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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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원
申昌源
출생 1967년 5월 28일(1967-05-28) (50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전라북도 김제군 금구면
국적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직업 무직
신장 174cm
체중 73kg
혈액형 A형
혐의 절도, 강도치사
죄값 무기징역
현황 수감중
탈옥 1997년 1월 20일
~ 1999년 7월 16일
수감처 전주교도소

신창원(申昌源, 1967년 5월 28일 ~ )은 대한민국의 수감자로, 1997년 탈옥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한민국에서 범행자의 예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체포 당시 입었던 화려한 빛깔의 쫄티가 유행하기도 했다.

출생 이후[편집]

출생이후 신창원은 그의 모친이 그가 어렸을 때 사망하는 등 매우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대로된 교육도 받지 못하였다.

범죄 행위[편집]

학교를 그만두고 1982년에 절도죄로 소년원에 들어갔다. 신창원의 친아버지 신흥선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찰에게 신창원을 구속 수감시키라고 계속 요구했다. 이는 아들 신창원이 소년원에 가서 새 사람이 되길 갈망하였기 때문이었으나, 신창원은 오히려 이 사건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반항적인 인생을 살게 된다. 신창원은 출소 뒤에 서울로 올라갔다. 음식점 배달부 등을 하다 1983년 절도죄로 또 다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았다. 1989년 공범 3명과 함께, 서울 돈암동 정모 씨 집에서 강도행위를 하다 공범 중 하나가 정씨를 죽여 강도치사죄로 수배를 받았고 그 해 9월 검거 되었다. 검거 후,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고 청송교도소에 수감된 후 1994년 부산교도소에 이감 되었다.

탈옥과 검거[편집]

1997년 1월 20일 부산교도소의 화장실 쇠창살을 쇠톱날로 절단하고 탈출하였다. 이후 약 2년 동안, 전국을 오가며 약 9억 8000여만원을 훔쳤고, 훔친 돈으로 유흥업소 여종업원들을 유혹해 동거하며 아지트로 삼았다. 그러나, 동거할 곳이 없을 때는 토굴 등에서 생활하며 쥐고기로 연명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경찰의 추격에 쫓기는 중 신창원의 담당형사인 원종열 경장이 쏜 총에 맞아 부상당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추격을 끝내 따돌려 신창원은 자신의 초인적인 체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경찰은 신창원의 검거를 위해 헬리콥터를 띄우고 전경을 동원했으나 번번이 속수무책이었으며 열세 번을 눈앞에서 놓쳐 많은 경찰관들이 이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1999년 7월 16일, 그가 숨어있던 전남 순천의 아파트에서 TV수리를 의뢰받은 수리공의 제보를 받은 경찰에게 검거 되었고 2년 6개월간의 탈옥 생활은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이후 당시 수사과장 김진희는 제63대 광주동부경찰서장으로 부임, 신고한 수리공 김영군은 경찰 특채되었다. 국내 여성 경찰공무원 최초 강력계장으로 임명된 박미옥도 당시 특별검거팀 소속으로 활약하였다.

재검거 이후[편집]

재검거 이후에 22년 6개월 형을 추가로 선고받았으며, 현재 교도소에서 모범적인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수감 중에 중졸, 고졸 검정고시를 연이어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1][2]신창원이 이태원 햄버거 가게에서 사람을 죽인 아서 패터슨보다 무거운 형을 받은 이유는 아서 패터슨은 범행 당시에 미성년자였기 때문이다.

지금 나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쓰는데 나같은 놈이 태어나지 않는 방법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너 착한 놈이다.'하고 머리 한번만 쓸어 주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5학년때 선생님이 '이 새끼야, 돈 안가져 왔는데 뭐 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하고 소리 쳤는데 그 때부터 마음 속에 악마가 생겼다.

— 《신창원 907일의 고백》 중[3]

행정 민사 소송[편집]

2009년 9월 29일대구고등법원에 따르면 신창원은 지난 7월 작성한 서신 12통의 발송이 허락되지 않자 지난달 경북 청송3교도소장을 상대로 서신발송불허처분취소와 손해배상금 300만원의 지급을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신창원은 소장 작성 매뉴얼에 어긋남이 없이 모든 소장을 직접 작성했다. 정보비공개처분취소 행정소송의 소장 등은 A4 용지 7장 분량으로 정보비공개처분(처분 경위.위법, 관계법령, 소결)과 서신 수.발신 불허처분(처분 경위.위법), 손해배상 책임 발생, 결론 등의 기본요건을 갖췄다.

또한 신창원은 2010년 4월 1일 교도소에서 기자의 접견을 막고 편지를 외부로 보내주지 않아 피해를 봤다는 소송을 내어 승소하여 100만원의 배상을 받았다[4]

자살 기도[편집]

2011년 8월 18일 신창원은 자신의 감방에서 자살을 기도했고 중태 상태에 빠졌다. 현재 그가 복역중인 경북북부 제1교도소에 따르면, 특이한 가혹행위 등은 없었고 지난 7월 부친이 사망한 것에 대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이로써 신창원은 지난해 6월 흉악범만 수용된 중경비시설인 제2교도소에서 제1교도소로 이감된 지 1여년 만에 자살기도로 물의를 일으킨 셈이 됐다. 제2교도소는 특별관리가 필요한 아동 성폭행범 등 흉악범죄자와 문제 수형자만 분리 수용하는 국내 유일의 중경비 시설이다. 당시 신창원은 제1교도소에서 모범적인 수형생활로 일반 교도소로 이감된 바 있다.[5]

각주[편집]

  1. "나도 신창원 처럼" 대구교도소 면학 열풍, 《매일신문》, 2008년 1월 25일. 매일신문 홈페이지 이용
  2. 탈옥수 신창원 옥중 인터뷰, 《신동아》, 2008년 5월 26일. 신동아 홈페이지 이용
  3. 《신창원 907일의 고백》, 《중앙M&B》, 1999년 9월 1일. 네이버 홈페이지 이용
  4. 박순기 기자 (2009년 9월 29일). “탈옥수 신창원 법률 공부중 소송 4건 제기”. 연합뉴스. 2009년 9월 30일에 확인함. 
  5. 조진호 기자 (2011년 8월 18일). “탈옥수 신창원 자살 기도.…생명엔 지장 없어”. 스포츠경향.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