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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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균유(중국어: 沈鈞儒, 병음: shěn jūn rú 선쥔루[*], 1875년 1월 2일 ~ 1963년 6월 11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청나라,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세 시기에 걸쳐 관직을 역임하였다. 저장성 가흥(浙江省 嘉興) 출신으로 자는 병보(秉甫), 호는 형산(衡山)이다.
생애[편집]
청조 시기[편집]
- 1904년(광서제 30년) 진사에 급제하여 1905년 일본 명문 사립 대학 호세이 대학(法政大學, 법정대학)에 유학하였다. 1907년 청나라로 돌아와 1909년 저장성 자의국(浙江省 諮議局, 저장성 지방의회) 부의장(副議長)이 되었다.
중화민국 시기[편집]
- 1922년 중화민국 북경정부 참의원 비서장(北京政府 參議院 秘書長, 중화민국 북경정부 상원의회 비서실장 겸 사무총장)을 지내고, 1926년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 북벌군이 저장성을 함락시키고 임시정부를 세우자, 저장성 임시정부 정무위원 겸 비서장(浙江省 临时政府 政务委員 兼 秘書長, 저장성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비서실장)이 되었다.
- 1927년 상해법과대학 교무장(上海法科大学 敎務長, 상해법과대학 총장)[1]이 되었고, 4·12 사건(四一二 政变, 4·12 정변) 이후 통공(通共) 혐의로 한때 구금되었다가 석방 후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 1935년 상해문화계 구국회(上海文化界 救國会)를 조직하고, 1936년 전국 각계 구국연합회(全國 各界 救國聯合会)를 결성하였다. 같은해 11월, 칠군자 사건(七君子 事件)으로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유명한 칠군자(七君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 1945년 중일전쟁이 끝나고, 중국인민구국회 주석(中國人民救國会 主席)을 맡았다.
- 1947년 중국 국민당 정부는 국공내전에 반대하던 중국민주동맹을 해산시켰고, 민주동맹은 1948년 홍콩에서 열린 민주동맹 1기 3중전회에서 중국 공산당과 연립 정부를 설립할 것이라고 성명하였다.
중국공산당 시기[편집]
- 1949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 제1기 전체회의에 참석하여 중앙인민정부위원(中央人民政府委員)에 당선되었다.
- 1949년 ~ 1954년 초대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원장(最高人民法院 院長, 대법원장)을 역임하였다.
- 1949년 ~ 1954년 제1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 全國委員會 副主席, 정협 전국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 1954년 ~ 1959년 제2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 全國委員會 副主席, 정협 전국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 1959년 ~ 1963년 제3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 全國委員會 副主席, 정협 전국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 중국정치법률학회 부회장(中國政治法律學會 副會長)을 역임하였다.
심균유 고택과 기념관[편집]
가흥(嘉興)에는 심균유의 집터가 있는데, 1993년 저장성(浙江省) 문화재 보호 단위로 지정되었으며, 심균유 기념관(沈鈞儒 記念館)이 건립되어 있다.
형산공원(衡山公園)과 심균유 동상[편집]
형산공원(衡山公園)은 심균유(沈钧儒)의 호 형산(衡山)을 따서 이름지어진 공원이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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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편집]
- 《중국위키백과》
-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전임 (초대) |
제1대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원장 1949년 10월 ~ 1954년 9월 |
후임 동필무 |
전임 장란 |
제2 · 3대 중국민주동맹 주석 1955년 10월 ~ 1963년 6월 |
후임 양명헌 |
전임 (초대) |
제1 · 2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1954년 ~ 1963년 |
전임 (초대) |
제1 · 2 · 3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 1949년 ~ 1963년 |
후임 심안빙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