키기 위한 특유의 구조 등으로 상당한 방어력을 보여주었고, 울산성 전투에서는 조-명 연합군의 대군을 막았다. 규모가 있는 왜성은 혼마루나 천수각 등도 있었으나 목건물은 현재는 모두 부서지고 없다.

상당한 방어력을 보여준 것 치고는 현재는 남아있는 게 별로 없다. 임진왜란 뒤에는 조선군이 얻어 돌을 쌓아 만든 석축을 기초해 조선식 읍성으로 고쳐 쓰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되었고, 일본군의 석축은 조선식에 비해 빠르게 올릴 수는 있지만 내구력 자체는 약해 시간이 지나면서 비교적 빨리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가택건축의 안정성과 유지력에서 분화된 다른나라의 축성술과 달리, 오로지 성을 쌓기 위해서만 방벽으로 발달한 일본식 축성술의 특징으로, 왜란 당시까진 석벽 틈새에 회반죽이나 흙을 집어넣지 않고 오로지 돌만으로 쌓아올리는 메쌓기(Dry stone/空積み,野面積み)가 주류였기 때문이다. 폭우가 내릴 시 따로 배수구를 개공할 필요없이 돌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며, 재해나 공세에 의해 무너져도 어차피 돌만으로 쌓은 벽이기에 흩어진 자재를 다시 쌓아올리면 되지만, 돌 틈새로 해충이나 쥐 등이 침범하기 쉽고, 식물들이 자라면서 이음새를 침범하거나 기반을 무너뜨리는 등 유지보수가 꾸준히 요구되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인스턴트 성벽이다.

오로지 전투만을 목적으로 하다보니 기본적으로 높은 지대를 끼고있는 산성 혹은 평산성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또한 물자의 보급을 쉽게 하기 위해 상당수 왜성들은 해안가나 강가 인근에 자리하고 있으며 평지부터 시작하여 정상부로 올라가는 구간을 여러 단계로 나누고 통행로도 미로와 같이 설계한 다음 그 구간마다 성책과 성문을 설치한 다층 방어구조를 채택하고 있어 성벽 방어선이 뚫리면 그대로 성의 함락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한국식 산성이나 읍성보다 훨씬 더 강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각 왜성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조선군과 명나라 군대에 의해 여러번의 포위전을 겪었지만 정작 20여개 왜성 중 직접적인 전투를 통해 함락당한 왜성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왜란이 끝난 이후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왜성은 전략적인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왜성이 버려진 상태로 남게되어 현존 왜성의 경우 보존상태가 좋은 경우가 드문 편이다. 그러나 일부 왜성의 경우 꽤 좋은 길목에 자리한 경우가 있으며 이 경우 일부 구조물을 보수하여 군사 주둔지역으로 전용하여 사용한 경우가 있으나 그 사례 자체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연구[편집]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이 축조한 성인 왜성(倭城)의 연구 결과를 정리했다.[7]

나 팀장은 1597년 왜군 1만6천 명이 40여 일간 만든 울산 왜성이 뛰어난 방어력을 갖춘 성이었다는 사실을 소개하면서 국내에 있는 왜성 30여 곳이 개발과 환경 변화로 훼손되고 있다고 지적했다.[7]

그는 "왜성은 400여 년 전 치열했던 동아시아 전쟁을 재구성하고 역사를 재현하는 데 있어 중요한 문화자산"이라고 강조했다.[7]

국립중앙박물관회가 공동 주관하고 KEB하나은행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는 이번 학술심포지엄은 22일까지 이어지는 '정유재란' 특별전과 연계해 기획됐다. 강화교섭과 정유재란 발발, 노량해전에 대한 이해의 방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순천성 전투 등에 관한 발표도 진행된다.[7]

국립진주박물관 관계자는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정유재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지길 기대한다"며 "전쟁의 실상은 물론 한국, 중국, 일본 민중의 삶과 생활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7]

정유재란 목적은 한반도 남부 정복…조선인 모조리 연행[7]

의의[편집]

왜성은 성곽 편년에 있어서 그 축성 연대가 확실하고 후대에 개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축성 당시 일본의 축성법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점에 의의가 있다. 이는 같은 시기 일본 국내에서 축조되었던 성곽이 후대에 계속 사용됨으로써 거듭 개·보수가 이루어지게 되고 그에 따라 성곽 축성 시기의 축성법을 명확히 가려내기 어렵다는 점과 비교해 볼 때 의미가 있다.

기타[편집]

  • 2019년에 <조선일본도설(朝鮮日本圖說)>이라는 왜성 현황 지도가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4]

주요 왜성 상세 목록[편집]

[9] PDF 링크 참조. 정부 근거 자료 제시 Untitled 역사문화센터의 자료.[10] 웹사이트 참조. 블로그, 매거진, 도서관 근거 자료 제시.[11]

임진왜란기 (1592 ~ 1598)[편집]

  • 1592년 4월 임진왜란 개전 직후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바로 보급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왜성을 축조하였다. 같은 해 11월 평양을 점령한 고니시군이 평양에 왜성을 축성하였고 우키다는 한성 남쪽인 남산에 왜성을 축성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월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쫓기기 시작한 일본군은 1593년 5월부터 지금의 경상남도 해안 일대에 20여곳의 왜성을 축조하였다.
왜성명 축성 시기 축성 수비 소재지 비고
눌차왜성[가덕도왜성](訥次倭城) 1592년 제6군
일문자삼성 가몬 모리 데루모토
(毛利 輝元)
6군 사령관
左三つ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小早川隆景)
6군 사령관
左三つ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小早川隆景)
제6군
일문자삼성 가몬(星紋の他図案:三つ星/渡辺星/九曜) 모리 히데카네(小早川秀包)
(毛利秀包)
다치바나노카미 다치바나 시게토라(무네시게)
(立花 宗茂)
부산광역시 강서구 눌차동 산84-7 눌차왜성 (2008년 발굴)[12]
가덕도 왜성지성[13](加德島倭城支城) 1593년 제6군
일문자삼성 가몬(星紋の他図案:三つ星/渡辺星/九曜) 모리 히데카네(小早川秀包)
(毛利秀包)
三つ撫子 다카하시 모토타네
(高橋 元種)
다치바나노카미 다치바나 무네토라(무네시게)
(立花 宗茂)
다치바나노카미 다카하시 무네마스(나오쓰구)
(立花 直次)
소 요시토시, 쓰쿠시 가몬 쓰쿠시 히로카도
(筑紫廣門)
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 산196 성북왜성
가덕도 성북왜성[14](加德島城北倭城) 1593년 6군 사령관
左三つ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小早川隆景)
左三つ巴 고바야카와 히데호우(히데아키)
(小早川秀包)
다찌바 토우코
(立花統虎)
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 산43, 산52, 산53
기장 죽성리왜성(機張 竹城里倭城) 1593년 3군 사령관
등나무 소용돌이 가몬 구로다 나가마사 부자 外
(黒田 長政)
2군 사령관
뱀 눈알 가토 기요마사
(加藤 清正)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산52-1번지 일원 죽성리왜성, 豆毛浦倭城 (2002년 발굴)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8호, 기장성-일본[15]
김해 죽도왜성(金海 竹島倭城) 1593년 제2군
나베시마 행엽 나베시마 나오시게
(鍋島 直茂)
나베시마 가쓰시게 부자
(鍋島勝茂)
제2군
나베시마 행엽 나베시마 나오시게
(鍋島 直茂)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 787번지 일원 가락성, 죽도성, 김해왜성(2004년 발굴)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7호[16]
구포왜성
(龜浦倭城, 일본어: カードカイ城 카도카이쇼[*][17])
1593년 6군 사령관
左三つ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小早川隆景)
제6군
소 요시토시, 쓰쿠시 가몬 쓰쿠시 히로카도
(筑紫廣門)
다치바나노카미 다치바나 무네시게
(立花 宗茂)
다치바나노카미 다카하시 무네마스(나오쓰구)
(立花 直次)
일문자삼성 가몬(星紋の他図案:三つ星/渡辺星/九曜) 모리 히데카네(小早川秀包)
(毛利秀包)
우군 사령관
일문자삼성 가몬 모리 히데모토
(毛利 秀元)
3군 사령관
등나무 소용돌이 가몬 구로다 나가마사
(黒田 長政)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1동 산93번지 감동포성, 의성 (2002, 2004년 발굴)
부산광역시 기념물 6호 카도카이성-일본
九法谷의 陳. 죽도왜성의 지성[18]
김해 농소왜성지[농소왜성][19][20](金海 農所倭城址) 1593년 제2군
나베시마 행엽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자
(鍋島 直茂)
경남 김해시 주촌면 천곡리 산86-5
김해시 주촌면 농소리 산22-5
신답지성 (2001년 발굴), 죽도왜성의 지성
2001년(경남문화재연구원)[21]
마사왜성[22](馬沙倭城) 1593년 제2군
나베시마 행엽 나베시마 나오시게
(鍋島 直茂)
경남 김해시 생림면 마사리 산 205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 산1 일대
土城, 죽도왜성의 지성
다대포성지[부산 다대포성][23][24][25][26](多大浦城址) 1593년 1군 사령관
立花家御定紋「祇園守」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 行長)
Mon (family crest) of the Sō clan of Japan. Called 丸に平四つ目結 in Japanese, and derived from the Taira clan mon. See also 소 요시토시
(宗 義智)
일본군
(日本軍)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로 529번길 11(다대동 일원)
동래왜성[27] 1593년 A Japanese family emblem (mon) named "Maru-no-uchi-ni-mitsuhikiryo". 깃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 外 1군 사령관
立花家御定紋「祇園守」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 行長)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산2|안락동 20 『大東地志』 城池 甑山城 倭人所築. (증산성을 왜인이 쌓았다.)
동삼동왜성[영도왜성][28](東三洞倭城) 1593년 제6군
일문자삼성 가몬 모리 데루모토
(毛利 輝元)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1동 210 동삼동왜성(東三洞倭城), 추목도성(椎木島城), 절영도 추목도단성
부산진성
(釜山鎭城, 일본어: 丸山城, まるやまじょう 마루야마조[*][29])
1593년 제6군
일문자삼성 가몬 모리 데루모토 부자 外
(毛利 輝元)
우군 사령관
일문자삼성 가몬 모리 히데모토
(毛利 秀元)
(제6군)
일문자삼성 가몬 모리 데루모토 부자
(毛利 輝元)
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99 (범일동) 소서성, 환산성, 부산왜성의 지성[30]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 1593년 2군 사령관
뱀 눈알 가토 기요마사
(加藤 清正)
3군 사령관
등나무 소용돌이 가몬 구로다 나가마사
(黒田 長政)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1 일원 烽火城(2012년 발굴)[31]
임랑포왜성[32]
(林浪浦倭城, 일본어: せいぐわん城 세이구완죠[*][33])
1593년 4군 사령관
の無背景画像。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外
(毛利 勝信)
제4군
の無背景画像。 시마즈 다다토요(島津忠豊)
(島津 豊久)
庵に木瓜 이토 스케타카
(伊東 祐兵)
三つ撫子 다카하시 모토타네
(高橋 元種)
三つ撫子 아키즈키 다네나가
(秋月 種長)
4군 사령관
の無背景画像。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毛利 勝信)
제4군
の無背景画像。 시마즈 다다토요(島津忠豊)
(島津 豊久)
庵に木瓜 이토 스케타카
(伊東 祐兵)
三つ撫子 다카하시 모토타네
(高橋 元種)
三つ撫子 아키즈키 다네나가
(秋月 種長)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산51 발굴조사 : 2001년(중앙문화재연구원) 세이관성-일본[34]
영등포왜성(永登浦倭城)[35] 1592년 제4군
원 안에 십자(丸に十の字)(の無背景画像。) 시마즈 요시히로 부자
(島津 義弘)
경남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산 6-17번지 唐島城, 영등왜성[36]
송진포왜성(松眞浦倭城)[37] 1593년 5군 사령관
벗풀 후쿠시마 마사노리
(福島 正則)
제5군
Family crest (mon) of the 도다 가쓰타카
(戶田勝隆)
「七つ片喰(酢漿草)」紋(染抜)(Chosokabe mon.svg) 조소카베 모토치카
(長曾我部元親)
경남 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리 산36-3번지 일대 시루성(甑城)[38]
거제 장문포 왜성(巨濟 長門浦 倭城)[39] 1594년 11월 5군 사령관
벗풀 후쿠시마 마사노리
(福島 正則)
제5군
丸に左万字(まるにひだりまんじ)は、日本の家紋「文字紋」の「万字紋」の一種である。丸の内に標準的な図案の「左万字」を描いたもので、蜂須賀氏が用いたことから「蜂須賀万字・蜂須賀卍(はちすかまんじ)」ともいう。 하치스카 이에마사
(蜂須賀 家政)
파인 수레바퀴(Japanese family crest "Ikoma-Guruma", upper half of "Genji-Guruma" wheel (kuruma). Used by Ikoma clan.) 이코마 지카마사
(生駒 親正)
Family crest (mon) of the 도다 가쓰타카
(戶田勝隆)
제5군
「七つ片喰(酢漿草)」紋(染抜 )(Chosokabe mon.svg) 조소카베 모토치카
(長曾我部元親)
파인 수레바퀴(Japanese family crest "Ikoma-Guruma", upper half of "Genji-Guruma" wheel (kuruma). Used by Ikoma clan.) 이코마 지카마사
(生駒 親正)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130-43번지 장목왜성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3호[40]
광리왜성[견내량왜성](廣里倭城)[41] 1593년 제1군
Mon (family crest) of the Sō clan of Japan. Called 丸に平四つ目結 in Japanese, and derived from the Taira clan mon. See also(Mon (family crest) of the Sō clan of Japan. Called 隅立て四つ目結 in Japanese, and derived from the Taira clan mon. See also) 소 요시토시
(宗 義智)
수군
겹쳐진 고리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 安治)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 경남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 왜성동왜성, 광리왜성
거제 지세포진성[지세포왜성][42][43][44](巨濟 知世浦鎭城) 1593년(1545년) 2군 사령관
뱀 눈알 가토 기요마사
(加藤 清正)
경남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 235-4번지
진해 자마산성[자마왜성][45](鎭海 子馬山城) 1593년 제1군
Mon (family crest) of the Sō clan of Japan. Called 丸に平四つ目結 in Japanese, and derived from the Taira clan mon. See also(Mon (family crest) of the Sō clan of Japan. Called 隅立て四つ目結 in Japanese, and derived from the Taira clan mon. See also) 소 요시토시
(宗 義智)
경남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 산15 웅천왜성의 지성 소산성, 동지성, 감포산성, 자마산성
진해 명동왜성(鎭海 明洞倭城) 1593년 제1군
Mon (family crest) of the Sō clan of Japan. Called 丸に平四つ目結 in Japanese, and derived from the Taira clan mon. See also(Mon (family crest) of the Sō clan of Japan. Called 隅立て四つ目結 in Japanese, and derived from the Taira clan mon. See also) 소 요시토시
(宗 義智)
별 세 개 마쓰라 시게노부
(松浦鎭信)
경남 창원시 진해구 명동 산1-1 웅천왜성의 지성, 소산성(小山城)
창원 진해 안골왜성[웅천 안골왜성](昌原 鎭海 安骨倭城) 1593년 수군
겹쳐진 고리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 安治)
下り藤(さがりふじ)は、日本の家紋「藤紋」の一種である。図は、加藤嘉明の加藤氏一族(初代伊予松山藩・水口藩藩主家)が使用した図案で、上り藤をそのまま上下反転した図案が伝えられている。この図のように葉・花・茎に境目を描かないものと描くものとがある。(の無背景画像。) 가토 요시아키
(加藤 嘉明)
수군 사령관
家紋。七曜紋。 구키 요시타카
(九鬼 嘉隆)
경남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산27번지 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5호
왜수군 제1기지 (2009년 발굴 동양문물연구원)
창원 진해 웅천왜성(昌原 鎭海 熊川倭城) 1593년 1군 사령관
立花家御定紋「祇園守」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제1군
Mon (family crest) of the Sō clan of Japan. Called 丸に平四つ目結 in Japanese, and derived from the Taira clan mon. See also(Mon (family crest) of the Sō clan of Japan. Called 隅立て四つ目結 in Japanese, and derived from the Taira clan mon. See also) 소 요시토시
(宗 義智)
경남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산211-1번지 남산왜성.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 일본 제2수군기지

정유재란기 (1597 ~ 1598)[편집]

  • 임진왜란 강화교섭이 결렬되면서 재침공해온 일본군은 기존에 축성하였던 왜성을 재차 점거하고 일본 수군은 웅천왜성을 점거하여 근거지로 삼았다. 이 당시 일본군은 점령지를 확실하게 확보함과 동시에 일본 본토와의 연결을 위해 기존 축성한 해안가 일대의 왜성을 보수하고 동편으로는 울산, 서쪽으로는 순천까지 전선이 확대되면서 이 일대에도 왜성이 새로 축성되었다.
왜성명 축성 시기 축성 수비 소재지 병력 비고
고성읍성[고성왜성](固城邑城) 1597년 A Japanese family emblem (mon) named "Maru-no-uchi-ni-mitsuhikiryo". 깃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 제2군
나베시마 행엽 나베시마 나오시게
(鍋島 直茂)
경남 고성군 고성읍 성내리,서외리,수남리일대 7,000명 수남리왜성,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9호[46]
광리왜성[견내량왜성](廣里倭城)[47] 1593년(1597년) 제1군
Mon (family crest) of the Sō clan of Japan. Called 丸に平四つ目結 in Japanese, and derived from the Taira clan mon. See also(Mon (family crest) of the Sō clan of Japan. Called 隅立て四つ目結 in Japanese, and derived from the Taira clan mon. See also) 소 요시토시
(宗 義智)
수군
겹쳐진 고리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 安治)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 경남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 왜성동왜성, 광리왜성
남해 선소왜성(南海 船所倭城) 1597년 수군
겹쳐진 고리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 安治)
제1군
Mon (family crest) of the Sō clan of Japan. Called 丸に平四つ目結 in Japanese, and derived from the Taira clan mon. See also(Mon (family crest) of the Sō clan of Japan. Called 隅立て四つ目結 in Japanese, and derived from the Taira clan mon. See also) 소 요시토시
(宗 義智)
제1군
Mon (family crest) of the Sō clan of Japan. Called 丸に平四つ目結 in Japanese, and derived from the Taira clan mon. See also(Mon (family crest) of the Sō clan of Japan. Called 隅立て四つ目結 in Japanese, and derived from the Taira clan mon. See also) 소 요시토시
(宗 義智)
경남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163-1 1,000명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2004, 『문화유적분포지도-남해군-』.[48]
부산진성
(釜山鎭城, 일본어: まるやまじょう 마루야마조[*][29])
1593년(1598년) 제6군
일문자삼성 가몬 모리 데루모토 부자 外
(毛利 輝元)
우군 사령관
일문자삼성 가몬 모리 히데모토
(毛利 秀元)
지휘관 봉행
Мон роду Асано 아사노 나가요시(淺野長吉)
(수축 및 증축)
제6군
일문자삼성 가몬 모리 데루모토 부자
(毛利 輝元)
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99 (범일동) 소서성, 환산성, 부산왜성의 지성[49]
부산일본성(釜山日本城) 1598년 제6군
일문자삼성 가몬 모리 데루모토
(毛利 輝元)
----
立花家御定紋「祇園守」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左三つ巴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小早川秀包)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增補文獻備考』21) 釜山浦城 甑山城 備局謄錄 ᷎有倭人.
(부산포성, 증산성은 비국등록에는 모두 왜인이 있다고 기록하였다.)[50]
마산일본성(馬山日本城) 1597년 제2군
나베시마 행엽 나베시마 나오시게
(鍋島 直茂)
나베시마 가쓰시게 부자
(鍋島勝茂)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12,000명 창원왜성, 용마성
『大東地志』 城池 江馬山城 倭人所築.
(강마산성을 왜인이 쌓았다.)
『增補文獻備考』 舊江馬山城 備局謄錄 有倭城.
(구 강마산성(용마산성, 또는 마산왜성)은 비국등록에 왜성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사천선진리성(泗川船津里城) 1597년 4군 사령관
の無背景画像。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毛利 勝信)
제4군 (좌군)
원 안에 십자(丸に十の字)(の無背景画像。) 시마즈 요시히로
(島津 義弘)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770번지 외 10,000명 선진리왜성(2005년 발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51]
순천왜성(順天倭城) 1597년 1군 사령관 (좌군)
立花家御定紋「祇園守」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 行長)
총대장 겸 7군 사령관
(좌군 사령관)

a Japanese family crest named "Ji-monji" for Ukita clan 兒文字紋。宇喜多氏の家紋。(剣片喰(けんかたばみ)は、日本の家紋「片喰紋」の一種である。(詳細は、下記PNGファイルの概要を参照のこと。)) 우키타 히데이에
(宇喜多 秀家)
수군
담쟁이 잎(の無背景画像。) 도도 다카토라
(騰堂 高虎)
1군 사령관 (좌군)
立花家御定紋「祇園守」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 行長)
수군
담쟁이 잎(の無背景画像。) 도도 다카토라
(騰堂 高虎)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산1번지 외 13,700명 왜교성, 예교성
(2001, 2002, 2004년 발굴),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171호
(1999년 2월 26일 지정)[52]
양산 증산리 왜성(勿禁 甑山里 倭城) 1597년 3군 사령관 (우군)
등나무 소용돌이 가몬 구로다 나가마사
(黒田 長政)
----
대나무와 참새 가몬 다테 마사무네
(伊達 政宗)
3군 사령관 (우군)
등나무 소용돌이 가몬 구로다 나가마사
(黒田 長政)
경남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산38-1번지 증산리왜성(甑山里倭城)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6호[53]
울산왜성(蔚山倭城) 1597년 2군 사령관 (우군)
뱀 눈알 가토 기요마사
(加藤 清正)
제8군 (지휘부 봉행)
Мон роду Асано 浅野家家紋 丸に違い鷹の羽 아사노 요시나가
(淺野 幸長)
2군 사령관 (우군)
뱀 눈알 가토 기요마사
(加藤 清正)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공원3길 54, 일원 (학성동) 10,000명 학성, 도산성 (1985년 발굴)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1997년 10월 30일 지정)[54]

축성과 수비 지휘관[편집]

역대 이름 사진 취임 사망 이력
지휘부 (봉행) Мон роду Асано 아사노 나가마사
(浅野 長政)
Nagamasa Asano.jpg 1547년 1611년 5월 29일 종오위하, 단조쇼히쓰(弾正少弼)
제1대 (1군 사령관)
(좌군)
立花家御定紋「祇園守」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 行長)
Daimyo Konishi Yukinaga Ukiyo-e.jpg 1555년 1600년 음력 10월 1일 센고쿠 무장, 장인, 기리시탄, 원수, 세레머니
제1군 "1대" 丸に平四つ目結 소 요시토시
(宗 義智)
Sō Yoshitoshi.jpg 1568년 1615년 1월 31일 센고쿠 무장, 다이묘, 원수
제1군 "2대" 별 세 개 마쓰라 시게노부
(松浦鎭信)
Matsura Shigenobu(16th).jpg 1549년 1614년 7월 3일 다이묘, 종사위하
제2대 (2군 사령관)
(우군)
뱀 눈알 가토 기요마사
(加藤 清正)
Kato Kiyomasa.jpg 1562년 7월 25일 1611년 8월 2일 센고쿠 무장, 다이묘, 원수
제2군 나베시마 행엽 나베시마 나오시게
(鍋島 直茂)
Nabeshima Naoshige.jpg 1538년 4월 12일 1618년 7월 24일 센고쿠 무장, 일본 장수, 원수
제3대 (3군 사령관)
(우군)
등나무 소용돌이 가몬 구로다 나가마사
(黒田 長政)
Kuroda Nagamasa.jpg 1568년 12월 21일 1623년 8월 4일 센고쿠 무장, 다이묘, 원수
제4대 (4군 사령관) の無背景画像。 모리 요시나리
(毛利 勝信)
생년 미상 1611년 센고쿠 무장, 다이묘, 원수
제4군 "1대" (좌군) 원 안에 십자(丸に十の字) 시마즈 요시히로
(島津 義弘)
Shimazu Yoshihiro.jpg 1535년 음력 7월 23일 1619년 음력 7월 21일 센고쿠 무장, 슈고 다이묘, 일본군 소속장, 원수
제4군 "2대" 三つ撫子 다카하시 모토타네
(高橋 元種)
1571년 1614년 11월 10일 센고쿠 무장, 센고쿠 다이묘
제4군 "3대" 三つ撫子 아키즈키 다네나가
(秋月 種長)
1500년대 중반 1600년대 초반 무장, 다이묘
제4군 "4대" 암자 안에 있는 모과 이토 스케타카
(伊東 祐兵)
Ito Suketaka.jpg 1559년 2월 22일 1600년 11월 16일 센고쿠 무장, 다이묘
제4군 "5대" の無背景画像。 시마즈 도요히사
(島津 豊久)
1570년 1600년 10월 21일 센고쿠 무장, 다이묘, 관위부 지주, 나카쓰카사노타이후(中務大輔)
제5대 (5군 사령관) 벗풀 후쿠시마 마사노리
(福島 正則)
Masanori Fukushima.JPG 1561년 1624년 8월 26일(음력 7월 13일) 다이묘, 일본 장수, 원수
제5군 "1대" Family crest (mon) of the 도다 가쓰타카
(戸田勝隆)
생년 미상 1594년 12월 4일 센고쿠 무장, 다이묘
제5군 "2대" 일곱 닢의 괭이밥 조소카베 모토치카
(長宗我部 元親)
Tyousokabe Mototika.jpg 1539년 1599년 5월 19일 센고쿠 다이묘
제5군 "3대" 丸に左万字(まるにひだりまんじ)は、日本の家紋「文字紋」の「万字紋」の一種である。丸の内に標準的な図案の「左万字」を描いたもので、蜂須賀氏が用いたことから「蜂須賀万字・蜂須賀卍(はちすかまんじ)」ともいう 하치스카 이에마사
(蜂須賀 家政)
Hachisuka Iemasa.jpg 1558년 1639년 2월 2일 다이묘
제5군 "4대"
(지휘부 중로)
파인 수레바퀴 이코마 지카마사
(生駒 親正)
Ikoma Chikamasa.jpg 1555년 1600년 음력 10월 1일 센고쿠 무장, 다이묘, 지휘부급 중로
제6대 (6군 사령관)
(총대장 - 총사령관)
左三つ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小早川隆景)
Kobayakawa Takakage (Beisanji Mihara).jpg 1533년 1597년 7월 26일 총대장, 센고쿠 무장, 다이묘, 원수
제6군 "1대" 일문자삼성 가몬 모리 히데카네
(毛利秀包)
Mouri Hidekane.jpg 1567년 1601년 4월 24일 센고쿠 무장, 다이묘, 원수
제6군 "2대" 다치바나노카미 다치바나 무네시게
(立花 宗茂)
立花宗茂畫像.jpg 1567년 9월 20일 1643년 1월 15일 센고쿠 무장, 다이묘 추증, 종삼위, 사콘노쇼겐, 시종, 히다노카미, 원수
제6군 "3대" 다치바나노카미 다치바나 나오쓰구
(立花 直次)
1572년 1월 4일 1617년 8월 20일 센고쿠 무장, 다이묘, 원수
제6군 "4대" 소 요시토시, 쓰쿠시 가몬 쓰쿠시 히로카도
(筑紫 広門)
1556년 1623년 5월 22일 센고쿠 무장, 다이묘
제6군 "5대" 일문자삼성 가몬 모리 데루모토
(毛利 輝元)
Terumoto Mouri.jpg 1553년 2월 4일 1625년 6월 2일 센고쿠 무장, 다이묘, 서군 총대장, 원수
제7대 (7군 사령관)
(총대장)
(좌군 사령관)
a Japanese family crest named "Ji-monji" for Ukita clan 兒文字紋。宇喜多氏の家紋。 우키타 히데이에
(宇喜多 秀家)
Ukita Hideie.jpg 1572년 1655년 12월 17일 총대장, 센고쿠 무장, 다이묘, 종삼위, 관위급 지주
산기, 사콘에이곤주조(左近衛權中將), 곤주나곤(權中納言), 원수
제8소대 (제8군)
(지휘부 봉행)
Мон роду Асано 浅野家家紋 丸に違い鷹の羽 아사노 요시나가
(淺野 幸長)
Asano Yoshinaga.jpg 1576년 1613년 10월 9일 센고쿠 무장, 다이묘, 지휘부급 봉행
제9대 (수군 사령관) 家紋。七曜紋。 구키 요시타카
(九鬼 嘉隆)
Kukiyoshitaka2.jpg 1542년 1600년 11월 17일 센고쿠 수군 무장, 다이묘, 원수
제1수군 담쟁이 잎 도도 다카토라
(騰堂 高虎)
Toudou Takatora.jpg 1556년 2월 16일 1630년 11월 9일 센고쿠 무장, 다이묘, 원수
제2수군 겹쳐진 고리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 安治)
Wakisaka Yasuharu02.jpg 1554년 1626년 9월 26일 센고쿠 무장, 다이묘
제3수군 下り藤(さがりふじ)は、日本の家紋「藤紋」の一種である。図は、加藤嘉明の加藤氏一族(初代伊予松山藩・水口藩藩主家)が使用した図案で、上り藤をそのまま上下反転した図案が伝えられている。この図のように葉・花・茎に境目を描かないものと描くものとがある。 가토 요시아키
(加藤 嘉明)
Katō Yoshiaki.jpg 1563년 1631년 10월 7일 센고쿠 무장, 다이묘
제10대 (우군 사령관) 일문자삼성 가몬 모리 히데모토
(毛利 秀元)
毛利秀元.jpg 1579년 11월 25일
(빗추 국 사루카케 성)
1650년 11월 26일(에도) 센고쿠 무장, 다이묘, 정삼위, 산기, 원수
무장 A Japanese family emblem (mon) named "Maru-no-uchi-ni-mitsuhikiryo". 깃카와 히로이에
(吉川 広家)
Kikkawa Hiroie.jpg 1561년 1625년 센고쿠 무장, 종사위, 민부쇼유(民部少輔), 지주(侍従)
다이묘 대나무와 참새 가몬 다테 마사무네
(伊達 政宗)
1567년 9월 5일 1636년 6월 27일 종오위하, 사쿄다이부(左京大夫), 관위부 지주, 에치젠노카미, 종사위하, 우고노에노곤쇼쇼(右近衛権少将)
무쓰노카미, 정삼위, 산기, 종삼위, 권중납언(権中納言), 추증, 종이위, 원수

외부 링크[편집]

각주[편집]

  1. 소위 “つなぎの城”
  2. 소위 “仕置の城”
  3. 김영식(2008) 《日本近世城郭과 倭城에 대하여》, p.25.
  4. 일본, 정유재란 당시 왜성 40여개 쌓았다, 주간경향신문
  5. 왜성 축소방식의 특징《한국의 산성》[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6. 김영식(2008) 《日本近世城郭과 倭城에 대하여》, p.32.
  7. 현지 안내문 인용
  8. 네이버 지도 역설. 기장군의 행정지명. 왜성[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018년 12월 21일 확인
  9. Untitled -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1],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시리즈[2] Archived 2018년 12월 29일 - 웨이백 머신, 한국학도서관 한국학전자도서관 [3] Archived 2018년 12월 29일 - 웨이백 머신, [鄭淳台의 역사현장 답사] 李舜臣과 島津義弘(시마즈 요시히로)의 血鬪 泗川倭城 전투와 露粱해전 [4], 420년 전 임진왜란의 전리품, 왜성을 다시 보다 [5], NAVER 학술정보 한국 남해안 왜성 축성술 연구 [6][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코리아스칼라 한국 남해안 왜성 축성술 연구 [7][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0. 方*鎭 2015年.11/28土 [8] Archived 2019년 7월 8일 - 웨이백 머신, 팬저의 국방여행 : 부산지역의 성곽(읍성,진성,왜성,산성) [9] Archived 2019년 7월 8일 - 웨이백 머신, 경향신문 문화 - 정유재란 때 전체 왜성 그린 지도 발견 [10], 팬저의 국방여행 마산왜성_03 [11] Archived 2019년 7월 10일 - 웨이백 머신, 김해박물관교재_7회차.indd 김해왜성의 축성과 그 의의 (나동욱),‘나성’은 알아도 ‘왜성’은?…잊어선 안 될 400년 전 ‘치욕의 성’[12]
  11. [13] Archived 2019년 9월 24일 - 웨이백 머신 과학의 산책|왜성 조사 편, 조선왕조실록 연계 왜성(倭城) [14][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만남의광장 역사스페셜<임진왜란 최후의 승부처- 울산성 전투> [15]
  12. 山崎敏昭, 1998, 「加德城と安骨浦倭城の繩張り」 『倭城の硏究』2, 城郭談話會. 福島克彦, 1998, 「加德城と安骨浦城の構造」 『韓國 慶尙南道 倭城址の調査硏究』, 神戶大學文學部. 한국문물연구원, 2010, 『釜山 訥次洞 817-4番地遺蹟』. 釜山廣域市史編纂委員會, 1999, 『江西區誌』.
  13. 가덕도 지성, 부산역사문화대전 Archived 2018년 12월 21일 - 웨이백 머신 2018년 12월 20일 확인
  14. 가덕도 성북 왜성, 부산역사문화대전 Archived 2018년 12월 20일 - 웨이백 머신 2018년 12월 20일 확인
  15. 『增補文獻備考』 豆毛浦城 臨浪浦城 備局謄錄 ᷎有倭城.(두모포성, 임랑포성은 비 국등록에 모두 왜성이라 기록하였다.)
  16. 『大東地志』 城池 竹島倭城 南十里 宣祖壬辰倭人所築 周五百八十척 外城周六百十五척.(남쪽으로 10리이고 선조 임진년(1592) 왜인이 쌓았다. 둘레는 580척 (약 176m)이고 외성의 둘레는 615척(약 186m)이다.) 『增補文獻備考』 竹島倭城 在南十里 壬辰倭賊石築 邑誌周五百八十척 外城周六百十五척.(죽도왜성은 남쪽으로 10리에 있고 임진년에 왜적이 돌로 쌓았다. 읍지에는 둘레 580척(약 176m), 외성 둘레 615척(약 186m)이라 기록하고 있다.
  17.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카도카이쇼-카도카이성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18. 『大東地志』 城池 仇法谷城 狐浦城 二處倭所築.(구법곡성, 호포성 두 곳을 왜인이 쌓았다.) 『增補文獻備考』 仇法谷狐浦 備局謄錄 並有倭城.(구법곡성과 호포성은 비국등록에서 모두 왜성이라 기록하였다.)
  19. 농소왜성,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 Google 도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019년 7월 8일 확인
  20. 김해시 주촌면 천곡리 산86-5 농소왜성(김해시 주촌면 농소리)주촌천곡 주촌선지리 주촌용덕 농소마을회관 평강로435번길
  21. 高田徹, 1999, 「金海 竹島倭城の遺構と遺物-繩張り-」 『倭城の硏究』3, 城郭談話會. 高瀨哲郞, 1999, 「倭城蹟を訪ねて」 『硏究紀要』5, 佐賀縣立名護屋城博物館. 경남문화재연구원, 2004, 『김해 농소리유적』. 
  22. 마사왜성,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 Google 도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019년 7월 8일 확인
  23. 다대포성, 부산역사문화대전 Archived 2018년 12월 21일 - 웨이백 머신 2018년 12월 21일 확인 다대포성 성곽봉수편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2020년 6월 18일 확인
  24. 다대포 성지 부산광역시 사하구 홈페이지 공고 2020년 6월 18일 확인
  25. 다대포성지(多大浦城址)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2020년 6월 18일 확인
  26. 다대포성 터 (2011-10-28) PNU로컬리티아카이브 2020년 6월 9일 확인
  27. 동래왜성, 부산역사문화대전 Archived 2018년 12월 21일 - 웨이백 머신 2018년 12월 21일 확인
  28. 동삼동왜성, 부산역사문화대전 Archived 2018년 12월 21일 - 웨이백 머신 2018년 12월 21일 확인
  29.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마루야마조-마루야마 성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30. 『增補文獻備考』 釜山浦城 甑山城 備局謄錄 有倭人.(부산포성, 증산성은 비국 등록에는 모두 왜인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東萊府邑誌』25) 城池 釜山鎭城 在府南二十里 僉使所居也 壬辰亂倭人築之 城周千六 百八十九척 高十三척.(부산진성은 부의 남쪽 20리에 있고 첨사가 거주하였다. 임진 년에 왜인이 쌓았고 성의 둘레는 1689척(약 512m)이고 높이는 13척(약 4m)이다.)
  31. 『大東地志』 鎭堡 開雲浦鎭 南三十里 宣祖 二十五年 自蔚山移于釜山浦之倭人所築城 水軍萬戶一員.(남쪽으로 30리에 있고 선조 25년(1592)에 울산에서 부산포로 옮기고 왜인들이 쌓았다, 수군만호 1인을 두었다.)『大東地志』 鎭堡 西生浦鎭 南五十里 初置水軍萬戶 宣祖二十五年 移設于倭人所築之倭甑城 水軍同僉制使一人.(남쪽으로 50리에 있고 처음에는 수군만호를 두었다. 선조 25년(1592) 옮겨 왜인이 축성하고 왜증성이라 하였다. 수군첨제사33) 1인을 두었다.)『增補文獻備考』 外甑城 在西生鎭 亦倭賊所築.(외증성은 서생진에 있고 또한 왜적이 쌓았다.)『與地圖書』34) 鎭堡 西生浦鎭 在府南五十三里 水軍萬戶一人 壬辰倭寇築城留屯 丁酉撤還後倭人所築城.(서생포진은 부의 남쪽 53리에 있고 수군만호 1인이 주둔하였다. 임진년(1592)에 왜구가 축성하여 주둔하였다. 정유년(1597)에 다시 돌아온 왜인이 쌓았다.)『蔚山府邑誌』35) 鎭堡 西生浦鎭 在府南五十三里 水軍萬戶一人 壬辰倭寇築城留屯 丁酉撤還後倭人所築城.(서생포진은 부의 남쪽 53리에 있고 수군만호 1인이 주둔하였다. 임진년(1592)에 왜구가 축성하여 주둔하였다. 정유년(1597)에 다시 돌아온 왜인이 쌓았다.)
  32. 임랑포 왜성, 부산역사문화대전 Archived 2018년 12월 21일 - 웨이백 머신 2018년 12월 20일 확인
  33.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세이구완죠-세이관성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34. 사 료 : 『增補文獻備考』 豆毛浦城 臨浪浦城 備局謄錄 ᷎有倭城.(두모포성, 임랑포성은 비국등록에 모두 왜성이라 기록하였다.)
  35. 임진왜란의 잔상 거제의 왜성, 서거제신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36. 『大東地志』3) 鎭堡 永登浦鎭 舊設仇來浦置水軍萬戶 仁祖元年 移于見乃梁西三里 英宗 二十七年廢 三十二年復設 有倭人所築 石城水軍萬戶一員.(옛날 설치했던 구래포로 수군 만호4)를 두었다. 인조 원년(1623)에 견량포에서 서쪽으로 3리 옮겨 설치하였다. 영종 27년(1751) 폐하였다가 32년(1756)에 다시 설치하였다. 왜인이 쌓은 성이고 수군 만호 1인을 두었다.) 『增補文獻備考』 永登浦城 舊長木浦城 備局謄錄 ᷎有倭城. (비국등록에는 영등포성(영등포왜성), 구장목포성(장문포왜성) 모두 왜성이라 기록하였다.)
  37. 임진왜란의 잔상 거제의 왜성, 서거제신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38. 東亞大學校博物館, 1995, 『巨濟市 城址 調査報告書』. 城郭談話會, 1997, 『倭城の硏究-特集:巨濟島の倭城』創刊號. 巨濟市誌編纂委員會, 2002, 『巨濟市誌』下卷.
  39. 임진왜란의 잔상 거제의 왜성, 서거제신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40. 『大東地志』 鎭堡 長木浦鎭 北六十里 本訓局屯 孝宗七年 設屯置別將有 倭人所築城 水軍萬戶一員.(북쪽으로 60리이고 훈련도감을 두었다. 효종 7년(1656)에 설치하여 별장7)을 두었다. 왜인이 쌓은 성이고 수군만호 1인을 두었다.) 『增補文獻備考』 永登浦城 舊長木浦城 備局謄錄 ᷎有倭城. (비국등록에는 영등포성(영등포왜성), 구장목포성(장문포왜성) 모두 왜성이라 기록하였다.)
  41. 임진왜란의 잔상 거제의 왜성, 서거제신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42. 임진왜란의 잔상 거제의 왜성, 서거제신문 2019년 7월 23일 확인
  43. 지세포성(知世浦城) 국립문화재연구소 2020년 6월 10일 확인
  44. 거제 지세포진성, 새거제신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019년 7월 23일 확인 조선 인종 때 왜적의 침입을 걱정하여 영남 6부의 25000명을 동원하여 쌓은 성으로, 성 아래 진을 두고 수군(水軍)을 배치하여 방어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은 함락되었고 당시의 만호 강지욱 장군은 옥포성 밖으로 밀려났다가 효종 2년(1651)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현재 성 입구에는 수군 만호의 비석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 37년(1603)에 지세포진이 옥포 북쪽으로 이건되었으며, 효종 2년(1651)에 다시 지세포로 복설(復設)되었다. 현재 성 입구에는 수군만호의 비석이 남아 있다. 성곽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며 둘레는 약 800m, 잔존 최고 높이 4.3m, 폭 4m~5m이다.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과 성문을 보호하는 시설인 옹성을 설치하였다. 축성 방법은 다른 읍성과 유사하게 큰 돌로 누워쌓기와 세워쌓기를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성곽에는 치(雉)를 일정 간격마다 설치하였으며 성 바깥으로도 해자를 두어 방어력을 높였다. 현재 성내에는 대부분 논밭이며 마을 쪽에는 민가들이 조성되어 있다.
  45. 진해 자마산성, 디지털창원문화대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019년 7월 9일 확인
  46. 高瀨哲郞, 1999, 「倭城蹟を訪ねて」 『硏究紀要』5, 佐賀縣立名護屋城博物館. 高田徹·太田秀春, 2005, 「文祿·慶長の役における日本軍の朝鮮城郭利用について-島津氏の事例を中心に」 『城館史料學』3, 城館史料學會.
  47. 임진왜란의 잔상 거제의 왜성, 서거제신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48. 高田徹, 2000, 「南海倭城の繩張り」 『倭城の硏究』4, 城郭談話會. 堀口健貳, 2005, 「畝狀空堀群を持つ倭城について」 『愛城硏報告, 愛知中世城郭硏究會』.
  49. 『增補文獻備考』 釜山浦城 甑山城 備局謄錄 有倭人.(부산포성, 증산성은 비국 등록에는 모두 왜인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東萊府邑誌』25) 城池 釜山鎭城 在府南二十里 僉使所居也 壬辰亂倭人築之 城周千六 百八十九척 高十三척.(부산진성은 부의 남쪽 20리에 있고 첨사가 거주하였다. 임진 년에 왜인이 쌓았고 성의 둘레는 1689척(약 512m)이고 높이는 13척(약 4m)이다.)
  50. 倭城址硏究會, 1979, 『倭城』Ⅰ.高田徹·堀口健貳, 2000, 「釜山倭城の繩張りについて」 『倭城の硏究』4, 城郭談話會. 21) 1770년에 홍봉한(1713~78 조선후기 문신)이 왕명을 받아 최초로 편찬한 「동국문헌비고」가 사실과 어긋나고 누락된 점이 많아 2차 편찬, 3차 보편을 거쳐 1908년 고종의 칙명으로 간행된 掌故(장고:典禮와 故事,나라의 일과관례)로 이루어져 편찬되었다. 편찬 목적은 영조 때 김치인(1716~1790, 조선후기 문신)이 진언하였듯이 치세와 실용적인 면을 위한 것으로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백과사전으로 제도와 문물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6考 250卷.(고:분류)으로 이루어져 있다.
  51. 지정사항 : 고적 81호(1936년 5월), 사적 50호(1963년 1월 21일 지정~1997년 1월 1일 해지), 『大東地志』 鎭堡 三千浦堡 南20里 自晉州移于通陽浦 成宗十九年築城 置權管後又移于固城縣 宣祖丁酉倭石曼子據於此 與蔚山之島山順天之倭橋稱爲三窟 堡城今稱倭甑城.(남쪽으로 20리에 있고, 진주에서 통양포(사천)로 옮긴다. 성종 19년(1488)에 쌓았다. 권관17)을 두고 있다 후에 고성현으로 옮긴다. 선조 정유년(1597) 석만자(島津義弘, 시마즈 요시히로)는 울산의 도산성, 순천의 왜교성과 더불어 삼굴18)이라 칭하였다. 보성은 지금 왜증성이라 부른다. 『增補文獻備考』 舊三千鎭倭甑城 在南二十里 備局謄錄 有廢城.(구 삼천진왜증성(사천왜성)은 남쪽으로 20리에 있고, 비국등록에는 폐성으로 기록하였다.)
  52. 지정사항 : 고적(1938년), 사적 49호(1963년 1월 21일 지정~1997년 1월 1일 해지), 순천대학교 박물관, 1997, 『순천 검단산성과 왜성』. 高田徹, 1998, 「順天城の繩張りについて」 『倭城の硏究』2, 城郭談話會. 順天대학교 박물관, 2001, 『順天倭城의 外城遺蹟』. 전남대학교 박물관·순천시, 2006, 『순천왜성』. 순천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순천시, 2007, 『순천시의 성곽과 봉수』.
  53. 高田徹, 1998, 「梁山城の繩張り」 『倭城の硏究』2, 城郭談話會. 高瀨哲郞, 1999, 「倭城蹟を訪ねて」 『硏究紀要』5, 佐賀縣立名護屋城博物館.
  54. 『大東地志』 城池 島山城 東五里 一云神鶴城 一云戒邊城 一云甑城 宣祖 三十年 倭人古止修築與 順天倭橋南海露梁爲三窟 明史以倭橋曳橋露梁爲老營. (동쪽으로 5리에 있고, 신학성, 또는 계변성, 또는 증성이라고도 부른다. 선조 30년(1597) 왜인이 옛것을 수리하여 쌓았고, 순천 왜교성(순천왜성), 남해 노량성(남해 선소왜성)과 더불어 삼굴이라 한다. 명나라 기록에는 왜교를 예교로, 노량을 노영이라 하였다.) 『增補文獻備考』 甑城 在東五里 一名島山 倭賊築城 於此其形如甑故名.(증성은 동쪽으로 5리에 있고 일명 도산이라고 한다. 왜적이 축성하였고 그 형상이 마치 시루같다고 하여 붙여진 옛 이름이다.) 『增補文獻備考』 伴鷗亭城 備局謄錄 有倭城.(반구정성은 비국등록에 왜성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