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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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mido Incident - Hijacked Transit Bus.jpg
Silmido Incident - Survived Rebel.jpg

실미도 사건(實尾島事件)은 1971년 8월 23일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무의리(현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던 공군 북파공작 부대의 부대원들이 교관 및 감시병 18명을 살해하고 섬을 빠져나와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진입한 뒤 군(軍)과 총격전을 벌이다 대부분이 수류탄으로 자폭한 사건을 말한다. 부대원과 진압군·경의 총격 과정에서 경찰 2명과 민간인 6명이 사망하였다.[1]

개요[편집]

684 부대(1968.4 - 1971.8)는 실미도에 있었던 북파목적의 비밀부대였다. 이 부대는 1968년에 일어난 1·21 사태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같은 해 4월에 총원 31명으로 창설되었다. 684부대원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침투하여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혹독한 훈련(훈련 과정 중 7명 사망)을 받았으나,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작전 자체가 불확실해지자 가혹한 훈련과 장기간의 기다림에 불만을 품고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경 교관 및 감시병 18명을 살해하였고 이 과정에서 부대원 1명도 사망하였다.[2]

섬을 빠져나간 23명의 684부대원들은 12시 20분경 인천 옥련동 독부리(옹암) 해안에 상륙한 뒤, 인천시내버스(현대 R-192)를 탈취하여 청와대 방향으로 향하였다. 인천에서 육군과의 총격전으로 타이어가 터져서 버스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이들은 수원-인천간 시외버스(신진 FB100L, 태화상운 소속)를 다시 탈취하여 14시 15분경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현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 부대원 대부분이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목숨을 끊었고, 생존자 4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972년 3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을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규정하고 부대의 진상을 은폐하였고, 이후 이 사건은 세간의 관심에서 잊혀진 채 30여 년간 묻혀 있었다. 그러다 1999년684부대의 실상을 소재로 하는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가 발표되고 이 소설을 바탕으로 2003년동명영화가 개봉하면서 사건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실미도에 앞서 실미도 사건을 다룬 <쿠데타>가 개봉될 예정이었으나 제작비 등 여러 문제가 겹쳐 좌절됐으며[3] 이 과정에서 드라마 PD 출신 김종학 감독의 영화감독 데뷔도 무산됐다.

2004년 2월대한민국 국방부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에서 1968년 3월 한꺼번에 행방불명된 7명의 청년이 684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4]

각주[편집]

  1. '실미도 공작원' 유해 안치됐지만…풀리지 않는 유족의 한 연합뉴스, 2017.8.23.
  2. 주석궁 대신 청와대로 한겨레21, 2003.12.3.
  3. 김승모 (2013년 7월 31일). “[기고] 故 김종학 PD, ‘모래시계’ 그 후”. PD저널. 2018년 9월 10일에 확인함. 
  4. "충북 옥천 실종자 7명, 실미도로 끌려가" 연합뉴스, 2004.2.16.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