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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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씨는 한자문화권의 성씨이다.

들보 량 梁[편집]

한국[편집]

양(梁)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조사에서 460,600명으로 조사되어, 대한민국 성씨 인구 24위이다.

  • 제주 양씨(濟州 梁氏)의 시조는 탐라개국설화에 등장하는 양을나(良乙那)이다. 양을나의 후손 양탕(良宕)은 559년에 사신으로 신라에 방문하여, 진흥왕에게 양(梁)씨 성을 사성(賜姓)받았다. 그의 후손 양순(梁洵)이 682년(신문왕 2) 신라에 들어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후 한라군(漢拏君)에 봉(奉)해졌다. 제주 양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4명을 배출하였다. 양팽손(梁彭孫)이 현령(縣令)을 지냈고, 양팽손의 아들 양응정(梁應鼎)은 선조 때 공조참판·대사성을 지냈다. 2015년 인구 142,200명이다.
    • 남원 양씨(南原 梁氏) 중시조 양우량(梁友諒)이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공(功)을 세워 남원부백(南原府伯)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제주 양씨에서 분적(分籍)하였다고 한다. 문헌의 실전으로 선계(先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양능양(梁能讓), 양주운(梁朱雲), 양수정(梁水精)을 각각 분파(分派)의 기세조(起世祖)로 병부공파(兵部公派), 용성부원군파(龍城府院君派), 대방부원군파(帶方府院君派)로 각각 나뉘었다.[1] 양진(梁稹)이 고려 현종 때 상서좌복야 등을 역임하였고, 양백익(梁伯益)은 공민왕 때 개성윤(開城尹)으로서 흥왕사(興王寺)의 변에 공을 세워 1등공신에 오르고 우왕 때 찬성사상의(贊成事商議)에 올랐다.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46명을 배출하였다.[2] 양성지(梁誠之)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지중추부사·공조판서를 거쳐 좌리공신에 오르고 대사헌·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양성지의 손자 양연(梁淵)은 중종 때 공조참판·대사헌·좌승지·병조판서·이조판서·좌찬성·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2015년 인구는 307,724명이다.
    • 충주 양씨(忠州 梁氏) 중시조 양능길(梁能吉)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에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삼중삼한대장군(三重三韓大將軍)으로 국가의 대업을 이룩하여 예성부원군(蘂城府院君)에 봉해지자 제주 양씨에서 분적하였다고 한다. 충주 양씨는 고려 때 상장군(上將軍) 양유달(梁攸達),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양일(梁逸), 정위(正位) 양창(梁暢), 검교첨사(檢校詹事) 양공소(梁公紹), 금자광록대부 검교태자태보 수사도 중서시랑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 권판상서이부사 판상서형부사(金紫光祿大夫 檢校太子太保 守司徒 中書侍郎同中書門下侍郎平章事 權判尙書吏部事 判尙書刑部事) 양원준(梁元俊), 어사중승(御史中丞) 양문형(梁文烱), 장사랑(將仕郞) 양문수(梁文秀), 지주사 양숙(梁肅) 등을 배출하였다. 조선 조에 들어서는 대과 급제자 2명과 무과 급제자 1명을 배출하였으며, 인물로는 조선 세종 때 이조좌랑, 병조정랑을 지내고 이후 영의정으로 증직된 양여공(梁汝恭)과 그의 손자로 이조정랑 및 사헌부 지평을 역임한 양순경(梁舜卿), 순조 때 양종간(梁宗幹) 등이 있다. 2015년 인구는 751명이다.

중국[편집]

중국 (梁)씨는 약 1800만명으로 중국 성씨 인구 20위이다.

버들 양 楊[편집]

한국[편집]

(楊)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69,101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은 중화(中和), 남원(南原), 청주(淸州), 안악(安岳) 등이 있다.

남송(南宋)의 홍호(洪皓)가 엮은 〈송막기문 松漠紀聞〉에서 발해의 유력한 귀족 성(姓)으로 (高)·(張)·(楊)·두(竇)·오(烏)·(李) 6성을 언급하였다.[3][4]

고려 태조 때의 장군 양지(楊志), 광종 때의 문신 양연(楊演), 현종 때의 명장(名將) 양규(楊規)와 그 아들 양대춘(楊帶春), 문종 때의 문신 양신린(楊信麟) 등 많은 양씨가 고려사에 등장하나, 시조 이전의 계보는 알 수 없다.

  • 중화 양씨(中和 楊氏)의 시조 양포(楊浦)는 고려 고종 때 정승(政丞)을 지냈으며 나라에 공을 세워 당악군(唐岳君)에 봉해졌다. 당악은 평안남도 중화군의 옛 지명이다. 양포의 장자인 양동무(楊東茂)가 간의대부로 이부상서에 올랐으며 1270년(고려 원종 11년)에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였다.[5] 5세손 양원격(楊元格)이 고려조에 판사(判事)를 역임하였고, 양원격의 증손자 양희지(楊熙止)가 1474년(성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 대사간, 한성부우윤을 역임했다. 6세손 양백지(楊百之)는 고려 말에 서경천호(西京千戶)를 지내며 후손들이 평양을 중심으로 세거하였다.[6] 중화 양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5명을 배출하였다. 2015년 인구는 7,287명이다. 현대 인물로는 야구 감독 양상문이 있다.
  • 남원 양씨(南原 梁氏)의 시조 양경문(楊敬文)은 고려조에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를 지냈다. 9세손 양이시(楊以時)가 1357년(공민왕 6) 문과에 급제하여 국자감학유(國子監學諭), 고부군수(古阜郡守), 경기도안렴사(京畿道安廉使), 추밀원지신사(樞密院知申事),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처부(妻父)는 고려 말의 문신 탁광무(卓光茂)이다. 남원 양씨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8명을 배출하였다. 인물로는 양공준(楊公俊), 양홍(楊洪), 양사형(楊士衡)이 있다. 2015년 인구는 17,332명이다.
  • 청주 양씨(淸州 楊氏) 시조 양기(楊起)는 원나라에서 공민왕의 비 노국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왔다고 한다. 양기(楊起)의 손자 양백연(楊伯淵)이 공민왕 때 서북면부원수(西北面副元帥)로서 동녕부(東寧府)를 쳐서 공을 세웠고, 1377년(우왕 3년)에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6세손 양정(楊汀)이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록되고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으며,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청주 양씨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1명을 배출하였다. 인물로는 양사언(楊士彦)이 있다. 2015년 인구는 38,161명이다.
    • 안악 양씨(安岳楊氏) 시조 양만수(楊萬壽)는 양기(楊起)의 셋째 아들로 고려 때에 전서(典書)를 지내며 안악군(安岳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고려조에 중랑장(中郞將) 양강례(楊康禮)의 아들 양인비(楊仁庇)가 문과에 급제하여 판관(判官)을 역임하였고, 조선조에 양정신(楊廷藎)이 1657년(효종 8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역임하였다. 2015년 인구는 277명이다.
    • 밀양 양씨(安岳楊氏) 시조 양근(楊根)은 양기(楊起)의 다섯째 아들이라고 한다. 양중춘(楊重春)이 1833년(헌종 3)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1840년에 성균관전적·사헌부지평을 역임하고, 1847년 태안현감 겸 홍주진관 병마절제도위가 되었다. 2015년 인구는 3,536명이다.
  • 통주 양씨(通州楊氏)의 시조 양복길(楊福吉)은 원래 중국 통주(通州) 사람이다. 그는 명나라 9의사(義士)의 한 명으로 나라가 망하자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와서 북벌(北伐)을 꾀하였으나 실패하고 조선에 귀화해서 정착해 살았다. 후손들이 선조의 고향인 통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2000년 인구는 83명이다.

중국[편집]

중국 (楊)씨는 약 4천만명으로 중국 성씨 인구 6위이다. 양(楊)씨의 기원은 중국 홍농 사람 당숙우(唐叔虞)의 후손 백교(伯僑)가 주나라로 들어가 양후(楊候)에 봉해진 것에서 비롯되었다. 저족, 막호로(莫胡蘆)족, 양(揚)씨에서 개성한 양씨가 있다. 양(楊)씨는 중국 소수 민족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성씨이다.

들보 량 樑[편집]

(樑)씨는 196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온 성씨로 당시에 16명이 있었다.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000년에 957가구, 3,211명으로 조사되었으나, 2015년에는 6명으로 조사되었다. 梁씨나 楊씨의 오기로 보인다.

도울 양 襄[편집]

(襄)씨는 조선씨족통보에 주나라 때 장공의 아들 양중이 시호를 성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000년에 263가구, 823명으로 조사되으나, 2015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각주[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