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토폴 포위전 (1941년~1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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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토폴 포위전
제2차 세계 대전동부 전선의 일부
Bundesarchiv Bild 101I-278-0882-05, Russland, feuerndes Geschütz in der Nacht.jpg
교전국
나치 독일의 기 나치 독일
루마니아 왕국의 기 루마니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의 기 이탈리아 왕국
불가리아 불가리아 왕국[1]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기 크로아티아 독립국
소련의 기 소련
지휘관
나치 독일 에리히 폰 만슈타인
루마니아 왕국 게오르게 아브라메스쿠
이탈리아 왕국 프란시스코 미벨리
소련 이반 예피모비치 페트로프
소련 필립 오케야브르스키
소련 고르데이 레베첸코
병력
1942년 6월 6일: 203,800명 118,000명
피해 규모
독일군:
25.119명 사망 또는 실종
92.503명 부상[2][3]
루마니아군: 8,454명
1,597명 사망
6,571명 부상
277명 실종[4]
총 사상자: 126,076명
95,000명 포로 (3분의 2 부상)
5,000명 부상
적어도 18,000명 사망[4]
Eastern Front 1941-12 to 1942-05.png
세바스토폴 포위전 시기 동부 전선의 상황도

세바스토폴 포위전제2차 세계 대전동부전선의 전투 중 하나이다. 이 전투는 흑해크림반도 세바스토폴에서 나치독일, 루마니아, 이탈리아왕국 추축국과 소비에트 연방 간의 점령전이다. 1941년 6월 22일 추축국은 바르바로사 작전으로써 소련을 침공했다. 추축국 육군은 1941년 가을 크림반도에 도착해 크림반도 대부분을 점령했다. 추축국의 목표는 세바스토폴만 남았다. 1941년 10월부터 11월까지 추축국은 세바스토폴을 점령하려고 시도했다. 11월 말에는 주요한 공격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폭우로 인해 1941년 12월 17일까지 지연되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지휘하에 추축국은 최초 작전에서는 세바스토폴을 점령 할 수 없었다. 1941년 12월 소련군은 케르치반도에 상륙작전을 펼쳐 포위 공격을 지연시키고 추축국의 병력을 분산시키게 했다. 이 작전으로 한동안 세바스토폴이 함락되지는 않았지만, 크림반도 동부의 케르치반도 교두보는 1942년 5월 함락되었다.

세바스토폴의 제1차 공세 실패 후, 추축국은 1942년 여름까지 소련군을 포위한 채로 육상, 해상, 공중으로 포위전을 펼쳤다. 1942년 6월 2일 작전명 스퇴르팽(Störfang)을 수행하기 시작한 추축국은 소련의 붉은 군대흑해 함대를 향해 강력히 포격했다. 도이칠란트 루프트바페는 포위 공격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도이칠란트 공군은 추축국 포병의 부족으로 동참했고 여기서 지상군을 지원하려고 매우 유효하게 폭격했다. 1942년 7월 4일 나머지 소련군이 항복하고 추축국이 항구를 결국 점령했다. 양군은 포위 공격 기간 사장자가 매우 많이 발생했다.

소련군이 무력화하면서 추축군은 이 해 여름 동안 청색 작전이라는 코카서스 유전 공세 작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배경[편집]

소련군의 해군기지인 세바스토폴은 세계에서 강력한 요새 중 하나였다. 크림반도 남서부 끝의 석회암질 곶에서 깊이 침식한 곳에 있는 세바스토폴은 지상으로 접근하기 매우 힘들었다. 세베르냐 만이 내려다 보이는 고도가 높은 절벽 지대가 정박지를 보호하여 상륙 위협을 막았다. 소련 해군은 항구를 현대화하고 천혜의 방어에 더하여 내륙과 바다로 발사할 수 있는 견고한 해안 방어 시설을 건립했다. 포병은 강한 콘크리트와 장갑차 포탑으로 보호받았다. 항구는 주요한 목표물이었다. 세바스토폴 항구는 추축국이 더 먼 원해로 진출할 수 있게 해 줘 코카서스 항구와 산맥 지역을 해상이나 공중에서 공격이 가능하게 하는 잠재된, 중요한 해군기지·공군기지 역할을 했다.[5] 소련 공군은 1941년 6월 추축국의 소련 침공 이후 크림반도에서 루마니아로 폭격하면서 공군기지로서의 가치가 증명되었다.[6]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됐을 때 소련의 공격 목표로 크림반도가 들어가 있진 않았다. 도이칠란트군은 붉은 군대 대부분을 드니프르 강 서부에서 붕괴시키면서 진군하는 소탕 작전 도중 무혈입성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6월에 들어서는 소련 공군이 크림반도에서 루마니아의 석유 정제 시설을 폭격하면서 석유 11,000톤을 잃게 되었다. 도이칠란트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은 크림반도를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이라고 말하면서 1941년 7월 23일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33번째 지침에서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 같은 중요한 목표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7]

도이칠란트 육군 최고사령부는 크림반도가 루마니아 석유 시설 공격을 방어하려는 군사상 요처이고 최대한 빨리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남진하라는 자신의 명령에 대한 장애를 못 견디고 8월 12일에 크림반도를 즉시 점령하라는 말을 반복했다. 키예프에서 거대한 포위전이 일어나는 한 달여간, 9월 17일 도이칠란트 제11군의 지휘관이 된 상급대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지휘를 맡은 지 일주일 후 크림반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치열한 전투 이후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소련의 여러 반격을 격퇴하고 붕괴시켰다. 11월 1일에는 크림반도의 주도인 심페로폴을 점령했고 11월 16일은 크림반도 전체를 일소했다. 케르치가 11월 16일 함락된 후 유일하게 남은 지역은 세바스토폴이었다.[8]

소련에게는 다행스럽게도, 1941년 10월 말 소장 이반 예피모비치 페트로프가 지휘하는 독립 해안군 32,000명이 오데사에서 치열한 전투 이후 바다를 이용해 세바스토폴로 도착했다. 소장 이반 예피모비치 페트로프는 내륙에서 세바스토폴로 접근하는 곳을 방어하기로 했다. 소장 이반 예피모비치 페트로프는 내륙 지역에 가장 바깥쪽은 항구부터 16km에 떨어져 있는 3개 방어선을 만들어 항구를 향해 전진하는 추축국을 방어하려고 했다. 소련 제51군과 흑해 함대를 포함한 소련군은 10월 크림반도에서 패배하고 12월에 탈출하면서 세바스토폴의 주요한 방어군으로 소장 이반 예피모비치가 지휘하는 독립 해안군만 잔류했다. 9월 26일부터 11월 16일 사이 크림반도의 나머지 지역을 도이칠란트군이 점령하면서 루마니아 제3군도이칠란트 제11군은 세바스토폴 공격을 준비했다. 도이칠란트 제11군은 처음에는 보병 7개 사단으로 전체 전선 중 가장 약했다. 루마니아군은 수만 많았지 제대로 훈련되지 않고 장비도 부족했다. 날씨가 나빠지고 집중호우로 인해 추축국이 불리해지면서 군사 증강이 지연된 10월 중순, 흑해 함대 사령관인 부제독 필립 오크탸브르스키노보로시스크로 출항하여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았다. 12월 17일부터는 날씨가 추축국이 작전을 시작하기 좋을 정도로 나아졌다.[9]

만슈타인의 '기러기 사냥' 작전[편집]

그러나 소련군은 크리미아 반도에서 또다시 쓰라린 경험을 맛보게 되었다. 1942년 4월 소련군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 휘하의 독일군을 공격했다가 적군 역시 강화된 것을 알고 실망했다. 그때 독일군은 전선에 처음 등장한 제22장갑사단, 루마니아 제7군단, 전투기 21개 연대, 시투카 급강하폭격기 다수를 가진 제8항공군 등에 의해 강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련군의 공세는 잠잠해졌다. 이제 만슈타인은 히틀러의 명령대로 공세를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케르치 반도의 소련군 부대를 제거하고 오랜 세바스토폴 포위전에 종지부를 찍게 될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세바스토폴을 점령하고 흑해를 넘어 코카서스 지방의 청색 작전에도 때맞추어 참가할 수 있을 것이다. 케르치 반도 공격을 위한 준비는 5월 초에 완료되었다.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이 작전을 '기러기 사냥' 작전이라 불렀다. 기러기 사냥 작전은 5월 8일 시작되었다. 독일군의 첫 공격은 만슈타인이 계획한 대로 되었다. 그는 공격이 북으로부터 동쪽을 향해 가해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부대를 전개시켰다. 그리고 소련군 방어부대가 북쪽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다른 독일군 부대가 흑해 쪽에서 공격용 주정을 타고 곧장 남으로부터 물이 고여 있는 수로로 들어갔다. 기습당한 소련군은 전투태세를 가누지 못했다. 이 공격 직후 독일군 공병은 신속하게 수로에 조립식 교량을 걸었고, 보병이 이 다리를 건너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갔다. 소련군 방어부대는 들기러기가 날아오르듯 달아났다. 만슈타인의 장갑부대가 급히 그들을 추격했다. 이렇게 하여 독일군은 5월 17일까지 17만명의 소련군 포로와 250대의 전차, 1,110문의 대포를 노획했다.

기러기 사냥 작전 이후 만슈타인은 케르치 서쪽 250km 지점에 있는 세바스토폴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그러나 만슈타인은 오랜 경험을 통해 세바스토폴의 요새에 최후의 공격을 가하는 '철갑상어' 작전이 기러기 작전보다 훨씬 어려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어부대 배후에는 흑해 함대가 도사리고 있었으며 세바스토폴 주위에는 3개의 대규모적인 방어선이 있었다. 베를린도 인정했듯이 전진은 "미터 단위"의 격전이 될 것이었다. 1941년 가을에 독일군이 처음으로 이 도시를 공격한 이래 소련군은 이곳을 결사적으로 지켜왔다. "독일군은 세바스토폴을 함락시키기 위해 병사 10만명의 생명을 바쳐야 할 것이다. 만일 그대들에게 그런 희생을 치르도록 강요한다 하더라도 그대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소련군의 I. S. 유마세프 제독은 부하들을 격려했다.

세바스토폴 전투[편집]

1941년 10월 30일의 1차 공격 결과 독일군은 세바스토폴 남동쪽 14km지점인 발라클라바 구릉을 점령했다. 많은 사람들이 세바스토폴의 영웅으로서 소련의 노래나 시에서 찬양하고 있는데, 그들은 먼저 이 구릉의 전투에 등장한다. 즉 "세바스토폴의 수병 5명"이 그들이다. 탄약이 떨어진 수병 5명은 각자가 최후로 남긴 수류탄 다발을 안고 전진해오는 독일군 전차 밑으로 뛰어들어가 한 사람이 각 1대씩 독일군 전차를 주저앉게 했던 것이다. 12월 중순에 있었던 독일군의 제2차 공격에 의해 세바스토폴 방어군은 시 북쪽으로 약 9km 선까지 후퇴했다. 그런데 12월 31일 공격이 중단되었다. 그날 독일군 부대는 세바스토폴로부터 자기들을 견제하기 위해 상륙한 소련군과 싸우기 위해 케르치 반도 쪽으로 투입되었던 것이다.

그 겨울 내내 세바스토폴은 끊임 없는 일제포격과 폭격하에서 죽음의 고통을 맛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민이 지하의 대피호나 시 주변의 동굴로 이전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공장을 짓고 방어부대를 위해 무기와 탄약을 생산했다. 독일군 공격부대의 압력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실시된 소련군의 케르치 반도 상륙은 포위된 세바스토폴 사람들에게 마음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1942년 1월이 되었다. 독일군 대포는 불과 8.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시민들은 동굴을 떠나 시내로 돌아왔다. 수개월 동안 낙관적인 분위기가 널리 퍼졌다.

그러나 18일 후, 독일군이 케르치 반도로부터 소련군을 구축(驅逐)하자, 세바스토폴 시민들은 다시 맥없이 동굴로 들어가 독일군의 신공세에 대비했다. 사람들은 이번에는 적의 공격이 성공할 것 같아 암담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시를 방어하는 소련군은 거의 전력을 잃고 있었다. 흑해 동쪽인 코카서스 지방으로부터 보급품을 운반해 오던 소련군 선박이 대부분 독일 공군에 의해 격침당하고 말았다. 6월 2일까지 독일군은 초대형 대포를 가지고 왔다. 그중에는 원래 프랑스마지노선을 깨뜨리기 위해 제작된 거대한 3문의 대포도 포함되어 있었다. 독일군이 동원한 거대 포는 구경 600mm의 곡사포 '칼' 과 '가마' 곡사포 그리고 위력이 가장 센 '도라' 곡사포이다. 이 '도라' 포는 포신 길이 32m, 구경 800mm의 거포로서 복선의 선로를 이용하여 움직였다. 이 포는 바흐치사라이(세바스토폴 북동쪽 약 30km) 진지에서 많은 포탄을 세바스토폴 요새로 쏘아넣었다. 파괴력을 키우기 위해 때에 따라 무게 7톤의 철갑탄(鐵甲彈)을 쏘기도 했다. 이 포탄은 굳은 암반을 27m나 꿰뜷고 들어가 폭발했기 때문에 소련군 무기 탄약고가 폭발할 때도 있었다.

독일군의 가공할 포격이 개시되었다. 이후 5일 동안 계속 죽음을 부르는 포탄의 비가 시내로 쏟아졌다. 병사와 민간인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6월 7일이 되자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세바스토폴 방어력이 크게 약화된 것으로 판단하고 공격명령을 내렸다. 독일군 7개 사단과 루마니아군 2개 사단이 큰 파도처럼 시를 방어하고 있는 3개 방어선 중 최전방에 있는 방어선에 대해 공격을 가했다. 이 방어선에는 참호며 대전차 장애물, 지뢰 등을 깔아놓았다. 안쪽의 제2방어선은 시의 북쪽에 집중적으로 요새가 몰려 있었고, 남쪽으로는 자푼선이라 불리는 방어선이 있었다. 독일군 포병은 그 요새를 몰로토프, 스탈린 , 볼가, 체카, 시베리아 등등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독일군은 북쪽 요새를 돌파하더라도 다시 세베르냐만을 건너야 하고, 또 시를 둘러싼 최후의 방어선을 돌파해야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박격포 포좌, 기관총좌, 포병진지가 미로처럼 깔려 있었다.

독일군은 제1방어선을 돌파하여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하는 데 2일을 소요했다. 그들은 맨 먼저 스탈린 요새(세베르냐만 북동쪽)에 공격을 집중하여 6월 13일 이것을 점령했다. 독일군 제22보병사단의 전투 보고에 의하면, "이때 싸운 적은 아마도 지금까지 조우한 적들 중에서도 가장 완강한 무리였다." 라고 적혀 있다. 그 사단이 스탈린 요새에서 잡은 포로는 고작 4명이었는데, 그나마 이들이 투항한 것은 정치위원이 자살한 직후였다. 막심고르키 1세 요새는 세바스토폴 북쪽의 벨베크 골짜기를 흑해에 이르기까지 약 6km에 걸쳐 제압하고 있었는데, 이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독일군이 쓴 '뢰흘링크 포탄'은 중량 1톤으로 바위나 콘크리트 속으로 파고들어가 폭발하는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2회에 걸친 뢰흘링크 폭탄 공격으로 이 요새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아직 고르키 요새는 죽지 않았다. 독일군 보병은 미로 같은 통로를 한 발짝씩 싸우면서 나아가야 했고, 그들은 파괴된 보루를 6월 17일이 되어서야 완전 점령할 수 있었다. 같은 날 몰로토프, 체카, 시베리아, 우랄 그리고 볼가 등 각 요새가 독일군 수중에 떨어졌다.(이 요새들은 모두 세베르냐만 북쪽에 있다.) 이 시점에서 독일군은 세바스토폴 동쪽에 있는 자푼선(제2방어선)을 공략했다. 만슈타인은 시내를 내려다보는 높은 언덕 위에 서서 전황을 살폈다. 그의 계획으로는 세바스토폴 동쪽 6km 지점에 있는 잉케르만 요새를 돌파한 다음 방비가 단단한 자푼 요새로 우회할 참이었다. 6월 28일, 독일군 돌격대는 만 동쪽의 체르나야강을 도하하여 잉케르만을 급습하였다. 만슈타인이 예정했던 우회 공격은 사실상 불필요하게 되었다. 독일군 부대가 잉케르만 요새로 침투하자, 배후의 벼랑이 대폭발을 일으키더니 높이가 27m인 암벽이 약 900m에 걸쳐 무너지면서 수천명의 사람이 그 밑에 깔렸다. 소련군은 항복보다 죽는 것을 택했던 것이다.

독일군은 잉케르만 고지와 골짜기를 점령한 다음 포격과 비행기의 지원 하에 만을 건넜다. 독일군은 6월 29일 자푼 방어선을 돌파하고 1854~1856년의 크리미아 전쟁 때 전사한 영국군이 묻힌 공동묘지를 탈취했으며, 무너진 기념비 사이에서 버티던 소련군 포병 진지를 침묵시켰다. 이어 자푼 방어선 남쪽으로 진격한 독일군 제72사단은 "풍차의 언덕"(세바스토폴 남쪽 약10km)을 공략하여 세바스토폴로 향하는 주요 도로를 확보했다. 7월 1일, 독일군은 시 중심부를 향해 다시 한번 포격을 시작하였다. 이는 독일군이 시내 소탕전에서 입을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한 것이다. 소련군은 크리미아 반도 최서단의 케르소네스곶으로 후퇴했다. 잠수함을 동원해서 군 수뇌부와 부상자를 되도록 많이 데리고 나왔지만, 남은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싸웠다. 한 장교는 상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우리는 여기가 당신이 죽는 장소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당신은 자기 임무를 훌륭히 수행할 것이며 살아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당신을 두렵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기를 속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부상자를 케르소네스로 철수시키고 있다. 원하건데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숨이 붙어 있는 한 부상자를 위해 원호해주길 바랄 뿐이다."

7월 3일, 소련군의 마지막 부대가 항복함으로서 세바스토폴 포위전은 개시된 지 247일만에 끝이 났다.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 약 10만명의 소련군 포로를 얻게 되었다.

결과[편집]

결국 도이칠란트군은 세바스토폴을 점령하였으나 10개월이나 걸린 공격과 추위로 인해 양군 다 해를 입었고 세바스토폴에서 도이칠란트군은 25,000명이 전사했고 소련군은 전멸했다.

각주[편집]

  1. Hayward 1998, pp. 50–51: Allowed German and Italian warships to use Bulgarian ports for operations in the Black Sea.
  2. “Human losses in World War II. German Statistics and Documentes”. 2012년 10월 2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3월 28일에 확인함. 
  3. “Human losses in World War II. German Statistics and Documentes”. 2015년 12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3월 24일에 확인함. 
  4. Forczyk 2008, p. 90.
  5. Dear and Foot 2005, p. 774.
  6. Bergstrom 2007, p. 43.
  7. Forczyk 2008, p. 6.
  8. Forczyk 2008, p. 8–9.
  9. Dear and Foot 2005, p. 775.

서지[편집]

  •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의 반격>
  • Bergström, Christer. Barbarossa – The Air Battle: July–December 1941. London: Chervron/Ian Allen. ISBN 978-1-85780-270-2.
  • Bergström, Christer. Stalingrad – The Air Battle: 1942 through January 1943. Midland Puplishing, Hinkley, 2007. ISBN 978-1-85780-276-4
  • Brookes, Andrew. Air War Over Russia. Ian Allen Publishing. 2003. ISBN 978-0-7110-2890-6
  • Forcyzk, Robert. Sevastopol 1942: Von Manstein's Triumph. Osprey, Oxford, 2008. ISBN 978-1-84603-221-9
  • Hayward, Joel S.A. Stopped at Stalingrad: The Luftwaffe and Hitler's Defeat in the East, 1942–1943.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8. ISBN 978-0-7006-1146-1
  • Hooton, E.R.. Eagle in Flames: The Fall of the Luftwaffe. Arms & Armour Press. 1997. ISBN 978-1-86019-995-0
  • Keyser, Carl A. WWll Diary held by the author's fami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