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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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오릉
(慶州 五陵)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사적
2014년 10월
종목사적 제172호
(1969년 8월 27일 지정)
면적89,550m2
시대신라 신라
소유국유
위치
경주 오릉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경주 오릉
경주 오릉
경주 오릉(대한민국)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67
좌표북위 35° 49′ 24″ 동경 129° 12′ 32″ / 북위 35.82333° 동경 129.20889°  / 35.82333; 129.20889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오릉(五陵)은 경상북도 경주 남쪽 약 2km 지점, 문천 남안의 송림 속에 있는 능묘이다. 1969년 8월 27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72호 신라오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1]

신라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과 그 부인인 알영부인의 능과 남해 차차웅·유리 이사금·파사 이사금의 능이라고 전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시조의 시체가 승천한 후 7일 만에 떨어진 것을 5개소에 매장한 것에서 오릉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개요[편집]

경주시내 평지 서남쪽에 위치한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다. 반면에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이 임금자리에 있은지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7일 후에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해서 몸의 다섯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했다고 한다.[2]

내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무덤의 겉모습은 경주시내에 있는 다른 삼국시대 신라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1호 무덤이 높이 10m로 가장 크며, 2호 무덤은 표주박형으로 봉분이 두 개인 2인용 무덤이다. 이러한 대형 원형 봉토무덤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 등장하는 것으로 박혁거세 당시의 무덤 형식은 아니다.

현지 안내문[편집]

이 능은 남산의 서북쪽에 해당하는 경주 분지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초기 박씨 왕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다섯 무덤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과 2대 남해왕, 3대 유리와, 5대 파사왕의 임금 네 분과 박혁거세왕의 왕후 알영부인의 능으로 전해 온다. 이는 삼국사기에 네 분의 왕을 담엄사 북쪽 사릉원 내에 장례를 지냈다는 기록과 삼국유사에서 박혁거세왕이 승천한 후 유체가 다섯으로 나뉘어 땅에 떨어지자 이를 각각 장사지내어 오릉이 되었다는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내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겉모습은 경주시내 평지 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다. 1호 무덤은 높이 약 7.86m로 가장 크며, 2호 무덤은 표주박형으로 봉분이 두 개인 2인용 무덤이다. 경내에는 박혁거세왕의 제향을 받드는 숭덕전과 그 내력을 새긴 신도비가 있으며, 그 위쪽으로는 알영부인의 탄생지라 전해지는 알영정이 자리하고 있다.[3]

각주[편집]

  1. 문화재청고시제2011-116호 Archived 2017년 11월 9일 - 웨이백 머신,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명칭 변경 및 지정·해제 고시》, 문화재청장, 대한민국 관보 제17560호, 392면, 2011-07-28
  2. 일연 (1281) 신라시조 혁거세왕 조(條) : 왕이 하늘로 올라가 7일 후에 유체가 부서져 땅으로 떨어지고, 왕후 역시 죽었다 한다. 나라 사람들이 합장하려고 하였는데 큰 뱀이 있어서 [사람들을] 쫒아내고 못하게 하므로, 5체를 각기 장례지내고 오릉으로 삼았다. 역시 이름을 사릉이라고 하니 담엄사 북쪽 릉이 이것이다. (王升于天 七日後遺體散落于地。后亦云亡。國人欲合而葬之。有大蛇逐禁。各葬五體為五陵。亦名蛇陵。曇嚴寺北陵是也。)
  3. 현지 "경주 오릉"안내문에서 인용

참고 문헌[편집]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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