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슐리외 추기경 아르망 장 뒤 플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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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망 장 뒤 플레시 드 리슐리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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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일자 1622년 4월 19일
품급 주교급 추기경
직책 수석국무대신
루송교구의 주교
출생 1585년 9월 9일
프랑스 파리
사망 1642년 12월 4일 (57세)
프랑스 파리
리슐리외의 삼면 초상화

리슐리외 프홍삭 추기경 아르망 장 뒤 플레시(프랑스어: Armand Jean du Plessis, cardinal-duc de Richelieu et de Fronsac, 1585년 9월 9일 - 1642년 12월 4일)는 프랑스정치가이자 귀족이며, 로마 가톨릭추기경이다. 162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루이 13세의 재상을 맡았다. 대뒤마소설삼총사》에서 악당 추기경으로 나와 전세계적으로 유명해 졌는데, 그는 실제로 위그노와 개신교인들을 탄압하고 정적들을 처형하는 등 공포정치를 펼친 악당이였다.

생애[편집]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의 활동[편집]

리슐리외는 프랑스 서부 리슐리외의 영주이자 앙리 3세의 주요행정관이었던 프랑수아 뒤 플레시와 파리 고등법원 법관의 딸인 쉬잔 드 라 포르트 사이에 태어났다. 5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의 경제적 상황이 나빠지면서 그는 자신이 집안을 다시 부흥시키겠노라 결심했다. 그래서 성직자로서의 인생을 살기로 한 그는 소르본 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1607년 4월 17일 22살의 나이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로 서품을 받고 1609년에는 루송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정치입문[편집]

재상으로 임명되다[편집]

리슐리외는 탁월한 지적 능력과 뛰어난 학구열, 부지런함을 인정받아 1614년에는 전국 삼부회성직자 대표로 출석하였다. 이때 중재자 역할을 맡아 능숙하게 협상을 벌인 덕분에 루이 13세의 모후이자 섭정인 마리 드 메디시스의 눈에 들어 그녀의 추천을 받아 정계에 진입하게 된다. 루이 13세와 마리 간의 정쟁에 휘말려 잠시 실각하기도 했지만, 정치가로서의 수완을 인정받아 1622년에는 추기경으로 승좌하였으며, 2년 후인 1624년에는 수석국무대신(사실상의 재상)으로 임명받았다.

절대왕정[편집]

리슐리외는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왕권 강화에 힘을 쏟았다. 왕권신수설전제군주제를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질서를 유지하려는 보수신학을 주장하며,행정조직을 정비하고 삼부회를 중지하는 등 절대왕정의 기초를 쌓아 올렸다.

종교정책[편집]

개신교에 대한 탄압[편집]

라로셸 포위전에서 리슐리외

또한, 프랑스개신교위그노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온건한 자세를 취하였으나,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 교회의 탄압에 맞서 영국을 끌어들려는 계획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억압정책으로 선회하였다. 이에 맞서 신앙의 자유를 존중받으려는 개신교 신자들은 프랑스 서부 해안도시인 라 로셸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1627년 프랑스 내 개신교 세력의 중심지인 라 로셸을 1년 동안 포위해 공략했다.

리슐리외는 라 로셸을 포위하고 바다쪽 항구에는 거대한 목제 방책(우측 사진 참조)을 세워 영국 해군의 지원을 원천 차단했다. 이 기간동안 고립된 라 로셸의 개신교인들은 기아와 질병의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 1년이 넘는 포위 동안 라 로셸 사람들은 쥐, 말 , 노새, 개, 그리고 고양이들을 잡아먹었고 어떤 사람들은 식초물에 가죽조각을 끓여 가죽 스프를 먹거나 혹은 풀을 먹으며 연명했다. 사망률은 하루 100명에서 하루 400명으로 증가했고 1627년 8월 2만5000명 이상이었던 주민은 5000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개신교인들은 1628년 10월 28일 항복했다.[1]

30년 전쟁[편집]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유럽 나라들 간의 세력 균형을 맞추기 위해 30년 전쟁(1618~48년)에 뛰어들어 스위스스웨덴 등 개신교 편에 서서 같은 로마 가톨릭 세력인 합스부르크 왕조(오스트리아 제국, 스페인)에 대항하였다.

이러한 그의 유연한 종교정책은 로마 가톨릭을 신봉하거나 프랑스스페인의 동맹을 옹호하던 일부 귀족이나 왕족의 강한 반발심을 불러왔다. 그래서 몇 번이나 리슐리외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리슐리외가 조직한 비밀경찰에 적발되어 관계자들이 줄줄이 참수당했다. 이러한 숙청은 리슐리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죽음[편집]

1642년 12월 4일에 죽었으며, 소르본 대학교 부속 성당에 안치되었다.


문학작품 속의 리슐리외[편집]

알렉산드르 뒤마의 소설삼총사에는 리슐리외 추기경이 나온다. 이 작품에서 그는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을 부추기고 왕권을 등에 엎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비열한 악당으로 묘사되었다. 이 때문에 《삼총사》는 가톨릭 교회에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참고 문헌[편집]

  • Belloc, Hilaire (1929). Richelieu: A Study. London: J. B. Lippincott.
  • Burckhardt, Carl J. (1967). Richelieu and His Age (3 volumes). trans. Bernard Hoy.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 Church, William F. (1972). Richelieu and Reason of Stat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 Kissinger, Henry (1997). Diplomatie. s.l.: Fayard.
  • Levi, Anthony (2000). Cardinal Richelieu and the Making of France. New York: Carroll and Graf.
  • Lodge, Sir Richard (1896). Richelieu. London: Macmillan.
  • Murphy, Edwin (1995). After the Funeral: The Posthumous Adventures of Famous Corpses. New York: Barnes and Noble Books.
  • Richelieu, Armand Jean du Plessis, Cardinal et Duc de (1964). The Political Testament of Cardinal Richelieu. trans. Henry Bertram Hill.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주석[편집]

  1. 김충현《루이 13세의 라 로셸(La Rochelle) 점령과 위그노의 약화》(서양사학연구 22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