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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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총
吳延寵
오연총 영정 (조선 초기에 제작된 원본은 유실되었으며, 현전하는 영정은 1925년 3월 후손이 함경남도에 있는 사당에서 모사한 이모본이다.)
출생1055년
사망1116년 음력 5월 10일
성별남성
국적고려
본관해주(海州)
별칭시호 문양(文襄)
학력문과 급제
경력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
직업문관, 군인, 정치인
부모오정(吳頲, 아버지)[1]

오연총(吳延寵, 1055년 ~ 1116년)은 고려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생애[편집]

관료 생활 초반[편집]

가세가 한미했고, 젊어서 빈천했으나, 학문에 힘써 문과에 급제했다.[2]

1096년(숙종 원년) 요에 사신으로 가서 천안절(天安節)을 하례했고[3], 1098년(숙종 3) 기거랑(起居郎)에 임명되었다가 병부낭중(兵部郎中)을 거쳐 시랑(侍郞)으로 승진했다.[2][4]

1100년(숙종 5) 상서(尙書) 왕하(王嘏)와 함께 송에 사신으로 가서 휘종(徽宗)의 즉위를 축하하고 이듬해 귀국했는데, 이 때 송 사람들이 구입을 허락하지 않던 희귀 서적인 『태평어람 太平御覽』을 황제의 허락으로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공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에 발탁되었으나, 외직으로 나가기를 자원했으므로 왕이 그를 전주목사(全州牧使)로 내보냈는데, 정사를 행하는 것이 너그럽고 공평하며 가혹하지 않으니 관리와 백성들이 안락을 누렸다.

그의 고과 성적이 가장 높자, 1104년(숙종 9) 소환되어 좌승선(左承宣)·형부시랑(刑部侍郞)·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임명되었고, 3달도 되지 않아 상서좌승(尙書左丞)·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로 승진했다.[2]

같은 해 왕이 남경(南京)에 행차했을 때, 권지추밀원부사(權知樞密院副使)로서 평장사(平章事) 이오·참지정사(參知政事) 오수증(吳壽增)·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 임의(任懿) 등과 함께 호종했고, 다음 달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한림학사(翰林學士), 이듬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비서감(秘書監)·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4],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어사대부(御史大夫)·한림학사승지,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지행영병마사(知行營兵馬事), 동계행영병마사(東界行營兵馬使)를 차례로 거쳤다.[2][5]

1106년(예종 원년) 신기군(神騎軍)의 징발 조건 완화를 건의하여 허락받았다.

같은 해 왕이 서경(西京)의 용언(龍堰)에 궁궐을 짓고 순행하는 일을 신하들에게 의논하게 했는데, 술사(術士)가 참서(讖書)를 이용해 이를 권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오연총은 남경의 공사가 막 끝나 백성들이 피로하고 재정이 고갈되었음을 이유로 들어 반대했으나, 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듬해 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 등의 상주로 서경 궁궐 창건이 다시 거론되자, 역시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으나 왕은 끝내 최홍사 등의 말을 들었고, 여론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여진 정벌[편집]

같은 해 여진(女眞) 정벌이 결정되자, 오연총은 윤관(尹瓘)의 부원수(副元帥)로 임명되었고[6], 9성을 쌓은 후인 1108년(예종 3) 협모동덕치원공신(協謀同德致遠功臣)에 책록되고, 좌복야(左僕射)·참지정사로 옮겼다.

같은 해 웅주(雄州)에 재침입한 여진을 물리치고 개선하여, 양구진국(攘寇鎭國)의 공신호와 수사도(守司徒)·연영전대학사(延英殿大學士) 관직이 더해졌다.[2]

그러나, 이듬해에도 여진이 재침입해 길주(吉州)를 포위해 함락시킬 위기에 처했다.

이에 오연총은 윤관과 함께 출정했으나, 길목인 공험진(公嶮鎭)에서 여진에게 기습을 당해 대패했고, 길주 역시 함락되고 말았다.

고려군은 다시 길주로 진군하려던 차에 여진 쪽에서 청한 화친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를 이유로 윤관과 함께 재신(宰臣)들의 계속되는 탄핵을 받은 끝에, 1110년(예종 5) 관직과 공신호를 박탈당했다.

같은 해 표문을 올려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사공(守司空)·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판삼사사(判三司事)로 복직되었다.[2]

말년[편집]

1112년(예종 7) 수사도(守司徒)·판병부사(判兵部事)·감수국사(監修國史)가 더해졌고, 같은 해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로 승진했으며, 이듬해 다시 수태위(守太尉)·판예병부사(判禮兵部事)·상주국(上柱國), 1114년(예종 9)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더해졌다.[5]

이후 병 때문에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사직을 청했으나, 왕은 원로인 그에게서 계속 도움을 받고 싶었으므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116년(예종 11) 향년 62세로 졸하자, 문양(文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왕은 그의 장례 때 모든 신하들이 참석하도록 했다.[2]

사후[편집]

사후 함경남도 산천군에 사우(祠宇)가 세워졌다. 그 뒤 1141년(세종 23년) 함경북도 북청 안북사(按北祠)에 배향되었고, 1925년 전남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에 덕산사(德山祠)가 건립되어 제향되었다. 1925년 3월 함경남도 산천군에 있던 문양공 사우에서 영정을 복사하여 덕산사에 봉안했으며, 덕산사는 남한 땅에 단 한곳 밖에 없는 유일한 오연총의 사당이다. 그의 후손과 유림들이 매년 음력 3월 3일 제를 올리고 있다.

평가[편집]

『고려사』는 오연총에 대해 그의 열전에서 이렇게 평했다.

(오연총은) 몸가짐을 바로잡고 순순(恂恂)하게 행동을 삼갔으며, 충성과 검소를 자부하며 영예를 구하지 않았다. 관직에 있을 때의 지론(持論)은 시폐(時弊)를 제거하는 데 힘쓰는 것이었으며, 일찍이 사사로운 일로 공익에 피해를 준 적이 없었으므로, 왕이 그를 중히 여겼다.

기타[편집]

사돈의 유래[편집]

고려 예종여진을 함께 정벌한 도원수 윤관부원수 오연총은 아들과 딸의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이기도 했다. 어느 봄날 술이 잘 빚어진 것을 본 윤관은 하인에게 술동이를 지게하고 오연총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전일 밤에 내린 소낙비로 물이 불어나 개울을 건널 수가 없었다.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고 있는데 개울 건너편을 바라보니 오연총도 술통을 옆에 두고 발을 구르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등걸나무 조각을 구해 걸터앉았다. 먼저 윤관이 술잔을 비운 뒤 개울 건너 오연총에게 잔 권하는 시늉을 했다. 오연총도 머리를 숙여 술잔을 받는 예를 표시한 뒤 스스로 채운 술잔을 비웠다. 이렇게 둘은 등걸나무(査)에 걸터앉아 서로 머리를 숙이며 술잔을 주고받는 시늉을 하며 풍류를 즐겼다. 이때부터 자식 사이의 혼인을 제안할 때는 '사돈 하자'라는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한다. 사돈의 뜻은 등걸나무(査)에 머리를 숙이다는 뜻의 돈수(頓首)의 합성으로 등걸나무에 앉아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이다.

영정[편집]

원래의 영정은 조선시대 초기에 제작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실전되었고, 현재 전하는 것은 1925년 3월 그의 후손이 함경남도 산천군에 있는 사당에서 그림을 모사해온 모사본이다.

무속의 신의 한사람으로도 숭배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외조카 김함(金諴)의 묘지명이 근거이다.
  2. 『고려사』 「오연총전」
  3. 당시 관직은 미상이다.
  4. 『고려사』 「숙종세가」
  5. 『고려사』 「예종세가」
  6. 자세한 것은 윤관 문서 참조.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