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성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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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성 전투를 그린 일본의 병풍화

왜성(倭城, 일본어: わじょう 와조오 [ウェソン →웨손[*]])은 임진왜란 그리고 정유재란일본군에 의해 한반도 남부 각지에 축조된 일본성곽을 말한다.

개요[편집]

왜성은 일본군이 남해안 일대 혹은 그외 지역을 점거하고 그들의 근거지를 확보하거나 일본군내 상호 연락 등을 위해 축조한 일본성곽으로써, 그 성격으로 보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연결성(連結城)[1]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령에 의해 부산에서 서울까지, 나중에는 의주까지 히데요시 자신이 명나라로 들어갈 때의 거처(御座所)와 군수물자의 보급로 확보를 목적으로 쌓은 성곽이다. 이것은 일명 “쓰타이노시로”(つたいの城)라고도 하는데, 군대가 거의 하루에 행군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쌓았으며, 주로 조선의 읍성을 고쳐서 사용하거나 적당한 읍성이 없는 곳에서는 새로이 간단하게 축성했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그 유구의 위치가 확실하지 않으며, 함경도길주안변 사이 등에도 쌓여져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길목마다 이 연결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둘째는 통치성(統治城)[2]인데, 대한민국 남해안(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남도순천 지역에 쌓은 성곽으로,

임진왜란기인 1592년부터 2년간에 걸쳐 일본으로부터의 수송로 확보와 일본군이 내륙에서 후퇴한 뒤 전세를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쌓은 28여 개성곽정유재란기에 신규로 축성한 11개39여 개의 성 (멸실된 왜성 포함) (2019 총 통계)이 그것이다.[3] (2019 기준 임진왜란 : 28여 개 정유재란 : 11여 개 총 : 39여 개) 최근에 곤양(昆陽).광양.목창.영춘(永春)왜성 등 추가로 발견이 된 왜성이 있으나 보통 멸실된 왜성이라 실제로 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구조[편집]

남해안 일대 왜성은 30여개로 약간의 차이점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일본의 성곽축조양식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이들 왜성은 16세기 일본에서 축조되기 시작하는 평성이 아니라 대부분 산성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정치적 지배 거점에 중점을 둔 평성보다는 전시 상황에 맞게 방어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진과 후퇴, 보급이 원활할 수 있는 강이나 바다에 인접한 곳에 축조하였다. 또, 성의 구조는 일본의 성에서 볼 수 있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구루와의 배치와 해자, 이중문으로 된 마스가타와 마스가타에 딸린 우마다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일본의 성의 모습은 당시 중국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과 일본인 화가가 울산성 전투를 그린 병풍화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이들 그림에서는 담에 난 총안인 사마를 통해 조명연합군에게 사격하는 일본병사와 겹겹으로 된 일본의 성곽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4]

구루와[편집]

일본의 산성이 대체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듯이 왜성 역시 마찬가지로 주곽부를 중심으로 지형을 이용하여 다중의 구루와의 배치 등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구루와의 배치는 지형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하고 있지만 구조적 원리를 간략화한다면 흔히 말하는 윤곽식(輪郭式)ㆍ제곽식(梯郭式)ㆍ와곽식(渦郭式)ㆍ연곽식(連郭式) 등으로 나눌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 변형인 경우가 많다.

고구치[편집]

일본의 성에서 출입구를 통상 고구치(虎口)라고 칭하는데, 왜성 또한 그 모양은 다양하지만 기능은 하나같이 출입구를 통과하는 적에게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한국의 경우는 옹성(甕城)이나 적대(敵臺)에 의해 주로 출입구인 성문이 보호되는 것과 비교가 된다. 그리고 구루와에 여러 모양의 각도(角度)를 주어 성벽으로 오르는 적을 원근(遠近)ㆍ좌우(左右) 등 다양한 위치에서 궁시 등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요코야가카리(일본어: 橫矢 횡시[*])이다. 이런 직선(直線)과 각(角)으로 이루어진 구루와형태는 일본 성곽의 독특한 점 가운데 하나이며, 한국의 경우 성벽이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일본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많지 않고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요코야가카리처럼 구루와에 각도를 주는 방식보다는 성곽 외각으로 사각모양의 치성(雉城)을 만드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석벽, 성루[편집]

일본의 경우 축성에 석벽방식을 도입한 것은 중세이후로 볼 때는 전국 시대 후반기이다. 물론 고대에는 조선식산성과 같은 석축성이 있지만 중세이후로는 거의 석벽이 사용되지 않았다. 석재확보나 기술적인 문제 등도 있겠지만 성곽의 항구성이나 방어력 증강의 필요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왜성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바이지만 일본성곽은 석축에 있어서 직선을 중시하는 경향이 현저하다. 따라서 구루와가 꺽이는 모서리 부분이 매끄럽게 처리되면서 전체적으로 상하석축선이 곡사선형태로 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자연석을 난적(亂積)하고 그 틈을 잔돌로 메우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또한 성루의 경우는 중세이래 산성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시설 가운데 하나이다. 구루와위에 시설하고 그위에 다시 목책이나 판벽을 설치하여 방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노보리이시가키[편집]

왜성에는 일본의 근세성곽에서 보이지 않는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라는 장대한 장벽도 설치되었다. 이것은 왜성만의 특징적인 구조로, 산성부의 본성과 산기슭부의 지성이나 부속시설을 하나로 연결하여 방어선을 확고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측된다. 서생포왜성이나 웅천왜성 등에서는 이 노보리이시가키가 잘 보존되어 있다.[5]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성에서도 간혹 보이는 축성방법으로 마쓰야마 성, 히코네 성, 스모토 성 등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왜란에 참전했다 귀국한 다이묘 들의 성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중 가토 요시아키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쌓은 성이 대표적이다.

해자[편집]

왜성은 일본의 성과 마찬가지로 성 아래에 해자가 시공되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중국의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에 나타난 전투장면을 보면 왜성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왜성을 공격하는 장면을 보면 담에 뚫린 사마(?間)으로 공성군을 사격하는 모습이 있고, 넘어에는 목책이 이중으로 세워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천수각이 보이고, 그외에 숙사(宿舍)가 그려져 있으며, 안쪽에는 군데 군데 방패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판벽(板璧)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해전(海戰)을 그린 것에서는 바닷가에 목책이 세워져 있고 곳곳에 판벽으로 가설하여 이곳에 몸을 은폐하고 공격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목책과 판벽을 세운 곳이 구(構)의 일부로 추정한다.

지명[편집]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의 행정지명도 있다.[6]

축성·수비한 왜장 목록[편집]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일으킨 왜군 대장 목록

앞으로 표를 추가할 예정이다. (현재 계획중)

다음 세대의 보존 및 일본왜성 연구[편집]

현재 보존이 필요한 왜성이 많고 연구를 꾸준히 하고 있다.

현재는 진행중이다.

주요 왜성 상세 목록[편집]

[7] PDF 링크 참조. 정부 근거 자료 제시 Untitled 역사문화센터의 자료. [8] 웹사이트 참조. 블로그, 매거진, 도서관 근거 자료 제시.

임진왜란기 (1592 ~ 1598)[편집]

소재지 시기 축성 수비 비고
가덕도왜성[눌차왜성](加德島倭城) 부산광역시 강서구 [눌차동 635번지] 일대
위치 : 강서구 성북동 [선창 마을] 동쪽 다리

→ 눌차동 [항월 마을]

1592년 일문자와 별 세 개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外
左三つ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小早川隆景) 外
左三つ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小早川隆景)
일문자와 별 세 개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小早川秀包)
다치바나노카미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눌차왜성 (2008년 발굴)[9]
가덕도 왜성 [지성][10](加德島倭城支城-) 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 산196 모리 히데카네
다치바나 무네토라
다카하시 무네마스
쓰쿠시 히로카도
고려 시대
가덕도 성북 왜성[11](加德島城北倭城-) 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 산43, 산52, 산53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1593년 고바야가와 히데호우
다찌바 토우코
부산 죽도 왜성([金海] 竹島倭城)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 787 일원 나베시마 나오시게 1593년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구포왜성(龜浦倭城)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1동 산93][덕천동 501]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다치바나 무네시게
1593년 구로다 나가마사
마사왜성[12] 경상남도 김해시 생림면 마사리 산 205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 산1 일대
나베시마 나오시게 1593년 일본군
기장죽성리왜성(機張竹城里倭城)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산 52-1] 일원 구로다 나가마사 1593년 가토 기요마사
다대포성[다대진성][13][14](多大浦城)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로529번길 38-5][다대동 181]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로 499 다대초등학교][15]
고니시 유키나가 1589년 윤흥신
윤흥제
동래왜성[16]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산2|안락동 20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산 2-30 일대
깃카와 히로이에 1593년 고니시 유키나가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 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99][범일동 590-5] 1593년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부자 모리 데루모토 소서성, 환산성, 부산왜성의 지성[17]
부산왜성(釜山倭城) 부산광역시 동구 [성북로36번길 46][범일동 산81-28] 1592년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外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증산왜성[18]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1 일원] 가토 기요마사 1593년 가토 기요마사
영등포왜성(永登浦倭城)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산 6-17번지] 1592년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자 唐島城, 영등왜성[19]
송진포왜성(松眞浦倭城)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리 후쿠시마 마사노리 1593년
장문포왜성(長門浦倭城)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일본군 1594년 11월
지세포진성[지세포왜성][20][21](巨濟 知世浦鎭城) 경상남도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 일본군 1490년
재건설 : 1545년
창원 진해 안골왜성[웅천 안골왜성](昌原 鎭海 安骨倭城)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산27번지 외 구키 요시타카 1593년 다치바나 무네시게
창원 진해 웅천왜성(昌原 鎭海 熊川倭城)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가토 기요마사 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
진해 자마산성[자마왜성][22](鎭海子馬山城)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 소 요시토시 1593년
진해 명동 왜성(鎭海明洞倭城)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명동 소 요시토시 1593년
진해 제포 왜관지[23](鎭海薺浦倭館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대마도주(아시카가 막부) 1407년
재건설 : 1423년
아시카가 막부
일본군
임랑포 왜성[24]
(林浪浦倭城, 일본어: せいぐわん城 세이구완죠[*][25])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산51] 모리 요시나리
시마즈 다다토요
이토 스케타카
다카하시 모토타네
아키즈키 다네나가
1593년
토성동 성[26](土城洞城-)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1가 25] 시마즈 요시히로[도진군(島津軍)] 삼국 시대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정유재란기 (1597 ~ 1598)[편집]

소재지 시기 축성 수비 병력 비고
견내량왜성
[광리왜성·한산왜성](見乃梁倭城·倭城洞城)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 1597년 일본군
고성왜성[고성성지](固城邑城·固城倭城)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성내리,서외리,수남리일대 1597년 깃카와 히로이에 다치바나 무네시게 7,000명
남해 선소왜성(南海船所倭城)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1597년 와키자카 야스하루 소 요시토시 1,000명
부산일본성(釜山日本城)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1598년 모리 데루모토 고니시 유키나가
마산일본성(馬山日本城)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1597년 나베시마 나오시게 나베시마 나오시게 12,000명
물금증산리왜성[양산왜성](勿禁甑山里倭城)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1597년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구로다 나가마사
사천선진리성
[곤양왜성](泗川船津里城)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1597년 모리 요시나리[27] 시마즈 요시히로 10,000명
순천왜성[광양왜성](順天倭城)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1597년 고니시 유키나가
소서행장군(小西行長軍)
고니시 유키나가 13,700명
순천 검단산성[28][29](順天 檢丹山城)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성산리 1598년 고니시 유키나가
일본군
일본군
울산왜성[도산왜성](蔚山倭城)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공원3길 54], 일원 (학성동) 1597년 오타 가즈요시 가토 기요마사 10,000명
초량왜관
[관수옥과 부산왜관][30][31](草梁倭館)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신창동|중앙동|광복동
부산광역시 중구 [용두산길 37-55 (광복동2가)]
1607년 일본군 일본 전관 거류지
부산이사청

멸실된 왜성이나 멸실중인 단계[편집]

소재지 축성 지휘관 시기 멸실 여부
중앙동왜성[박문구왜성](中央洞倭城)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대로 2 (중앙동7가) 고니시 유키나가 부하
모리 데루모토
1593년 멸실
(부산항 매립 등 개발, 용미산 삭평)[32]
호포왜성지(狐浦倭城址)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가산리 산 56-1, 56-8, 1166전 외 일본군(불명) 불명 멸실
(산업개발)
농소왜성[신답왜성][33](農所倭城)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농소리 산 21 일대 나베시마 나오시게
나베시마 가쓰시게
1593년 멸실
영도왜성[동삼동왜성][34](影島倭城)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1동 210 모리 데루모토 1593년 [일부 멸실]
동래왜성[35](東萊倭城-)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산2|안락동 20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산 2-30 일대
깃카와 히로이에 1593년 [일부 멸실]
마사왜성[36](馬沙倭城) 경상남도 김해시 생림면 마사리 산 205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 산1 일대
나베시마 나오시게 불명 [멸실 위기]
진주 망진왜성(望晉倭城) 경상남도 진주시 천전동 [망경동 산30-3] 시마즈 요시히로
데라야마 히사가네
모리 요시나리
이케다 히데오
나카가와 히데시게
다카하시 나오쓰구
1593년 멸실 확정

각주[편집]

  1. 소위 “つなぎの城”
  2. 소위 “仕置の城”
  3. 김영식(2008) 《日本近世城郭과 倭城에 대하여》, p.25.
  4. 왜성 축소방식의 특징《한국의 산성》[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5. 김영식(2008) 《日本近世城郭과 倭城에 대하여》, p.32.
  6. 네이버 지도 역설. 기장군의 행정지명. 왜성 2018년 12월 21일 확인
  7. Untitled -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1],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시리즈[2], 한국학도서관 한국학전자도서관 [3], [鄭淳台의 역사현장 답사] 李舜臣과 島津義弘(시마즈 요시히로)의 血鬪 泗川倭城 전투와 露粱해전 [4], 420년 전 임진왜란의 전리품, 왜성을 다시 보다 [5], 국립진주박물관 - 교육/행사/연구 - 학술조사연구 - 왜성조사 - 남해 선소왜성 [6], NAVER 학술정보 한국 남해안 왜성 축성술 연구 [7], 코리아스칼라 한국 남해안 왜성 축성술 연구 [8]
  8. 方*鎭 2015年.11/28土 [9], 팬저의 국방여행 : 부산지역의 성곽(읍성,진성,왜성,산성) [10], 경향신문 문화 - 정유재란 때 전체 왜성 그린 지도 발견 [11], 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 정유재란(1597~1598)과 왜성 [12], 팬저의 국방여행 마산왜성_03 [13], 김해박물관교재_7회차.indd 김해왜성의 축성과 그 의의 (나동욱),‘나성’은 알아도 ‘왜성’은?…잊어선 안 될 400년 전 ‘치욕의 성’[14]
  9. 山崎敏昭, 1998, 「加德城と安骨浦倭城の繩張り」 『倭城の硏究』2, 城郭談話會. 福島克彦, 1998, 「加德城と安骨浦城の構造」 『韓國 慶尙南道 倭城址の調査硏究』, 神戶大學文學部. 한국문물연구원, 2010, 『釜山 訥次洞 817-4番地遺蹟』. 釜山廣域市史編纂委員會, 1999, 『江西區誌』. 
  10. 가덕도 지성, 부산역사문화대전 2018년 12월 20일 확인
  11. 가덕도 성북 왜성, 부산역사문화대전 2018년 12월 20일 확인
  12. 마사왜성,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 Google 도서 2019년 7월 8일 확인
  13. 다대포성, 부산역사문화대전 2018년 12월 21일 확인
  14. 다대진성 전투, 지식백과 2018년 12월 29일 확인 다대포성, 지식백과 2018년 12월 29일 확인 다대포성이 쌓여진 연대는 문헌기록으로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 다대포진영이 장림포에 있었다고 하니, 이때에 본격적인 축성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었다가 다시 축조한 성이라는 정설이다.
  15. 다대포성 2018년 12월 21일 확인 동쪽과 남쪽 성벽이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으며, 대부분 주택의 축대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다대초등학교 안에 있었던 다대포 객사는 현재 몰운대 공원으로 이전하여 복원되어 있다.
  16. 동래왜성, 부산역사문화대전 2018년 12월 21일 확인
  17. 『增補文獻備考』 釜山浦城 甑山城 備局謄錄 ᷎有倭人.(부산포성, 증산성은 비국 등록에는 모두 왜인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東萊府邑誌』25) 城池 釜山鎭城 在府南二十里 僉使所居也 壬辰亂倭人築之 城周千六 百八十九척 高十三척.(부산진성은 부의 남쪽 20리에 있고 첨사가 거주하였다. 임진 년에 왜인이 쌓았고 성의 둘레는 1689척(약 512m)이고 높이는 13척(약 4m)이다.)
  18. 『增補文獻備考』21) 釜山浦城 甑山城 備局謄錄 ᷎有倭人.(부산포성, 증산성은 비국
  19. 『大東地志』3) 鎭堡 永登浦鎭 舊設仇來浦置水軍萬戶 仁祖元年 移于見乃梁西三里 英 宗 二十七年廢 三十二年復設 有倭人所築 石城水軍萬戶一員.(옛날 설치했던 구래 포로 수군 만호4)를 두었다. 인조 원년(1623)에 견량포에서 서쪽으로 3리 옮겨 설 치하였다. 영종 27년(1751) 폐하였다가 32년(1756)에 다시 설치하였다. 왜인이 쌓은 성이고 수군 만호 1인을 두었다.) 『增補文獻備考』 永登浦城 舊長木浦城 備局謄錄 ᷎有倭城. (비국등록에는 영등포성 (영등포왜성), 구장목포성(장문포왜성) 모두 왜성이라 기록하였다.)
  20. 거제 지세포진성, 한국학대백과사전 2019년 7월 23일 확인
  21. 거제 지세포진성, 국가문화유산포탈 2019년 7월 23일 확인 거제 지세포진성, 새거제신문 2019년 7월 23일 확인 조선 인종 때 왜적의 침입을 걱정하여 영남 6부의 25000명을 동원하여 쌓은 성으로, 성 아래 진을 두고 수군(水軍)을 배치하여 방어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은 함락되었고 당시의 만호 강지욱 장군은 옥포성 밖으로 밀려났다가 효종 2년(1651)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현재 성 입구에는 수군 만호의 비석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 37년(1603)에 지세포진이 옥포 북쪽으로 이건되었으며, 효종 2년(1651)에 다시 지세포로 복설(復設)되었다. 현재 성 입구에는 수군만호의 비석이 남아 있다. 성곽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며 둘레는 약 800m, 잔존 최고 높이 4.3m, 폭 4m~5m이다.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과 성문을 보호하는 시설인 옹성을 설치하였다. 축성 방법은 다른 읍성과 유사하게 큰 돌로 누워쌓기와 세워쌓기를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성곽에는 치(雉)를 일정 간격마다 설치하였으며 성 바깥으로도 해자를 두어 방어력을 높였다. 현재 성내에는 대부분 논밭이며 마을 쪽에는 민가들이 조성되어 있다.
  22. 진해 자마산성, 디지털창원문화대전 2019년 7월 9일 확인
  23. 제포왜관, 디지털창원문화대전 2019년 7월 9일 확인
  24. 임랑포 왜성, 부산역사문화대전 2018년 12월 20일 확인
  25.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세이구완죠-세이관성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26. 토성동 성, 부산역사문화대전 2018년 12월 20일 확인
  27. 경남관광길잡이[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사천 선진리성 2008년 12월 13일 확인
  28. 순천 검단산성, 문화콘텐츠닷컴 2019년 7월 30일 확인
  29. 順天 劍丹山城과 倭城 = Cultural relics of Keomdan-Sanseong and Wae-Seong fortress in Suncheon city, 국립중앙도서관 2019년 7월 30일 확인 순천 검단산성 자료, 국립중앙도서관 2019년 7월 30일 확인 검단산성, 문화콘텐츠닷컴 2019년 7월 30일 확인 검단산성은 정유재란때에 조선명군(朝鮮 明軍)의 연합군이 주둔하여 순천 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倭軍)과 격전을 벌였던 전적지이며 그 당시에 축성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왔던 유적이다. 순천 왜성은 정유재란때 소서행장군(小西行長軍)이 쌓아 약 1년 이상을 주둔하였기 때문에 관련 문헌자료가 비교적 풍부한 편이나, 검단산성에 관한 문헌자료는 거의 없고 단지 구전(口傳)만 전해져 오고 있을 뿐이다.
  30. 초량 왜관, 부산역사문화대전 2019년 7월 22일 확인
  31. 관수옥과 초량왜관 터, 다음 백과 2019년 7월 22일 확인
  32. [https://sanzinibook.tistory.com/1803 박문구왜성은 용두산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용미산에 있었다고 하는데, 부산항 매립 등 개발 바람에 휘말려 현재 용미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이다. (…) 추목도왜성과 박문구왜성의 위치는 여전히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개발 등에 휘말려 왜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들어선 건물 때문에 왜성 터로 추정되는 땅을 파헤쳐 조사할 수도 없다. 그렇게 왜성은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있다. _ P.29 부산 박문구왜성 외 몇몇 왜성들은 관공서 건물과 지하철 기지창 건설 등 개발 바람에 휘말려 문화재 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학계와 언론의 무관심 속에서 개발과 맞물려 왜성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한때, 왜성은 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어 우리 역사에 있어 미아가 될 뻔한 적이 있으며, ‘허물어버리자’는 극단적인 주장이 일 때도 있었다. 다행히 현재는 지방기념물로서 타 문화재와 동등하게 보호받고 있으나 아직 학계와 언론의 무관심, 일반인들의 부정적 인식은 여전하다.]
  33. 신답왜성,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2019년 7월 8일 확인
  34. 동삼동왜성, 부산역사문화대전 2018년 12월 21일 확인
  35. 동래왜성, 부산역사문화대전 2018년 12월 21일 확인
  36. 마사왜성,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 Google 도서 2019년 7월 8일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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