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이씨 (이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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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이씨 (永川 李氏)
관향경상북도 영천시
시조이문한 (李文漢)
집성촌황해도 황주군
전라남도 담양군
경상북도 의성군
경상북도 경산시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울산광역시
경상북도 영천시
주요 인물이현보, 이보흠, 이문량, 이숙량, 이석지, 이덕홍, 이광준, 이민성, 이민환, 이희발, 이기택, 이병석
인구(2000년)36,781가구 총 116,970명

영천 이씨(永川 李氏)는 경상북도 영천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개요[편집]

영천 이씨의 시조는 고려의 평장사 문한(文漢)이며, 그의 후손인 신호위대장군 대영(大榮), 봉승랑(奉承郞) 겸 관농방어사(觀農防禦使) 중영(仲榮), 문하시중평장사 수춘(守椿)을 각각 중시조로 하는 파가 있다.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39명과 많은 명신·학자를 배출했으며, 역사상 대표적 인물로는 현보(賢輔)·종검(宗儉)·보흠(甫欽) 등이 있다.

현보는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부제학·호조참판·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올라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종검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한림·직제학·대사간을 역임하고 역시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보흠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박사를 지내고 단종손위 후에는 순흥부사(順興府使)로 있으면서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장류(杖流), 순절하였다. 이밖에 응(膺)·순몽(順蒙)·승손(承孫) 등이 유명하다.

인물[편집]

  • 이현보(李賢輔, 1467년 ~ 1555년) :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시인. 이흠(李歆)의 아들. 시호는 효절1498년(연산군 4)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됐다. 이때에 서연관의 비행을 탄핵했다가 안동에 유배됐으나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된다.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후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중종 37)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됐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안동 예안으로 낙향하였다. 품계는 종1품 숭정대부에 이르렀다. 명종실록 이현보의 졸기에서는 만년의 지조가 완전하여 으뜸으로 친다고 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노나라 래자에 비견되었고 1519년 안동부사 재직당시 중양절에 화산양로연(花山養老宴)을 열어 부모님을 포함한 고을의 80이상 노인들을 초대해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어 부모님을 즐겁게 하였다. 작품으로는 어부가가 있다.
  • 이문량(李文樑 , 1498년 ~ 1581년) :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대성(大成), 호는 벽오(碧梧) 또는 녹균(綠筠). 이현보의 차남. 관직은 평릉도 찰방에 이르렀다. 퇴계 이황과 절친하였으며, 퇴계의 제자들인 이덕홍, 황준량, 류중엄 등의 어릴 적 스승이기도 하다. 황준량은 이문량의 사위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중국 후한진기 (구품관인법을 제정한 진군의 부친), 마량에 비견되었다.
  • 이덕홍(李德弘 , 1541년 ~ 1596년) :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艮齋). 농암 이현보의 종손자이자 훈련원 습독 이현우(李賢佑, 1470~1560)의 손자. 아버지는 이충량이다. 관직은 영춘현감에 이르렀고 임진왜란 발발 후 세자 광해군을 성천까지 호종하였다. 국왕과 왕세자에게 거북선의 원형인 귀갑선의 설계를 그렸으며 바다에는 거북선 육지에서는 거북거의 사용을 주청하였다. 저서로는 간재집이 있다. 영주 오계서원에 배향되었다.
  • 이보흠(李甫欽 ,1397년 ~ 1457년(세조 3):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大田). 아버지는 부사직 이현보(李玄寶)이다. 유방선의 문인으로서 1429년(세종 11)에 문과(文科)에 급제,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를 거쳐 사정(司正)이 되고, 1443년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주부(主簿)가 되었다. 1448년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가 되어 대구(大丘 : 대구 大邱)에 사창법(社倉法)을 시험적으로 시행했고, 이 법이 효과를 거두자 계속적인 실시를 위해 힘을 다하였다. 『세종실록』의 편찬에도 관여하였으며, 문종 때 장령(掌令)을 지냈다. 1457년(세조 3) 순흥부사(順興府使)로서 순흥에 유배되어 있는 금성 대군(錦城大君)과 함께 단종(端宗)외 복위를 도모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박천(博川)에 장류(杖流) 후 교살(絞殺)되었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追贈).

인구[편집]

  • 2000년 36,781가구 총 116,970명

항렬표[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