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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베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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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베르나르
Émile Bernard
《꽃병이 있는 자화상》, 1897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꽃병이 있는 자화상》, 1897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신상정보
본명 에밀 앙리 베르나르
출생 1868년 4월 28일(1868-04-28)
프랑스 릴
사망 1941년 4월 16일(1941-04-16)(72세)
프랑스 파리
직업 화가
국적  프랑스
성별 남성
스승 페르낭 코르몽
사조 후기인상주의, 종합주의, 클루아조니즘
주요 작품
영향
묘비
묘소 파리 팡탱 공동묘지

에밀 앙리 베르나르(프랑스어: Émile Henri Bernard, 프랑스어 발음: ​[emil ɑ̃ʁi bɛʁnaʁ], 1868년 4월 28일~1941년 4월 16일)는 프랑스의 후기인상주의 화가이자 작가로,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외젠 보슈[1]와 예술적 친분을 쌓았고, 이후에는 폴 세잔과도 교류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대부분은 1886년부터 1897년까지의 비교적 젊은 시기에 제작되었다. 그는 19세기 말 미술 사조인 클루아조니즘과 종합주의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르나르의 문학 활동 역시 중요한데, 희곡, 시, 미술 비평, 그리고 자신이 기여했던 근대 미술의 결정적 시기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를 담은 미술사적 기록들을 남겼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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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앙리 베르나르는 1868년 프랑스 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여동생이 병약했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했고, 그 결과 릴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20명 이상을 고용하던 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할머니는 그의 예술 활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1878년 파리로 이주했고, 에밀은 생트바르브 중등학교(Collège Sainte-Barbe)에 다녔다.

《에밀 베르나르》의 초상,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1886년, 내셔널 갤러리 소장

그는 국립 고등 장식미술학교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1884년에는 페르낭 코르몽의 화실에 들어가 인상주의와 점묘주의를 실험했으며, 이곳에서 화가 루이 앙케탱과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와 친분을 쌓았다. 베르나르는 회화에서 지나치게 표현적인 경향을 보였다는 이유로 국립미술학교에서 정학 처분을 받은 뒤, 그는 브르타뉴 지방을 도보로 여행했고, 그곳의 전통과 풍경에 깊이 매료되었다.

1886년 8월, 베르나르는 퐁타방에서 폴 고갱을 만났다. 이 짧은 만남에서 두 사람은 예술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다시 만날 것을 고대했다. 훗날 베르나르는 이 시기를 회상하며 “나 자신의 재능은 이미 완전히 성숙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화풍이 고갱의 성숙한 화풍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믿었다.

1887~18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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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La Grandmère), 1887년, 반 고흐 미술관

베르나르는 1887년 9월 해안 지역에 머물며 그의 할머니의 초상화인 《할머니》(La Grandmère)를 그렸다. 그는 다른 화가들과의 교류를 이어가며 고갱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 시작했다. 이후 파리로 돌아와 아카데미 줄리앙에 다녔고,[2] 자신의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은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났다. 그는 클리시 거리에서 반 고흐, 앙케탱, 툴루즈로트레크와 함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식당을 찾았다. 반 고흐는 이들을 ‘프티불바르 학파’(Petit-Boulevard)라고 불렀다.

1년 뒤, 베르나르는 도보로 다시 퐁타방으로 떠나 고갱을 만났다. 두 사람의 우정과 예술적 협력 관계는 빠르게 깊어졌다. 이 무렵 베르나르는 자신의 작업과 그 방향성에 대해 많은 이론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는 “가장 극단적인 단순성을 지니고, 개인의 개성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실천될 수 있으며,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예술을 찾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고갱은 이러한 생각을 언어로 명확히 표현하는 베르나르의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888년은 근대미술사에서 결정적인 해였다. 10월 23일부터 12월 23일까지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는 아를에서 함께 작업했다. 고갱은 퐁타방에서 발전시킨 새로운 양식을 아를로 가져왔는데, 그 대표작이 《설교 후의 환상: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었다. 이 작품은 강렬한 시각적 상징성을 지닌 그림으로, 고갱은 이미 9월에 이 작품의 스케치를 반 고흐에게 보내기도 했다.

고갱은 또한 베르나르의 《초록 목초지의 브르타뉴 여인들》을 함께 가져왔는데, 이는 자신의 그림과 교환한 작품으로 공동 작업실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작품 역시 매우 인상적인 것으로, 베르나르가 이미 8월에 여러 장의 드로잉을 반 고흐에게 보내며 소개했던 새로운 양식을 잘 보여준다. 그 영향으로 반 고흐는 1888년 12월 이 작품을 수채화로 모사해 동생 테오에게 보내며, 베르나르의 새로운 양식이 널리 알려져야 한다고 추천했다. 이듬해에도 반 고흐는 1889년 12월 10일 여동생 빌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르나르를 묘사하며 이 그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고, “너무나 독창적이어서 반드시 한 점을 갖고 싶었다”고 썼다.

1888년 9월 말, 반 고흐의 요청에 따라 베르나르와 고갱은 각각 서로의 초상화가 배경에 포함된 자화상을 제작해 보냈는데, 이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베르나르의 양식이 얼마나 일관되고 효과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1891년 베르나르는 오딜롱 르동과 페르디난트 호들러 등이 있는 상징주의 화가 그룹에 합류했다. 1893년에는 이집트, 스페인, 이탈리아를 여행하기 시작했고, 이후 그의 화풍은 더욱 절충적으로 변했다. 그는 1904년 파리로 돌아와 생애의 마지막까지 그곳에 머물렀으며, 1941년 사망하기 전까지 국립미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양식과 예술에 대한 이론: 클루아조니즘과 상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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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카페 데 자르(Café des Arts)에서 열린 ‘인상주의 및 종합주의 그룹 회화전’, 일명 볼피니 전시회 포스터

베르나르는 굵은 형태를 어두운 윤곽선으로 구분하는 회화 양식을 이론화했으며, 이는 클루아조니즘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폴 세잔의 영향을 연상시키는 기하학적 경향을 보이며,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와의 협업 속에서 발전했다.

일부에서는 이 ‘클루아조니즘’ 기법의 공로를 베르나르가 아니라 그의 친구 앙케탱에게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1887년 봄, 베르나르와 앙케탱은 “신인상주의에 등을 돌렸다”고 전해진다. 베르나르는 또한 세잔의 작품에서 받은 영향에 대해, 브르타뉴에 있을 당시 “스펙터클에서 불필요한 모든 것은 현실로 덮어버려 우리의 눈을 차지하고 정신을 가린다. 의미를 만들기 위해서는 장면을 단순화해야 하며, 어떤 면에서는 그 구조를 그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사용하는 첫 번째 수단은 자연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하는 것이다. 선은 주요한 대비로만 줄이고, 색은 프리즘의 일곱 가지 기본색으로 환원한다. 사물이 아니라 양식을 보게 하는 것, 객관적인 것보다 추상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다. 두 번째 수단은 직접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개념과 기억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내면의 기억과 구상을 더 많이 불러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자연 앞에 있으면서도 나 자신을, 즉 나를 표현하고 있었다. 외적 형상의 침묵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의미가 있었다.”

상징주의와 종교적 주제는 베르나르와 고갱의 작품 모두에서 나타난다. 1889년 여름, 베르나르는 르 풀뒤에 홀로 머물며 많은 종교 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상업적 작업을 병행해야 했던 상황에 불만을 느꼈다. 베르나르는 편지와 글, 여러 성명을 통해 상징주의와 자신의 관계를 자주 언급했는데, 이를 기독교적 본질과 신성한 언어로 보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상징주의라고 믿었으며, 이전의 종교적 상징주의 시도들은 아름다움의 본질을 드러내긴 했지만 진리를 찾지는 못했다고 보았다. 르네상스 이전의 예술은 가시적인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즉 형태나 구체적 대상이 아니라 이념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1890년경 상징주의의 부흥을 통해 이를 회복하고자 했다. 베르나르가 생각한 새로운 상징주의는 인상주의를 극복하고, 조르주 쇠라와 같은 시각적 착시를 만드는 대신, 실제 상징을 단순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에게 진리는 기법이 아니라 사상을 통해 발견되는 것이었다.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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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베르나르에게 가장 큰 좌절 중 하나는 폴 고갱이 회화적 상징주의에 대한 자신의 영향을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2001–2002년 시카고 미술관과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은 공동으로 《반 고흐와 고갱: 남쪽의 아틀리에》 전시를 개최하여, 베르나르의 기여를 재조명했다.

베르나르의 제자 중 한 명으로는 스웨덴 화가 이반 아구엘리(1869~1917)가 있다.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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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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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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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 Palais des Beaux-Arts. Notes sur la peinture
Le Moderniste I/14, 27 July 1889, pp. 108 and 110
  • Paul Cézanne
Les Hommes d'aujourd'hui, no. 387
  • Vincent van Gogh
Les Hommes d'aujourd'hui, no. 390, (1891)
reprinted in: Lettres & Recueil (1911), pp. 65–69
  • Néo-traditionnistes: Vincent van Gogh
La Plume III/57, 1 September 1891, pp. 300–301
  • Charles Filliger (!)
La Plume III/64, 15 December 1891, p. 447
  • Vincent van Gogh[3]
Mercure de France VII/40, April 1893, pp. 324–330
reprinted in: Lettres & Recueil (1911), pp. 45–52
  • Note
Mercure de France VII/44, August 1893, pp. 303–305
reprinted in: Lettres & Recueil (1911), pp. 53–57
  • Avant-propos pour le premier volume de la correspondance de Vincent
dated 10 June 1895
first published in: Lettres & Recueil (1911), pp. 59–63
  • Notes sur l'école dite de "Pont-Aven"
Mercure de France XLVIII, December 1903, pp. 675–682
  • Julien Tanguy dit le "Père Tanguy"
Mercure de France LXXVI/276, 16 December 1908, pp. 600–616
  • Preface
Lettres de Vincent van Gogh à Émile Bernard & Recueil des publications sur Vincent van Gogh faites depuis son déces par Émile Bernard, précédées d'une preface nouvelle par le même auteur, Ambroise Vollard, éditeur, Paris, 1911, pp. 1–43
  • La méthode de Paul Cézanne. Exposé critique
Mercure de France CXXXVIII/521, 1 March 1920, pp. 289–318
  • Une conversation avec Cézanne
Mercure de France CXLVIII/551, 1 June 1921, pp. 372–397
  • Souvenirs sur Van Gogh
L'Amour de l'Art, December 1924, pp. 393–400
  • Souvenirs sur Paul Cézanne: une conversation avec Cézanne, la méthode de Cézanne. Paris: Chez Michel, 1925.
  • Louis Anquetin
Gazette des Beaux-Arts VI/11, February 1934, pp. 108–121
  • Le Symbolisme pictural, 1886–1936
Mercure de France CCLXVIII/912, 15 June 1936, pp. 514–530
  • Souvenirs inédits sur l'artiste peintre Paul Gauguin et ses compagnons lors de leur séjour à Pont-Aven et au Pouldu
Nouvelliste du Morbihan, Lorient, (1939)
  • Note relative au Symbolisme pictural de 1888–1890
first published in:
reprinted in: Lettres à Émile Bernard, Editions de la Nouvelle Revue Belgique, Brussels 1942, pp. 241–257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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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예술가들과 주고받은 그의 서신은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다. 반 고흐, 고갱, 베르나르는 아이디어와 작품을 교환했으며, 반 고흐와 고갱이 베르나르에게 보낸 많은 편지들은 이들의 삶과 작품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오딜롱 르동, 폴 세잔, 엘레미르 부르주, 레옹 블루아, 기욤 아폴리네르,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 앙리 드 그루가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들", 브뤼셀, 1942년
  • 닐 맥윌리엄 편, "에밀 베르나르. 한 예술가의 편지들(1884–1941)", 디종, 2012년. 그의 전 생애를 아우르는 430통의 서신을 선별해 수록한 편집본이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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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https://www.eugeneboch.com Eugène Boch a common friend of Vincent van Gogh and Émile Bernard
  2. ↑ https://www.eugeneboch.com Eugène Boch a common friend of Vincent van Gogh and Émile Bernard
  3. ↑ This text and the Note following accompanied excerpts from Vincent van Gogh's letters to Bernard and to Theo, his brother, published in the Mercure de France 1893 through 1897. Translated to the German by Margarethe Mauthner, this selection was pre-published by Bruno Cassirer in Kunst und Künstler, Berlin, June 1904 to September 1905, and finally in a bestselling volume.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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