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를 평산이라 하였는데, 이는 그의 본관 평산 신씨에서 따온 것으로, 독립이 보장되는 것이 불확실하다고 본 신익희는 나중에 죽더라도 본관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아들의 호를 평산이라 지었다. 그는 1923년에 모친과 함께 상해로 부친 신익희를 찾아가 공부를 하면서 독립운동 대열에 참가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하였고 중국 중앙은행의 과원조장, 신탁국조장을 지내기도 했다.
아버지를 따라 귀국, 아버지 신익희의 정치활동을 보좌하였으며, 이후 민주국민당에 입당한 이래, 민주국민당과 민주당, 신민당에서 정치활동을 하였다. 1956년 8월 23일, 아버지 신익희의 죽음(5월 5일)으로 공석이 된 경기도 광주군 제3대 민의원의원 보궐선거에서 처음 당선되었고, 이어서 제5대, 제6대 총선에서도 당선되었다.
1975년 11월 10일 숨졌으며, 서울 수유리의 아버지 신익희 묘역 근처에 안장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