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Sienic/신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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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월 1일 신년하례회. 두번째 줄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신규식

신규식(申圭植, 1879년 음력 1월 13일 ~ 1922년 양력 9월 25일)은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용우(龍雨)의 아들이며 아호는 예관. 다른 이름은 신성이다. 1879년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에서 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경술국치를 맞자, 이듬해인 1911년중국으로 망명해 쑨원천치메이중국 동맹회 간부들과 친교를 맺어 중국 동맹회에 가입한 뒤 신해혁명에 참여했다. 이어 1912년에 중국의 혁명가들과 친교를 맺기 위해 신아동제사를, 그 해 7월에는 '동주공제'(同舟共濟)라는 뜻의 동제사를 조직했다. 이 단체의 총재 박은식을 비롯해 김규식신채호조소앙, 홍명희, 여운형, 조동호, 장건상 등이 가입해 있었다. 이들은 1917년 7월에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1918년신한청년당의 조직을 지원했다. 이듬해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이 되어 1921년 11월 3일쑨원이 이끄는 광둥의 국민당 정부로부터 임정의 승인을 얻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22년에 병사했다.

별명으로는 성(誠)·목성(木聖)이 있고, 아호로는 예관(睨觀)·여서(余胥)·일민(一民)·청구(靑丘)·한인(恨人) 등이 있다. 중국식 이름으로는 신정(申檉)이라 한다. 충청북도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본관은 고령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1879년 충청북도 청원 문의면에서 용우(龍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신용우는 중추원 의관(議官)을 지냈다. 어린시절 신규식은 비교적 여유 있는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 자랐고, 한학을 공부하다가 한성부로 상경, 1894년 일본제국을 배척하고 사악(邪惡)을 배격하기 위해 글을 써서 사람들을 고무·격려하고 학우들과 가숙(家塾)의 동년군(同年軍)을 조직하여 훈련했다.

청년기[편집]

학창시절[편집]

1898년 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에 입학하여 중국어·한국사·지리 등을 배웠다.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들어갔고, 학교당국의 불합리한 처사와 부패에 대항해서 조성환(曺成煥)과 함께 학교당국의 부정에 반발하는 동맹휴학을 모의했으나 신병으로 하향중에 모의가 실행되어 군법처형은 면했다.

군인, 계몽 활동[편집]

1902년 무관학교 졸업하여 대한제국 육군 보병 참위(參尉)로 임관되어 부위(副尉)까지 진급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지방 진위대(鎭衛隊)와 연결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하자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이때 목숨은 건졌지만 오른쪽 눈 시신경이 망가져 시력을 상실, 외견상 흘겨보는 상이 되자 누군가 그를 놀렸고, 이에 신규식은 흘겨본다는 뜻으로서 스스로 예관이라 불렀다. 이는 상하이 망명시 그의 아호이자 가명으로도 활용되었다.

을사조약에 충격을 받은 그는 을사조약 이후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해보려고 학회를 조직하여 공업계 잡지도 발간하였으며, 계몽, 강연활동도 다녔고, 윤치호, 윤효정 등이 조직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 등 애국계몽단체에도 가담하여 활동했다.

애국계몽운동[편집]

각지에 중동학교·청동학교(淸東學校)·문동학교(文東學校) 등의 학교를 설립하는데 동참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 후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여 활동한다. 윤치소(尹致昭)·신창휴(申昌休) 등과 함께 광업회사를 발기하고 실업계를 계몽하기 위해 〈공업계 工業界〉라는 월간지를 창간했다. 동시에 1901년부터 문동학교(文東學校)를 비롯해서 중동학교(中東學校)와 청동학교(淸東學校) 등에 관여하여 교육활동을 하는 한편, 대한자강회대한협회 등에 참가했다. 1909년 대종교에 입교했다. 1910년 10월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집에서 다시 음독을 시도했다가 마침 그의 집을 방문한대종교 종사(宗師) 나철(羅喆)에게 구명되었다.

중국 망명 활동기[편집]

중국 망명과 중국 혁명 가담[편집]

경술국치 이후 이듬해 1911년 청나라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여기서 그는 이름을 '정'(檉)이라고 바꾸고, 쑨원천두슈,천치메이등 중국의 혁명가들하고 교분을 쌓았다. 중국혁명의 성공이 곧 한국해방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한 그는 1911년 3월, 쑨원(孫文)이 이끄는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가입하여 천치메이황싱,쑹자오런등과 친교을 맺었다. 그 해 1911년 10월 우창 봉기에 가담하여, 신해혁명에 참여했다. 1911년 11월에 상하이에서 중국 동맹회 중부총회를 이끌었던 천치메이와 함께 봉기했다. 이는 신해혁명에 참여한 유일한 한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1913년 7월에는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에 반대하기 위해 일어난 '제2차 혁명'(제2차 봉기)에도 천치메이와 함께 봉기에 참가했다.

독립운동[편집]

1912년 5월 망명자들과 상하이 교민이 늘어가자 독립운동과 교민들의 상부상조를 위한 비밀결사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다. 동제사는 대종교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이 단체에는 박은식·김규식·홍명희·신채호·조소앙·문일평·여운형·장건상 등이 참여했는데, 이 조직은 한때 회원이 300여 명에 이르렀고 상하이 본부 이외에도 베이징·톈진·만주 등과 노령(러시아)·구미(미국,유럽)·일본 각지에도 지사를 설치했다. 아울러 쑹자오런(宋敎仁)·뤼톈민(呂天民) 등 중국 국민당, 중국동맹회 인사들과 함께 동제사의 협력단체인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발기하고, 환구중국학생회(寰球中國學生會)에 가입하기도 했다. 한편 한인학생의 중국 및 구미의 각급학교 진학을 위한 예비교육기관으로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고, 군사교육을 위해서 약 10년간 100여 명의 학생들을 바오딩 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 난징 해군학교(南京海軍學校), 톈진 군수학교(天津軍需學校) 등에 입학시켰다. 이런 활동을 통해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게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임시정부 결성 노력[편집]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13개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신규식은 이를 독립운동의 호기로 보고 러시아 제국의 연해주에서 온 이상설·유동열·박은식 등과 협조하여 고종을 수반으로 하는 망명정부를 구상하고, 이를 위해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실패한 뒤 1917년 피압박민족의 독립운동 분위기 속에서 박은식·조소앙 등과 국외 독립운동단체의 단결과 통일을 주장한 〈대동단결선언 (大同團結宣言)〉을 작성했다. 이 선언은 유럽 등지에서 독립한 작은 나라들을 언급했는데 이는 국제 정세를 읽고 있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2년 뒤 2·8 독립 선언, 3·1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1] 한편, 그 해 8월 스웨덴 스톡홀름 국제사회주의자대회에 조선사회당(朝鮮社會黨)의 명의로 한국독립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대회가 무산되고 말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기[편집]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만주와 각지의 독립운동자들과 연락하여 지린(吉林)에서 독립선언을 하게 하고 여운형·장덕수·김철(金澈) 등이 발기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조직에 가담해 파리강화회의김규식을 파견하는데 일조했다. 3·1 운동 후에는 한국과 만주, 연해주, 미주에서 몰려드는 지사를 맞이하기에 바빴다. 이어 4월에 여운형,선우혁(鮮于赫)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했으며 제4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부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내부에서 주도권을 놓고 암투가 벌어지자 임시정부에 대한 실망감에 빠져 의원직마저 사퇴했다. 같은 해 9월 각지에서 만들어진 정부를 통합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 대통령 이승만이 정부개편문제를 둘러싸고 제안된 국민대표회의안을 수습하지 못하고 1921년 태평양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자, 5월부터 국무총리대리와 외무총장직을 겸임했다. 10월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광둥(廣東) 중화민국 정부의 북벌서사식(北伐誓詞式)에 특사로서 박찬익(朴贊翊)과 함께 참가했다. 이때 신해혁명의 동지인 쑨원을 만나 국서를 봉정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가적 승인을 얻어내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호법정부(護法政府)를 중국 정통정부로 승인하며 아울러 그 원수와 국권을 존중함

  • 대중화민국 호법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 한국학생을 중화민국 군관학교에 수용할 것
  • 500만 원을 차관할 것
  • 조차지대를 허락하여 한국독립군을 양성하게 할 것

1922년 태평양회의가 결말 없이 끝나고 국민대표회운동이 다시 전개되자 신규식 내각은 외교적인 실패 등의 이유로 총사퇴했다.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안이 통과된 뒤 임정 내의 분열상태를 비관해 25일동안 단식하다가 '한국의 독립을 기원'하는 유언을 남기고 9월 25일 사망했다.

사후[편집]

그의 묘소는 상해 만국공묘(萬國公墓)에 안장되었다.[2]

사후[편집]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상하이 정착 초기에 박은식, 홍명희와 함께 설립한 단체인 동제사 결성 때 연설한 내용을 정리한 《한국혼(韓國魂)》과 유고 시집인 《아목루(兒目淚)》가 있다.

가족[편집]

제자이자 사돈인 윤보선, 맏며느리 윤완희의 친정아버지였다.

동생인 신건식도 임시정부에 참가한 독립 운동가이다. 그의 장남 신준호는 대한민국 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의 둘째딸 윤완희와 결혼하여 윤보선 일가와 사돈간이 된다. 독립운동가 박찬익은 그의 동생 신건식의 사돈이었다.

  • 아버지 : 신용우(申龍雨)
  • 어머니 :
    • 형 : 신정식
    • 동생 : 신건식(申建植, 다른 이름은 신원(申垣), 1888년 ~ ?)
    • 제수 : 오건해(吳健海, 1894년 ~ ?)
  • 부인 : 조정완(趙貞垸)
    • 장남 : 신준호
    • 며느리 : 윤완희(尹完嬉) 화가. 윤보선(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의 둘째 딸
    • 딸 : 신명호(申明浩, 1904년 ~ ?)
    • 사위 : 민필호(閔弼鎬, 1898년 2월 7일 ~ 1963년 4월 14일)
      • 외손자 : 민영수
      • 외손녀 : 민영주(閔泳珠, 1921년 ~ )
      • 외손녀사위 : 김준엽
      • 외손녀 : 민영애(閔泳愛, 1927년 ~ )
      • 외손녀 : 민영의(閔泳懿, 1929년 ~ )
      • 외손녀 : 민영화(閔泳華, 1932년 ~ )
      • 외손녀 :
      • 외손녀사위 : 이윤철(임시정부 국무위원 이광의 아들)
      • 외손자 : 민수영(閔樹榮, 1942년 ~ )
  • 장인 : 조종만(趙鐘萬, 조선시대 말기에 군수를 지냄)
  • 사돈 : 박찬익(독립운동가, 호는 남파)
  • 기타 : 신세호(申世浩)

저서[편집]

  • 《한국혼 韓國魂》
  • 《아목루 兒目淚》

참고자료[편집]

주석[편집]

관련 항목[편집]

전임
이동녕
제7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1921년 5월 16일 - 1922년 6월
후임
노백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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