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에너지 위기
1970년대 에너지 위기(영어: 1970s energy crisis), 석유 위기(영어: Oil crisis), 또는 오일 쇼크, 석유 파동(영어: Oil shock[※ 1])은 원유 값이 급등하여 전 세계 각국에 경제적 타격을 준 경제 위기를 말하며,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2차례의 유류 파동은 각각 1973년과 1978년에 일어났다.
1973년 석유 위기 (제1차)[편집]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 발발 이 후 페르시아 만의 6개 산유국들이 가격인상과 감산에 돌입, 배럴당 2.9달러였던 원유(두바이유) 고시가격은 4달러를 돌파했다. 1974년 1월엔 11.6달러까지 올라 2∼3개월 만에 무려 4배나 폭등했다. 이 파동으로 1974년 주요 선진국들은 두 자릿수 물가상승과 마이너스 성장이 겹치는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어야 했다.
대한민국의 경우, 1973년 3.5%였던 물가상승률은 1974년 24.8%로 수직상승했고, 성장률은 12.3%에서 7.4%로 떨어졌다. 무역수지 적자폭도 크게 확대(10억 달러→24억 달러)됐다.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에너지 수요가 많은 중화학공업으로 전환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충격은 더 컸다. 1975년에 이르러 성장률은 6.5%로 더 떨어졌고, 물가는 24.7%의 고공비행을 이어갔다. 후 폭풍은 2년간 지속됐고, 1976년에서야 비로소 경제는 정상을 되찾았다.[1]
1차 유류 파동 당시에는 1개월 만에 국제유가가 약 3.9배로 올랐고 대한민국의 환율도 21.9% 올랐다. 경제성장률은 3%선으로 급락했다. 1973년 당시 대한민국 서울의 자가용 승용차는 5만4331대였으나 1차 유류 파동으로 인해 9,518대가 줄어 1974년에는 4만 4,813대가 되었다. 1971년에는 3만9054대, 1972년에는 4만753대, 1973년에는 5만4331대, 1974년에는 4만4813대, 1975년에는 4만7881대, 1976년에는 5만4954대, 1977년에는 7만4320대, 1978년에는 10만6960대로 1차 석유 파동 시기를 제외하고 서울의 자가용 승용차 댓수는 해마다 증가하였다.
1차 유류 파동으로 6%대였던 미국의 국채수익률은 8%대로 상승했다.[2] 이로 인해 당시 자동차시장에서 대 변혁이 일어나게 되고, 시빅이 CVCC 엔진으로 새로운 배기가스 규제에 합격, 당시 약세였던 혼다의 이미지에 큰 변화가 생겼다.
1979년 석유 위기 (제2차)[편집]
1978년 12월 호메이니 주도로 이슬람 혁명을 일으킨 이란은 전면적인 석유수출 중단에 나섰고 배럴당 13달러대였던 유가는 20달러를 돌파했다.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30달러벽이 깨졌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무기화를 천명한 1981년 1월 두바이유는 39달러의 정점에 도달했다.
선진국들의 충격은 1차 파동 때보다 적었지만, 한국경제는 오히려 반대였다. 대내적으로 10·26 사건과 1980년 정치혼란이 겹치면서 1980년의 실질성장률은 경제개발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2.1%)를 기록했다. 물가상승률은 무려 28.7%에 달했고 실업률도 5%를 넘어섰다. 1981년 성장률이 6%대로 높아졌지만 기술적 반등 수준이었으며, 물가는 여전히 20%를 웃돌았다. 2차 오일 쇼크 역시 꼬박 2년간 한국경제에 치명적 충격을 주었다.[1]
2차 유류 파동 때는 6개월 만에 국제유가가 2.3배가 올랐고, 한국 환율이 36.5% 상승했다.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성장이 되었다.
유가 상승 폭 1차 때보다 컸던 1978년 2차 유류 파동 때는 8~9% 수준이었던 미국의 국채수익률이 15% 수준까지 올랐다. 한국의 회사채 수익률도 2차 유류 파동 당시 20% 초반에서 30%대까지 상승했다.[2]
같이 보기[편집]
- 중동신화: 1차 유류 파동 관련
- 주바일 항만공사: 1차 유류 파동 관련
- 2003년 이후 고유가현상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 ↑ ‘오일 쇼크’(oil shock)는 원래 ‘석유에 의한 공급 충격’을 의미한다.
참조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