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 코크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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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코크런
Eddie Cochran
Eddie Cochran2.jpg
1958년경
기본 정보
본명 에드워드 레이먼드 코크런
(Edward Raymond Cochran)
출생 1938년 10월 3일(1938-10-03)
미국 미네소타주 앨버트 리
사망 1960년 4월 17일 (21세)
영국 서머싯주 바스
직업 싱어송라이터, 음악가
장르
악기
  • 기타
  • 보컬
활동 시기 1952년 ~ 1960년
레이블
관련 활동

에드워드 레이먼드 코크런(Edward Raymond Cochran, 1938년 10월 3일 ~ 1960년 4월 17일)은 미국계 음악인이다. 코크런의 〈Twenty Flight Rock〉, 〈Summertime Blues〉, 〈C'mon Everybody〉, 〈Somethin' Else〉 등속 로커빌리 노래들은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초기 청소년의 불만과 갈망을 포착하고 있다. 멀티트랙 녹음, 디스토션 기법, 오버더빙을 자신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실험했다. 기타, 피아노, 베이스, 드럼 연주가 가능했다. 그의 날카로운 복장과 잘생긴 젊은 외모는 1950년대 로커의 입장에서 반항적 태도의 본보기였으며, 불의의 사망으로써 그는 상징적인 입지를 확립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접한 코크런은 학교 밴드에서 연주하고 블루스 기타를 독학했다. 1954년 기타리스트 행크 코크런과 2인조 밴드를 결성했고 1년 뒤 해산했다. 제리 케이프하트와 작곡 경력을 시작한 그는 제인 맨스필드 주연의 영화 《더 걸 캔트 헬프 잇》에서 부른 〈Twenty Flight Rock〉으로 첫 성공을 거둔다. 직후 리버티 레코드와 음반 계약을 맺는다.

1960년 4월의 영국 투어 중 21세 방년에 코크런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브리스톨의 히포드럼 극장에서 막 공연한 찰나에 윌트셔 주 치프먼의 택시 탑승 가운데 사망했다. 생전에 유명한 작품들은 모두 음반화되었지만, 사후에 그보다 많은 곡들이 출판되었다.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또한 다양한 음악가들에 의해 곡들이 커버되고 있다.

생애[편집]

에드워드 레이 코크런은 1938년 10월 3일 미네소타 주 앨버트 리에서 태어났다. 12세 무렵 가족과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고 14세가 되면서 현지 그룹과 연주를 시작했다.[1]

1955년경 코크런 브라더스

1955년 학교를 중퇴하고 행크 코크런(혈연 관계는 없다)과 컨트리 앤 웨스턴 그룹 코크런 브라더스를 창립한다. 지역 컨트리 TV 쇼에 출연하고 엣코 레코드에서 싱글을 출판한다.[1]

단독 경력[편집]

시간이 지나 내슈빌로 근거를 옮긴 행크는 작곡가로 크게 성공하고, 에디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에 감응되어 음악적 지향을 변경한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제리 케이프하트와 작곡가 협력을 맺고 크레스트 레코드에서 자신의 첫 단독 싱글 〈Skinny Jim〉을 발매한다.[1] 이 노래는 〈Long Tall Sally〉에 대한 그의 답변으로, 이 싱글에는 양자의 버전이 모두 취입돼 있었다.[2]

제리 케이프하트는 이 싱글을 에디와 리버티 레코드의 계약 체결 및 로큰롤 영화 《더 걸 캔트 헬프 잇》 출연을 위한 "데모"로서 이용했다. 영화의 프로듀서는 엘비스의 기용을 고려했지만, 출연료를 댈 수 없어서 무산됐다. 제인 맨스필드 주연의 이 영화에서 그가 공연한 자작곡 〈Twenty Flight Rock〉은 애틀랜틱 레코드에서 발매 시 양면 모두 흥행에 실패했지만 여기서 보여준 엘비스스러운 연예 방식은 존 레논, 빌리 퓨리, 클리프 리처드, 폴 매카트니한테 영향을 미쳤다.[2]

에디가 리버티에서 출판한 첫 싱글은 〈Sittin' in the Balcony〉의 커버로, 작곡가 존 D. 루더밀크가 조니 디 명의로 위선 녹음한 곡이었다. 1957년 3월 싱글의 공개 직후 마미 밴 도렌 주연의 영화 《언테임드 유스》에 출연한다. 에디 스스로는 "전혀 좋아하지 않아요"라고 낮추었지만, 싱글은 물경 미국 톱 20 내로 편입되는 등 원작보다 성공했다. 이듬해까지 〈Mean When I'm Mas〉, 〈Pretty Girl〉이 미국 차트에서 아쉽게 낙방하고 〈Drive In Snow〉, 〈Jeannie Jeannie Jeannie〉가 소폭적인 히트를 기록했다.[2]

1958년 가을, 자작곡 〈Summertime Blues〉가 에디의 다시없는 히트를 기록했으며 끝내 영국 및 각국의 차트관문 돌파를 성사시킨다. 기악의 거개를 본인이 오버더빙하고 포 도츠 소속 베이스 가수 원 크로스비와 공조했다.[2] 이 곡은 더 후, 비치 보이스, T-렉스, 헤비 메탈의 선지자 블루 치어(1968년 미국 톱 20위 진입 달성), 더 스트레이 캐츠가 커버하면서 흔히 커버되는 록 노래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3]

에디의 차기 싱글 〈C'mon Everybody〉은 영국에서는 더 두드러지는 히트가 되었다. 1959년 톱 10위 달성, 1988년 톱 20위 달성에 더해서 그 이듬해 자이브 버니가 1위 메들리에 포함시켰다. 〈Home on the Range〉를 개작한 〈Teenage Heaven〉과 연인 샤론 셜리 및 형제 밥이 작곡한 〈Somethin' Else〉는 에디의 마지막 미국 히트곡이 되었다.[4]

영국 순회공연 및 사망[편집]

1960년 1월 에디는 첫 영국 데뷔에 착수한다. 동료 록 음악가 진 빈센트와 20주간의 순회공연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이즈음 레이 찰스 커버곡 〈Hallelujah I Love Her So〉가 순회공연과 맞물려 발매, 크게 히트되었다. 영국에서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던 TV 쇼 《보이 미츠 걸》에 출연했고 《NME 폴 위너스 콘서트》 출연 시에 "미국이 보내준 가장 약여한 공연자"라고 소개되었다. 영국 언론에서 에디는 "미국에서 록은 잠잠해지고 있지만, 영국 관객께서는 여전히 거친 음악을 위해주시네요."라고 진술했다.[5]

사망 바로 일주일 전 에디는 언론에 대고 "향수병으로 고생이에요. 며칠만 있다가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라고 밝혔다. 영국 퇴거 뒤에는 버디 홀리의 전속 밴드 더 크리케츠와 합류하기로 했다. 1960년 4월 17일, 브리스톨의 히포드럼 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샤론 셜리와 진 빈센트와 동승한 채 공항으로 향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5] 사고 현장에 처음 출두한 경찰관은 신입 경관 데이브 하몬이었다. 하몬은 이후 데이브 디를 예명으로 히트 가도를 걷는다. 에디의 사망 소식은 여러 영국 신문에서 특필되었지만, 미국에서는 음악지에 조그맣게 다뤄진 것이 다였다. 사후 발매된 싱글 〈There Steps To Heaven〉은 영국에서 정상에 올라가기도 했다.[6]

각주[편집]

참고 문헌[편집]

  • 맥알리어, 데이브 (2005). 《The Best Of Eddie Cochran》 (영어). EMI 골드. 
  • 피니스, 롭 (1988). 《The Eddie Cochran Box Set》 (영어). 리버티 레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