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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두환(1985년)
전두환(1985년)
대한민국제11·12대 대통령
임기 1980년~1988년
전임: 최규하(제10대)
후임: 노태우(제13대)

신상정보
출생일 1931년 1월 18일(1931-01-18)(93세)
출생지 한국 경상남도 합천군
정당 무소속, 민주정의당
부모 전상우, 김점문
배우자 이순자
자녀 전재국, 전재용, 전효선
종교 불교
별명 호 일해(日海)
전두환
별명 일해(日海)
출생지 한국 경상남도 합천군
복무 대한민국 육군
근무 육군
최종계급 예비역대장

전두환(全斗煥, 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군 출생)은 12.12 군사 반란5.18 광주 민주화 운동진압등으로 구속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대한민국반란수괴이자 내란수괴이다.[1]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 12.12 군사 반란 후 중앙정보부장 서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예편 후 정계에 입문하여 1980년 9월부터 1988년까지 대한민국제11·12대 대통령을 지냈다. 그 외에 민주정의당 초대 총재 등을 지냈다. 12·12 군사 반란으로 군부를 장악하고 5·17 비상계엄을 통해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였다. 대통령 재직기간에 1988년 서울 올림픽 준비 등을 수행하였다. 퇴임 후 민주정의당 명예총재,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 등을 지냈으며, 1995년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내란 및 군사 반란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1심에서 사형,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98년에 사면되었다. 아호는 일해(日海), 본관완산(完山)이다.

생애[편집]

유년기[편집]

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 율곡면에서 전상우광산 김씨 김점문[1]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세 명의 형이 있었으나, 두 형 중 전열환은 고향 친구들과의 놀이 도중 사고로 사망하였고 둘째 형 전규곤은 사고로 사망하였고, 셋째형 전기환과 그, 동생 전경환과 누이들만 살아남았다.

그가 5세 되던 해에 그의 가정은 경상남도 합천에서 대구로 이사하였다.

이후 전두환은 호란보통소학교에 입학하였다.[1] 그의 아버지 전상우는 횡포를 부리는 일본인 순사를 벼랑에서 밀어 떨어트린 뒤 만주 지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2년 만에 귀국했다.[1] 이 일 때문에 전두환은 또래들보다 2~3년 늦게 호란보통소학교를 졸업했고 1947년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해 5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통학하였다 한다.[1] 그 뒤 대구공업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우수한 성적이었다 하며 6·25 전쟁 중 1951년 2월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운동선수로서의 전두환[편집]

전두환은 운동선수이기도 했으며 축구선수였고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중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으며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축구선수로서 계속 활약했다. [2] 이 전력이 있는 전두환은 대통령이 된 이후 박종환 당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불러다 축구국가대표팀의 작전과 선수기용을 직접 지시하기도 했다.

전두환이 생도시절에 주최된 전국 대학 축구대회에서 육군사관학교는 전두환 골키퍼의 맹활약으로 준결승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군인 생활[편집]

대구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 사관학교에서 동기인 노태우·정호용 등과 만나 친분을 쌓고 인맥관계를 형성하였으며 1955년 2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사 11기로 육군소위에 임관하였다. 1961년 5월 16일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육사에서 대위로 있던 그는 육사 내에서 지지 시위를 주도하여 박정희 前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의 비서관에 임명됨으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하였다. 소령 계급이었던 1962년하나회를 조직하여 군부 내에 인맥을 형성하는 한편,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대리,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등을 지냈다.[3]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을 거쳐, 1969년 육군본부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을 지냈다. 1970년에는 육군 대령으로 연대장이 되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고, 1971년 귀국 후, 장군으로 진급, 그 뒤 제1공수특전단 단장,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8년 제 1사단장을 지냈다. 장군 진급 후 육사 11기 출신과 그 후배 기수가 가입된 군장성 모임인 하나회를 결성하였는데 그의 동기 기수가 주축이 되었다. 하나회에서 윤필용 등과 함께 하나회를 이끌어갔으며 윤필용하나회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기도 하였다. 1973년 4월 윤필용 사건으로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강창성에 의해 하나회가 군부 내 사조직으로 적발되어 위기에 몰렸으나, 1979년 3월 기적적으로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윤필용 사건으로 강창성에게 앙심을 품은 전두환은, 12.12 군사 반란강창성보안사에서 혹독하게 고문하였으며, 강제로 예편시킨 후 삼청교육대에 보내버렸다. 윤필용은 수감 중 강제 퇴역당하였고, 전두환은 하나회의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다음은 전두환이 군인으로서 걸어온 길이다.

  • 1955 육군 소위 임관(육사 11기)
  • 중령
    • 1963 중앙정보부 인사과 과장
    • 1963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 1966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 1967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
  • 대령
    • 1970 제9사단 29연대장 (월남 백마부대)
  • 준장
    • 1971 제1공수특전단 단장
    • 1976 청와대경호실 차장보
  • 소장
  • 중장
    • 1980 제10대 중앙정보부 부장서리
    • 국가보위입법회의 상임위원장
  • 대장
    • 진급과 동시에 전역

군사반란과 집권 과정[편집]

1979년 10월 26일대통령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저격당하는 10·26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혼란과 함께 권력 공백으로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직으로 일시 권력을 승계하였다. 이 날 전두환은 부하들에게 막강한 합수본부 설치 기안을 명령하였다.[4]

10월 27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 국내담당차장 전재덕, 검찰청 총장 오탁근, 치안본부장 손달용 등을 보안사 2층 사령관 접견실로 불렀다.[4] 전두환은 이들을 입구에서 삼엄한 몸수색을 하였으며, 상석에 앉아 박정희의 서거를 알린 뒤 범인은 중앙정보부라고 지목하고 박준광 소령을 통해서 각 기관의 업무지침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4] 중앙정보부에는 ‘앞으로 일체의 예산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 다만, 합수본부의 허가를 받으면 집행할 수 있다.’라며 행동에 제한을 두었다. 그 뒤 “앞으로 모든 정보 보고는 오후 5시, 오전 8시에 합수부에 제출하라.”라고 지시했다. “정보부는 전재덕 차장이 당분간 장악하라.”라고 지시했다가 선임자가 해외담당차장임을 알고는 수정했다.[4] 당시 소령이었던 박준광은 전 장군이 ‘과거의 실력자들을 앞에 두고 좌중을 제압하면서 상황을 간단하게 장악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람이 갑자기 커 보이는 것이었다.’라고 증언하였다.[4]

11월 권력 공백에 의한 혼란 중에 김재규 등을 박정희 대통령 저격범으로 체포하였고, 같은 달 최규하는 제10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허삼수 등 육사 11기 출신 영남장교들이 주도하는 비밀 사조직 하나회를 주축으로 하여 신군부를 형성하였고, 신군부가 12·12 군사정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같은 해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계엄사령관 육군 대장 정승화 등을 김재규 등과 공모한 공범으로 체포하고, 이 과정에서 김오랑 소령 사망사건 등 물리적 교전이 발생하였다. 1980년 육군중장으로 진급하고, 이어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앉았다가 그해 4월 14일 제10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했다. 1980년 5월 북한군 침투설이 돌자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발표하였고, 5월 18일 시민군과 군 병력 간에 발생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계엄군을 투입, 5월 20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그 뒤 국무회의와 정권을 장악한 뒤, 그해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이어 7월 17일 중앙정보부장직을 사퇴하고 국보위만을 관할하다가 8월 5일 육군대장으로 진급하고, 8월 22일 예비역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였다.


미사일 각서[편집]

1980년 초 전두환 대통령이 악화된 대미관계를 풀기 위해 “사거리 180km, 탄두 무게 453kg 이상의 미사일은 절대 개발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줬고 이후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 신군부를 승인하였다. 1990년대에 미국과 다시 협상을 벌인 결과 ‘미사일 각서’를 무효화하는 대신 2001년 MTCR(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에 가입하여 ‘사거리 300km, 탄두 무게 500kg 이하’의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 [5][6]

제5공화국[편집]

11대 대통령[편집]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여 그해 8월 27일 그는 대통령 후보자에 출마, 경쟁자 없이 단독 출마로 장충동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간접선거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80년 9월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그 해 9월 법률의 연좌제를 공식 폐지하였고, 10월 17일 정당해산령을 내려 제3공화국제4공화국의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과 민주당계 야당인 신민당을 강제해산시켰다.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에 입당, 민주정의당의 초대 총재가 되어 2월 개정된 새 헌법에 따라 장충동체육관에서 치러진 선거로 90.6%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제12대 대통령(7년 임기에 단임)에 당선되었다. 일반적으로 그는 노태우 등과 함께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진압 지휘체계의 실질적인 주요 핵심 책임자로 여겨지고 있다.[출처 필요] 그러나 정확한 명령계통[출처 필요]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2대 대통령 취임[편집]

청남대(전두환의 대통령 재직 시절 별장, 충청북도 청원군 소재)

12대 대통령 취임 후에 그는 박정희 정권을 전면 부정하였다. 박정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는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하였다. 또한,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부조리 혐의로 엮어서 제거하고,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부조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하였다.[7] 또한, 대통령 연임제를 철폐하고 임기 7년의 대통령 단임제를 시행하였다. 집권 후 정책의 주요 강령으로 정의사회구현, 복지사회건설을 구호로 내걸었으며, 재임기간 물가안정, 범죄 소탕, 경제 성장, 88 서울 올림픽 개최 준비 성공, 무역흑자 달성 등을 이룩하였다.[출처 필요] 그러나, 다수의 국민과 민주화 운동가들에 의해 군부독재자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집권 과정에서 행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으로 후에 제6공화국 때의 5공 청문회1993년 김영삼 집권 후 문민정권에서 사법심판을 받게 된다. 그로 인해, 한동안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상실하기도 했었다.

5·18 이후 야당 지도자인 김영삼·김대중 등을 가택연금하였는데, 김영삼은 1983년 5월 18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이하여 전두환 정권의 야당인사 탄압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23일간 단식투쟁을 시도하기도 하였다.[8]

핵개발 포기[편집]

전두환은 취임 초 핵실험 및 개발을 포기하였다. 1982년~1983년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 개발 계획을 극비리에 추진하였고, 이는 일본미국 측 언론에 입수되어 보도되었다. 일본 아사히 신문의 보도로는 레이건 정부는 그런 정보를 입수해 계획 중지를 요구했으며, 전두환은 1983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핵개발 계획 중지를 약속하게 되었다.[9][10][11][12][13] 2004년 9월 8일 미국의 AP통신도 미국 고위관리의 증언을 인용하여 비슷한 보도를 하였다.[12][13] 핵개발을 계속 추진해나갔던 박정희 정권에 비교하여 1979년 12.12 군사 정변 이후 집권하여 정당성이 미비하고 집권기틀이 부족하였던 전두환은 미국의 지원과 정권의 정당성을 승인받으려고 핵개발 포기를 선택하게 되었다.[14][15] 또한, 박정희(朴正熙) 정권 말기에 악화하었던 미국과의 관계 회복과 레이건 미국 대통령 행정부의 박정희 집권 시절의 핵개발 계획에 매우 부정적이었던 측면도 작용하였다.[16] 또한, 정통성 부재를 만회하기 위해 레이건행정부의 지지를 받을 필요도 있었다.[16] 1980년 12월 19일 전두환은 박정희가 핵개발을 주도했던 원자력연구소를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갑자기 통폐합시킨 뒤 명칭에서 ‘원자력’이라는 말을 빼버리고 ‘에너지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변경시키기도 했다.[17] 전두환은 핵을 포기하였고.[12][13] 1983년 11월 당시 재처리 작업을 통해 추출했던 플루토늄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제출되었다.[10]

정치적 활동[편집]

1983년 10월에는 동남아 순방을 다녀왔다. 10월 9일, 동남아시아 국가 순방 기간에 순방국 하나인 버마(미얀마)에서 아웅산묘소 참배 도중 북한에서 보낸 공작원들에 의한 폭탄테러사건이 발생하였다. 1진으로 도착하여 예행연습 중이던 이범석, 심상우, 함병춘 등 80명의 외교관과 취재진 및 현지안내인이 피폭으로 즉사하였다. 현지 한국인들을 방문하고 뒤늦게 2진으로 방문한 그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때 북한이 파견한 특수요원 중 검거된 상위 신기철은 현장에서 사살되었고 체포된 소좌 진모는 사형에 처했다. 상위 강민철은 범행사실을 자백하고 수사에 협조하여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2008년 5월 21일 사망했다.[18]

1980년 9월 연좌제를 폐지하였다고 한다.[출처 필요] 1981년 보호·감호소 설치를 제정하기도 했다. 상습범은 형기 종료 후에도 즉각적인 사회복귀를 막아야 한다는 논리로 보호감호제도를 시행, 시행하고 같은 해 강원도 춘천시 춘천교도소에 보호감호시설을 설치했다. 춘천교도소 보호감호소는 뒤에 1983년 2월 12일 경상북도 청송군으로 이전하였다.[19]

1984년 가을 한국 경제가 모라토리움 선언 직전의 상태까지 가자 일본을 방문 60억 달러의 융자를 요청하였다.[20] 일본은 논란 속에 60억 달러의 지원을 결정하여 원조를 받아왔다.[20]

교육·문화분야[편집]

군사반란과 국민의 민주화 염원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싸늘해진 민심을 달래고, 국민의 정치적 욕구를 돌리려고 이른바 3S(Sex, Screen, Sports) 정책을 실시하였다.[출처 필요] 일본의 우익 거물 세지마 류조(이토추 상사 고문)의 제안을 받아들여 민심수습책의 일환으로 올림픽 유치에 전력을 다하였다. 계속하여 급조된 프로야구 프로축구 출범, 칼라 TV 방송 전격실시, 영화 및 드라마 성적 표현 검열완화, 교복자율화 등이 이어졌다. 1981년 국풍(國風)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축제를 벌였으나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기도 하였다.[21] 취임 직후 과외 등 모든 개인교습을 금지하고 단속을 하였다.[22]

제5공화국 말기[편집]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국민의 개헌과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당시 현행 헌법에 따라 13대 대선 때도 12대 대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1988년 2월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특별담화인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에 호헌철폐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그 해 경찰의 피고인 성추문 사건인 문귀동 성추문 사건과 그해 10월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과 맞물려서 6월 10일에는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을 시발점으로 반정부적 성격의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시국 수습을 위해 1987년 6·29 선언이 발표되었고,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단안을 발표하였고, 7월 9일 그는 이를 수용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전두환은 행정관과 외교관을 지낸 노신영을 후계자로 낙점하고 있었다. 제네바대표부 대사로 있던 노신영1980년 외무부 장관으로 불러들였고, 1982년 안기부장, 1985년 국무총리에 임명했다.[23] 그 뒤 강원용의 지적대로 정치수업을 시켜서 후계자로 낙점하려 하였으나, 전두환의 주변 인사들, 특히 군 출신들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며 반발하자 결국 전두환은 뜻을 거두고 말았다.[23] 7월 10일에는 민주정의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노태우에게 총재직을 넘겼다. 1987년 7월 10일 민주정의당 명예총재가 되었다.

퇴임 후[편집]

퇴임 직후[편집]

1988년 2월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그는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그는 이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들었으나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어 제5공화국의 청문회가 진행되었다. 여기서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 비리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하다가 1988년 11월 23일, 대국민 사과와 함께 재산 헌납을 발표하고,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과 민주정의당 명예총재직을 사퇴하고 강원도에 있는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1990년 12월 30일 하산하였다. 김영삼문민정부 출범 후 서석재박계동 등이 대통령 4천억 비자금 수뢰설을 주장하였으나 무대응으로 대응하다가 김영삼 정권의 내사로 비자금 수수가 밝혀지면서 1995년에는 12·12 사태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및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노태우와 함께 기소되었다. 이후 법정에서 전두환은 최종적으로 반란수괴죄가 적용되어 사형선고가 되었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이후 사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0년대 이후[편집]

전두환과 이순자

1995년 11월 16일 후임 대통령인 노태우의 수감을 계기로 12·12 군사 반란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국민적인 요구가 거세어졌으며, 당시 대통령 김영삼도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고, 소급입법을 적용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선언하였다.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이 내려지자 검찰은 재수사에 착수, 12월 3일 전두환과 관련자 16명을 내란 및 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하였다. 동시에 제5공화국의 비리에 대한 수사도 진행되었다.

공판은 1996년 3월부터 진행이 되었는데,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사형을, 1996. 12. 16. 서울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96노1892) 각 선고받았으며, 1997년 4월 17일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당시 대법원은 전두환 등이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하였다.[24]

형 확정 이후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97년 12월 22일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지역감정 해소 및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한 대통령 특별사면에 의해 풀려났다. 그러나 추징금은 사면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고, 재산은닉, 비자금 조성혐의로 2,205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아 532억 원을 납부하였다. 그 뒤 자신의 통장에는 29만 원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고 있어 약 1,673억 원이 환수되지 못하고 있다.[25] 그는 1995년에 제정된 5·18 특별법 등으로 법에 따라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한 공로로 받은 훈장 등을 박탈당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훈장 9개를 반납하지 않았다.[출처 필요]

1995년 12월 4일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때 그는 1989년 12월 15일 노태우김영삼·김종필·김대중의 영수회담에 동의하여 5공 청산의 정치적 종결을 위해 법정에 섰음을 강조하였고 자신을 5·18 특별법 등으로 구속한 김영삼 역시 군부세력과 연합하였으니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6] 이어 좌파운동권[모호한 표현]이승만 대통령 이후 역대 정권을 부정하였는데 김영삼 정부는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모호한 표현] 3~6공화국을 내란에 의한 범죄집단으로 규정한다고 비판하였고[26]이후 발생하는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것과 12·12 등 모든 사건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며 제5공화국 인사들에 대한 정치 보복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였다.[26]

사회적 활동[편집]

2002년 안중근의사 여순순국유적 성역화 사업추진위원회 고문을 지냈다. 2008년 2월 25일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여 제17대 대통령 이명박에게 이 대통령이 국민이 바라는 염원을 잘 파악해서 국정을 잘 이끌어갈 것을 기대하고 또 그렇게 해주리라 믿는다며 독려하였다.[27] 2008년 7월 22일 인사차 방문한 한나라당 대표 박희태 등 정치인들의 예방을 받고 회견하였다. 회견 중 전 세계적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곡물을 하루에 두 끼 먹기 운동을 제안하기도 했다.[25][28][29] 촛불 정국 등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난 여론이 형성되자 이 대통령이 취임 후 6개월도 되지 않았음을 들어 군에서도 불문율로 연대장 이상이 되면 100일은 봐주는 고사를 들어 대통령은 상당히 오래 봐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이명박을 변호하기도 하였다.[25][28][29] 정치권은 코미디 같은 제안이라 하였고,[25] 그날 오후 진보신당은 논평을 내고 전두환의 제안을 헛된 개그라고 비판하였다.[30]

2000년대 이후[편집]

2007년 8월 29일 한나라당·이명박 등의 방문 시에는 자신이 대신 인질로 가는 편이 낫겠다는 발언을 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인질 납치극과 관련 자신은 이제 많이 살았다. 난 특수훈련도 받아서 인질 대신 아프가니스탄에서 생활하기도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31][32][33] 이에 일부 네티즌들의 비판이 있었고,[33] 권영길은 전두환 덕분에 웃었다는 비평을 발표하기도 했다.[34] 2008년 4월 17일 언론 인터뷰에서 "카메라 기자들이 내 사진은 꼭 비뚤어지게, 인상 나쁘게 찍는다", "젊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아직 감정이 안 좋다.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등의 농담을 하여 구설수에 올랐다.[35]

2009년 2월 18일에는 서울 명동 대성당에 마련된 김수환 추기경의 빈소를 찾았다가 구설수에 올랐다. 검은색 정장과 중절모 차림으로 경호원 10명을 대동하고, 김운회 주교의 안내를 받으며 시신이 안치된 유리관 쪽으로 갔고, 관 앞에서 불교식으로 합장하고 나서 그만 평소 자신의 습관대로 계속 뒷짐을 진 채 관을 주시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끝난 조문 시간은 채 2분이 걸리지 않았다. 조문을 마치고 대성당 밖으로 나오자 김 추기경과의 인연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전두환은 “인연이 깊다.”라며 김 추기경과의 개인적인 친분에 대해 언급만 했을 뿐 신군부에 저항했던 김 추기경의 민주화 행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자들이 그에게 “30년 악연이라는데…….”, “서운한 감정은 없느냐?”, “김 추기경과 악연인 것 아니냐?”라고 질문하자 “개인적으로 찾아오라.”라면서 일절 답을 하지 않았다.[36]

2009년 8월 14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했다. 이희호 여사를 만나자마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신가"라며 "자꾸 상태가 나빠지는 것 같아 휴가 중에 올라왔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도 이 병원에서 완쾌한 바 있다면서 "의료진들이 워낙 저명한 분들이니 잘 하실 것"이라며 "틀림없이 완쾌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모시고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김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전직 대통령들이 가장 행복했었다면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우회적으로 아쉬움을 표현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10번 정도 청와대에 초대받아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듣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며 "외국 방문 후에는 꼭 전직 부부를 청와대에 초청해 방문 성과를 설명해주며 만찬 및 선물도 섭섭지 않게 해주셨다"고 말했다. 이어 "이명박 대통령이 그런 것을 잘 알아서 전직 대통령의 의견도 들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37]

외교 관계[편집]

반공의 기치 아래 한·미·일 삼각동맹을 추진하였다.[38]

대미 관계[편집]

미국의 압력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개발한 핵을 폐기하였다는 견해가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레이건 정부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계엄령 발동에 대해서 견제하는 태도를 유지해왔다.[38]

대일 관계[편집]

그는 대통령 재임 중,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에도 국권피탈의 책임이 일부 있었다고 인정해 당시 일본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되었다.

1981년 8월 15일에 있었던 광복절 기념식의 연설에서 그는 “우리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치욕을 둘러싸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꾸짖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의 정세, 국내적인 단결, 국력의 약함 등 자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하였다.

또 이듬해의 광복절 기념식전에서도, 일본 정부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에 의해 일본인에 대한 택시 승차거부가 일어나는 등 반일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던 때, 강경적인 자세를 보이면서도 “이민족 지배의 고통과 모욕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한 확실한 보장은, 우리를 지배한 나라보다 살기 좋은 나라, 보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내는 길밖에 없다.”라고 하여 맹목적 ‘반일’보다는 실력을 형성한 ‘극일’주의를 강조했다.

대북 관계[편집]

1982년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발표하였지만, 이러한 통일정책은 북한의 계속된 거부로 말미암아 실질적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출처 필요]

기타[편집]

닮은 연예인(박용식, 이주일)들에 대한 탄압도 간혹 회자되곤 한다.

유행어[편집]

  • 법정 회견에서 ‘29만 원 밖에 없다’고 하여 이 발언이 한동안 유행하였다.[39][40]

평가[편집]

전두환에 대한 평가는 현재 극과 극이며 대부분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룬다.[출처 필요] 그의 평가는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를 가르는 척도 중의 하나로 통용되기도 하지만, 시각이 전혀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보수주의 일각에서도 전두환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으로 평가하는 세력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이해당사자들의 사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타고난 유들유들함과 비위로 위관급 장교 시절부터 철저한 ‘정치군인’의 면모를 드러냈다는 평이 있다.[출처 필요] 이후 청와대 경호실 근무 경험으로 ‘정치군인’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자질을 다 갖추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41]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 시 지지하는 데모를 하였으나 호응은 없었다. 이때부터 정치적 두각을 나타냈으며 하나회 윤필용 필화사건으로 축출되었으나 운 좋게 위기를 모면하고 다시 보안사령관으로 복귀했다. 정승화도 전두환이 정치적 야망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하였고,[42] 전두환은 이후 대통령 박정희와의 잦은 교제를 통해 권모술수의 능력을 길러온 것으로 알려졌다.[43] 그의 붙임성에 대해서는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44] 그런가 하면 이희호는 “전 대통령의 유명한 숫기와 입담을 나중에야 알았다. 사형을 시키려 했던 ‘수괴’의 안사람을 상대로 동네 복덕방 아저씨가 아주머니 대하듯 일상적으로 대했다.”고 밝히기도 했다.[45] 범죄소탕과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는 성과를 이룩했다는 일부의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긍정적 평가[편집]

1979년 박정희피살 후 경제회생 노력을 기울인 점과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유치한 점 등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출처 필요] 2009년 9월 납북자가족모임과 라이트코리아 등 보수단체회원들은 서울 세종로 통일부 앞에서 시위를 하며 임진강 참사 사고 이후 전두환이 북한의 수공계획을 미리 간파하고 평화의 댐을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46]

부정적 평가[편집]

  • 1979년12.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하는 등의 행위를 주도한 것이 대표적인 비판의 근거이다. 인권적인 측면에서는 국가안전기획부, 경찰청 대공분실, 보안과 등을 통해 김근태, 박종철 등의 민주화운동 인사등을 무자비하게 고문하는등 인권 유린을 자행하며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비판이 있다.
  •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삼청교육대의 실상에 대한 몇 가지 결과를 발표하였다. 1980년에 신군부에 의해 설치된 삼청교육대는 정부에 의한 조직적인 폭력 및 인권유린 사례로, 당시 강제 입소되어 숨진 사람 가운데 일부의 사인이 조작·은폐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조사됐다. 강제 입소자 중에는 학생이 980명에 달했으며 이 중 17명은 중학생이었고, 질병사한 54명 중 최소 4명은 폭행 등으로 숨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47][48]
  • 1988년 3월 새마을본부 중앙회장이었던 동생 전경환은 공금 76억여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구속됐으며 골프장 허가를 미끼로 거액을 챙긴 사촌동생 전순환과 노량진 수산시장 영업권 불법인수와 관련된 친형 전기환, 그리고 공금을 횡령한 처남 이창석씨 등이 재임기간 중 저질러진 친인척의 비리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1988년 11월 23일 부정축재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고 백담사로 사실상 유배의 길을 떠난다.[49]
  • 또한 천문학적인 뇌물등의 혐의로 유죄를 받고 법적인 환수조치를 당하였으나 당당히 29만원 밖에 재산이 없다는 결과가 나와 국민적인 실소를 자아내기도 하였다. 1997년 검찰은 전두환에 대한 확정 판결 이후 추징금 납부시효를 세 번이나 연장해 가며 비자금을 추적해 왔으나 2,205억원 중 532억원(24%)을 징수하였으며 성과는 그리 크지 않은게 현실이다. 아직까지 환수조치는 계속되고 있다.[50][51]
  • 연평균 지가상승률이 이승만 21.6% 박정희 33.1% 전두환 14.9% 노태우 17.7% 김영삼 -1.2% 김대중 -0.6% 노무현 4.5%에다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때는 생산소득에 대한 불로소득 비율이 거의 미미한데 비해 이승만 때에 43%, 전두환은 67.9% 노태우는 거의 100% 박정희는 무려 248.8%에 달했으며 부동산 시장의 불안정을 보이고 있다. 이는 경제의 기강이 무너졌다는 것과 동시에 제5공화국 시절의 경제 치적은 실제로 경제가 좋은 것이 아니라 부동산 거품경제로 인한 착시현상일 뿐을 의미한다. [52]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책임 의혹[편집]

2007년 7월 24일 대한민국 국방부의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서울특별시 태평로에 소재한 프레스센터에서 12ㆍ12 군사반란 및 5ㆍ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5ㆍ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사건에 대한 조사결과 보고서를 발표할 때 그가 자위권 발동을 했다는 견해를 발표하였다.[53][54] 과거사위의 주장에 의하면 보안사에서 찾아낸 2군사령부 작성 수기(手記)문서에 보안사령부 사령관으로 있던 전두환이 직접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진종채 2군사령관,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차규헌 육사 교장 등이 참석한 군 수뇌부회의에서 자위권 발동 필요성을 강조했음을 확인했다고 언론에 발표하였다.[53][54]

종교[편집]

전두환의 종교는 불교로 알려져 있다. [55] 대통령직이후에 정치적인 이유로 백담사에 들어갔으며, 1989년 백담사 은둔 1주년을 맞아 부처님 진신사리 친견 및 봉헌법회에서 불경을 외우기도 했다. [56] 이때, 전두환은 1988년 11월 23일 오후 3시 20분, 안현태 전 경호실장 등 수행원과 백담사에 도착. 그 후 25개월 동안 전두환은 백담사에 머무르며, 백담사 생활을 한지 1년후 전두환은 찾아온 신도들과 대화하면서 " 몇 사람 손봐주고 싶었던 마음을 극복했다"고 불교신앙고백을 했다고 한다. 또 주지에게 "모든 일이 내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니 남을 탓하거나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백담사에 와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으니 나는 복있는 사람이죠"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56]

그러나,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 취임식을 했던 1980년 9월 10일 직후인 10월 27일에 10·27 법난[57]을 일으키며 집 권 신군부 세력이 불교계 정화를 추진한 사건이 있는데, 불교신자인 전두환이 그 사건을 일으킨 동기는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신군부를 반대했던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가 전두환 지지 성명에 반대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을 방문하여 성금을 전달하는 등 신군부에 밉보인 것이 원인이라는 해석이 있다. [58]

서훈 취소[편집]

2006년 국무회의에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등 3년이상 형을 선고받은 176명의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 등을 환수키로 의결하였다.[59] 그러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비롯해서 서훈 취소 대상자 절반 가까이가 훈장 반환 요구에 대해 반환 기한인 30일까지 반환은커녕 사유서조차 내지 않고 있다. 이에 행자부 관계자는 “서훈 취소자의 경우 훈장 기록부 명단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이 사실을 관보 등을 통해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훈장에 따른 영예가 모두 상실됐다고 볼 수 있다”며 “반환 의무 규정을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60]

가족 관계[편집]

전상우
(全相禹)
1893~1967
김점문
(金點文)
1898~1978
전열환

1915~1925
전규곤

1916~1916
전기환
(全基煥)
1929~2019
전두환
(全斗煥)
1931~2021
이순자
(李順子)
1939~
전경환
(全敬煥)
1942~2021
전재국
(全宰國)
1959~
전재용
(全在庸)
1964~
박상아
(朴相兒)
1972~
전재만
(全在晩)
1971~
전효선
(全孝善)
1962~

그의 재임시절 형 전기환노량진 수산시장을 인수하고, 동생 전경환새마을운동 중앙본부 회장을 지내며 이권을 챙기는 등 비리를 일으켜 퇴임 후 물의가 되었다.

부인 이순자의 사이에 재국, 재용, 재만 세 아들과 딸 효선을 두었다. 첫째 재국은 시공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관련 인물[편집]

문화에 나타난 전두환[편집]

문학[편집]

  • 백무현, 《만화 전두환》, 전두환에 대한 비판적인 소설 겸 만화
  • 《황강(黃江)에서 북악(北岳)까지》, 전두환 전기

전두환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같이 읽기[편집]

참고자료[편집]

  • 《황강(黃江)에서 북악(北岳)까지》- 전두환 일대기

주석[편집]

  1. http://news.joins.com/article/3359391.html?ctg=1000
  2.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subSectionId=1010090000&newsId=20090206000186
  3. 네이트 인물검색
  4.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48) - 조선닷컴 인물
  5. 한경비즈니스[대한민국 우주시대 ‘카운트다운’우주강국 코리아 ‘카운트다운’ ]
  6. 북한의 로켓발사 정국과 북미 관계의 함수 분석
  7. 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책세상, 2000) 112~113쪽.
  8. 김영삼 - Daum 백과사전
  9. 80년대초 국내서 플루토늄 추출 한겨레 2004.09.09
  10. "레이건이 전두환 핵무기개발 직접 저지" 프레시안 2004-09-10일자
  11. "83년 레이건이 핵개발 중지 요구" 경향신문
  12. 국내서 82년 플루토늄 극미량 추출 세계일보
  13. "한국, 82-83년 극비리 핵개발 추진" YTN 2004-09-09일자
  14.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까 주간한국 2004-09-23일자
  15. ‘제5공화국’ 전두환, 핵무기개발 포기 방영후 네티즌 비난 해럴드경제
  16. <전직 대통령 북핵실험 진단 `3인3색'> 연합뉴스 2006년 10월 10일자
  17. 북데일리
  18. 맛있는 정보! 신선한 뉴스! - 서울신문
  19. 22년만에 간판 내리는 청송감호소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 박정희 시대 경제의 명과 암 브레이크뉴스
  21.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교과서포럼 저, 도서출판 기파랑, 2008.3.24) 237p
  22. ‘신정아 사건’ 1년, 가정교사 지낸 기자의 '그녀를 위한 변명' 신동아 매거진 2008.10.01 통권 589호
  23.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3/02/200403020500004/200403020500004_6.html (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신동아 2004년 03월(534호)
  24.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25. 경제난에 ‘두 끼 먹자’ 일요서울 2008-07-31 기사
  26. 전두환 대국민성명 전문, 한국일보 1995년 12월 04일자, 8면
  27. YS "잘할 것으로 믿어" DJ "서민 살피길" 한국경제 2008-02-25 기사
  28. 전두환 “하루에 두 끼만 먹기 운동하자” 이색 제안 경향신문 2008년 07월 22일 기사
  29. “경제 어려운데 하루 두 끼 먹기 운동 어떤가” 문화일보 2008-07-22 기사
  30. [논평] 전두환 전 대통령의 헛개그를 고찰함 :: 네이버 뉴스
  31. 전두환 "인질 석방 안 되면 내가 대신 인질 될까 고민" 조선일보 2007년 8월 29일자 기사
  32. 전두환, 이명박에 입심 과시 중앙일보 조선일보 2007년 8월 30일자 기사
  33. [인터넷 스타] ‘전두환 인질’ 발언 : 맛있는 뉴스 : 특집 : 한겨레21
  34. [권영길 후보 논평, 전두환 덕분에 웃겼다] 연합뉴스 2007년 08월 29일자
  35. 전 前대통령의 ‘으스스한’ 농담, 구설 올라 서울신문 2008-04-17
  36.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71814 전두환, 고 김수환 추기경 '뒷짐 조문' 결례] 오마이뉴스 2009-02-18 기사
  37. 전두환 전 대통령도 DJ 문병 "틀림없이 완쾌될 것"
  38. 대통령 따라 출렁거린 한·미 관계 30년
  39. 사이버공간은 전두환 패러디 글로 '들썩' :: 네이버 뉴스
  40. 전씨는 구호대상자 아닌가 :: 네이버 뉴스
  41. 강준만. 〈제1장 왜 광주는 피를 흘려야했나?/ 1980년 - K공작〉.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서울: 인물과사상사. 50쪽. ISBN 89-88410-75-0.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42. 정승화(이경식 정리·대필)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휴먼앤북스, 2002) 404쪽. "목에 힘을 주고 패거리 우두머리 같은 기질을 보이며 행세하는 전두환 소장은 정신 자세부터가 정치적이었고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43. 강준만. 〈제1장 왜 광주는 피를 흘려야했나?/ 1980년 - K공작〉.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서울: 인물과사상사. 49쪽. ISBN 89-88410-75-0.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44. 김성익, 《전두환 육성증언》(조선일보사, 1992) 346쪽. 박정희와의 관계에 대해 전두환은 1987년 4월 12일 청와대 본관식당에서 수석 비서관들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어디 가 있어도 골치아픈 일이 있으면 나를 불렀어요. 군대 얘기도 물어보고 그랬어. 나는 항상 그 양반한테 희망적인 얘기를 많이 했어요. 1년에 한두 번씩은 부르셨어요. 이 식당, 여기에서 육여사와 함께, 분식 권장할 때인데 분식으로 식사도 했어. 육여사가 만든 거라고 했는데 별로 맛은 없지만 나는 식성이 좋으니 두 그릇 정도 먹었어요."
  45. 남편의 사형선고 소식때 나는 외롭게 감금당해 있었다” 경향신문 2008년 11월 11일 기사
  46. "전두환 대통령은 북한 수공계략 간파했다" - 오마이뉴스 2009년 09월 9일자
  47. 국방부 과거사위 발표 “삼청교육대 사인 일부 조작”
  48. 6공 시절 5공 청산 과정
  49. 6공 시절 5공 청산 과정
  50. 시민단체, 재산 위증혐의 전두환씨 고발
  51. '숨은 전두환씨 재산 찾기' 숨바꼭질
  52. 한국경제 제 3의 길이 가능한가?
  53. 전두환씨 5·18때 '자위권 발동' 주장 서울경제 2007년07월24일자
  54. 과거사위, 5·18때 전두환씨 '자위권 발동 주장' 확인 경향신문 2007-07-24 일자
  55. 황준범 기자. “역대 대통령들 종교문제”. 한겨레. 2009년 7월 6일에 확인함. 
  56. 전두환 백담사 은둔(1988.11.23) 역사학연구소
  57. 전두환의 불교탄압
  58. 정천기. “월주스님 "10ㆍ27법난 때 죄수복입고 조사받아". 한국일보 (연합뉴스 인용). 2008년 9월 8일에 확인함. 
  59.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등 176명 서훈취소 , 《연합뉴스》인용
  60. 전두환·노태우씨 훈장반환 ‘버티기’, 《한겨레인용
  61. 지종학풍수지리연구소
  62.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바깥 고리[편집]

2000년대 이전에 전사모라는 팬클럽이 등장하였다.


제11·12대 대한민국 대통령
전임
박충훈
(권한 대행)
1980년 9월 1일 - 1988년 2월 24일 후임
노태우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 박근혜 · 문재인 · 윤석열
전임
윤일균
(대행)
제10대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1980년 4월 14일 - 1980년 7월 17일
후임
-

틀: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