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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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옥식
출생1944년 5월 13일(1944-05-13)(77세)
전라남도 광양시
성별남성
국적대한민국
학력서울대 문리대 동양사학과졸,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정치학박사
직업언론인, 정치학자(북한문제연구가)
활동 기간1973년 ~
소속사단법인 대한언론인회, 사단법인 한국정치학회
종교기독교(개신교)
가족배우자, 1남1녀

서옥식(1944년 5월 13일~ )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정치학자이다.

생애[편집]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운평리에서 태어나 순천 매산고등학교서울대학교 문리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했다. 1973년 동양통신사에서 외신부-사회부 기자로 일했고, 1981년부터 2002년 5월까지는 연합뉴스에서 외신부장, 북한부장, 편집국장, 논설고문 등으로 근무했다. 기자시절에는 언론통제가 극에 달하였을 때 사건기자로 활동하면서 주로 긴급조치위반사건 등 시국사건을 취재∙보도했다. 특히 1976년 명동 3∙1 민주구국선언(재야지도자 김대중, 함석헌씨 등이 명동성당에서 주도한 유신철폐요구사건)과 1979년 10·26 사건(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을 집중적으로 취재∙보도했다. 퇴임 후에는 경기대학교에서 정치학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하고.[1] 2003년부터 호남대를 시작으로 2006년 이후 성결대, 숭실대, 한남대, 경기대, 경남대 등에서 초빙교수, 연구교수, 강의교수, 초빙연구위원 등으로 재직해 왔다. 2005년부터 2011년까지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을 지냈고 2008년에는 선거기사심의위원회 심의위원에 임명됐다. 또 2008년 11월25일 한국언론재단 사업이사로 선임돼 2009년 12월 31일까지 근무했다.[2] 한국언론재단 이사 근무시절인 2009년 6월에는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개최된 IPI(국제언론인협회)세계총회에 한국대표단원으로 참석했다.[3] 2009년 이후에는 서울대 관악언론인회 감사,[4] 서울대 동양사학과 총동문회장, 서울대 인문대학 총동창회 부회장[5] 을 각각 역임했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언론진흥재단 전문위원과 언론인금고관리위원, 한국광고자율심의기구 기사형광고 심의위원을 각각 지냈다.[6] 2012년 3월부터 2014년 10월까지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으로 일했다. 2014년 2월 5일에는 서울대총장 추천위원회 추천위원에 선임됐다.[7] 2015년 10월에는 국회개혁범국민연합 고문으로 위촉됐으며[8] 2016년 2월에는 사단법인 대한언론인회 이사(편집위원 겸임)로 임명됐다.[9] 2016년 4월부터는 임기 2년의 연합뉴스사우회 회장으로 선임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10] 주요 논문으로는 ‘남북한 통일정책과 논의에 대한 비교연구’(2002,석사논문), ‘김정일체제의 지배이데올로기 연구-선군정치를 중심으로’(2005, 박사논문)등이 있으며[11] 저서로는 ‘통일을 위한 남남갈등 극복방향과 과제’(2003), ‘북한의 선군정치론’(2006),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말말말-서해 NLL은 우리 영토선 아니다’(2010), ‘오역의 제국-그 거짓과 왜곡의 세계’(2013), ‘북한 교과서 대해부’(2015) 등이 있다.[12] 서옥식의 논문과 저서 등은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등을 비롯한 전국의 상당수 공공도서관과 대학도서관에 소장돼 있고 그 내용 개요는 인터넷 포털인 구굴, 야후, 네이버, 다음, 네이트, 줌 등에 소개돼 있다. 또한 위에 적시된 서옥식의 저서 5권 모두는 미국 스탠포드대 동아시아 도서관(East Asia Library)에 소장돼있다.[13]

약력[편집]

  • 2016.04- (現)연합뉴스사우회 회장
  • 2016.02- (現)사단법인 대한언론인회 이사겸 편집위원
  • 2015.10- (現)국회개혁범국민연합 고문
  • 2011.12- (現)통영의딸 송환대책위원회 대책위원
  • 2006.05- (現) 한국정치학회 정회원
  • 2003.01- (現)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연구위원
  • 2015.03-2016.03 서울대학교 총동창신문 논설위원
  • 2014.01-2016.07 서울대학교 총장추천위원회 검증소위원회 위원
  • 2014.01-2014.07 서울대학교 총장추천위원회 추천위원
  • 2012.03-2014.10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 2010.07-2012.07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총동창회 부회장
  • 2010.03-2013.03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인금고관리위원
  • 2010.02-2012.12 한국광고자율심의기구 기사형광고 심의위원
  • 2010.02-2010.07 한국언론진흥재단 전문위원
  • 2009.02-2015.02 서울대학교 관악언론인회 감사
  • 2009.10-2011.10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총동문회장
  • 2009.06-2009.06 제58차 IPI(국제언론인협회)세계총회 한국대표단원
  • 2008.11-2009.12 한국언론재단 상임이사
  • 2008.02-2008.05 언론중재위원회 선거기사 심의위원
  • 2007.03-2007.12 이명박 제17대 대통령후보 언론특보
  • 2006.09-2008.02 한남대학교 국방전략대학원 초빙교수
  • 2006.03-2014.06 성결대학교 사회과학대 행정학부 초빙교수
  • 2006.03-2007.08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서울) 연구교수
  • 2006.03-2007.02 숭실대학교 인문대 강의교수
  • 2005.05-2011.05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2004.08-2008.08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자문위원
  • 2004.01-2005.12 현대정치발전연구원 부설 현대아카데미 회장
  • 2003.03-2005.02 호남대학교 사회과학대 초빙교수
  • 2004 - 2016 Who's Who in the World 21판(2004)이후 13년간 연속 등재(ISBN 0-8379-1131-1)
  • 2004 Dictionary of International Biography 제31판 등재(ISBN 1-903986-0807)
  • 2002 Contemporary Who's Who 2002/2003판 등재(ISSN 1545-9233)
  • 2002 International Directory of Distinguished Leadership 제10판 등재(ISSN 1087-3998)
  • 2002.04-2002.05 연합뉴스 이사대우
  • 2000.11-2002.04 연합뉴스 논설위원실-기사심의실 고문
  • 2000.11- 2002.08 PHILAKOREA 2002 세계우표전시회 조직위원
  • 1999.09-2015.02 서울대 총동창회보 논설위원
  • 1999.08-2001.07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 1998.07-2000.11 연합뉴스 편집국장
  • 1998.07-2000.11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운영위원
  • 1997.06-1998.08 연합뉴스 편집국 북한부장겸 부국장대우
  • 1994.06-1997.06 연합뉴스 외신1부 방콕특파원(2차)
  • 1993.06-1994.05 연합뉴스 외신1부 부장
  • 1992.06-1993.05 연합뉴스 외신2부 부장대우
  • 1992.03-1993.08 한국언론연구원 국제뉴스보도론 강사
  • 1991.06-1992.06 연합뉴스 외신1부 차장
  • 1987.07-1991.06 연합뉴스 외신1부 방콕특파원(1차)
  • 1986.11-1987.07 연합뉴스 정치부 차장대우
  • 1981.01-1986.11 연합뉴스(舊 연합통신) 기획취재부, 정치부 기자
  • 1973.03-1980.12 동양통신 외신부-사회부 기자

저서[편집]

  • 거짓과 왜곡 조작 날조를 가르치는 사회-북한 교과서 대해부(The Trouble with North Korean Textbooks: Distortion of history, Government Maniplation and Lies)》도서출판 해맞이미디어, 2015, ISBN 978-89-90589-68-2
  • 《오역의 제국-그 거짓과 왜곡의 세계(The Empire of Misinterpretation and Mistranslation-The World of Inaccuracy and Distortion》수정판, 경희교육IP-도서출판 도리, 2014, ISBN 978-89-90932-43-3 03810
  • 《실록-언론·언론인의 길: 그때 그 현장 못다한 이야기(제4집)》공저, 대한언론인회, 2014.

ISBN 978-89-90237-66-8

  • 《故 노무현 전 대통령 말말말-어록으로 본 노무현의 종북좌파 진보주의와 그 적들》경희교육IP-도서출판 도리, 2010, ISBN 978-89-90932-41-9
  • 《나는 북한의 대변인 변호인 이었다(I am a Spokesman and a Defender of North Korean Government》수정판, 경희교육IP-도서출판 도리, 2013, ISBN 978-89-90932-41-9
  • 《김정일 ‘통일대통령’ 만들기 북한의 선군정치론》경희교육IP-도서출판 도리, 2006, ISBN 89-90932-37-8-93340
  • 《신 동북아 질서의 제문제(Issues on New World Order in Northeast Asia)》공저, 법영사, 2004, ISBN 89-7032-185-3
  • 《통일을 위한 남남갈등 극복방향과 과제(How to Overcome 'South-South Conflict' for the Unification of Korea》도서출판 도리, 2003, ISBN 89-90932-04-1 03300

논문[편집]

  • 《선군정치의 역사적 등장배경과 통치이데올로기적 기능》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논문집 제2집, 2008.
  • 《A Study on the Ruling Ideology of the Kim Jong Il Regime》abstract, The Graduate School of Politics & Policy, Kyonggi University, Seoul, Korea, 2007.
  • 《선군정치의 의미, 역사적 발생배경과 특징》 전남대 선군정치 학술토론회 주제발표논문, 2007.
  • 《김정일 체제의 지배이데올로기 연구- '선군정치'를 중심으로- (A Study on the Ruling Ideology of the Kim Jong Il Regime -An Analysis on ‘Military-First Politics’ -)》경기대 정치학박사 학위논문, 2005.
  • 《남북한통일정책과 논의에 대한 비교연구(A Comparative Study on the Unification Policies and Formulas of South and North Korea)》경기대 정치학석사 학위논문, 2002.
  • 《간디의 종교적, 도덕적 이념과 사회적 이상》서울대학교 문리대 졸업논문, 1973.

번역[편집]

  • 《랭군 아웅산묘소 폭탄공격사건 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 및 버마정부가 취한 조치에 관한 보고서 全文(1984년 제39차 유엔총회 제출 보고서》 (The Bomb Attack at the Martyrs' Mausoleum in Rangoon: Report on the Findings by the Enquiry Committee and the Measures Taken by the Burmese Government<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39th Session Agenda Item 128), 연합뉴스 출판국 발행 월간세계 10월호, 1984.

언론 기고문 등 기타[편집]

  • 《보수원로 130여명 한국자유회의 출범》연합뉴스, 2017.
  • 《‘한국자유회의 출범’…“촛불정국은 광장의 열기가 법치-대의정치 압도하는 헌정위기”》조선일보, 2017.
  • 《한국자유회의 출범을 환영한다》뉴데일리, 2017.
  • 《검인정 역사교과서-다양성은 커녕 한결같이 좌편향 붕어빵 교과서》대한언론(www.kjclub.or.kr), 2017.
  • 《제주 4.3사건은 ‘김일성 지령’으로 발발》올인코리아, 2017.
  • 《탄핵정국 주역은 가짜뉴스 양산한 언론》올인코리아, 2017.
  • 《국민을 우롱한 해괴한 헌재의 탄핵 판결》올인코리아, 2017.
  • 《사드배치 반대단체 촛불시위 대거 참가》올인코리아, 2017.
  • 《국가안보에 필수적인 사드 배치 반대 망언록》올인코리아, 2017.
  • 《촛불시위 주도 핵심세력의 정체는 무엇인가》대한언론, 2017.
  • 《언론이 보도 안한 촛불세력 명단 공개》올인코리아, 2017.
  • 《촛불집회 핵심단체들의 대북 굴종적 행적》올인코리아, 2017.
  • 《촛불집회 주도세력에 ‘반헌법-반국가단체’》올인코리아, 2017.
  • 《김영란법 파장-민간공익재단 지원 언론인 국내외 연수 불가》대한언론, 2017.
  • 《북한 핵무장을 조장한 우리시대의 망언록》올인코리아, 2016.
  • 《‘최순실 쓰나미’에 매몰된 나라》대한언론(www.kjclub.or.kr), 2016.
  •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일, 김일성 우상화 위해 날조된 것》일요신문, 2016.
  • 《왜곡된 중국의 9.3 전승절과 박근혜대통령의 천안문 망루외교》해피캠퍼스, 2016.
  • 《북한 인권법을 반대했던 33인의 발언록》올인코리아, 2016.
  • 《10월 17일 '타도제국주의동맹'은 날조극》올인코리아, 2016.
  • 《북핵과 사드에 관한 좌익의 억지·궤변들》올인코리아, 2016.
  • 《한국사회 100인 망언 총정리》올인코리아, 2016.
  • 《北교과서 ‘9·9절’ 조작…“남북총선거 거친 합법정부”》연합뉴스, SBS 뉴스, 2016.
  • 《‘더치페이’는 국적불명의 외래어…“ ‘각자내기’ 사용하자”》연합뉴스, SBS 뉴스, 2016.
  • 《北교과서 “미군, 무릎 꿇고 정전협정에 조인” 날조해 기술》연합뉴스, 2016.
  • 《김정은, 親祖母 김정숙 우상화작업 추진》올인코리아, 2016.
  • 《정전협정 63주년…北 교과서 “휴전일, 미국이 북한에 항복한 날”》MBN, 아시아경제, 2016.
  • 《‘영창 13일 발언’ 계기로 본 김제동의 과거 ‘막말’들》올인코리아, 2016.
  • 《“美가 무릎꿇고 도장 찍어”… 北, 정전협정 왜곡 ‘김일성 띄우기’》문화일보, 2016.
  • 《KBS 도전! 골든벨 문제있다, 오역된 소설제목을 정답으로 제시》해피캠퍼스, 2016.
  • 《광우촛불난동 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선동․왜곡 우리사회 60인의 망언 총정리》해피캠퍼스, 2016.
  • 《북한 교과서의 8.15 왜곡·날조·은폐 기술》올인코리아, 2016.
  • 《평화협정이 평화 보장한다는 건 사기극》올인코리아, 2016.
  • 《北교과서 “남한 무자비하게 끝장보겠다”》올인코리아, 2016.
  • 《김정일이 쌍안경 들고 남쪽 살피자 남한 병사들 눈멀어?》데일리안, 2015.
  • 《현행 교과서, 북한 독재는 2번 남한 독재는 24번 언급》데일리안, 2015.
  • 《북한의 ‘광명성 4호’ 발사기념 사진을 계기로 본 사진조작 사례들》올인코리아, 2016.
  • 《북 교과서 “훈민정음은 우리 인민들이 만들어” 황당》데일리안, 2015.
  • 《‘안경 낀 김일성’…보천보 업적 가로채려 사진 조작》연합뉴스, 2015.
  • 《“김정은 원수님, 3살 때 운전”, 이렇게 되고 싶은가》오마이뉴스, 2015.
  • 《北교과서 “南 민주화운동은 모두 김일성 교시 따른 것”》연합뉴스, 2015.
  • 《중국의 열병식 참가국으로 본 국제정치》올인코리아, 2015.
  • 《北역사교과서 “김일성 축지법…김정은 3세에 사격”》연합뉴스, 2015.
  • 《“김일성 축지법·김정은 3살에 사격을 했다니…”》 KBS 뉴스, 2015.
  • 《“이순신은 양반 위해 싸웠다”… 북한 교과서 첫 집대성》연합뉴스, 2015.
  • 《사실 왜곡하는 언론의 오역》KBS 뉴스, 2015.
  • 《‘한국서 누락’ 유관순, 일본·북한 교과서도 실었다》동양일보, 2015.
  • 《2014년 고교 한국사 교과서 2종엔 유관순이 없다》데일리안, 2015.
  • 《北 교과서 “김정일, 지도 까맣게 칠하니 日 암흑”》채널A, 2015.
  • 《소설 ‘앵무새 죽이기’는 작품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오역된 제목》해피캠퍼스, 레포트월드, 2015.
  • 《아직도 각종 유언비어․음모론과 전쟁중인 천암함 피격 사건》해피캠퍼스, 2015.
  • 《천안함 5주기---다시 보는 북한 비호 52인의 천안함 폭침 망언록》올인코리아, 2015.
  •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대졸업식 명연설문 한국서 오역: 감동은 커녕 무슨 뜻인지도 모•르게 번역》해피캠퍼스, 레포트월드, 2015.
  • 《누가 번역해도 오역이 불가피하다는 20세기의 최고소설 율리시스》제임스 조이스학회 홈페이지, 2015.
  • 《오역이 키운 타이타닉 여객선 침몰 희생자수》해피캠퍼스, 레포트월드, 2015.
  • 《북한의 역사날조-현대사 시발점이 다르다》해피캠퍼스, 2014.
  • 《영화 'Reservoir Dogs'는 '저수지의 개들'이 아니라 '창고의 개자식들'이 바른 번역》해피캠퍼스, 2014.
  • 《‘평화협정’이 평화 보장하는 것 아니다!》올인코리아, 2014.
  • 《‘KAL기 폭파 조작’ 주장에 가린 특종보도》올인코리아, 2014.
  •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링컨대통령 연설문 번역은 오역》해피캠퍼스, 2014.
  • 《교과서 최대의 오역 - 민주주의 대장전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해피캠퍼스, 2014.
  • 《민주주의 바이블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문은 오역됐다》레포트월드, 2014.
  • 《히치콕 영화 제목 ‘North by Northwest’는 일종의 판타지(환상) 같은 것》해피캠퍼스, 2014.
  • 《말실수, 오역, 오보 3 박자가 부른 독일통일의 서곡 베를린장벽 붕괴》해피캠퍼스, 2014.
  • 《최악의 종교탄압국 북한에 침묵한 교황》올인코리아, 2014.
  • 《교회헌금 500억으로 평양복판에 김일성영생탑 등 건립》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2014.
  • 《서울대총장 선출: 총추위와 이사회의 다른 결정》교수신문, 2014.
  • 《이명박 대통령 독도 발언을 오역해 ‘매국노’로 몰아붙인 국내 좌파언론들》레포트월드, 2014.
  • 《북한, 타이타닉 침몰한 날 ‘인류의 태양’이 떴다고 주장》올인코리아, 2014.
  • 《한국 기독교의 불편한 진실 신사참배》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2014.
  • 《국내 언론의 세월호 보도, 외국사례 인용에 오류많다》올인코리아, 2014.
  • 《북한은 3.1운동을 계급투쟁으로 규정》올인코리아, 2014.
  • 《성경에 근거없는 성모 마리아 승천 ‘Assumption’》대한기독교장로회총회, 2014.
  • 《진보와 보수를 선악 개념으로 가르치는 나라》대한기독교장로회총회, 2014.
  • 《보수(우파)와 진보(좌파) 제대로 알기》대한기독교장로회총회, 2014.
  • 《성경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는 오역된 표현》대한기독교장로회총회, 2014.
  • 《성경의 감람나무, 종려나무 표현 모두 오역》대한기독교장로회총회, 2014.
  • 《천안함 폭침 4주기 맞아 되돌아본 진보-좌파 인사 50명의 망언들》올인코리아, 2014.
  • 《평화협정이 평화 보장하는 것 아니다》올인코리아, 2014.
  • 《마르크스-엥겔스 ‘공산당선언’ 허구로 판명》올인코리아, 2014.
  • 《서옥식, ‘노무현의 反헌법 어록집’ 발간》올인코리아, 2014.
  •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오역된 제목》해피캠퍼스, 2013.
  • 《오역으로 점철된 EBS 대학 수능 외국어 영역 교재》해피캠퍼스, 2013.
  • 《기독교인이 죽으면 바로 천국간다는 것은 성서 오역-오해의 산물, 부활해야 갈 수 있다》해피캠퍼스, 2013.
  • 《마태복음의 ‘예수 처녀잉태 예언 실현’은 오역이 불렀다》해피캠퍼스, 2013.
  • 《미 부통령의 박근혜 대통령 접견 ‘베팅’ 발언 보도는 오역이 부른 대형사고》해피캠퍼스, 2013.
  • 《마태복음 기자도 ‘성경 오역’의 피해자》교회연합신문, 2013.
  • 《“2차 세계대전 日 핵폭탄 투하는 오역이 불렀다”》연합뉴스, 2013.
  • 《역사기념관은 서울대의 자부심 그 자체...건립 서둘러야》서울대총동창회보, 2013.
  • 《트루먼 행정부는 일본 언론의 오역때문에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했다》해피캠퍼스, 2013.
  •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마녀의 젖꼭지’는 오역, ‘마녀의 클리토리스’가 맞다》레포트월드, 2013.
  • 《서울대 ‘개학(開學) 1895년’은 왜곡된 역사 바로 잡은 것》대학신문, 2013.
  • 《대한민국을 남한 유일의 합법정부로 주장하는 것은 오역》동아일보, 2013.
  • 《좌파진영, 유엔결의문까지 오역하면서 대한민국의 한반도유일합법정부론 부정》해피캠퍼스, 2011.
  • 《좌파 선동 동영상물 ‘백년전쟁’ 오역으로 한국현대사 조작》올인코리아, 2013.
  • 《가장 잘못 쓰이는 개신교 용어 소천=천국직행》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2013.
  • 《우리말 성경의 ‘귀신’은 비기독교적 용어다》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2013.
  • 《오역이 부른 시험성적 빵점, 숙제도 오역 때문에 빵점》한국번역학회, 2013.
  • 《다시 주목받는 盧 전 대통령 국방관련 발언》동아일보, 2012.
  • 《서옥식 교수가 발췌한 노무현의 망언들》올인코리아, 2012.
  • 《‘서해NLL 포기밀약’의 진상은 밝혀져야》올인코리아, 2012.
  •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북한 장거리 미사일 발사 망언록》올인코리아, 2012.
  • 《역사교과서 집필시안 세 가지 쟁점》매일신문, 2011.
  • 《북한이 말하는 평화=대한민국의 공산화》올인코리아, 2010.
  • 《김정일시대 통치이데올로기로서의 선군정치와 대남전략》성결대 특강 주제발표문, 2010.
  • 《‘평화냐 전쟁이냐’는 북의 선군정치전략》올인코리아, 2010.
  • 《‘친북좌파’ 논리로 왜곡된 6.25》뉴데일리, 코나스넷, 2008.
  • 《세계가 조롱하는 한국의 광우병 촛불시위》뉴데일리, 2008.
  • 《PD수첩은 한국판 지미의 세계?》뉴데일리, 2008.
  • 《친북 좌파 논리로 왜곡된 6.25》뉴데일리, 2008.
  • 《피흘려 도운 우방 16개국을 내전에 개입한 제국주의 세력으로 매도해서야》연합뉴스, 2008.
  • 《What is ‘Military-First Politics’?》레포트월드, 2008.
  • 《공산당선언발표 160년...마르크스의 유령은 환생하는가》해피캠퍼스, 2008.
  • 《PD수첩 ‘광우병기획물’은 한국판 ‘지미의 세계’》뉴데일리, 2008.
  • 《사회과학 논문작성의 이론과 실제》해피캠퍼스, 2008.
  • 《노무현 대통령이 말한 인민, 인민주권》뉴데일리, 2008.
  • 《허위. 왜곡. 편파 보도도 언론의 자유인가?》뉴데일리, 2008.
  • 《오역이 부른 인류사의 비극...쇠고기 협상파문으로 되돌아 본 오역 사례들》연합뉴스, 2008.
  • 《한국전쟁 58주년 조명-6.25가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간의 전쟁’이라니 소름끼친다》레포트월드, 2008.
  • 《선군정치란 무엇인가(선군정치 문답풀이)》해피캠퍼스, 2007.
  • 《북이 말하는 평화는 ‘공산화’》뉴데일리, 2007.
  • 《노무현이 북서 쓴 ‘인민’과 ‘인민주권’의 의미》뉴데일리, 2007.
  • 《북한의 선군정치와 대남전략》해피캠퍼스, 2007.
  • 《북한이 말하는 평화》뉴데일리, 2007.
  • 《“김정일,핵포기 하기 힘들 것”》뉴데일리, 2007.
  • 《핵 문제 해결없는 평화협정은 ‘사기’》뉴데일리, 2007.
  • 《남북한 통일정책 어떻게 바뀌어 왔나》해피캠퍼스, 2007.
  • 《바람직한 통일관. 통일정책과 통일헌법 제정방향》해피캠퍼스, 2007.
  • 《조지 W. 부시 정부의 신군사전략과 동북아안보정책》해피캠퍼스, 2007.
  • 《남북정상회담이후 북한의 변화에 대한 평가》해피캠퍼스, 2007.
  • 《북한군 통수체제와 당-군 관계》해피캠퍼스, 2007.
  • 《탈냉전시대 러시아의 대외정책과 전략》해피캠퍼스, 2007.
  • 《한미동맹의 문제점 진단과 바람직한 방향》해피캠퍼스, 2007.
  • 《북한은 통일을 위해 핵을 사용할 것인가》레포트월드, 2007.
  • 《선군정치의 의미, 역사적 발생배경과 특징》레포트월드, 2007.
  • 《21세기 한국의 국가전략》 해피캠퍼스, 2007.
  • 《정부형태로서 내각제와 대통령제 비교-우리의 권력구조 변경논의에 부쳐-》레포트월드, 2007.
  • 《21세기 경쟁은 시스템이 아니라 CEO 들간의 리더십 경쟁》Better People Better World(한국인간개발연구원 발행), 2006.
  • 《80년 5월 그때 기자들은 어디에 있었는가?》기자통신(한국기자협회발행: 2001년 5월호 통권29호), 2001.
  • 《FAO, 세계식량사정 2010년까지 악화 경고》연합뉴스, 1996.
  • 《30년 군부통치에 맞선 태국 민주항쟁》월간 말지 1992년 7월호(통권 73호), 1992.
  • 《제8차 남북적십자 서울 본회담의 현장》북한연구소 발행 ‘북한’ 8월호(통권164호), 1985.

수상 경력[편집]

  • Distinguished Leadership Award for Outstanding Contributions to the Field of Editing(편집공로상): American Biographical Institute(2001)
  •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석사과정 수석졸업상(2003)
  •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박사과정 수석졸업상(2006)

논란 및 이슈[편집]

국가이익이냐 정권이익이냐: 보도성향 논란[편집]

민주노총 산하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이 발행하는 언론 전문비평 주간신문인 ‘미디어오늘’은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서옥식 신임 편집국장이 취임후 보도방향에 대해 “정권의 이익이 아닌, 국가의 이익에 충실하겠다”고 다짐했다면서 “이는 권력의 풍향에 따라 보도의 논지마저 흔들리던 과거의 관행과 결별하겠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미디어오늘은 또 “서 국장은 편집국내에서도 알아주는 소위 ‘확인 제일주의자’로 소속 부서 기자들이 귀찮을 정도로 ‘사실 확인’을 강조한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어“(북한부장을 역임한 서 편집국장이) 독자적인 시각에서 남북 문제에 접근할 생각이다. 한 민족 전체의 이익이 제일가는 기준이다. 갈등과 대립 구도로는 현재의 남북 관계를 정확히 볼수 없다”라고 말해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에 기여하는 대북 보도에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고 전했다.[14] 하지만 서옥식 편집국장의 이같은 다짐은 연합뉴스가 1999년 대통령인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총재 비서실장이었던 김옥두 의원의 부인관련 민감한 기사를 일부러 내보내지 않았다는 의혹이 일면서 퇴색하고 정권의 눈치를 본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한겨레신문은 1999년 9월 28일 1면 톱기사에서 보험설계사인 김 비서실장의 부인 윤모씨의 계약 보험료 입금 실적이 1997년 2천6백여만원에서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는 1998년 22억2천3백여만원, 1999년 9월 현재 29억5천여만원으로 각각 급증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한겨레신문의 이 기사는 다음날인 9월 29일 중앙일보에 인용, 자세히 보도됐다.[15] 한겨레신문은 윤씨가 삼성 이건희 회장 부인과 전직 장관 부인들을 비롯한 고위관리와 공공기관장들의 부인, 경찰간부 부인들에서 보험계약을 따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다음날 도하 신문들에 거의 인용보도됐으나 연합뉴스는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이에 앞서 같은해 발생해 특검수사까지 받은 '조폐공사 파업유도사건', '옷로비사건' 등과 함께 김대중 정부의 레임덕을 앞당긴 사건으로 지적됐다. 조폐공사 파업유도사건과 옷로비사건으로 김태정 당시 법무장관이 임명 8일만에 사임하는 등 김대중 정부의 도덕성과 국정운영은 치명타를 입었다. 연합뉴스 노동조합은 10월 7일 “이번 기사누락 사태는 연합뉴스의 참담한 위상을 그대로 노정한 사건”이라고 규정하며 △회사의 공개해명과 재발방지 약속 △관련자 문책 △기자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성명을 채택했다. 이에 서옥식 편집국장은 연합뉴스 노동조함 공보위원회 소식지에 입장을 개진하며 △당사자의 보험 실적이 평소에도 회사에서 인정받을 만큼 좋았고 △정황 상 대가성이 있거나 비리차원으로 규정하기 힘들었으며 △업계 관행으로 볼 때 모금액과 가입자 확인이 어렵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구차한 해명성 기사는 쓰지 않는 게 낫겠다고 판단해 기사화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16] 그러나 김옥두 위원 부인의 ‘보험특혜모집’을 맨 처음 보도했던 한겨레신문의 김규원 기자는 2001년 2월 23일 대법원에서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법 위반’혐의로 벌금 500만원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은 “김기자가 권력층의 로비 진상을 파악하려는 의도로 기사를 썼다고 하더라도 신용정보의 오남용을 막고 사생활 비밀을 보호해 건전한 신용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관련 법규의 취지에 비춰 위법성이 인정된다”고 유죄확정 이유를 밝혔다.[17]

야당의 동시다발 공격부른 한국언론재단 임원 선임‘낙하산’논란[편집]

서옥식 전 연합뉴스 편집국장은 2008년 11월 25일 언론유관 공공기관인 한국언론재단 사업이사에 선임돼 2009년 12월 31일까지 재직했다. 사업이사란 언론재단의 직위 서열 제2인자로 언론인들의 저술, 기획취재, 세미나개최, 국내외 연수를 지원하고 각 언론매체에 정부광고 집행을 대행하는 업무를 총괄한다. 하지만 당시 민주당 최재성 대변인은 서옥식이 2007년 이명박 제17대 대통령후보의 언론특보단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를 들어 낙하산 인사라는 성명을 발표했다.[18] 이어 11월 27일 민주당의 조정식 원내대변인도 국회 현안브리핑에서 정부가 언론재단 임원에 이명박 대선 캠프 출신의 서옥식 전 연합뉴스 편집국장을 선임하는 등 언론장악을 노골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19] PD저널은 이날 “사업이사로 선임된 서옥식 전 연합뉴스 편집국장이 당초 유력한 언론재단 이사장 후보로 거론됐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후보 시절 언론특보를 지낸 이력 때문에 자격 시비 논란이 끊이질 않자 재단이사회는 그를 이사장 대신 상임이사에 내정했다”면서 “그러나 서 이사 등은 ‘낙하산 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상태다”라고 보도했다.[20] 한편 민주당의 최문순 의원은 이날 별도의 논평에서 “언론재단 사업이사로 내정된 서옥식 전 연합뉴스 편집국장은 이명박 대통령후보 언론특보 출신으로 30여년 동안 지켜온 언론인의 이력에 ‘낙하산 인사’라는 오명을 더하게 됐다”고 비꼬았다.[21] 서옥식의 언론재단 임원 선임에 대해 당시 언론계 일각에서는 “중앙언론사에서 약 30년간 기자로 일했던 ‘전문 언론인’이, 그것도 언론사를 떠난지 5년후에 언론유관기관 임원으로 선임된 것이 어째서 비전문성의 낙하산 인사가 될 수 있느냐”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으나 기사화되지는 않았다. 실제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에 두 후보캠프에서 일했던 적지않은 전․현직 언론인이 공천을 받아 정치에 참여하거나 정부 요직을 맡은 게 사실이다. 특히 서옥식 전 연합뉴스 편집국장의 언론재단 임원 선임을 낙하산 인사라고 맹렬히 비난했던 최문순 의원(현 강원도지사,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과거 MBC 기자-노조위원장 출신으로 노무현정권 시절인 2005년 2월부터 2008년 2월까지 친여매체인 MBC사장을 지낸후 2008년 5월 통합민주당 비례대표(전국구)의원으로 낙점받아 정계에 진출한 전형적인 ‘폴리널리스트’(언론인출신 정치인)에 해당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옥식은 연합뉴스 편집국장 시절 김근 한겨레 논설주간이 정부로부터 연합뉴스 사장으로 내정된 후 2000년 9월 22일 연합뉴스 이사회에서 연합뉴스 사장으로 선임되자 낙하산인사라며 ‘김근사장 낙하산 투하 반대투쟁’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당시 연합뉴스 사원들은 투표를 통해 전사원의 97%가 김근 논설주간의 사장선임에 반대했다. 특히 연합뉴스 노조는 김근사장 출근저지투쟁을 벌이며, 81%의 찬성으로 9월 22일부터 26일까지 일주일간 파업을 결의하기도 했다.[22] 김근사장은 취임하자마자 자신의 사장선임을 강력히 반대했던 서옥식 전 편집국장의 상무이사 승진 임용을 거부했다. 연합뉴스의 경우 편집국장직을 마치면 사장, 전무, 최소한 상무이사로 승진하는 것이 관례였다. 서옥식 국장은 편집국장을 하고도 연합뉴스 창설이래 사장은 커녕 상무이사도 못하고 퇴사한 유일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23] 연합뉴스 사장인사는 창사이래 최대 주주였던 KBS가 사실상 좌지우지했다. 당시 KBS사장은 김대중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정부조직개편심의위원회 위원장이었으며 김근사장의 전주고 선배였던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신의 박권상씨였다.

남한만 꾸짓고 북한의 종교-인권탄압에 침묵한 교황 비판하다 역공받아[편집]

서옥식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를 위선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비판하는 장문의 글을 인터넷신문에 올렸다가 적지않은 공격을 받았다.[24] 공교롭게도 서옥식을 공격한 사람은 대부분 개신교, 특히 진보를 자처해온 한국기독교장로회소속인사들이었다.[25] 서옥식은 교황이 한국 방문에서 평화를 외치면서도 한반도와 동북아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협하고있는 북한정권에 대해 시종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썼다. 교황은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서나, 성모대축일 미사나, 광화문광장 시복식 행사, 명동성당 강론에서 북한정권의 극악한 종교-인권탄압, 무자비한 공개총살형 등 정권의 잔인성에 대한 비판은 물론 北核(북핵)에 대한 우려, 북한 동포들의 굶주림 등 고통에 대한 동정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교황이 서울에 도착한 8월 14일은 북한이 무력시위에 나서 KN-02 탄도미사일의 개량형으로 추정되는 단거리 발사체 5발을 쏘아 올린 날이었다. 그러나 교황은 오히려 북한정권의 도발과 위협까지도 모두 무제한으로 용서하고 대북지원을 강화하라는 뜻으로 해석될 만한 발언을 남겼다. 방한기간 내내 평화와 사랑을 얘기하면서도 인간도살을 방불케하는 북한정권의 비인간적인 살상만행과 탈북자문제, 강제수용소 운용, 종교탄압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교황은 오히려 남한에 대해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는 ‘죽음의 문화’와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을 거부하거나 맞서 싸우라”고 말하는 등 한물간 해방신학자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지껄이는 말들을 서슴지 않았다. 계급투쟁적 시각에서 남한을 비판한 것이다.[26] 서옥식은 대한민국의 민간항공기를 공중폭파시켜 탑승객 115명 전원을 숨지게하고 어뢰 기습공격으로 천안함 46명의 안타까운 목숨을 수장시킨 천인공노할 테러집단, 민간인 거주 연평도에 무차별 포격을 퍼부으며 서울과 청와대 불바다 운운 한 뒤 ‘남조선 괴뢰 역적패당의 잘못’이라고 책임을 남쪽에 돌린 후안무치한 잔학 집단, 호화사치를 일삼으면서도 300여만명을 굶겨죽이고 사람을 기관총으로 쏴죽이는 패륜 집단,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을 북으로 납치하고도 ‘그런 적 없다’며 시치미 떼는 범죄 집단, 민간인들을 인간방패삼아 폭력을 일삼는 이슬람 과격무장세력에게 무기를 불법으로 공급하는 김씨 세습왕조에 대해 교황은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썼다. 북한에는 정식 가톨릭 사제는 없으나, 대외 선전용으로서 장충성당 등 가톨릭 종교 시설을 운용하고 있다. 서옥식의 이 글에 대해 예컨대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의 H목사는 “세월호의 참사를 겪고 있는 이 암울한 시기에 이런 논지를 펼치면서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과 한신(한신대)과 김재준 목사님과 또한 순수한 마음으로 통일을 기도하는 기장 목사를 공격하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이 있거나 역사에 대한 해석과 이해의 무지거나 혹은 현재의 불의한 권력에 아부아첨 또는 비호내지는 동조하는 의도가 있다고 보여질 수 있다”고 동문서답식의 엉뚱한 비난을 퍼부었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反헌법-反대한민국 어록집 저술[편집]

서옥식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반헌법-반대한민국 어록을 정리한 “나는 북한의 대변인 변호인 이었다”를 2014년 출간했다.[27] 자신의 2010년 저서 ‘서해 NLL은 우리 영토선 아니다-어록으로 본 노무현의 진보좌파주의와 그 적들’[28]이란 책을 보완하고 수정한 이 책은 특히 국가정보원이 공개한 총 246분(分)의 노무현-김정일 대화록에 나타난 노 대통령의 서해 NLL(북방한계선)포기, 북핵비호, 반미공조 발언들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이 대화록은 김정일의 NLL포기 요구가 단지 NLL허물기에 그치지 않고 북한이 정전협정 이래 일관되게 주장해온 ‘평화협력체제’ 구축과 ‘낮은 단계 연방제’ 통일로 나아가는 데에 노 전 대통령이 동조했다는 주장을 했다는 내용이 포한돼있다. 이 책의 제목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김정일에게 한말 “나는 북한의 대변인, 변호인 역할을 했다”에서 따왔다고 저자는 밝힌다. A4용지 총 103쪽에 달하는 대화록을 보면,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이 김대중 정부시절인 1999년 서해 NLL 남쪽 대한민국의 영해안에 일방적으로 그어놓은 북한의 해상군사경계선, 그리고 남한의 NLL 사이에 있는 수역을 공동어로구역 아니면 평화수역으로 만들자는 김정일의 제안에 동의한다. 이는 평화수역이라는 이름 아래 대한민국 영해안에 북한의 활동공간을 만들자는 얘기다. 이를 육지에 대입하면 북한이 휴전선 남쪽 수원 부근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군사경계선’을 멋대로 굿고 그 군사경계선과 기존 휴전선 사이, 즉 서울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수도권을 남북한이 공동관리하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노무현 전대통령의 영토 포기성 언행을 이 책은 지적한 것이다. 저자 서옥식은 노 전 대통령 사후 나온 책들이 거의가 그를 미화하거나 영웅시하는 것들이지만 어록집 형태의 이 책은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둔 역사의 기록물이며, 다만 사실을 오도할 가능성이 있는 발언들에 대해서는 보충자료나 전문가의 의견 등을 통해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있다. 그리고 저자는 ‘말통령’이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우리의 현대사에 있어서 말로써 가장 논란의 중심에 선 지도자를 꼽자면 단연 노무현 대통령이라고 지적하고, 이 책을 쓴 이유도 그의 거침없고 파격적인 발언들을 통해 그의 실체를 재조명하기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책이 밝힌 노무현 전대통령의 반헌법-반대한민국 어록 몇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연방제로 가는 통일방안을 바꿀 아무런 이유 없다(2007년 10월 19일 청와대에서 서울주재 외신기자들과 가진 간담회)
  • 통일위해서는 ‘대한민국과 대한민국헌법’수호라는 금기 깨야(2008년 10월 1일 서울 밀레니엄 힐튼호텔에서 개최된 10.4남북정상선언 1주년 기념학술회의 격려사)
  • 통일위해서라면 주권 일부도 포기 각오해야(상동)
  • 통일은 남북 지방정부를 전제로 한 국가연합이 바람직(2004년 2월 24일 방송기자클럽 초청 기자회견에서 ‘고건총리가 최근 통일수도로 서울이 좋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답하면서: 이 주장은 북한의 연방제통일방안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실정법상 헌법위반인데도 당시 기자들은 아무런 이의제기도 하지않았다)
  • 용산 미군기지는 침략의 상징이다(2004년 3월1일 제85주년 삼일절 기념사)
  • 핵문제 해결방안으로 유엔을 통한 대북제재 반대한다(대통령 당선자 자격으로 2003년 1월 30일 일본 NHK-TV와 가진 회견)
  • 북한 체제 붕괴 원하는 자들과는 얼굴 붉힐 각오돼있다(2004년 12월 6일 프랑스 동포간담회에서 북핵문제 해결과정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며)
  • 미국이 북한체제붕괴로 문제 해결한다면 한미간 마찰 일 것(2006년 1월 25일 신년기자*회견)
  • 북한 붕괴 막는 것이 한국 정부의 매우 중요한 전략(2006년 12월 9일 뉴질랜드 교포간담회)
  • 남북대화 시대에 한미동맹 강조하는 것 좋지 않다(2008년 10월 1일 서울 밀레니엄 힐튼호텔에서 개최된 10.4남북정상선언 1주년 기념학술회의 격려사)
  • 아시아의 최대 안보위협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2004년 1월 14일 출간된 로버트 게이츠 전 미국 국방장관의 회고록 ‘듀티'(Duty)
  • 남한 국민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했더니 평화를 해롭게 할 국가 1번은 미국((2007년 10월 3일 평양서 가진 김정일과의 정상회담)
  • 김정일 위원장 만나 핵포기하라고 하면 대화판도 깨진다(2003년 5월 1일 MBC 100분 토론회)
  • 평양가서 핵 논의하라는 것은 김정일과 싸우고 오라는 얘기(2007년 9월 11일 청와대 춘추관 기자회견)
  • 북한이 핵을 가지려는 것은 일리가 있다(2004년 11월 12일 미국방문중 로스앤젤레스 국제문제협의회(WAC)에서 행한 연설)
  • 북한의 핵개발은 공격용아닌 방어용(2006년 5월 29일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신임 회장단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 북한 미사일발사를 무력위협으로 보는 우리 언론이 문제다. 북한 미사일은 무력위협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으로 발사한 것이다(2006년 7월 5일 북한의 미사일발사에 대해)
  • 북한 미사일 발사는 안보차원의 위기 아니다(북한 미사일 발사후인 2006년 7월 9일 ‘청와대 브리핑’에 올린 글)
  • 북이 미사일 발사했다고 국민들을 놀라게 할 이유가 뭐냐. 북 미사일 발사가 뭐 대단한 일이라고 호들갑 떠느냐 (2006년 12월 21일 민주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회 연설에서 한미연합사 해체와 함께 자주국방을 강조하고 북한 미사일 발사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며)
  • 북한 미사일은 1차적으로 남한 겨냥한 것 아니다(노무현 전대통령 사후인 2009년 9월 22일 출간된 ‘성공과 좌절-노무현 대통령 못다 쓴 회고록’)
  • 존재하지도 않는 북핵위협론을 퍼뜨리는 사람들 있다(2003년 2월 19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대한상공회의소 초청 조찬모임)
  • 북한은 1987년(KAL기 858기 공중폭파) 이후 테러자행한 적 없다(2004년 11월 12일 미국방문 중 로스앤젤레스 교민간담회)
  • 전작권환수 한나라당이 하면 제2창군이고 참여정부가 하면 안보위기냐(2006년 8월 9일 연합뉴스 특별회견)
  • 금싸라기 땅에 미군이 딱 버티고 앉아 지하철도, 도로도 못낸다(2006년 12월 21일 민주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회 연설)
  • 전작권 환수하면 621조 들어간다는 건 전혀 터무니없는 말(2006년 8월 31일 KBS특별회견)
  • 전작권 독자수행 못한다면 대통령도 외국에서 스카우트하면 어때(상동)
  • 6.25 전쟁은 (김일성의 불법남침아닌) 내전(2006년 11월 20일 APEC정상회담 참석차 베트남에 갔다가 캄보디아를 방문하면서 가진 동포간담회)
  • 김정일은 북에서 가장 유연하고 대화가 되는 사람(노무현 전대통령 사후인 2009년 9월 22일 출간된 ‘성공과 좌절-노무현 대통령 못다 쓴 회고록’)
  • NLL이 우리 영토선이라고 말하는 건 국민 오도하는 것(평양을 다녀온 후인 2007년 10월 11일 청와대에서 열린 정당대표-원내대표 초청간담회)
  • NLL은 어릴적 땅따먹기할 때 그어놓은 줄(2007년 11월 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을 상대로 한 연설)
  • (NLL남쪽 대한민국 영해에 남북한이 공동관할하고 사용할 수 있는 공동어로구역 아니면 평화수역만들자는 김정일의 제의에) “예”라고 대답한 뒤 “위원장의 공동어로 평화수역 구상에 나도 똑같은 생각이다”(2007년 10월 3일 평양서 가진 김정일과의 정상회담)
  • NLL은 국제법적인 근거도 없는 데 남측에서는 이걸 영초라고 주장한다(상동)
  •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2007년 10월 2일 북한방문 중 평양의 만수대의사당 방명록에 남긴 글)
  • 김정일 위원장이 오래 사셔야 인민이 편안해 진다(2007년 10월 2일 북한방문 중 북한의 김영남 최고위원회 상임위원장이 주최한 만찬에서 건배를 제의하며)
  • 북한이 싫어하니 개혁·개방이라는 용어 쓰지 않겠다(2007년 10월 4일 북한방문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개성공단에 둘러)
  • 북한이 달라는 대로 다 퍼주어도 남는 장사다(2006년 5월 9일 몽골방문 동포간담회)
  • 나는 외국정상들과 회담때 북한측 대변인-변호인 노릇했다(2007년 10월 3일 노무현-김정일 남북정상회담)
  • 나는 지난 5년간 6자회담에서 북한 입장을 갖고 미국과 싸웠다(상동)
  • 북한체제 존중하는 것이 약속이자 도리이고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상동)
  • 미국이 만든 작계 5029 내가 없애버렸다(상동)
  • 북한은 패전당사자 아니다...6.25 남침 사과요구 현실성 없다(2007년 10월 19일 청와대 외신기자간담회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전에 6.25전쟁에 대한 북한의 사죄가 선언돼야 한다는 CNN기자의 질문에)
  • 북한을 주적으로 하는데 반대한다. 북한은 대한민국의 주적 아니다(2002년 4월 10일 충북 청주에서 열린 민주당 대통령 후보경선 TV토론)
  • 국가보안법은 낡은 유물,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야(2004년 9월 5일 MBC시사매거진 500회 특집 인터뷰)
  • 국보법은 남북대결주의를 뒷받침하는 근거이자 남북대화의 걸림돌(2008년 10월 1일 서울 밀레니엄 힐튼호텔에서 개최된 10.4남북정상선언 1주년 기념학술회의 격려사)
  • 한국에서 공산당이 허용될 때 완전한 민주주의가 된다(2003년 6월 9일 일본방문 중)
  • (한국전을 공모하고 개입한) 마오쩌둥(毛澤東)을 존경한다(2003년 7월 10일 중국 CCTV방송 인터뷰)
  • 4.3사건 정부 과오에 대해 사과드린다(2003년 10월 31일 4.3사건에 대해 정부를 대표해 공식 사과를 한다며)
  • 우익단체의 인공기와 김정일 초상화 소각은 적절치 못한 행동(2003년 8월 19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
  • 대한민국의 역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던 역사(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 취임사)
  • 한국은 미국을 등에 업은 자본주의 분열세력이 세웠다(2001년 11월 18일 안동시민학교 특강)
  •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은 역사에서 분열세력이 승리했다는 사실(2005년 7월 1일 청와대에서 열린 민주평통 21기 전체회의 대회사)

노무현 전대통령의 왜곡된 진보관(進步觀) 비판[편집]

서옥식 만큼 대한민국에서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진보관(進步觀)을 맹렬히 비판한 사람은 없을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저서 <노무현 말말말-서해 NLL은 우리 영토선 아니다>(2010)와 <나는 북한의 대변인 변호인 이었다>(2014)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시절 이데올로기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그는 이데올로기의 집착자이며 그의 이데올로기는 누가 뭐래도 ‘진보’이다”라면서 “대한민국 정치지도자 중 노대통령 처럼 국민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편 가르는 데 ‘진보’란 말은 자주, 즐겨 사용한 사람은 아마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썼다. 실제 대중을 상대로 하는 노 전 대통령의 연설이나 강연문을 보면 거의 언제나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등장한다. 대통령 임기 말년에 가서는 우리가 추구해야할 민주주의로 ‘진보적 시민민주주의’와 ‘진보적 시장주의’라는 것을 제시했다. 그러나 ‘진보적 민주주의’는 김일성이 일찍이 제창했다. 그는 퇴임 후에도 봉화마을에서 참여정부 측근인사들을 중심으로 ‘진보주의 연구회’라는 공부방을 이끌어오면서 진보사상 연구를 해왔다. 그뿐 아니다. 봉화마을을 찾는 주민들을 상대로 진보와 보수에 대한 강의를 해왔다. 세상을 뜬 후에도 ‘진보주의의 미래’라는 유고집이 나왔을 정도다. 서옥식은 그러나 노 전대통령의 ‘진보관’은 크게 왜곡돼 있다면서 “그는 진보와 보수를 철저히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참과 거짓, 합리와 비합리, 참신(斬新)과 퇴영(退嬰), 친구와 적의 차원에서 설명한 바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노 전대통령의 발언들을 정리해보면 ▵보수는 강자의 사상, 진보는 약자의 사상 ▵보수는 약육강식, 진보는 더불어 살자는 것 ▵보수는 강자끼리 움켜지는 것, 진보는 약자끼리 나누는 것 ▵진보는 버스 ‘같이 타고가자’, 보수는 ‘늦는다 비좁다 태우지 마라’ ▵보수는 힘센 놈만 밀어주는 것, 진보는 약자를 챙기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고 서옥식은 소개한다. 서옥식에 따르면 노 전대통령은 또 ▵진보는 개혁세력, 보수는 반개혁세력 ▵진보는 통일세력, 보수는 반통일세력 ▵진보는 평화주의자, 보수는 전쟁주의자로 규정한다. 또한 보수의 핵심가치로 돈을 중심에 둔 ‘성장’과 ‘경쟁’을 들면서 진보의 핵심가치로는 인간을 중심에 둔 ‘자유’, ‘평등’, ‘평화’, ‘박애’, ‘행복’, ‘복지’, ‘균분’ 등 이 세상 좋은 것이란 몽땅 갖다 붙이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또한 “보수주의의 문제점으로 정의, 연대의식, 연대의 가치,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한 전략이 없다는 것”을 들면서 “역사는 상당기간 진보와 보수 간의 갈등(투쟁)으로 전개될 것” “역사의 본질은 지배와 예속의 문제”라고 말했다. 좌파들의 ‘계급투쟁’이론을 연상케 하는 말들이다. 노 전 대통령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진보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이며 하나님의 교리와도 통한다”며 ‘진보주의=민주주의’, ‘진보주의=사람사는 세상’ ‘진보주의=하나님의 교리’라는 등식까지 내놓았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면서 민주주의의 장래는 그를 지지하고 지원하는 모임인 ‘노사모’와 ‘참여포럼’에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은 그의 묘비에도 새겨져있다. 서옥식은 “노대통령의 진보와 보수의 시각을 보면 마치 북한의 조선말사전이나 철학사전. 정치학사전을 읽는 느낌이다. 북한의 사전들은 보수를 타도해야할 사상, 진보를 쟁취해야할 긍정적인 사상으로 소개하고있다. 특히 보수를 ‘착취계급의 사상(자본주의)’, 진보를 ‘노동계급의 혁명사상(사회주의 공산주의)’으로 정의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진보와 보수는 누가 나쁘고 누가 좋다는 2분법적 시각, 선악개념, 그리고 도덕적 우열 개념이나 가치의 고하(高下)개념이 아니다. 요약하면 진보가 ‘나쁜 것을 고치자’라면 보수는 ‘좋은 것을 보존하자’이다. 좋은 것을 보존하고 나쁜 것은 고치는 것은 보존을 하면서도 변화를 추구하는 인간생활의 두 축이다. 하지만 진보가 잘못되면 고치지 않는 것만 못한 ‘개악’이 될 수 있고 보수가 잘못되면 ‘기득권 유지’가 될 수 있다. 진보가 보수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사조라면 역사상 가장 진보를 주창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공산주의)가 70여 년간의 실험 끝에 물러난 수구적이고 반동적이며 퇴영적인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진보와 보수는 사회발전의 방향과 방법을 달리하는 기본적 두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즉 사회 변화의 속도와 폭이 보다 광범위하고 빠르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진보라고 분류할 수 있고, 그 변화의 폭과 속도가 검증을 거치고 구성원의 합의과정을 통해 보다 점진적이고 단계적이어야 한다고 본다면 그것은 보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보수가 대외적으로 대결주의를 취하지만 진보는 평화주의를 취한다”며 진보=평화, 보수=전쟁이라는 노 전대통령의 사고는 자신의 전형적인 특기였던 2분법적 편 가르기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수주의자가 전쟁세력이라는 노 전 대통령의 주장은 소련과 동유럽 현실사회주의 체제붕괴이후 전개된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수행된 미국 공화당 정부의 걸프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 이라크전쟁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면 미 민주당 정권이 개입한 가운데 전개된 1,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들 전쟁의 초기에는 민주당정부가 개입돼 있으나 오히려 이 전쟁들을 마무리한 것은 공화당정부였다.[29] 서옥식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인터넷 포털의 책소개란에는 노사모 회원 등 친노인사들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노무현 대통령의 진보를 폄훼하지 말라”며 서옥식을 비판하는 내용의 댓글이 20여건이나 올라와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박근혜 대통령 중국 전승절 70주년 열병식 참관 반대[편집]

서옥식은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신문, 특히 진보⦁좌파 언론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대일(對日)항전승리70주년기념일(전승절) 열병식 행사 참관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시종 비판적인 견해를 유지했다. 평소 박 대통령에게 ‘비우호적’이면서도 전승절 참가 당위성을 앞장서서 강조했던 대한민국의 소위 ‘진보⦁좌파 언론’들은 박 대통령이 2015년 9월 3일 베이징의 톈안먼(天安門)광장에서 거행된 전승절기념 열병식을 참관하자 쌍수를 들며 칭찬일색으로 평가했다. 이들 언론은 박 대통령이 전승절 열병식 참관 외국 정상 중 유일하게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진 것, 기념행사장 망루 좌석배치에서 박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Spiridonovich Putin) 러시아 대통령 다음으로 우대를 받은 점, 시 주석과의 오찬 등 극진한 대접을 받은 것을 북한 참석대표 최룡해(崔龍海) 노동당 비서가 받은 처우와 비교해 보도하면서 마치 한국이 북한보다 중국으로부터 우선적으로 대우받고 있다는 점도 부각시켰다. 박대통령의 톈안먼 망루 외교를 계기로 심지어 중국의 국가이익이 북한에서 한국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까지 보도했다. 하지만 당시 한중 정상회담을 비롯한 박 대통령의 중국방문 결과를 들여다보면 한국이 얻은 것이라고는 거의 없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 북한의 핵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한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배치 반대입장은 불변이었고 ‘한반도 비핵화’, ‘6자회담 재개’, ‘한반도 평화통일 지지’ 같은 외교적 수사들은 중국이 항상 사용하던 용어들이었다. 중국은 박-시진핑 한중정상회담에서 핵문제에 대해서는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를 통해, 통일과 관련해서는 ‘장래 한민족에 의한 통일’ 지지, 한반도 안보정세에 관련해서는 ‘누구도 긴장을 고조하는 행동을 삼가야할 것’ 등 극히 원론적인 종전 입장을 되풀이함으로써 대북(對北)정책 기조를 선회하고 있다는 어떠한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다. 청와대는 정상회담 직후 한중일 정상회담을 한국에서 개최하는 데에 합의했다고 발표했지만, 중국 외교부의 공식적 발표에 이러한 내용은 빠져있었다.[30] 서옥식은 중국의 전승 70주년기념 열병식에는 6.25참전부대는 참가치 않았다고 하지만 과거 김일성 소속부대였던 동북항일연군이 등장했다면서 박 대통령의 열병식 참관에 문제를 제기했다. 김일성은 1935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국제공산당) 7차 대회 결정에 따라 1936년에 중국공산당 주도로 창설된 동북항일연군의 2군6사(師)에 소속돼 있었고, 일본관동군의 토벌을 피해 소련의 연해주로 패주한 뒤 1942년부터는 소련 극동군 제25군 예하부대이자 소련비밀경찰(KGB)의 지령업무를 담당했던 88정찰여단의 대위로 복무했다. 서옥식은 특히 마오쩌둥(毛澤東)이 통솔하던 중국공산당의 인민해방군이 △6.25전쟁에 개입한 침략군으로서 북한군(조선인민군)이 저지른 살육만행 보다 우리 국군과 국민에게 엄청난 만행과 피해 및 고통을 안겨줬다는 점, △대한민국의 통일을 방해한 세력이란 점, 그리고 △항일운동의 주도세력은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 정부가 아니라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라는 점,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약속한 국제적 문서인 카이로선언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한 포츠담선언의 주역이 중국공산당이 아니라 미국⦁영국과 함께 중국 국민당정부의 장제스란 사실,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민국의 법통으로 규정된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후원한 세력이 역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라는 점에서 박대통령의 열병식 참관은 적절치 못하다고 비판했다. 서옥식은 특히 중국정부는 열병식에 초청한 51개국 중 일본과 필리핀을 제외한 49개국 대표가 중국을 방문해 열병식 참관률이 96%나 된다고 자랑하지만 참관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실망스럽고 초라하기 그지없다고 주장했다. 열병식에 참석한 외국 정상급 22명의 거의 대부분이 세계적으로 지탄받는 독재자, 장기집권자, 인권⦁인종탄압자, 부패권력자, 국제형사범죄자로 수배중인자, 성폭행혐의자, 과거 폭압적인 공산주의자, 공정한 선거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자들이며,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제외하면 자유민주주의 국가 원수로는 박대통령이 유일했다고 지적했다. 서옥식은 특히 열병식 참가자 중에는 30만명의 자국민을 살해한 혐의로 유엔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수배를 받고 있는 수단의 오마르 알-바시르(Omar al-Bashir)대통령도 포함돼 있음을 지적했다.[31] 미국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물론 본국에서 공식 대표를 파견하지 않고 주중 미국대사관 사절을 보내 최소한의 ‘성의 표시’만 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전승절 당일을 피해 방중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던 일본은 공식 사절도 없이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만 자리를 차지했다. G-7국가를 포함한 대다수 서방 선진국들은 참석을 하지않았거나 참석하더라도 주중 대사관 사절로 대신했다. 이웃 나라인 인도는 외교장관도 아닌 차관급의 외교국무부장, 호주는 재향군인회장이 참석했다.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다른 주요 아시아 국가들과 유럽 국가들은 중국과의 경제협력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국가정상급 대표를 보내지 않았다.

김일성의 정체 진위논란에 대한 견해[편집]

김일성의 정체를 싸고 진위논란이 있으나 ‘북한학’을 전공한 서옥식은 그의 저서 ‘거짓과 왜곡 조작 날조를 가르치는 사회-북한 교과서 대해부’(해맞이미디어, 2015)에서 가짜가 맞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김일성 가짜설이란 북한의 최고지도자였던 김성주(金成柱)가 일제 식민통치 시기 만주벌판에서 백마를 타고 일본군을 무찌르던 신출귀몰한 전설적인 명장 김일성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주장에 기초하고 있다. 당시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항일투쟁 시기 수많은 빨치산 항일운동가들이 돌려 사용하던 이름으로, 특정 개인을 지칭하는 이름이라기보다는 무장투쟁 지휘관들이 신변보호와 함께 일본군경의 작전을 교란시키기 위해 사용하던 가명이었다. 여러 명이 동시에 사용했기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천하를 쥐락펴락’하며 이곳 저곳 전투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 김성주가 언제부터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북한의 김일성은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2권에서 김성주란 본명을 가진 그가 어떻게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됐는지 적고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1928년 10월 자신이 김성주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을 당시 그 지역에 김혁이라는 사람이 노래를 만들어 보급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혁이 만든 노래 가운데 ‘조선의 별’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 ‘조선의 별’이 김성주를 지칭하는 뜻이었다고 한다. 당시 16세에 불과했던 김성주는 이에 대해 김혁을 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혁과 차광수, 서정애, 박도범 등 동지들도 김성주를 ‘조선의 별’이라는 뜻에서 ‘한별’이라고 불렀고 나중에는 한자어인 ‘一星’(일성)으로 고쳐 부르는 데 찬동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김성주가 김일성이 된 것은 본인의 의사가 아니었고, 전설의 명장 김일성의 이름도 도용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평양의 조선혁명박물관에는 백마를 탄 항일투사 김일성의 그림이 걸려 있으며 김일성 전기나 만화책, 교과서 등에는 이런 그림이 빠짐없이 들어있는 데 이 ‘백마를 탄 김일성 장군’은 아마도 1887년 함남 북청출신으로 일본육사를 졸업한 김광서(金光瑞: 일명 金擎天)장군의 이미지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소련에서 일본간첩혐의로 두 차례나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김광서는 북부 시베리아 수용소 수감중 강제노역을 하다가 심장질환으로 1942년 1월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아직도 그 무덤을 찾지 못하고 있다. 1959년 소련 군사재판소는 재심끝에 김광서에게 무죄를 선고, 그에게 씌워졌던 일본 간첩이라는 누명을 벗겨줬다. 미국에서도 김광서(김일성) 장군에 대한 기밀문서를 2009년 공개한 바 있다. 미 극동사령부 정보참모국(G-2)이 1952년 7월 31일자로 작성한 기밀문서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는 “당시 조선인들 사이 전설로 알려진 백마탄 장군 김일성은 실존 인물로 본명이 김광서이며,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이 내세운 가짜로, 본명은 김성주”라고 적고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 ‘선구자’의 “조국을 찾겠노라 말달리던 선구자”는 김광서 장군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조국의 광복도 못 본 채 이역만리에서 이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 전설적 김일성 장군인 김광서 장군에게 뒤늦게나마 8.15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정부는 또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김광서 장군의 손녀 2명에 대해 특별 귀화로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했다. 이들은 러시아 국적으로 각각 모스크바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거주 중인 옐레나(당시 54세. 의사)와 동생 갈리나(당시 52세. 의사) 자매다. 다만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같은 가짜설이 남한의 우익 인사들이 아니라 북한 주민들에 의해 먼저 제기됐다는 사실이다. 해방후인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이 33세의 나이로 연설하기 위해 평양 공설운동장(현 모란봉경기장)에 모습을 나나내자 북한 주민들은 말로만 들어왔던 전설의 항일 명장 김일성이 이렇게 젊을 수 있냐며 가짜설을 제기했고 이후 남한에서도 우익인사, 반공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가짜설이 퍼져나갔다. 서옥식은 김성주의 김일성 명성 도용은 특히 북한이 김성주의 최대 항일투쟁 업적으로 모든 문헌과 선전물에 기록하고 있는 소위 ‘보천보 전투’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보천보전투란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인솔,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km 떨어진 일제의 전략적 요충지인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현재 양강도 보천군)를 습격해 승리를 거둔 ‘전투’라고 북한의 교과서 등 문헌에 소개돼 있다. 하지만 서옥식은 보천보 전투에 참가한 주력부대는 동북항일연군, 그리고 전투를 지휘한 사람은 ‘김일성’이란 이름을 갖고있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장이며, 김성주(훗날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된 김일성)는 이 부대의 일개 대원 또는 지대장급으로 참가했다고 주장한다. 조선혁명군이란 해방이후 김일성집권 정당화와 우상화를 위해 북한이 조작해낸 실체도 없는 가공의 군조직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뒤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항일 빨치산운동을 했으며 1940년 10월경에는 일본 관동군의 토벌에 쫓겨 소련의 연해주로 패주했다. 그는 이곳에서 한참 수용소 생활을 한 뒤 1942년 8월부터 해방 때까지 소련극동군 25군 예하 88정찰여단에서 활동했다. 보천보 전투는 항일빨치산부대에 의한 일개 경찰지서 습격약탈사건으로 전과(戰果)로 따지면 일본 순사의 두 살난 딸과 일본인 음식점 주인 등 2명이 총탄에 맞아 사망했을 정도로 미미한 사건이다. 서옥식은 따라서 ‘보천보 전투’는 ‘보천보 주재소 습격약탈사건’이 정확한 명칭이라고 말한다. 일경 주재소를 습격하고 조선인 상가를 약탈한 사건을 대형 항일전투로 치켜세우고 김일성을 영웅으로 만든 것은 당시 동아일보 보도였다. 북한에서도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를 지휘했다는 근거자료로 동아일보 보도를 인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남한 학계인사 다수는 김일성 가짜설을 부정하고 있다. 이들은 북한의 김일성이 진짜라는 이유로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가 보천보전투를 이끌었다는 당시 동아일보 기사, 그리고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檢事局) 사상부(思想部)가 1939년 8월 31일자로 발행한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기록을 들고 있다.[32] 사상휘보 제20호는 보천보사건을 지휘한 사람의 신원에 대해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출신지는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로 기술하고 있다.(사상휘보 기록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이들은 또 만주의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빨치산 투쟁을 하려면 나이가 젊고 건강해야 하기 때문에 평양공설운동장에 나타난 젊은 청년이 김일성이 맞다는 주장을 편다. 하지만 당시 만주땅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동북항일연군의 단위부대장들은 거의가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누가 진짜 김일성(훗날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된 사람)인지를 가리는 일은 쉽지않았다. 당시 이른바 ‘김일성 부대’ 토벌과 김일성 색출․검거에 나섰던 일본 군경은 ‘김일성 부대’를 이미 소탕했는 데도 몇 달후 또는 1-2년후 소탕됐다는 김일성부대가 다른 지역에서 다시 출몰하는 바람에 긴장하고 병력을 재투입해 전투를 벌여야 했다. 김일성의 10촌으로 1994년 탈북한 강명도(인민무력부 보위대학 보위전문 연구실장과 합영회사 부사장 역임)는 2014년 8월 3일 종편 채널A 방송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북한의 김일성은 실제 진짜 김일성 장군의 이름과 업적을 가로챈 가짜라고 주장했다. 근거로 김일성이 해방후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자기 가족도 김성주가 김일성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33] 미 군정청도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이며,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으로 명성을 얻은 ‘김일성’(진짜 김일성) 행세를 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미군정청 자료에 따르면 김성주가 1929-1930년 만주와 조선 국경에서 활동하던 실제 김일성의 유격부대에 합류했으며, 실제 김일성이 55-60세에 숨지자 명령 때문인지 자발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을 ‘유명한 전사(戰士: 김일성)’로 가장했다고 기술돼 있다[34] 평생을 북한 김일성 진위를 연구하다 타계한 이명영(李明英) 전 성균관대 교수(정치학)는 1974년 그의 저서 ‘김일성 열전-그 전설과 신화의 진상규명을 위한 연구’를 통해 북한이 보천보전투의 지휘자를 김일성(훗날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된 사람)으로 조작한 사실을 밝혀냈다고 주장했다. 또 1945년 해방신문의 기자로 전쟁 당시 월북하여 북한 외무성의 국장을 지냈단 박갑동 씨는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있었던 김일성 장군 환영식 사진을 보천보전투에 참가했다가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박달(朴達), 박금철(朴金喆)에게 확인시켰더니 사진 속 인물이 보천보전투를 지휘한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고 각각 증언해왔다”고 밝혔다.[35] 당시 국내에서 조국광복회 회원으로 항일운동을 벌이던 박달과 박금철은 1937년 5월 중순경 국경을 넘어 장백현 이십도구(二十道溝)의 외진 곳으로 갔다. 거기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6사장 김일성과 만나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이 때 제6사장 김일성에게서 보천보 습격계획을 듣고 돌아온 박금철은 보천보 부락의 지도 등 지형정보를 작성해서 제6사로 보냈다. 또 습격당일 밤에는, 60여명의 국내동지들을 이끌고 방화약탈의 선두에 섰다. 그래서 김일성의 얼굴 등 인적 사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36] 특히 소련의 88정찰여단에서 대대장 김일성의 부관겸 통역으로 활동했던 전 북한군 부참모장 유성철(6.25전쟁때 작전국장)씨와 부대대장을 지낸 박성훈씨 증언은 김일성 가짜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북한의 김일성이 죽은 김일성들의 공적을 자기 것으로 가로채려 했다고 주장했다.[37] 김일성이 가짜라는 결정적 증언을 한 사람은 해방직후 평양의 소련 군정청 핵심 멤버였던 레베데프(Nikolai Georgievich Lebedev, 1901–1992)소장이었다. 1945년 8월 평양에 진주한 소련 극동군 제25군 정치사령관인 레베데프 소장은 사망 1년전인 1991년 6월 모스크바에서 가진 중앙일보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 김일성이 가짜가 맞다는 결정적 증언을 했다. 기자회견 내용은 그해 9월 5일자 중앙일보에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6)’이란 제목으로 실렸다.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를 맡았으며 당시 33세의 소련군 대위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양성하는 등 북한 정권창출에 직접적으로 간여한 인물인 레베데프에 따르면 본명이 김성주(金聖柱)인 김일성은 입북할 때부터 명성만 있고 실체는 불분명한 전설적 김일성 장군을 이용하기 위해 김일성이란 이름을 다시 쓰기 시작하도록 했으며 소련군 장성들도 이것이 절묘한 신의 한 수라고 감탄했다는 것이다.[38] 레베데프 소장의 이같은 언급들은 그가 1991년 8월 22일 모스크바에서 가진 장준익 전 육군사관학교 교장(예비역 중장)과 가진 인터뷰에서 재확인 된다. 레베데프 소장은 장 전 육사교장과의 인터뷰에서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열린 대회는 ‘김일성장군환영대회가’가 아니라 ‘조선 인민해방 축하대회’라고 수정하면서 “김일성 동지의 발언이 있겠다고 소개하니까 그곳에 모인 군중은 열화같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이는 김일성장군에 대한 국민들의 대단한 인기를 알 수 있었고, 연설이 끝난후 김일성(김성주)은 진짜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여론이 비등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소련군 대위였던 김일성은 북한에 들어와서 처음엔 김영환(金英煥)이란 이름으로 행세했다. 이후 1945년 10월 11-12일, 소련군 정치사령부 로마넨코 소장의 각본으로 평양시내 ‘다미야’라는 일본 요리집 자리에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조만식) 간부들에게 가짜 김일성은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해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현 모란봉경기장)에서 이른바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고, 김성주는 전설의 김일성장군으로 둔갑한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평안남도 양덕이 고향인 전 평안남도지사 박인각씨는 “연설에 앞서 소련 점령군사령관 스티코프 대장이 그를 김일성장군이라고 소개했으나 참석했던 사람들은 33세의 젊은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밝힌바 있다. 또 신의주가 고향인 전직 교장 이영훈씨는 “군중들의 술렁이는 분위기를 파악한 스티코프는 여기 있는 김일성이 항일투쟁의 김일성 장군이 맞거나 틀리거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잘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해 소련도, 김성주 자신도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증언했다. 이밖에도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들은 오영진(吳泳鎭)의 ‘하나의 증언’, 허동찬의 ‘김일성 평전’, 임은의 ‘북조선왕조성립비사’ 등에 나타나 있다. 서옥식의 저서 ‘북한 교과서 대해부’에 따르면 본명이 김성주(金成柱: 북한의 김일성은 원래 이름이 金聖柱였으나 보천보사건을 자신이 지휘한 것처럼 조작하기 위해 이름까지도 金成柱로 고쳤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있다)였던 2군 6사장은 1901년 함남 출생으로 일찍 부모를 따라 만주에 가서 살다가 1920년 러시아로 들어가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마치고 ‘붉은 군대(赤軍)’에 들어갔다. 이 사람은 만주사변(1931년)이 일어난 후인 1932-1933년경 가족과 함께 동만주(간도)로 이주했고 1934년부터 동북항일연군의 전신인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사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2군에 3사가 만들어지자 그 사장으로 있다가 1936년 7월 동북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될 때 제1로군 2군 6사장이 됐다. 당시 소련은 만주에 있는 중국공산당과 그 유격대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하고 있었을뿐 아니라 심지어 동북항일연군에 소련인 지도요원까지 배치하고 있었다. 보천보주재소를 습격한 소위 ‘김일성부대’ 토벌에 나선 일만군경 발표에 따르면 습격을 지휘, 주도한 사람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6사장 김일성(제1대 김일성)으로, 이 사람은 사건 5개월 후인 11월 13일 만주 통화성(通化省) 양목정자라는 곳에서 만주군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발표됐다. 제6사장 김일성이 죽은 뒤인 1938년 봄 또 한 사람의 조선인이 소련으로부터 파견돼 와서 사망한 2군 6사장의 후계자(제2대 김일성)가 됐는 데 이 사람은 본명이 金一星이며 1939년 초 부대 개편으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장에 오른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일만군의 추격을 피해 1940년 소련의 연해주 하바로프스크 근교에 정착, 패주한 동북항일연군 소속 대원들을 중심으로 교육훈련을 시켜온 오케얀스카야 야영학교(Okeyanskaya Training Camp)교장이었으나 1944년 가을 부상 후유증에 결핵까지 겹쳐 사망했다. 그는 1939년 5월 3일 밤 200여명의 병력으로 함남 삼수군 호인면의 반절구(半截溝)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부상했다. 북한의 김일성(제3대 김일성)은 이 두 부대장의 부하였다. 북한의 김일성은 보천보습격사건에 참가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지대장같은 하급 지휘관 또는 부대원 자격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金英柱)와 김일성의 평단중학 동창생 장아청(張亞靑)은 김일성이 2군 6사의 사장이 아니라 일개 부대원이었다고 각각 진술 한 바 있다. 당시는 신출귀몰하다는 ‘전설의 김일성장군’에 대한 이야기들이 널리 퍼져 있는 데다 일만군경의 토벌작전과 검거를 피하기 위해 가명을 쓰는 것이 하나의 관행처럼 돼있었다. 동북항일연군의 단위부대장들은 거의가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썼던 것으로 전해져 있다. 소위 ‘김일성부대’는 소부대 단위로, 또한 동시다발적으로 ‘히트 앤드 런’의 전형적인 유격전을 벌였다. 이처럼 북한의 김일성(제3대 김일성)은 죽은 김일성을 자신이라고 조작한 것이다. 한국 학계의 다수설은 이 3인의 김일성이 동일인물(제2군 6사장=제2방면군장=북한 김일성)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교과서들도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 이 사건을 ‘보천보 전투’라는 이름으로 비중있게 수록하면서 이후 김일성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국내에서 이종석 교수(전 통일부장관)등이 주장하는 ‘진짜 김일성’의 유일한 근거는 북한이 내세우는 자료를 제외하면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檢事局) 사상부(思想部)가 1939년 8월 31일자로 발행한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기록이 전부인 것으로 보인다. 중국측 자료에는 보천보 습격사건은 나오지만 김일성이 이를 이끌었다는 기록이 전무하다. 사상휘보는 보천보사건을 지휘한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본명 김성주(金成柱), 당년 29세의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 출신으로 어릴 때 부모를 따라 간도 방면으로 이주하여 동 지방에서 자라 비단(匪團)에 투신한 조선인이라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현재 그 실모(實母)는 생존해 있는 모양이다.”라고 적고 있다. 본명과 출신지로 보면 북한의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를 지휘한 것이 맞다. 그러나 이 기록도 본명과 출생지 이외의 나머지 다른 ‘팩트’들은 모두 틀린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의문시되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은 1912년생이므로 당시 나이는 25세이며, 이주한 곳은 간도가 아니라 무송이다. 또한 어머니 강반석(康盤石)은 7년전인 1932년 7월 31일 이미 사망했다. 오히려 ‘사망한 보천보습격사건 지휘자 김일성’의 이주지가 간도이며, 그의 부모와 처자도 거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사상휘보의 기록은 사망한 2군 6사장 김일성과 북한 김일성의 신원이 뒤섞여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주목할 점은 사상휘보에 나오는 김일성의 본명이 ‘金成柱’로, 이보다 2년전 ‘보천보사건 지휘자 김일성’의 사망소식을 전한 경성일보 기사(보도 일자 1937년 11월 18일)에 나오는 이름 ‘金成柱’와 동일하다는 점이다. 사상휘보의 기록은 ‘이미 죽었다는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인 데 왜 그런지 이 대목에 대한 설명이 없다. 또 하나의 주목을 끄는 것은 보천보습격사건을 지휘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장의 출생지가 평안남도가 아니라 함경남도라는 자료(서적)들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출생지가 함경남도라면 보천보사건 지휘자는 북한의 김일성이 결코 아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지금의 평양시 만경대) 출신이기 때문이다. 일본인 나가오카 도모타로(永丘智太郞)가 1938년에 쓴 ‘극동의 계획과 민족’(極東の計劃と民族)이라는 책의 ‘만주(滿洲)의 비적적화(匪賊赤化)와 조선인(朝鮮人)’이라는 장을 보면 2군 6사장 김일성은 평남출신이 아니라 함남출신으로 나온다. 또한 노리타케 가즈오(則武三雄)의 1942년 문집 ‘압록강’(鴨綠江)의 ‘비적(匪賊)과 압록강’이란 장에서도 보천보습격사건을 지휘한 김일성은 함남태생으로 기록돼있다. 이명영 교수(2000년 6월 20일 별세)는 북한 김일성의 본명은 ‘金成柱’가 아닌 ‘金聖柱’이며, 그가 본명이 ‘金成柱’인 보천보 김일성의 공적을 가로채기 위해 본명의 한자까지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북한 김일성의 본명이 ‘金成柱’ 아닌 ‘金聖柱’로 보아야 할 근거는 많다. 김일성의 동생이름이 철주(哲柱; 지혜로운자), 영주(英柱: 영웅)임을 감안하면 그의 본명은 ‘成柱’보다는 ‘聖柱’(거룩한 자)가 더 어울리는 이름이다. 더구나 부모가 기독교 신자임을 감안하면 ‘聖柱’로 작명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명영 교수가 1971년 2월에 당시 혜산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 책임자였던 함남도경(咸南道警) 고등과(高等課) 경부(警部) 이치하라 간이치(市原感一, 1896-?)를 일본에서 만나 청취한 바에 따르면 “사건 피의자의 한사람인 박록금(朴祿金)은 보천보사건을 지휘한 김일성(金日成)이 1901년생으로 1937년 당시 36세(북한의 김일성은 1912년생으로 1937년 당시 25세),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고 만주사변 후에 소련에서 만주로 온 사람이란 것을 처음으로 진술했다. 혜산사건이란 1937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일본 관헌측이 김일성 부대의 보천보(普天堡) 습격작전 후 국내 연계세력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조국광복회 회원 188명을 기소한 사건이다. 박록금(朴祿金)에 의해 김일성(金日成)의 신원이 알려졌다는 것을 안 다음부터 권영벽(權永壁), 이제순(李悌淳), 박달(朴達), 박금철(朴金喆) 등 혜산사건의 다른 주요 간부들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들의 진술은 거의 일치했다”고 증언했다. 사상휘보의 기록은 자료에 적시된 것처럼 여러 가지 설(說)중의 하나를 택한 것이며 김일성을 직접 체포해 심문하고 조사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른 여러 가지 증거들을 모두 배척하고 사상휘보 기록만을 취한다는 것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 사상휘보의 김일성 신원은 북한 김일성의 신원과 일부 부합하나, 이는 혜산사건의 수사기록도 재판기록도 아닌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이 펴낸 일종의 동향보고서에 불과한 만큼 형사피고인의 유무죄를 다룬 신문조서나 판결문보다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할 것이다. 형사사건에서는 피고인의 정확한 신원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팩트’(사실)다. 더구나 보천보사건 이후 진짜 김일성이 전사한 후에도 다시 김일성의 이름으로 여기저기서 일만군경에 대항하는 전투와 함께 약탈행위가 그치지 않았던만큼 ‘살아있는 김일성’ 즉, 보천보사건을 지휘한 김일성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전제아래 조사보고서를 만든다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에 전사하고, 그후 사상휘보 20호가 발행된 1939년 무렵에는 북한의 김성주가 김일성(金日成)이란 이름으로 행세하고 있었으므로 사상휘보의 기록은 두 사람을 동일 인물로 착각하여 기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사상휘보 기록보다는 수사 책임자의 증언과 당시 언론보도가 더 믿을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북한 김일성의 보천보사건 지휘가 맞다고 주장하는 국내외 학자들도 김일성이 한 명이라는 전제하에 연구를 진행하다보니 제2방면군장(2군 6사장인 제1대 김일성이 전사하자 그의 이름과 직위를 승계한 제2대 김일성)의 처(김혜순)를 북한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김정숙)이라고 하는 연구 결과를 내놓는 등 오류를 범하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가 부르스 커밍스이다. 다음은 서옥식이 그의 저서 ‘북한 교과서 대해부’에서 김일성의 정체가 가짜라고 주장하면서 기술한 내용이다. 서옥식은 보천보사건의 지휘자가 북한의 김일성이 아니라는 즉, 김일성이 가짜라는 이유로 다음의 14개 사항을 근거로 제시한다. ①보천보사건 이후 일제가 국내 연계세력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조국광복회 회원 188명을 기소한 사건인 이른바 혜산사건 피고인들의 2군 6사장 김일성 신원에 대한 진술을 토대로 작성한 신문(訊問)조서(1974년 출간된 이명영 저 ‘김일성열전’을 보면 2군 6사장 김일성이 기소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김성주(金成柱)라는 이름 석자만 판결문에 나와 있다. 김일성이 기소되지 않은 것은 혜산사건 관련자 검거기간중 이미 사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이 사건의 수사책임자 이치하라 간이치(市原感一) 함경남도 경찰국 고등과 경부(警部)는 “2군 6사장 김일성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이 사건의 핵심인 만큼 200명(정확히 188명)에 가까운 피고인들에 대한 신문조서에 2군 6사 김일성의 신원이 자세히 기록된다는 것은 조서 작성상의 상식”이라고 말했다. 실제 혜산사건 피고인들은 수사관 신문과정에서 2군 6사장 김일성의 정체에 대해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1901년 함남출신,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붉은 군대’(赤軍)를 거쳐 입만(入滿)한 후 동북항일연군 입소>라고 밝혔다고 이치하라씨는 증언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1912년 평남 대동군출신으로 학력은 길림 육문중학 중퇴다. 본명이 金成柱라고 스스로 주장하나 사실관계나 정황으로 보아 金聖柱일 가능성이 높고 본명까지도 조작했을 개연성이 높다. 이런 증언으로 보면 보천보습격을 주도한 2군 6사장은 북한의 김일성이 절대 아니다) ②숨진 2군 6사장 김일성의 가족사항이 북한 김일성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제 내무성 경찰국의 특별고등경찰 조사보고서(보고서에 따르면 2군 6사장 김성주(金成柱)에게 김성보(金成甫)라는 이름의 사촌형이 있다고 기록돼 있으나 북한의 김일성은 종손 장형으로 사촌형이 결코 없다. 그리고 ‘성보’는 ‘성주’, ‘철주’, ‘영주’로 이어지는 북한의 김일성 가계 항렬(柱字)이 아니라는 점이다) ③보천보사건 5개월 후 2군 6사장 김일성의 사살을 확인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檢事局) 보고서 및 김일성 사살을 전한 당시 언론(경성일보,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보도 내용 ④2군 6사장 김일성을 사살한 만주군의 진술을 담은 만주군 기관지 ‘철심’(鐵心) 보도내용 ⑤2군 6사장 김일성의 인상착의를 잘 아는 주민들의 진술을 토대로 김일성의 참수된 목(얼굴부분)을 검시, 신원을 직접 확인한 만주군 장교의 증언(2군 6사장 김일성은 야영지에서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그의 인상착의를 잘 알고 있었다) ⑥북한의 김일성이 2군 6사장이 아니라 이 부대의 일개 부대원이라는 친동생 김영주와 김일성의 중국인 친구 장아청의 증언 ⑦보천보습격을 지휘한 사람이 북한의 김일성이 아니라는 박달, 박금철 등 습격에 참가한 사람들의 증언 ⑧사살된 2군 6사장의 후계자로 제2방면군장으로 승진한 제2대 김일성의 깡마르고 안경낀 사진(3명의 김일성 중 제1대 김일성과 제3대 김일성(북한의 김일성)을 제외한 제2방면군장(제2대 김일성)만이 유일하게 동북항일연군시절의 사진 3장을 남겼다. 일제 토벌대가 수거한 이들 사진에 나오는 제2방면군장은 한결같이 빈약한 체격에 키가 작고 코가 높고 근시로 안경을 착용하고 있는데 북한은 이 3장의 사진 중 흐릿하게 찍혀있는 사진에 나오는 제2방면군장을, 그것도 변조해 북한의 김일성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당시 일제 토벌대가 제2방면군장의 사진과 함께 인상착의까지 공개하고 사진을 복사해 수배전단까지 뿌렸기 때문에 보천보사건의 2군 6사장이 죽지않고 끝까지 부대를 이끌고 1945년 해방때까지 계속 항일투쟁을 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인 북한당국으로서는 해방후 2군 6사장, 제2방면군장, 북한 김일성이 모두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진을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⑨제2방면군장이 1939년 5월 3일 밤 200여명의 병력으로 함남 삼수군 호인면의 반절구(半截溝)를 습격하다 중상을 입었고 결국 이 후유증으로 5년후 병사한 사실(북한 김일성이 제2방면군장과 동일인물이라면 전투 중 중상을 입었어야 하는데도 북한 김일성은 항일투쟁중 중상을 입은 사실이 전혀 없다) ⑩1939년 일만군경에 체포된 제2방면군장의 처 김혜순의 증언 및 죽은 2군 6사장에게도 부인이 있었다는 여자대원의 증언(제2방면군장이 북한의 김일성과 동일인물이라면 북한은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 김정숙을 김일성의 첫 부인이자 항일의 여성영웅이라고 밝혀온 만큼 김혜순과 김정숙은 동일인물이어야 한다. 그러나 두 여인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또한 제1대 김일성 2군 6사장에게도 장백현의 한 농가에 최(崔)씨 성을 가진 부인이 살고있었다는 6사 소속 부대원의 증언이 있고 실제 일제 경찰에서 이 부인을 체포하려 갔다가 도망가고 없어 허탕친 일이 있다. 따라서 제2군 6사장, 제2방면군장, 북한의 김일성이 모두 동일인이라면 이들의 부인도 모두 동일인이어야 하는 데 제각각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북한은 이처럼 제1대 김일성과 제2대 김일성이 북한의 김일성으로 조작했지만 이들의 부인만은 조작할 수 없었다) ⑪1940년 당시 만주국 최고검찰청 사상담당 검사 오가타 히로시(緖方 浩)씨가 일본 관동군 제4과(課)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신원에 관한 기록을 토대로 한 증언(김일성은 조선인이며, 나이는 1940년 당시 34-35세, 키는 약 165cm의 작은 사람이며, 얼굴은 빈약했고,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안경은 위장용이 아니라 심한 근시때문이란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북한의 김일성은 당시 28세로 신장 175cm의 건장한 체격이었고 안경을 끼지않았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시기 사진은 무슨 이유인지 한장도 남아있지 않아 그가 안경을 착용했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1940년 말 일본관동군 토벌대의 공격을 피해 소련 연해주로 패주한 뒤 해방때까지 소련군 88정찰여단에서 활동할 때 모습이 담긴 사진, 그리고 해방이후 북한 최고지도자로 군림하던 1970년대 까지도 안경을 낀 모습은 북한의 어느 신문방송, 홍보선전기록물이나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육문중학 재학시절의 사진이 한 장 남아있으나 이것도 안경을 끼지않은 모습이다. 북한은 김일성의 항일투쟁때의 장면들은 100% 삽화 등 그림으로 처리하고 있으나 여기에도 안경을 착용한 모습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⑫2군 6사장 김일성이 만주 통화성(通化省) 양목정자에서 전사한 후 통화성 주민들이 추모비 건립 모금운동을 벌인 사실 ⑬일본인 나가오카 도모타로(永丘智太郞)가 1938년에 쓴 ‘극동의 계획과 민족’(極東の計劃と民族), 그리고 노리타케 가즈오(則武三雄)의 1942년 문집 ‘압록강’(鴨綠江)에 보천보습격을 이끈 김일성이 함남출신으로 서술돼 나온다는 점(북한의 김일성은 평남 대동군 태생인만큼 이들 책에 나오는 2군 6사장은 결코 북한의 김일성이 아니다) ⑭당연히 기록돼야 할 것으로 보이는 중국측 자료에 김일성이 보천보사건을 이끌었다는 기록이 전무하다. 북한의 김일성이 보천보사건을 지휘했는가를 분명히 확인하기 위해서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장(제1대 김일성)의 인물사진이나 북한 김일성(제3대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시절 사진 한 장이라도 남아있었으면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두 명이 남긴 사진은 한 장도 없다. 다만 전사한 2군6사장(제1대 김일성)을 승계한 제2방면군장(제2대 김일성)만이 유일하게 부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3장을 남겼는데 이 사진에 나타난 제2방면군장은 깡마르고 작은 키에 근시로 안경을 착용하고 있어 누가 봐도 북한의 김일성이 아니라는 것을 첫 눈에 알 수 있다.[39] 김일성이 눈이 나빠 청년시절 안경을 착용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북한은 3장의 사진 중 제2방면군장의 얼굴 모습이 비교적 뚜렷한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없게 흐리게 찍혀있는 이 사진을, 그것도 사진에 등장하는 일부 인물을 삭제하는 등 변조해 1972년 개관된 평양의 혁명박물관에 전시하고 항일투쟁 시절의 김일성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1968년 김일성 미화와 우상화를 위해 백봉이 쓴 책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에도 이 사진이 변조돼 등장한다. 그런데 어이된 일인가. 중국의 흑룡강성 혁명박물관에는 동북항일연군 시절의 안경낀 제2방면군장이 부대원 및 상관들과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88여단시절 북한의 김일성이 부대원 및 상관들과 함께 찍은 사진 등 2개가 전시돼있는데 두 사람(제2방면군장과 북한의 김일성)은 동명이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흑룡강성 혁명박물관의 안경낀 제2방면군장 사진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아니라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의 일부 지휘자와 전투원’이란 설명이 붙어있다.[40] 보천보전투 참가 부대는 김일성이 창설했다고 주장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아니라 김일성이 복무했던 중국공산당 휘하의 동북항일연군이다. 전투의 성격도 항일무장투쟁이라기보다 당시 국경지대에 빈번했던 비적(匪賊)들의 약탈행위 수준이었다. 항일투쟁이란 구실로 군자금 마련을 위한 노략질이었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滿洲省委) 예하 유격대로 항일과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있었지만 사실은 약탈, 방화, 살인, 납치를 일삼는 공비(共匪)떼에 불과했다. 서옥식은 따라서 ‘보천보 전투’아닌 ‘보천보주재소 습격약탈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건의 성격에 더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래서 중국공산당 마저도 ‘보천보 전투’에 대해 ‘비적활동’(匪賊活動)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당사(黨史)에 김일성 부대의 유격활동을 제대로 올리지 않았다. 중국공산당 당사뿐 아니라 현존하는 중국측 자료나 문헌에 김일성이 보천보습격사건을 이끌었다는 기록을 어디에도 없다. 보천보습격사건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산하 제1군 2사⦁4사와 2군 6사와 박달, 박금철이 주도한 조국광복회의 연합작전이었다. 그런데도 북한 교과서를 비롯한 문헌들은 김일성이 창건했다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단독 작전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문제는 보천보습격사건에서 북한의 김일성이 어떤 역할을 했느냐이다. 보천보습격사건 참가자인 혜산사건 피고인들의 진술을 종합해보면 당시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소위 ‘김일성부대’로 알려진 2군 6사의 사장(師長) 김일성이 보천보사건 5개월 후 전사하자 또 다른 승명자(承名者)가 2군 6사장 자리를 물려받아 1939년초 제2방면군장(제2대 김일성)으로까지 승진했다. 북한의 김일성(제3대 김일성)은 이 두 부대장의 부하였다. 보천보사건 이후 일제관동군과 만주군의 토벌이 강화되자 제2방면군장 김일성과 북한의 김일성은 모두 소련으로 피난했다. 제2방면군장은 소련의 연해주 오케얀스카야 야영지(南야영)에 정착한 뒤 1944년 가을 병사했다. 해방과 함께 북한을 다스릴 지도자로 소련의 스탈린에 의해 간택된 김일성은 귀국후 아예 자신이 2군 6사장으로 보천보사건을 지휘하고 제2방면군장으로까지 승진한 것처럼 모든 업적을 가로챈 것이다. 당시 국경지역을 소란케했던 소위 혜산사전(惠山事件) 피의자들인 박록금(朴祿金), 권영벽(權永壁), 이제순(李悌淳), 박금철(朴金喆), 마동희(馬東熙), 박달(朴達) 등에 대한 일본측의 신문조서(訊問調書)에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들을 신문했던 혜산사건 수사책임자 이치하라 간이치(市原感一, 1896~?) 함경남도 경찰국 고등과 경부(警部)는 신문내용을 토대로 2군 6사장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나이 1937년 기준 36세(1901년 생),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 함경남도 태생이라고 밝혔다.(이명영 교수가 쓴 ‘김일성 열전’에는 그가 1970년대 초 보천보사건 당시 김일성에 대한 수사와 사살에 직접 관련됐던 혜산사건 수사 책임자와 만주군 관계자를 찾아가서 들은 증언이 나온다. 증언을 한 사람들은 혜산사건 수사책임자였던 이치하라 간이치 말고도 혜산사건 피고인들의 기소를 담당했던 가가와 스나오(香川愿, 1902~?) 검사, 미나기 요시오(皆木善男) 함남도경 순사부장, 1937년 11월 13일의 김일성 사살 작전에 참여하고, 시신의 신원 확인을 직접 담당했던 만주군 장교 야기 하루오(八木春雄, 1910-2002) 등이다. 이들은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1937년 당시 36세로,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으며, 보천보 사건 5개월 후인 1937년 11월 13일 사살된 것이 틀림없다고 증언한다) 혜산사건이란 1937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일본 관헌이 김일성부대의 보천보습격사건 후 국내 연계세력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조국광복회 회원 등 조선인 501명(다른 기록엔 739명)을 검거하고 이 가운데 188명을 기소한 사건이다. 이런 기록으로 판단해 보면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의 김일성은 절대로 북한의 김일성과 동일 인물이 아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생일이 1901년이 아닌 1912년이며 길림의 육문중학교 중퇴생이다. 보천보습격사건 직후 1937년 8월 23일에 2군 6사의 김일성 부대는 만주 임강현(臨江縣) 5도구(道溝)에 있는 채목장을 습격하여 인부 5명을 납치했고, 9월 3일에는 갑산군 은흥면 중평리(甲山群 雲興面 仲坪里)에 있는 광산 3개를 털어 사금과 금품을 강탈했다. 하지만 2군 6사장이 사살된 1937년 11월 13일 이후 이듬해 봄까지는 김일성부대의 비적활동은 보고되지 않는다. 리더십의 공백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1938년 4월 26일 김일성부대가 나타나 임강현 제3구 6도구(臨江縣 第3區 6道溝)를 습격, 주민 51명을 납치하고 많은 양의 현금과 식량을 약탈해간 사건이 발생했다. 죽었다는 김일성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일제는 다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 나타난 김일성은 2군 6사장이 죽은 뒤인 1938년 봄 소련으로부터 파견돼 와서 김일성이란 이름을 승계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1939년 초 제1로군 산하 제1, 2군이 제1, 2, 3 방면군(方面軍)으로 개편되면서 제2방면군장으로 승진했다. 이 제2방면군장 김일성 부대는 1939년 5월 3일 밤 200여명의 병력으로 함남 삼수군 호인면의 반절구(半截溝)를 습격, 만주국 경찰과 4시간 교전 끝에 식량과 의류를 약탈하고 경관과 주민을 포함해 약 40명을 살상했다. 이 과정에서 제2방면군의 병력 손실도 적지 않았다. 특히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중상에 가까운 상처를 입고 부인이자 제2방면군 여자청년부장이었던 김혜순(金惠順)과 헤어졌다. 김혜순도 부상했다. 부상한 사람들의 동행은 눈에 띄기 쉽다는 작전상의 고려에서였다. 이후 김혜순은 밀림속 산가(山家)에 숨어 있다가 1940년 4월 6일 체포됐다. 조선일보는 김혜순 체포 사실을 1940년 7월 5일자에서 보도했다. 체포된 김혜순은 남편인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본명은 金一星, 간도 용정(龍井)의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와 소련 적군사관학교를 나왔고, 1930년 소위 5.30 간도폭동사건 때에는 행동대장이었으며, 1940년 당시 나이는 34세(1906년 생)라고 진술함으로써 이 사람도 북한의 김일성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체포된 다른 대원들도 김혜순과 같은 진술을 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간도폭동과는 무관하며 1940년 당시 28세(1912년생)인데다 그의 처는 1940년 10월 함께 소련으로 도피하던 중 훈춘의 산꼭대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김정숙이다. 전사한 2군 6사장을 승계한 제2방면군장의 김일성의 부대는 1940년 3월 25일 만주 허룽현(和龍縣) 훙치허(紅旗河)에 있는 일본군 마에다(前田) 부대를 습격해 일본군 120여명을 사살하고 부상자를 포함한 30여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경기관총 6정, 소총 100여 정, 권총 30여 정, 무전기 1대, 총탄 수만 발을 노획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북한의 주장대로 제2군 6사장과 제2 방면군장, 김성주(북한 최고지도자 김일성)가 처음부터 동일 인물이라면 마에다 부대 섬멸전투는 겨우 민간인 2명이 총탄에 맞아 사망한 보천보사건에 비해 전과(戰果)가 수십배나 되는 등 김일성 최대의 항일무장투쟁으로 기록될 수 있는 데도 북한당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를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않고 있다. 북한 교과서에도 전과 서술도 없이 아주 간단히 기술돼 있다. 기이한 일이다. 너무 떠들고 자랑하다보면 김일성이 가짜라는 사실만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는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북한은 또한 1935년 2월 13일의 동흥습격사건(東興襲擊事件)이 최초의 국내진공이자 보천보사건보다 규모가 큰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지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이홍광(李紅光, 1910-1935)이 이끄는 공산유격대원 2백여명은 이날 평안북도 북동부 후창군(厚昌郡) 동흥읍(東興邑)을 습격해 일본군 다수를 살상했다. 당시 평안북도 경찰부 집계를 인용한 조선중앙일보 1935년 2월 16일자 보도에 따르면 일본측 피해는 사망 8, 중경상 5, 체포(포로) 10명 등 총 23명이었다. 경기도 용인군 단삼동 출신으로 1926년 길림성(吉林省) 이통현(伊通縣)으로 이사했던 이홍광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후 항일투쟁에 나섰으며 동북항일연군의 전신인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 사장으로 습격사건을 지휘했다. 이홍광은 그해 5월 환인현(桓仁縣)과 흥경현(興京縣)의 접경지 노령(老嶺)에 이르러 일본군과 마주쳐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환인현 해청화락(海靑火絡) 밀영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했다. 하지만 북한은 교과서와 역사서에서 이 사건을 지어버렸다. 김일성의 업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뿐 아니라 남한도 마찬가지다. 보천보사건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한 것이라며 미화하느라 크게 떠들지만, 그보다 피해 규모와 파장이 컸던 동흥습격사건은 주모자가 김일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관심 가진 사람도, 거론하거나 연구하는 사람도 언론도 거의 없다. 보천보사건과 그 후 잇단 약탈 사건으로 혜산(惠山)경찰서는 2군 6사에 대한 비상경비태세에 들어갔다. 김일성과 내통한 국내인사들을 색출하고 권태국(權泰國), 김석태(金錫泰), 조신제(趙信濟)등을 체포해 정보를 수집한 후 혜산경찰서는 60명의 특별 수사반을 장백현에 파견하고 김일성을 지원하는 조직망 11명을 체포했다. 그 결과 국내에서 각종 공산당 조직에 관련된 162명, 장백현에서 60명 등 도합 222명이 체포됐다. 그 후 9월과 10월에 박달(朴達), 김성연(金成演), 이용술(李龍述)등 279명이 추가로 체포되는 등 1-2차 검거에서 체포된 자가 도합 501명이나 됐다. 일제 관헌들은 보천보습격사건의 주범인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을 캐내는 작업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검거된 조선인 피의자 501명을 신문하는 과정에서 습격을 주도한 자가 북한의 김일성이 아님을 밝혀낸 것이다. 당시 동북항일연군 정치위원이었던 웨이정민의 현상금이 3천 엔(円)이었던 데 비해 보천보사건 이후 김일성의 현상금이 1만 엔으로 올랐다는 사실은 일제가 보천보사건 주동자 검거에 전력을 투구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2 t 트럭에 가득 찰 정도로 방대했던 구속 피의자 501명 심문조서 속에는 제6사장 김일성의 신원이 기록돼 있다. 파악된 김일성의 신원은 많은 피의자들을 교차 신문한 끝에 나온 것인 만큼 정확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신문조서는 함흥지방법원에 보관돼 있던 것을 1946년 초에 찾아내 현재 북한의 조선로동당이 보관하며 공개하지 않고 있다. 보천보사건으로 1941년 8월 함흥지방법원에서 권영벽⦁이제순⦁박달 등 6명이 사형, 박금철 등 4명이 무기징역을 받았다. 유기징역은 15년 4명, 13년 6명, 12년 9명, 10년 18명, 8년이 14명이었으며, 7년 이하가 104명이나 됐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 중 박달은 질병으로 집행이 연기돼, 1945년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 월북했다. 이처럼 보천보습격사건은 북한 김일성의 업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김일성의 항일무쟁투쟁사 중 가장 빛나는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문헌들은 “김일성이 1937년 3월 무송현 서강(西崗)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열고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 계획을 제시하고 행동에 옮겼다”면서 “경찰관주재소, 면사무소를 비롯한 일제의 통치기관들을 습격, 소탕하고 보천보 일대를 해방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북한의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1937년 6월 4일 밤 10시 주력부대에서 선발된 100여명의 원정대를 지휘해 전투를 시작했다. 이 전투로 일제의 경찰관주재소, 면사무소, 우체소, 농사시험장, 산림보호구 등 일제의 모든 기관이 전소됐고, 적들은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의 총탄에 맞아 너부러졌다. 정치공작원들은 김일성이 작성한 조국광복회 10대강령과 포고문등을 비롯한 수많은 격문과 삐라를 살포하면서 인민들속에서 정치 선전사업을 활발히 진행했으며, 이 때 거리에 떨쳐나선 인민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을 환호하며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혁명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여 불렀다는 것이다. 북한 역사서에 따르면 또한 김일성은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뜨거운 답례를 보내면서 모든 반일 애국역량에 굳게 단결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여 싸울 것을 호소하는 열화같은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은 군중들의 가슴을 무한히 격동시켰으며 그들에게 조국의 자유와 해방 에 대한 굳은 신념을 북돋아 주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윽고 부대의 철수를 알리자 인민들은 저마다 노획물자를 지고 조선인민혁명군을 따라 나섰다. 김일성의 인솔하에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는 국내진공의 위대한 목적을 달성하고 조국을 완전히 해방할 날을 기약하면서 승리의 개가 드높이 개선의 길에 올랐다고 쓰여있다. 김일성은 그 후 추격해오는 적들을 구시산에서 섬멸하고 또 다시 간삼봉에서 놈들의 대병력을 섬멸함으로써 국내 진공작전의 승리를 더욱 빛냈다는 것이다.(력사사전Ⅰ, 평양: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1, pp. 903-906) 보천보 전투는 전과로 치면 아주 미미한 것이다.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인 26호에 50명, 조선인이 280호에 1천323명, 중국인이 2호에 10명 등 총 308호에 1천 383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무장인원으로는 5명의 경찰이 상주하고 있었을 뿐이다. 사전에 현지답사를 통해 지형 정찰까지했던 김일성 부대는 우선 전화선을 절단한 후 경찰관주재소부터 공격했다. 먼 거리에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하며 들어가는 바람에 총소리에 놀란 경찰관들은 모두 피신하고 주재소에 없었다. 이 작전에서 일본인이 피해를 본 것은 주재소에서 잠자다 미리 대피하지못한 일본인 순사의 2살짜리 딸이 유탄에 맞아 죽고, 총소리에 놀라 거리에 나왔던 일본인 음식점 주인이 총에 맞아 죽은 것, 그리고 주재소 무기가 탈취된 것이 전부다. 오히려 김일성부대는 퇴각하는 과정에서 6월 5일 일본경찰추격대와 충돌해 2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동아일보 1937년 6월 7일자) 일본의 좌파 지식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그의 저서 ‘와다 하루키의 북한 현대사’에서 이 사건으로 오히려 조국광복회 회원을 중심으로 조선인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돼 조국광복회와 함께 동북항일연군 조직이 궤멸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방화와 약탈로 피해자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은 김일성부대의 작전 목적이나 방법이 물자 약탈이지 항일전투가 아니었음을 명백히 말해준다. 항일전투부대라면 당연히 일본의 관서나 일본의 경찰이나 군부대등을 상대로 작전을 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절대로 동포들에게는 피해를 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30분가량 집중사격을 가한 후에 주재소 무기고를 부수고 경기관총 1정, 소총(장총) 6정, 권총 2정, 실탄 1천 170발등과 기타 물품들을 탈취했다. 그리고 농사시험장과 소방서 등을 약탈하고, 면사무소, 학교(보통학교), 우편소등에 방화하고, 시가지에 들어가 주택, 상점, 병원 등을 털어 현금과 물자, 의료 기기와 약품, 곡물과 의류 등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습격 1 시간 후에 철수했다. 북한 교과서를 보면 보천보 전투의 구체적인 전과가 나와 있지 않다. 이처럼 전과를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과 자체가 미미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북한 문헌들(김일성동지략전,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2, p. 213; 조선민족해방투쟁사, 평양: 력사편찬위원회, 1949, p. 389)은 보천보 전투에서 김일성이 군중을 모아놓고 “환호하는 인민들에게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촌음을 다투는 전투 중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에 어긋날 뿐 아니라 어느 문헌에도 연설했다는 기록이 없다. 당시 동아일보 1936년 6월 5일자는 오히려 주민들이 공포에 질렸다고 보도했다.. 김일성이 주민들을 모아놓고 연설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증언한 사람은 2군 6사의 기관총반 반장 강위룡이다. 강위룡은 항일무장투쟁 당시 북한의 김일성과 막역한 사이였으며 만주에서 연해주로 파난 갈 때 김일성과 동행했던 사람이다. 1962년까지 연변에서 사법부장을 지내다가 북한으로 갔는데 보천보혁명박물관에서 보천보전투가 굉장한 전투였던 것처럼 과장돼있고 북한의 김일성이 연설을 한 것처럼 해놓은 것을 보고 사실과 다르다고 이야기를 했다가 노동교화처분을 받고 해주로 쫏겨났다. 그런데 어느날 평양에서 열린 ‘항일운동 빨치산동지 모임’에서 김일성이 ‘곰’(강위룡의 별명)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는 것. 해주에서 노동교화처분을 받고있다는 사실을 듣고 곧바로 강위룡을 불러올려 평양위수사령관으로 임명했다는 것이다.(서재진 저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연구’, 통일연구원, 2006, p. 202) 2군 6사장 김일성이 연설을 하지 않았지만 대원들이 전단을 뿌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은 보천보전투에서 뿌린 전단에 ‘조선인민혁명군 북조선원정대 사령 김일성’이라고 기술돼 있다고 주장하지만 조선인민혁명군은 존재하지도 않은 부대이며, 참가부대는 동북항일연군인 만큼 이 또한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1972년에 출간된 ‘김일성동지략전’은 ‘동북항일연군 북조선원정대 사령 김일성’이라고 기록된 중국측 문헌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으나 이 또한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현존하는 중국측 일부 자료에는 보천보전투가 언급돼 있기는 하지만 북한의 김일성이 전투를 지휘했다는 기록은 없다. 보천보 전투가 국내진공이라는 선전효과는 거두었지만 결과는 일본관헌의 필사적인 토벌작 전으로 동북항일연군이 궤멸당하는 계기가 된다. 북한의 김일성은 보천보 전투 이후 1938년 말부터 일제 토벌대의 추격을 받고 장백현으로 이동한다. 잔여 부대원 16명과 함께 1938년 12월-1939년 3월 사이 100일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몽강현에서 압록강 연안 북부 국경일대를 향해 이동했다. 일본군의 집요한 추격으로 ‘고난의 행군’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특히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 1사장 정빈이 투항하고 1로군 군장 양정우가 전사한 것은 큰 타격이었다. 결국 북한의 김일성은 1940년 가을에 소련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북한의 교과서를 비롯한 문헌들은 북한의 김일성이 추격해오는 적들을 구시산과 간삼봉에서 모조리 소탕해 버렸다고 허위사실을 기록하고 있다.(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 혁명력사(중학교 제4학년용),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주체92(2003), pp. 67-68) 보천보전투계획은 1937년 3월 있은 중국공산당의 무송현(撫松縣) 서강(西崗) 양목정자(楊木頂子)회의에서 논의됐다. 중국공산당 만주성 특위 서기었던 웨이정민의 주재로 열린 회의에서는 북한의 주장처럼 김일성의 ‘주체노선’에 의해서가 아니라 웨이정민이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 참가했다가 가지고 온 행동강령에 근거해서 조선국내 진공 작전이 논의된 것이다. 당시 회의에는 중국공산당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1군 제2사 사장 중국인 조아범(曺亞範), 제4사 사장 중국인 주수동(周樹東), 그리고 제2군 제6사 사장 김일성(북한의 김일성이 아님)이 참가했다. 조선국내 진출문제를 토의하는 이 회의에서는 김일성의 제6사가 보천보 공격을 맡도록하고 제4사는 무산으로, 제2사는 장백으로 진출해 6사의 국내기습을 돕기로 결정했다. 무산, 장백을 먼저 공격해 일제 토벌대의 관심과 병력을 이들 지역으로 집중시킨 뒤 보천보를 습격한 것이다. 보천보가 조선국내 진공작전의 목표로 선정된 것은 전적으로 보천보의 지리적 장점 때문이었다. 보천보는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오는 가림천가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부락으로서 조선의 내륙으로 통하는 중요한 철도분기점인 혜산진과 만주 장백현의 중심인 장백부를 가까이 접해있는 요충지로 불릴 만큼 예민한 지역이었다. 동북항일연군이 이곳을 습격하면 그 소식은 삽시에 조선국내로 퍼져 나가게 돼있었다. 즉,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심리적 효과를 노리는 공산빨치산 전술에 적합하다는 것이 보천보를 작전지로 선택한 이유의 하나였다. 동북항일연군이 보천보를 선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 곳에 대적할 일본군이 전혀 주재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경찰관주재소와 면사무소, 농사시험장, 소방서, 학교, 우편소, 산림보호구 등이 있는 비교적 큰 마을인데도 상주 무장경찰인력은 5명에 불과했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북한은 정권수립 후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해 1955년 8월 7일 보천보에 ‘보천보혁명박물관’의 문을 연후 1963년 새 건물로 단장했고, 1967년 6월 량강도 혜산시에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을 세우며, 김일성의 우상화에 이를 대대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광우병 폭력촛불시위에 대한 견해[편집]

서옥식은 2008년 여름 장장 106일에 걸쳐 대한민국 심장부 수도 서울을 온통 광란의 장(場)으로 마비시켜 사회적 피해액만도 약 4조원에 달했던 광우병촛불난동시위에 대해 세계를 속인 사기극이라며 아주 비판적이다.[41] 서옥식은 특히 2016년 5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당시 MBC PD수첩 보도를 포함, 미국 쇠고기를 먹으면 당장이라도 머리에 구멍이 뚫려 모조리 죽게되는 몹쓸병에 걸린다고 선동했던 사람들의 주장대로라면 쇠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미국인 3억 2천만의 상당수는 8년이 지난 2016년 현재 인간광우병에 걸려 죽고 없을 것이고, 또 다른 나머지 사람들은 발병 또는 잠재적 감염상태에서 죽을 날을 처참하게 기다리는 등 머지않아 미국이라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소멸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미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남아있고 미국인들은 지금 이 순간도 자국산 쇠고기를 즐겨먹으며 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해 먹었거나 현재도 먹고있는 나라를 합치면 전 세계적으로 117개이나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쯤 지구촌 곳곳에서 미국산 쇠고기 식용으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하는 등 난리가 날 법도 한데 조용한 건 또 무엇인가?”라고 적었다 서옥식은 광우병촛불폭력시위는 언론의 거짓 왜곡 선동과 종북세력의 대한민국 체제전복 시도, 자칭 진보·좌파의 대선결과 불복과 새로 출범한 이명박 정부에 대한 증오와 저주, 신생 정부의 무기력이 결합해 일어난 대한민국과 법치 파괴 기도였다고 말한다. 그는 당시 검찰조사결과 밝혀진 1천 872개 단체로 구성돼 촛불시위를 주도한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는 언제나 우리사회의 민감한 정치․사회 현안이 있을때마다 반미․반정부 폭력투쟁의 전면에 나서 북한을 비호해온 친북계열인 한국진보연대․민주노총․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언노련)․언론개혁시민연대(언개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남측본부․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남측본부․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6.15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6.15남북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우리민족끼리연방통일추진회의(연방통추)․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주한미군철수운동본부 등과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인 노동자의 힘․사회주의노동자연합․민중연대 그리고 민주노동당․참여연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협의회(민교협)․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YMCA․흥사단․한미FTA저지범국민운본부․인권실천시민연대․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노동인권회관․녹색연합․환경정의․다함께․민족문제연구소․민주주의법학연구회․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반미여성회․실천불교전국승가회․한국가톨릭농민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참교육학부모회․평화를 만드는 여성회․평화와 통일은 여는 사랍들․학술단체협의회․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한민족예술인총연합․한국여성단체연합․한국여성민우회․한국청년단체협의회․한극문화연대 등 진보 및 좌파단체와 그 구성원들이 대부분 참여했다고 소개했다.[42] 서옥식은 대체로 이들 단체와 그 구성원들은 국가보안법 위반 경력과 친북경력을 민주화운동이라 거짓 선동한다. 이들은 민주화운동가 또는 자칭 진보세력이라고 떠들면서도 북한의 주체사상이나 3대 권력세습, 인권탄압, 핵무장에는 침묵한다. 이들은 북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오히려 내정간섭이며 북한을 내재적 접근으로 바라봐야한다고 황당한 발언을 하며 북을 감싸고 돈다. 그러면서 그들이 살고있는 대한민국에에 대해서는 온갖 저주를 퍼붓고 심지어 멸망하기까지 바란다. 실제 1천 872개 단체로 구성된 ‘광우병국민대책회의’를 이끌며 광우난동촛불시위를 주도한 ‘한국진보연대’는 그들의 투쟁 목표가 궁극적으로 이명박 정부를 타도하고 대한민국 사회를 마비시키는 것이라고 그들의 공식 문건에서 밝히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옥식은 광우병 촛불폭력시위를 촉발시킨 PD수첩의 결론적인 메시지는 미국산 쇠고기를 절대적인 위험물질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미국소=광우병소=죽음이라는 인식을 시청자들에게 널리 심어준 것이었는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자료가 허구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말했다.[43]

천안함 폭침사건에 대한 견해[편집]

서옥식은 천안함 폭침 5주기인 2015년 3월 대한민국내의 종북좌파진영과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일부 정치인과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들이 이 사건 직후부터 명확한 증거도 제시하지못하면서 북한의 소행임을 부정하고 좌초, 기뢰사고, 내부폭발, 피로파괴, 자폭, 미군오폭설, 한미합작 의도적 폭파설 등을 주장하면서 북한의 독재 세습정권의 반문명적 군사모험주의노선에 면죄부를 주고 있다면서 천안함폭침을 북한소행이 아니라고 비호한 52인의 망언을 소개했다. 이들 52인의 망언은 한 인터넷신문을 통해 잘 소개돼있다.[44] 2010년 3월 26일 밤 발생한 천안함의 폭침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같은해 3월 31일 호주, 미국, 스웨덴, 영국 등 4개국 전문가 24명과 국내 10개 전문기관의 전문가 25명, 군전문가 22명, 국회추천 전문위원 3명 등 모두 74명으로 구성된 5개국 민·군합동 다국적 조사단이 출범해 51일의 정밀 조사끝에 5월 20일 천안함이 북한 잠수정의 어뢰로 침몰한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서옥식은 ‘망언(妄言)’의 뜻을 알아보기 위해 사전을 찾아보니 <이치나 사리에 맞지 아니하고 망령되게 말함. 또는 그런 말, 떳떳하지 못한 말, 사려깊지 못한 말, 경솔한 말, 허황된 말, 부적절한 말> 등으로 나와 있다고 소개했다. 영어로는 thoughtless words(remarks, statements), recklesss remarks, improper remarks, ludicrous statements 등으로 설명돼 있다고 지적했다. 서옥식이 정리한 대표적인 망언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직책은 발언 당시)

  • 천안함 폭침은 소설…소설가인 내가 졌다(소설가 이외수, 2010.5.10,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
  • 이명박이야말로 천안함 희생자들을 낸 살인 원흉(한상렬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목사), 2010.6.22,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해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북한 언론인과 평양주재 외국특파원들과 가진 기자회견)
  • 천안함 북 소행 발표는 웃기는 개그…0.0001%도 설득이 안 된다(김용옥 원광대 석좌교수, 2010.5.23, 봉은사 부처님 오신날 대법회 강연)
  • 천안함 사건은 정부가 적당히 장난치려다 커져버린 것…MB의 5.24 대북 조치는 박정희, 전두환의 쿠데타를 능가하는 헌정파괴조치(백낙청 한반도 평화포럼 공동대표, 2010.6.10, 프레시안 인터뷰)
  • 천암함은 좌초된 후 다른 선체와 충돌해 절단되고 침몰했다(신상철 정치웹진 서프라이즈 대표, 2010.4.15, 서프라이즈 기고문)
  • 천안함사건은 정부가 종북세력을 단속하기 위해 억지로 북한소행으로 조작한 것(박창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신부, 2013.11.22, 전북 군산시 수송동성당에서 열린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시국미사)
  • 정부의 천안함사건 발표는 급조된 선거용(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 2010.5.20, 민주노동당 긴급현안대책회의)
  • 북한의 소행임을 전제로 소설을 써대고 있다(노회찬 진보신당 전 국회의원, 2010.5.6, ‘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
  • 북한소행이 아니라는 양심선언이 곧 도처에서 나올 것이다(김효석 민주당의원, 2010.4.20, 민주당 제47차 원내대책회의)
  • 정부가 북한을 자극해서 천안함사건 일어났다(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서울시장 후보, 2011.10.10, 관훈토론회)
  • 폭발이 있었다는 증거가 단 하나도 없다. 합조단 발표를 믿으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유시민 국민참여당 참여정책연구원장, 2010.5.21, 프레시안)
  • 북한의 소행으로 규정하는 정확한 데이터들이 없다(박영선 민주당의원, 2010.5.27, CBS ‘이종훈의 뉴스쇼’)
  • 천안함이 두동강 난 건 홀인원이 한 다섯 번쯤 연속으로 나는 확률(최문순 민주당의원, 2010.6.16, CBS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인터뷰)
  • 일부 언론과 보수층에서 북한 소행설로 연기를 피우고 있다(박지원 민주당의원, 2010.4.1, 민주당 제67차 고위정책회의)
  • 6.2 선거는 이명박정권 심판이지 천안함을 빌미로 김정일 정권 심판하는 것 아니다(정동영 민주당의원, 2010.5.7, 정세균-정동영 조찬회동)
  • 북한소행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는 신북풍 뒤에 숨어 이득을 보려는 간악한 술수(천정배민주당의원, 2010.5.4, 노컷뉴스)
  • 합동조사단 발표는 매우 부실… 진실을 은폐해 신뢰 얻을 수 없다(한명숙 민주당 서울시장후보, 2010.5.23, 서울시장후보 방송연설)
  • 북한이 했다니까 그럼 북한이 했다고 치자(정세균 민주당대표, 2010.6.11, 조선일보 인터뷰)
  • 천안함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숨은 의도가 분명히 있다(이재정 전통일부장관, 2010.5.22, 경기방송 시사대담프로그램 ‘시사21’)
  • 선거 한 번 이겨보겠다고 천안함 가지고 전쟁까지 불사하고 있다. 북한에 천안함 반론권

보장하지 않으면 정전협정 위반(이정희 민주노동당의원, 2010.5.26, 민중의소리 인터뷰)

  • 이명박 정권은 한반도를 전쟁위기로 몰고있는 불량 정권(심상정 진보신당 상임고문, 2010.6.1,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유시민 후보를 지지해 달라고 발표한 호소문)
  • 천안함 사건은 북한을 악마로 만들기 위해 미국과 MB가 음모한 작품(정성희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2011.3.23, ‘통일뉴스’에 올린 ‘리비아 침공과 천안함 1년’이란 제목의 글)
  • 어뢰로 맞췄다는 것은 달리는 차 안의 사람이 나비를 맨 손으로 잡을 확률과 비슷(유원일 창조한국당 의원, 2010.4.29, 아이뉴스)
  • 수구 신문들이 천안함 침몰의 원인을 북한의 공격에 의한 것이라고 선동한다(표명렬 평화재향군인회 대표, 2010.5.2, 평화재향군인회 홈페이지에 올린 ‘천안함사고 보도, 수구 신문들의 이적행위’)
  • 천안함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수구세력이 ‘사건화’한 것(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 (2010.6.1, 동국대 정년퇴임 강연)
  • 미국의 처지에서 천안함 사건은 꽃놀이패였다(정연주 전 KBS사장, 2010.8.8, 한겨레신문 기고 칼럼)
  • 북한 검열단 받아들여 진상규명 확실히 하는 것 필요(김용현 동국대 교수, 2010.5.21, 한국일보)
  • 결론을 예단해놓고 조작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2010.5.20, 인터넷매체 ‘미디어스’)
  • 폭발이 없었는데 두달 후 폭발이라고 발표해서 결과가 진실되는 것 아니다(이종인 알파잠

수기술공사 대표, 2010.5.20, 한겨레신문)

역사교과서는 국정과 검정의 선택이 아닌‘팩트’우선의 문제[편집]

서옥식은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정치권, 학계를 비롯한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2015년에 펴낸 <거짓과 왜곡 조작 날조를 가르치는 사회-북한 교과서 대해부(해맞이 미디어, 614쪽)>라는 책 서문에서 역사기술은 다양성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참과 거짓을 가르는 팩트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역사 교과서 발행 체제는 우리 사회의 치열한 이데올로기 대립 과정에서 정권에 따라 국정과 검정 사이를 오락가락해왔지만 정부의 국정화 결정에 빌미를 제공한 것은 대다수 우리 기존 역사 교과서들의 오류, 왜곡, 편향적인 기술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예컨대 우리의 일부 역사 교과서는 1948년 8월 남한 유권자 77.5%가 비밀투표를 통해 최종 선출한 대의원 360명이 북한측 대의원 212명과 함께 그해 9월 2일부터 일주일간 평양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국회)에 참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헌법을 확정하고 김일성을 수상으로 선출함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웠다는 북한 교과서와 역사서들의 날조된 주장을 그대로 기술하고 있다고 서옥식은 지적한다. 북한 김일성정권을 남한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 세웠다는 이 기막힌 내용을 우리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가르쳐온 것이다. 그는 “우리는 때로 객관적으로 동일한 사안이라도 사고나 관점에 따라 다양한 가치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다양성이란 이름아래 팩트가 실종되거나 왜곡된다면 그건 거짓의 기록이나 다름없다. 지금의 대한민국 검인정교과서들은 다양성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좌편향 일변도로 다양성을 상실했다”면서 현행 검정교과서가 8종(種)이지만 다양성을 보장하기는 커녕 오히려 내용이 비숫한 ‘1종의 획일적인 붕어빵 교과서’가 되고 말았다고 꼬집었다. 서옥식의 이같은 견해를 종합해보면 역사교과서 문제는 국정이냐 검인정이냐가 아니라 참과 거짓의 문제이며 어느 쪽이 사실을 기술하고 사실의 바탕위에서 역사를 해석하느냐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서옥식은 흔히 영국의 역사가 카(E. H. Carr)의 사관을 ‘주관적 역사관’이라고 부르지만 그 자신은 사실을 매우 중시했다고 지적한다. 카는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에서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It is 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ast and the present.)라고 말해 역사가가 사실을 토대로 하여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해야 함을 강조했다. 서옥식은 또 “역사 기술의 이데올로기적 접근은 아주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는 진위(眞僞, true/false), 정사(正邪, right/wrong), 선악(善惡, good/bad), 미추(美醜, beautiful/ugly), 객관적으로 타당한 견해와 주관적인 편견(objectively reasonable views/subjective prejudices)등이 섞여 있는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누구나 다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것, 초경험적인 것, 주술적이고 비과학적인 내용이 포함된 것이 이데올로기”라고 강조한다.

대학강의에 대한 평가: 학생들의 이데올로기 성향에 따라 극과 극[편집]

서옥식은 30년간의 언론인 생활을 끝내고 2003년부터 2014년까지 약 10년간 국내 5개 대학에서 초빙교수 등으로 강의를 했다. 언론정보학 계통의 학과가 있는 곳에서는 매스커뮤니케이션개론, 현대사회와 언론, 정보사회론, 광고와 마케팅 등 언론관련 과목을 강의했으나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고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정칙학개론, 국제정치학 입문, 현대정치사상, 북한정치체제론, 남북교류협력론, NGO의 이해, 미래사화와 문화, 논문작성의 이론과 실제 등 주로 정치학관련 사회과학 과목을 강의했다. 저서로도 단독저서 5권과 공저 2권 등 7권이 있으나 단독저서 3권은 학문영역의 책이다. 이밖에 학생들을 위해 만든 대학 내부 교재로 ‘핵심 현대 정치사상’, ‘키포인트 국제정치학’등이 있다. 서옥식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된 동기에 대해 “내가 공부해서 알고있는 조그만한 지식을 학생들과 나누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의 지식나눔공동체인 ‘해피캠퍼스’와 ‘레포트월드’등에는 50여건에 달하는 서옥식의 방대한 레포트와 논문, 학습자료 등이 등재돼 있는 것으로 발견되는 데 이는 그의 ‘지식나눔 의지’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언론인 출신인 서옥식은 언론보도의 생명이 ‘사실(fact)’에 있듯이 학생들에게 무엇보다 ‘사실’을 강조한다. 그의 저서 <오역의 제국- 그 거짓과 왜곡의 세계(2013)>와 <거짓과 왜곡 조작 날조를 가르치는 사회-북한 교과서 대해부>는 제목이 가리키듯 그가 얼마나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마지막까지 강의를 했던 성결대학교에서 일부 학생들이 그에게 붙여준 이름은 ‘서사실(徐事實)’(서옥식+사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옥식의 강의 스타일이나 강의 내용 평가에 대해서는 학생들의 성향이 소위 ‘진보’냐 ‘보수’냐에 따라 갈린다고 할 수 있다. 보수적인 학생들은 서옥식의 수업이 재미있고 항상 이론과 실제를 겸비하고, 현장감각이 있는 강의를 하기 때문에 강의실이 수강생으로 넘쳐난다고 말한다.[45] 또한 학생들은 서옥식을 보수적인 성향의 인물로 보지만 진짜 좌파들이 감히 한마디도 못할 정도로 논리적이고 팩트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강의가 너무 감동적이라는 평가가 있다고 한다. 인터넷 ‘dcinside.com 갤러리’에서 ‘검색하다가’라는 ID를 가진 한 성결대 학생은 “(서옥식 교수와) 정치성향이 안 맞으면 최악의 수업이지만 정치성향이 맞으면 끝내주는 강의이다. 그런데 워낙 사실만 말해서 기분 나빠도 할 수 없긴 하다. 수업 중간중간에 야한 말을 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학점받기도, 듣기도 무난한 수업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oo’란 ID의 한 학생은 “(서옥식 교수는) 전형적인 보수고 정치성향 안맞으면 수업 듣기도 짜증나고 출석도 맘대로고 암튼 별로다”라고 적고있다.[46] 이에 대해 서옥식은 자신은 진보도 보수도 아니며 ‘사실’을 중시할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기타[편집]

  • 1980년 광주 5∙18 민주항쟁 때는 동양통신사의 제휴 외신사였던 미 UPI 통신 서울지국의 배려로 UPI 특파원증을 발급받아 현지에서 생생한 기사를 취재하여 광주의 목소리를 국내외에 알렸다.[47] 신군부의 게엄확대조치에 따른 보도통제와 기사검열로 광주시민들의 한국언론에 대한 불신과 취재거부가 극에 달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미국 언론사 특파원으로 ‘위장’한 것이다.
  •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한 대한항공(KAL)858기 공중실종사건(1987년 11월 29일)때는 사건발생 약 2주후인 1987년 12월 13일 버마(현 미얀마)해역에서 KAL기가 공중폭파됐음을 알리는 최초의 증거물이자 잔해인 구명정(life raft)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사진과 함께 특종으로 보도했다. 당시 군사독재체제였던 버마에는 언론탄압이 극도에 달해 서방기자가 한명도 상주하지 않았으나 동남아 유일의 한국특파원으로 태국의 방콕에 상주하고 있던 연합통신(현 연합뉴스)의 서옥식 기자는 KAL기사건 발생이후 운좋게 관광비자를 얻어 버마 수도 랑군(현 양곤)에 들어가 취재활동을 하고 있던중 구명정 발견이란 특종을 하게된 것이다.“[PDF]'KAL858기 폭파사건'조사결과 중간발표문, 2006년 8월 1일,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PDF). 2014년 7월 2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7월 17일에 확인함. </ref>
  •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 붕괴 때는 동유럽 현지에 약 1개월간 파견취재를 나갔으며 1991년 1월 걸프전 발발때는 종군기자로 43일간 이라크-요르단 국경과 이스라엘, 이집트에 특파되기도 했다.

각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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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