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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는 팔기군의 기인(旗人, 청나라때 만주사람을 일컬음) 에호하라의 딸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에호하라가 여러 곳의 지방 관리로 근무했기 때문에 그녀는 어릴때부터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자연스럽게 권모술수를 익힐 수 있었다.

마침내 궁으로 들어가 청나라 제국의 9대 황제 함풍제의 눈에 들어 그의 비가 되었고, 황태자 재순(載淳)을 낳아 귀비의 지위까지 올랐다.

함풍제가 31세의 젊은 나이로 열하에서 병사하자, 6살밖에 되지 않은 황태자 재순이 황제로 등극하여 동치제가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정권은 서태후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함풍제가 세상을 뜰 때 당시 서태후의 나이는 27살이었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난제2차 아편전쟁을 겪으며 함풍제의 곁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몸이었던 그녀는 순식간에 황제의 인장을 차지하고 함풍제의 이복동생 공친왕과 손을 잡고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또한 동태후를 끌어들여 함께 수렴청정을 하자고 꾀었다.

함풍제의 정실황후였던 자안황태후(동태후)는 동쪽의 종수궁에 기거했고, 서태후(서태후)는 서쪽의 저수궁에 기거했다. 그래서 동태후, 서태후라고 불리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서태후보다 두 살 어린 동태후는 온순한 성격인데다 정치적 야심이 없는 인물이라 서태후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따름이었다.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굳히기 위해 서태후는 함풍제 시절부터 자신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조정 대신들을 축출하고자 했다. 그녀는 함풍제의 운구가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때를 기다렸다가 궁에 먼저 들어와 대신들을 모았따. 그리고 운구를 모시고 오던 재원,단화, 숙순 등을 파직한 후 체포하여 참형에 처하거나 유배를 보냈다. 이렇게 서태후는 권력을 잡았고, 이 일이 신유년에 일어났다 하여 '신유정변'이라고 부른다.

동치제는 서태후의 손아귀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한 채 19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권력을 탐하기 위해 아들의 죽음마저 슬퍼하지 않았던 서태후는 서둘러 동치제의 뒤를 이을 인물을 고민했다. 만일 동치제의 자식이 후사를 잇는다면 태황태후가 되는 서태후의 정권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서태후는 오랜 고민 끝에 마침내 종제 광서제를 보위에 오르게 하니, 그의 나이 겨우 4살때의 일이다.

나이 어린 황제를 보필한다는 명분하에 서태후는 동태후와 함께 다시 수렴청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서태후에게 성격이 참하고 야심이 없는 동태후는 눈에 거슬리는 인물이었다. 특히 그녀가 자신의 정책에 종종 반대하고 나서자 갈등이 고조되었고, 얼마 후 동태후는 갑자기 죽었다.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궁 내에서는 서태후가 동태후를 독살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서태후는 함께 손을 잡고 정변을 일으킨 공친왕 혁흔 역시 1884년에 파면하고 그 자리에 광서제의 아버지인 순친왕을 앉혔다. 백성 및 서양 대표들과도 친분이 있고, 자신의 군대를 갖고 있던 공친왕보다도 성격도 심약하고 아들이 볼모나 다름없는 상태로 황위에 있는 순친왕 쪽이 다루기 쉽다는 계산에서였다.

이제 서태후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서태후는 모든 정치 문제를 논함에 있어 자신이 모르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단속했다. 황제인 광서제는 아침저녁으로 서태후에게 문후를 드리며 그날의 일을 의논하고 그녀의 하교를 받아야 했다. 나라의 황제는 비록 광서제였으나 실질적으로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으며, 지배권력은 서태후의 치마폭 안에 있었던 셈이었다.

서태후는 광서제의 배필도 직접 골랐다. 자신의 친인척의 딸을 광서제의 황후로 맞아들인 것이다. 15세가 된 광서제는 서태후의 뜻에 따라 혼례를 올렸다.

서태후는 정권을 잡고 자신의 안위를 유지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을 뿐, 서구 열강들이 몰려오는 혼란한 시기에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보살피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1884년 청불전쟁이 벌어지자, 그녀는 군대에 대기명령만을 내리고 이허위안을 짓는다는 명분으로 북양함대의 자금 30만 냥을 유용하여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전쟁터의 군사와 백성들이 큰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정작 협상 자리에서는 중국에 불리한 불평등조약을 맺어 중국의 이권을 프랑스에 내주었다. 나라의 지도자가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를 내팽개친 것이다.

1889년, 광서제가 19살이 되자 더 이상 서태후의 수렴청정은 그 명분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서태후는 모든 정권을 광서제에게 양위한다는 발표와 함께 공식적으로 정권에서 물러났다.

서태후의 그늘에서 벗어난 광서제는 스스로 독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1895년 발발한 청일전쟁을 계기로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위세를 과시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광서제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서태후는 갖은 술책으로 전쟁 준비를 방해하고 기어이 청일전쟁에서 패배를 이끌어냈다.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대만 땅과 랴오둥 반도를 일본에게 양도하는 선에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광서제에겐 치욕적인 조약의 체결이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판단 아래 광서제는 내정을 개혁하고 국력을 신장시키기 위해 일대 정치개혁을 실시했다. 캉유웨이,양계초 같은 인물들이 광서제의 개혁에 가담했다. 그들은 시험제도를 개량하고 신문 보도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의 이른바 '유신변법'을 시행했다. 이를 두고 '백일개혁'이라 부른다.

그러나 광서제의 개혁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수구 세력이었다. 개혁으로 인해 자신들의 이권이 사라질까 두려워한 그들은 서태후를 독려해 그녀의 정권 재탈환을 부추겼다. 그들의 부추김에 고무된 서태후는 광서제를 궁중에 유폐시킨 후 다시 정권을 잡았다.

당시 청나라 일각에서는 의화단이라는 비밀결사집단이 그 세력을 얻고 있었다. 이들은 "청조를 도와 양놈을 멸하자!"는 부청멸양 구호를 외치며 베이징으로 진출했는데, 서태후를 비롯한 수구파들은 이들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비호했다. 청조의 공식 인정을 받은 의화단은 독일의 베이징 주재 외교관(클레멘스 폰 케텔러 남작) 살해하기에 이르렀고, 영국,미국,프랑스,일본,러시아 등 8개국의 연합군이 자국의 공관원들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8국연군을 조직, 군대를 파병해 베이징까지 밀려들어왔다. 이에 서태후는 광서제와 함께 서둘러 시안으로 몽진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피난살이는 1901년 베이징 의정서 체결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들은 서구 열강들의 군대 주둔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4억 5천만냥에 달하는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구 열강들이 중국 본토를 다스리기 위한 필요성 때문에 서태후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점이었을 뿐이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그동안의 쇄국으로 일관해오던 정책 노선을 변경하여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만주족한족의 혼가(混嫁)를 허용하였고, 여인들의 전족을 금지시켰다. 남자들의 단발이 허락되었고, 인신매매와 아편을 금지한다는 등 그밖에 과거제를 폐지하고 군사제도를 개혁을 한다는 각종 개혁 내용이 속속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1908년, 광서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마자 서태후 역시 그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