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다다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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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다다요시(일본어: 足利直義 (あしかが ただよし) 아시카가 다다요시[*] 1306년 ~ 1352년 3월 12일)는 남북조 시대에 활약한 무장이다. 무로마치 막부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와는 친형제 사이이다.

생애[편집]

도막 ~ 막부 창설[편집]

손윗형 다카우지와 함께, 아버지의 측실로 호조 씨가 아닌 우에스기 기요코(上杉清子)에게서 태어났으며, 아시카가 씨의 관례에 따라 두 형처럼 처음에는 도쿠소케(得宗家)이자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싯켄(執権)인 호조 다카토키(北条高時)의 이름과 아시카가 씨의 선조 미나모토노 요시쿠니(源義国)의 이름에서 한 자(字)씩을 받아 다카쿠니(高国)로 이름을 올려 사용했지만, 후에 헤이시(平氏)인 호조 씨가 실권을 틀어쥔 막부에 반기를 든 뒤로는 가와치 겐지(河内源氏)의 인물들이 주로 썼던 글자인 「요시」(義)를 써서 다다요시(忠義)로 개명하였고, 나중에 한자만 다른 다다요시(直義) 바꾸었다.

겐코(元弘) 3년/쇼쿄(正慶) 2년(1333년) 앞서 막부 타도를 꾀하다 오키 섬(隠岐島)으로 유배당한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이 오키 섬 탈출에 성공해 센조 산에서 거병하자, 형 다카우지와 함께 천황측에 가담하여 막부의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 공격에 가세했다. 천황의 친정인 겐무 신정(建武新政)이 시작되고 사바노카미(左馬頭) 관직에 임명되었고, 새로 가마쿠라 후쇼군(鎌倉府将軍)이 된 나리요시 친왕(成良親王)과 함께 가마쿠라로 가서 가마쿠라 부의 싯켄직을 맡아 훗날의 가마쿠라 부의 초석을 쌓았다. 겐무(建武) 2년(1335년) 옛 막부 잔당이 다카토키의 어린 아들 도키유키(時行)를 앞세워 시나노(信濃)에서 거병하였고, 간토(関東)로 진격하였다. 나카센다이의 난(中先代の乱)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서 다다요시는 무사시 국(武蔵国) 이데노사와(井出の沢)[1]에서 반란군에 패하고 가마쿠라로 쫓겨왔고, 반란군이 가마쿠라로 밀려오자 앞서 유폐되었던 모리요시 친왕(護良親王)을 혼란 와중에 살해한다. 그리곤, 미카와 국(三河国) 야하기(矢作)[2]로 달아났다. 그 와중에 나리요시 친왕을 무사히 교토(京都)까지 돌려보냈다.[3]

그 해에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가마쿠라 잔당들의 반란 진압을 명분으로 천황의 명령도 없이 무단으로 원군을 일으켜 오자 형 다카우지에 합류, 반란군으로부터 가마쿠라를 탈환했다. 가마쿠라를 탈환한 뒤에도 다카우지는 가마쿠라에 머무르며 자신을 따랐던 사졸들에게 독자적으로 논공행상을 집행하는 등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였는데, 이는 사실 다다요시의 의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이에 반발한 고다이고 천황의 조정은 다카우지 추토령을 내리고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를 총대장으로 하는 다카우지 추토군을 파견했다. 궁지에 몰린 다카우지는 사면을 주청하며 칩거에 들어갔고, 다다요시를 위시한 군사들이 요시사다에 맞서 스루가 국(駿河国) 다고시가와라(手越河原)[4]에서 맞아 싸웠지만 패배, 이에 위기감을 느낀 다카우지는 직접 군을 이끌고 출진해 토벌군을 하코네(箱根) ・ 다케노시타(竹ノ下)에서 격파하고 그대로 교토로 쳐들어 갔다. 하지만 엔겐(延元) 원년/겐무 3년(1336년), 오슈로부터 상경한 기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顕家)와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 닛타 요시사다의 연합군과의 사이에 벌어진 교토에서의 시가전에 패해 교토에서 쫓겨났고, 이이어 셋쓰 국(摂津国) 데시마가와라(豊島河原)에서 패하자 규슈(九州)로 도주하였다. 규슈에서 세를 수습한 다카우지는 서국 무사들을 결집시켜 재차 교토로 진군했고, 진군 도중에 빈고 국(備後国)에서 고곤 상황(光厳上皇)의 인젠(院宣)을 받으면서 관군으로써 대의명분을 얻게 된다. 다타라하마(多々良浜)에서 겐무 정권측의 기쿠치 다케토시(菊池武敏) 군을 고전 끝에 격파하고, 바닷길로는 다카우지, 육지로는 다다요시가 총지휘를 맡아 지금의 효고 현 고베 시의 미나토 강(湊川)에서 합류해 이곳에서 닛타, 구스노키가 이끄는 관군을 격파하고(미나토 강 전투) 교토로 입성한다.

양두정치에서 간노의 소란[편집]

고묘 천황(光明天皇)을 옹립한 다카우지는 겐무시키모쿠(建武式目) 17조를 제정해 새로운 막부를 열었다. 이 식목의 제정에 있어서도 다다요시의 의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엔겐 3년/랴쿠오(曆應) 원년(1338년) 다카우지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직에 임명되고, 다다요시는 사에몬노카미(左兵衛督)에 임명되어 정무에 관련된 업무를 보게 되었다. 이는 '두 쇼군'이라 불린, 다카우지와 다다요시에 의한 이원정치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쇼헤이(正平) 3년/조와(貞和) 4년(1348년) 무렵부터, 아시카가 가문의 집사를 맡고 있던 고 모로나오(高師直)와 대립하면서 막부는 다다요시 세력과 반 다다요시 세력으로 양분되고 이는 급기야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이라 불리는 사건으로까지 발전한다. 이 혼란을 틈타 요시노의 남조도 세를 펴쳐 다카우지의 북조를 위협했다. 그러던 중 다다요시 세력의 참언으로 집사직에서 해임된 모로나오가 쇼헤이 4년/조와 5년(1349년) 동생 모로야스(師泰)와 함께 다다요시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다다요시는 형 다카우지의 저택으로 도망쳤고, 이를 쫓아 모로나오 형제의 대군은 쇼군 다카우지의 저택 주위를 포위했다. 모로나오 형제는 다다요시의 파면을 요구했고, 다다요시가 출가해 정계를 은퇴하는 것으로 사건은 수습됐다. 다다요시는 출가한 뒤 법명을 게이엔(慧源)이라 했다.

쇼헤이 5년/간노(觀應) 원년(1350년) 다카우지가 다다요시의 양자(그러나 혈통상 다카우지 자신의 아들이기도 하였다)인 다다후유(直冬)를 토벌하기 위해 주고쿠(中国)로 떠난 후, 다다요시는 교토를 탈출해 모로나오 토벌을 요청하며 남조에 투항해 버렸다.[5] 다다요시의 세력은 형인 다카우지를 압도하는 것이었고, 쇼헤이 6년/간노 2년(1351년) 하리마 국(播磨国)의 고메지 성(光明寺城)과 셋쓰 국의 우치데노하마(打出浜)[6]에서 다카우지 세력을 격파했다. 다카우지는 고노 모로나오와 모로야스 두 형제의 출가를 조건으로 다다요시와 화친하였고, 화의가 성립되었다. 모로나오 형제와 그 일가는 다다요시 파의 우에스기 요시노리(上杉能憲)에 의해 2월 26일에 제거되었다.

모로나오 형제가 제거된 뒤, 다카우지의 적장자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라(足利義詮)의 보좌를 맡아 다다요시는 정계에 복귀했다. 그러나 다카우지는 아들 요시아키라, 측근 사사키 도요, 아카마쓰 노리무라와 함께 출진해 남조에 항복하며 쇼헤이 일통(正平一統)을 이끌었고, 남조 정권은 다다요시 토벌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다다요시는 8월 1일에 교토를 빠져나와 호쿠리쿠(北陸), 시나노(信濃)를 거쳐 가마쿠라에서 반 다카우지 세력을 규합했다. 그러나 스루가 국(駿河国)의 삿타 산(薩埵山)[7], 사가미 국(相模国) 하야카와지리(早川尻)[8] 등지에서 다카우지에 패했고, 1월 5일에 가마쿠라에서 무장해제당하고 조묘지(浄妙寺) 경내의 렌푸쿠지(延福寺)에 유폐되었다. 이듬해인 쇼헤이 7년/분나(文和) 원년(1352년) 2월 26일, 급사한다. 향년 47세.

공식적인 사인은 병사라고 말하고 있지만, 군담소설 《태평기》(太平記)에서는 형 다카우지가 독살했다고 적고 있으며, 다다요시가 죽은 날은 묘하게도 고 씨 형제가 죽은 지 1주기에 해당하는 날이었다. 일본의 사학자 세노 세이이치로(瀬野精一郎)는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죽음으로, 고노 모로나오 형제에 의해 시작된 간노의 소란은 완벽히 그 막을 내렸다고[9] 평가한다(다만 다다요시 세력의 저항은 다다요시의 아들 다다후유를 맹주로 1364년까지 이어졌다).

덧붙여 다카우지는 죽기 직전인 쇼헤이 13년/엔분(延文) 3년(1358년) 죽은 동생 다다요시를 종2위에 위계되도록 고코곤 천황(後光厳天皇)에 상소했었다.

인물됨[편집]

  • 일설에는 《태평기》의 원형이 된 사서의 오류를 정정하였다는 이야기 등도 전해진다. 선승 무소 소세키(夢窓疎石)에게도 귀의한 일이 있다.
  • 한 살 차이 나는 친형제였던 다카우지와 형제로써의 사이는 몹시 좋았고, 다카우지는 다다요시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여 무로마치 막부가 세워진 뒤에는 군사 부문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세이이타이쇼군이라는 상징적인 지위로써만 두고 실제 정무는 모두 다다요시에게 위임했다고 한다. 「이승에서의 좋은 운은 다다요시에게 내려주시옵고 다다요시의 안온을 보전케 하옵소서」(今生の果報をば直義にたばせ給候て、直義安穏にまもらせ給候べく候)라 적은 다카우지의 원문(願文)이 시미즈 하치만구(石清水八幡宮)의 봉납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카우지에게도 군사 지휘권은 온연히 존재했고 그러한 이두정치는 필연적으로 막부 내에 파벌 싸움을 불러 일으켜 간노의 소란이라는 비극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
  • 현대 사학자들이 조울증이 있었던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몹시 심했던(조정으로부터 역적으로 몰린 것을 부끄러워하며 싸움을 피하고 한때는 출가하기까지 했다) 다카우지와는 달리 다다요시는 냉정침착한 자세를 잃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형을 보좌했다. 때문에 아시카가 씨가 천하를 쥐는 데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었다고 평가받는다.
  • 다카우지가 자신에게 들어오는 산더미처럼 쌓인 선물을 부하들에게 모두 나눠줄 만큼 욕심이 없었다는 일화는 유명한데, 다다요시는 애초에 그런 선물을 받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고 한다(《태평기》).
  • 많은 전공을 세운 도키 요리토(土岐頼遠)가 고곤 상황에게 행패를 부리며 들이닥치자, 요리토의 군사적 재능과 그가 세운 전공을 들어 그를 구명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조정의 권위를 중시한 다다요시는 그러한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 요리토를 처형했다. 고곤 상황의 권위를 가볍게 보거나 부정하는 것은 상황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된 형 다카우지와 그의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까지도 자칫 부정될 수 있는 것이었기에, 정에 흔들리지 않은 냉철한 판단으로 요리토를 처형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요리토의 무공을 감안해 도키 집안 자체에 대해서는 요리토의 조카에게 집안의 대를 잇게 하는 등 현실적인 절충을 시도하기도 했다.
  • 간노의 소란으로 형 다카우지와 대립하게 된 뒤에도 일관되게 무로마치 막부의 정통성을 옹호했다. 다다요시와 남조 사이의 화의 교섭을 기록한 「요시노 어사서안」(吉野御事書案, 『군서유종』에 수록)에서 다다요시가 승리하는 날에는 막부는 북조 정권을 해체하고 남조에 모든 정권을 반환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남조 측에 다다요시는 실제 천하의 질서를 지키는 것은 막부와 그 막부를 이루고 있는 무사들이므로 남조도 막부의 요구대로 무조건 교토로 귀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양자 화의 후에도 다다요시와 남조 정권은 서로 여전히 불신하는 상태가 이어졌다. 그 후, 다카우지는 남조와 화의교섭을 벌이면서 당면과제였던 다다요시 토벌을 앞세우며 남조 측의 요구를 전면 받아들인다는 항복선언에 가까운 조건을 제시했고 이에 안도한 남조 역시 다카우지와 손잡고 다다요시 토벌을 명령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조 앞에서 막부의 정통성을 옹호한 다다요시였지만 정작 막부의 쇼군이자 형인 다카우지와의 외교전에서 패함으로써 여러 구니의 무사들 뿐 아니라 오오타카 시게나리(大高重成) 같은 측근들로부터도 배반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각주[편집]

  1. 지금의 도쿄 도 현 마치다 시(町田市) 혼마치다(本町田).
  2. 지금의 아이치 현 오카자키 시(岡崎市)
  3. 모리요시 친왕 암살도 겐무 정권의 입장을 세우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사카다 고이치(阪田雄一)「나카센다이의 난과 가마쿠라 쇼군부」, 사토 히로노부(佐藤博信) 편집 『간토 아시카가 씨와 도고쿠 사회 - 중세 도고쿠론』(関東足利氏と東国社会 中世東国論)5, 이와다 쇼엔(岩田書院), 2012년, ISBN 978-4-87294-740-3
  4. 지금의 시즈오카 현 시즈오카 시(静岡市) 스루가 구(駿河区)
  5. 그러나 남조에 투항한 뒤에도 다다요시는 자신이 발급하는 문서마다 남조가 아닌 북조의 연호인 간노를 사용하고 있어, 그의 남조 투항은 편의적인 것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모리 시게아키(森茂暁), 「전쟁의 일본사」(戦争の日本史) 제8권 '남북조의 동란', 깃카와고분칸(吉川弘文館), 116-117쪽.
  6. 지금의 효고 현 아시야 시.
  7. 「埵」는 「토」(土)자 변에 「수」(垂)를 붙여 쓴다. 지금의 일본 시즈오카 현 시즈오카 시 시미즈 구(清水区).
  8. 지금의 가나가와 현 오다와라 시.
  9. 세노 세이이치로(瀬野精一郎) 저 『인물총서(人物叢書) ‐ 아시카가 다다후유(足利直冬)』, 깃카와고분칸(吉川弘文館), 2005년, p.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