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Edudesigner/초등 6학년1학기 사회3단원 대한민국의 수립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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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도입


학습 목표[편집]

다양한 인터넷 자원을 활용하여 6.25전쟁, 4.19혁명, 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 항쟁에 대한 정보를 탐색, 분석, 활용, 생성, 공유할 수 있다.

학습자 등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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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진입니다Rudwls981128 (토론) 2010년 6월 29일 (화) 14:20 (KST)
  • 열심히하겠습니다(김성현)
  • 6.25에 대해 하겠습니다(강병준)125.241.107.106 (토론) 2010년 7월 15일 (목) 14:06 (KST)
  • 백민석입니다. 잘하겠습니다.왕참치 (토론) 2010년 7월 15일 (목) 14:24 (KST)
  • 이도현:잘만하면될까요?열심히 하겠습니다125.241.107.106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16 (KST)
  • 꼼꼼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Seyoung1998 (토론)
  • 열심히하겠습니다.125.241.107.106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22 (KST)박태욱
  • 열심히 하겠습니다Cjstjswls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23 (KST)

학습 안내[편집]

  • 학습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루어 집니다.
  1. 정보 탐색
  2. 정보 분석
  3. 정보 활용
  4. 정보 생성
  5. 정보 공유


학습 전개


학습 전개[편집]

1.정보 탐색[편집]

  • 인터넷 검색을 사용하여 원하는 정보를 찾아봅시다.
  • 사용할 수 있는 지식 저장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더 많은 저장소를 알고있다면 편집을 눌러 추가해주세요.

지식저장소[편집]

http://www.naver.com/ 네이버 http://kr.yahoo.com/ 야후 http://www.google.co.kr/ 구글 http://www.nate.com/ 네이트 http://kr.msn.com/ MSN


http://100.naver.com/ 네이버 백과사전 http://www.encyber.com/ 엔사이버 백과사전 http://enc.daum.net/ 다음 백과사전 http://www.britannica.co.kr/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http://krdic.naver.com/ 네이버 국어사전 http://www.encyber.com/kordic/ 엔사이버 국어사전 http://www.ganada.org/ 가나다 국어사전 http://www.korean.go.kr/ 국립국어원

탐색한 주소모음[편집]

  • 정보가 있는 주소들을 아래에 복사 붙여넣기 하여 다른 학습자들도 정보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2.정보 분석[편집]

  • 위에서 찾은 정보를 아래 질문에 따라 평가해봅시다.

적합한 정보를 찾았나요?[편집]

사실을 근거로한 타당한 정보인가요?[편집]

믿을 만한 출처를 갖고 있는 신뢰할 만한 정보인가요?[편집]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찾기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를 구성,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개요  [편집]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의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었다. 이 안이 국내에 전해지자, 임정을 중심으로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어 반탁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신탁운동을 둘러싸고 임시정부측은 결사적으로 반탁을 주장한 반면, 박헌영의 조선공산당등 좌익측은 찬탁을 주장하여 의견이 엇갈리게 되었고, 이리하여 좌우의 제휴에 의한 민족통일공작은 절망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1946년 1월, 미·소 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열렸고, 이어 3월에는 정식 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회의가 거듭되는 동안 차츰 결렬 상태에 빠졌고, 이 혼돈 속에서 타개를 위한 몇 가지 방도가 모색되었던 것이다.

첫째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민당이 호응하여 조직한 민족통일 총본부의 자율정부운동이었다. 얄타 회담과 모스크바 3상 결의를 취소하여 38선과 신탁통치를 없애고 즉시 독립 과도정부를 수립하라는 것인 정읍발언이었다.

한편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계통의 한독당은 국민의회를 구성하여 반탁운동을 근본으로 하되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을 실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가 하면 김규식·여운형등 중간우파와 중간좌파가 주도하여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들 좌우합작운동 주도세력들인 중도파 인사들은 선임정후반탁을 주창하여 찬탁의 입장에서 미·소 공동위원회의 재개를 통해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동시에 좌익세력들은 남한의 정치·경제·사회를 교란하는 여러 수단을 사용하였다. 1946년 5월 정판사 위폐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부산의 철도 파업을 계기로 일으킨 대구 폭동은 그들의 지하운동의 대표적인 예였다. 이 사건 이후 미군정은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창설하였고, 1947년 6월에는 미군정청을 남조선 과도정부라고 칭하였다. 1947년 5월에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무렵 미-소 냉전이 격화되면서 매카시즘열풍이 불던시기라 이 역시 미·소의 의견대립으로 양측의 입장만 확인한상태로 완전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9월 17일 미국은 한반도의 문제를 유엔에 제출하여 이관하였다.


제헌국회 총선 투표 광경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미국은 한국에서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결과 정부가 수립되면 미·소 양군은 철수할 것이며, 이러한 절차를 잠시 협의하기 위해 유엔 한국 부흥위원단을 설치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이 결의안의 수정 통과로 유엔 한국위원단은 1948년 1월에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반대로 북한에서의 활동은 좌절되었다. 1948년 2월의 유엔 총회에서는 가능한 지역 내에서만이라도 선거에 의한 독립정부를 수립할 것을 가결하였다. 이와같이 하여 1948년 5월 10일에 남한에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어 5월 31일에는 최초의 국회가 열렸다. 이 제헌국회는 7월 17일에 헌법을 공포하였는데, 초대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이어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수립이 국내외에 선포되었으며, 그해 12월 유엔 총회의 승인을 받아 대한민국은 한국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정부가 되었다.

참고 문헌  [편집]
본 문서에는 다음 커뮤니케이션에서 GFDL 또는 이에 준하는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_%EC%A0%95%EB%B6%80_%EC%88%98%EB%A6%BD’ 125.241.107.106 (토론) 2010년 7월 15일 (목) 14:29 (KST) 박정희대통령친일인명사전과 체제청산 삼분법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4,389명의 인물들을 수록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였다. 이 사전에는 일제시대 하급장교부터 시작해서 각종 사회단체의 주도자까지 광범위한 조선인들이 친일인사로 분류되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사전에서처럼 만주국군 소위를 친일로 규정해 놓으면 그런 장교가 되고 싶었던 사람들도 모두 내면적 친일이 되어 버린다. 또 조선미술가협회와 같은 단체의 간부들을 친일로 규정해 놓으면 그 협회의 나머지 회원들도 모두 미미한 친일이 되어 버린다. 이런 식으로 친일인명사전은 일제시대를 살았던 거의 모든 조선인들을 친일의 범주에 넣어 버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 '친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로는 '일본과 친함'이란 뜻이 되겠지만 실질적으로 쓰이는 의미는 '이씨조선 말기에서부터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시기에 일본의 조선 침략과 지배를 지지하고 협력하여 이익을 얻음'이라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서 '반민족 배신자'란 뜻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친일인명사전은 그 당시의 조선인 대부분을 친일의 범주에 넣은 것이니 곧 민족 구성원 대부분을 '반민족 배신자'로 규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민족 전체를 부정하는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모순은 친일인명사전이 보편적인 체제청산의 맥락에서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념과 질서는 내부적인 모순이나 외부적인 힘에 의하여 급격히 바뀌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체제교체는 반드시 실패한 구체제에 대한 청산작업을 동반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사에서도 체제청산작업은 여러 차례 일어났다. 바로 신라통일, 신라-왕씨고려의 왕조교체, 왕씨고려-이씨조선의 왕조교체 그리고 이씨조선체제에서 일제식민제체로의 체제교체에 수반된 청산작업을 들 수 있다. 한국사에서의 체제청산은 대부분 인적청산이 없는 평화적인 작업이었다. 신라통일의 시기에는 백제와 고려의 왕과 귀족들이 대부분 당나라나 왜의 관리로 흡수되었고 남은 사람들도 신라의 하급관리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구체제의 지배세력에 대한 인적청산은 일어나지 않았다. 신라와 왕씨고려의 교체기에도 신라와 견씨백제의 지배세력들이 모두 왕씨고려의 지배세력으로 편입되어 역시 인적청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씨조선이 일본제국으로 흡수될 때에도 신라가 왕씨고려로 흡수될 때와 매우 유사한 양상을 띠었다. 예외가 있다면 왕씨고려에서 이씨조선으로의 교체기에 왕씨고려의 왕족들이 모두 몰살당하는 철저한 인적청산이 이루어졌다는 것뿐이다. 체제청산은 역사발전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연적인 과정인데 그 방법은 평화적인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사람들은 일제가 민족독립을 주장하는 조선인들을 고문하고 죽였다거나 사람들을 끌어가 전쟁과 노역 그리고 매춘을 강요한 예를 들어 한국사에 존재했던 다른 체제청산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일제가 한 일들은 이전의 왕조에서도 모두 했던 것들로 일제의 지배만이 사악하고 가혹했다고 할 수 없다. 또 이전의 체제교체는 민족내부의 변혁이었지만 일제식민체제는 이민족에 의한 통치이므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라의 백제병합도 당시로서는 이민족에 의한 지배와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한민족은 신라통일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단일정치공동체를 유지하면서 비로소 형성된 것이며 그 이전의 신라와 백제는 한 민족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라가 내세웠던 ‘삼한일통’은 일제가 내세웠던 ‘내선일체’나 ‘대동아공영’과 그 역할이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성공하였다는 것이고 후자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기 전 일본령 조선에서는 '아시아의 제 민족이 힘을 합쳐 영미제국주의에 맞서 싸워야한다.'는 주장이 선이었고 '각 민족이 자신들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과 악의 구분은 태평양 전쟁의 결과가 뒤바꾸어 놓아 전자는 악이 되었고 후자는 선이 되었다. 이렇게 선과 악이 엎치락뒤치락 뒤바뀌는 현상은 몇 년 후 한반도에서 더욱 심하게 일어난다. 인민군이 주둔하면 공산주의가 선이요 자본주의는 악이었고 국군이 주둔하면 그 반대가 되었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서 볼 때 사회체제는 선과 악이 따로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득세했느냐 실세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일제식민체제에 대한 청산작업도 체제교체에 따른 청산작업의 일환이라는 시각으로 접근해야지 절대 악을 응징한다거나 이전의 한국사에서 행해졌던 체제청산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 의미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청산작업에 나서야만 구체제에 축적되었던 모순을 제대로 해소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과제를 보다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체제교체에 따른 청산작업의 바람직한 원칙을 생각해 본다.

체제청산 삼분법 사회체제는 선악이 없다. 따라서 구체제에 대한 청산작업도 선악의 개념이 아니라 구체제가 남긴 모순을 잘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보다 더 잘 열어나가자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 그러한 입장에서 나온 것이 체제청산 삼분법이다. 이것은 기존의 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체제가 들어섰을 때 구체제에 대한 청산작업을 아래와 같이 세 분류로 나누어 각기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1. 구체제의 질서를 주도하고 그로부터 특권을 누린 정치세력 -> 실패한 체제에 대한 정치적 책임 2. 구체제의 질서를 악용하여 민중들을 괴롭힌 사람들 -> 민중을 괴롭힌 도덕적 책임 3. 구체제가 요구하는 질서에 순응하며 살았던 민중들 ->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첫째, 구체제의 질서를 주도하고 그로부터 특권을 누린 지배세력에 대해서는 실패한 체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일제시대에 대한 책임도 그 당시의 지배세력이라 할 수 있는 이씨왕족이나 고관들이 져야 한다. 이 책임은 도덕적 책임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이다. 일제식민체제의 질서를 주도하고 그로부터 특권을 누린 사람들이니 그 체제가 붕괴하였다면 마땅히 자신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 직후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조선 왕족들과 총독부 관리들이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앞줄 중앙에 모자를 벗은 고종과 그 오른쪽에 순종이 보인다. 이 사람들은 일제식민체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져야한다. 둘째, 구체제의 질서를 악용하여 민중들을 괴롭힌 사람들에 대해서는 민중을 괴롭힌 악행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친일인명사전에는 조선인들을 붙잡아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고문하고 괴롭힌 고등계 형사들이 실려 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체제질서를 악용하여 민중들을 괴롭힌 이런 악당들은 있어왔다. 조선시대에도 농민들을 붙잡아 동학난에 가담한 혐의를 씌워 고문하고 죽인 지방수령들이 있었고 대한민국에서도 시민들을 붙잡아 공산주의 운동을 한 혐의를 씌워 괴롭힌 경찰들이 있었으며 김씨조선에서도 인민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학대하거나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낸 보위부 요원들이 있었다. 체제질서를 악용하여 민중들을 괴롭힌 이런 사람들에게는 친일이라는 정치적 책임을 묻기보다는 민중을 괴롭힌 데 대한 도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셋째, 구체제가 요구하는 질서에 순응하며 살았던 민중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정치적 도덕적 책임도 묻지 말아야 한다. 일제가 실시한 창씨개명에 참여한 조선인들은 전체 인구의 약 80%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조선인들 대부분은 궁성요배와 신사참배 등 그들이 요구하는 질서를 받아들이고 살았다. 이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바람이 불면 누웠다가 바람이 잦아들면 다시 일어서며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는 풀 같은 존재가 바로 민중들이다. 어떤 체제든지 ‘대동아공영’이니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며 제 나름의 이념을 내세우며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지만 민중들에게는 자신들이 생존하고 번성해야 한다는 영구불변의 이념이 있다. 체제가 실패하면 그 체제에서 특권을 누린 지배세력이 그 정치적 책임을 질 것이지 먹고 살기 위해서 지배세력이 요구하는 질서에 순응한 민중들에게 그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신사참배하는 학생들. 조선 민중들은 창씨개명과 궁성요배같은 일제가 요구하는 질서에 순응하며 살았다. 이들에게 일제식민체제의 책임을 물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친일인명사전은 잘못된 점이 많다. 첫째, 정치적 책임을 져야할 지배세력의 일부가 빠져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이은을 들 수 있다. 그는 일본군 중장의 계급까지 올라 제1항공군 사령관까지 지냈던 사람인데 이 사전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씨왕족은 일제식민통치에 협력하고 그 대가로 특권을 누려왔으니 당연히 친일인명사전에 올려야 한다. 둘째,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사람들까지 광범위하게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로 박정희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이씨조선체제를 일제식민체제로 바꾸는데 기여하거나 일제식민체제에서 질서를 주도하고 특권을 누린 사람이 아니다. 체제의 질서를 악용하여 민중을 괴롭힌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강직한 성품을 타고 나는 바람에 군인으로서 조국을 위해 온 몸을 불살랐을 뿐이며 그 조국이 태어날 때에는 일본이었는데 성년이 되어서 한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특권세력도 아니고 민중을 괴롭힌 악한도 아닌 이런 사람들은 모두 친일인명사전에서 빼야 한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워지게 된 계기를 만든 사람은 임종국 선생이다. 그가 쓴 유명한 ‘친일문학론’에는 저자 자신에 대해 쓴 자화상이란 글이 있는데 거기서 임종국은 자신이 17세였을 때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내용을 소개해 놓고 있다. 하루는 친구 놈한테서 김구 선생님이 오신다는 말을 들었다. "그 김구 선생이라는 이가 중국 사람이래!" "그래? 중국 사람이 뭘 하러 조선엘 오지?" "임마 것두 몰라! 정치하러 온대." "정치? 그럼 우린 중국한테 멕히니?" 한국어를 제외한 모든 관념, 이것을 나는 해방 후에 얻었고 민족이라는 관념도 해방 후에 싹튼 생각이었다. 일제시대는 이런 상황이었는데 군인이 되고 싶어 일본군에 입대한 청년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우리는 일제식민체제에 대한 청산작업에 있어서 겸손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고 오늘날의 기준으로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 조상들을 매도하는 것은 매우 오만한 태도다. 지금 대한민국을 찬양하고 대한민국의 국군이나 경찰로 복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대한민국이 붕괴되어 전혀 다른 이념과 질서를 가진 체제로 바뀐다면 그들도 반드시 체제청산작업의 심판대에 오를 것이다. 그 때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고 단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준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은 많은 인력이 투입되어 만들어진 방대하고도 세밀한 자료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애써 감추어 왔던 일제시대의 생활상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귀중한 역사자료이기도 하다. 또 독립운동 중심의 편향된 국사교과서의 기술에서 벗어나 일제가 요구하는 질서에 순응하며 살았던 대다수의 조선인들에게도 역사적 조명을 비추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들 역시 역사의 주체이며 소외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친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이 사전은 그 내용으로 보았을 때 '친일인명사전'보다는 '일본령조선인물사전(日本領朝鮮人物事典)'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요컨대, 사전의 이름을 바꾸던지 정치적 도덕적 책임이 없는 사람들을 빼던지 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초기에 민족국가로서의 기반을 견고하게 다지기 위해 민족주의를 강조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어느 정도 견고한 나라로 성장한 지금도 그러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이제 일제식민체제에 대한 청산작업도 이성적인 자세로 접근할 때가 되었다. 또 일제식민체제에 대한 청산작업에 이어 김씨조선의 붕괴에 따른 체제청산작업도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 작업은 전쟁과 테러에 대한 범죄와도 연결이 되어 있어 다소 문제가 복잡하다. 그러나 역시 보편적인 체제청산작업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 미래지향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 참고용어

친일(親日) 1. 일본과 친함. 2. 이씨조선 말기에서부터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시기에 일본의 조선 침략과 지배를 지지하고 협력하여 이익을 얻음. 3. 일본의 식민통치 시대를 살았던 조선인의 삶. 실질적으로는 2번의 뜻으로 대부분 쓰여 왔으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서는 3번의 뜻으로 쓰였다. 친일파(親日派) 1.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 2. 이씨조선 말기에 일본에 기대어 왕조의 이익을 도모하자는 입장을 가진 세력. 3. 이씨조선 말기에서부터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시기에 일본의 조선 침략과 지배를 지지하고 협력하여 이익을 얻은 사람들. 실질적으로는 3번의 뜻으로 대부분 쓰이고 있다.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內는 內地(일본)를 말하고 鮮은 조선을 말한다.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일본과 조선은 같은 조상을 가졌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일본과 조선이 다시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가 일제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데 이용되었다. 현대의 과학적 연구에 의하면 일본은 선사시대부터 거주하던 토착민과 한반도에서 이주해간 이주민의 융합으로 구성된 것으로 밝혀져 이 이론의 타당성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주고 있다. 범아시아주의(Pan-Asianism) 아시아의 여러 민족은 유사한 혈통과 문화를 가지고 있으므로 정치적으로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대동아공영권을 뒷받침해 주는 배경이 되었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서방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일본, 조선, 만주, 중국, 동남아시아의 일부로 구성된 공동체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념적 구호가 되었다.

팔굉일우(八紘一宇) 온 세계가 하나의 집이라는 뜻이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일본의 세계침략을 정당화하는 구호로 이용되었다.

  • 박정희의 친일논란

박정희(1917~1979)는 한일합방되고 7년이 지난 1917년 태어났다.

구미보통학교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문경보통학교의 교사로 취임한다.

어릴 때부터 나폴레옹을 흠모하고 군인이 되고 싶었던 그는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나이제한에 걸리게 된다. 그러자 결연한 의지를 담은 편지와 혈서를 보내어 재차 응모하게 되는데 위의 왼쪽 신문기사는 그것을 보도한 내용이다. 그 편지내용을 보면 박정희는 당시 일본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스스로를 일본인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참고)

그는 이듬해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42년 졸업한다. 위의 오른쪽 사진은 그 졸업식을 보도한 기사로 생도대표로 앞에 나와 경례하는 사람이 박정희다. 이후 그는 일본육사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은 후 1944년 3월 졸업한다. 같은 해 12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하여 이듬해 8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약 8개월동안 주로 중국 팔로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부대에서 근무하게 된다.125.241.107.106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33 (KST)http://kallery.net/index.php?g_clss=forum&g_prcss=thrd&g_tmplt=&g_brd=20&g_thrd=1693박태욱




  • 이은의 친일




위 사진의 왼쪽 두 번째 사람은 군부대를 시찰하고 있는 이은(영친왕, 1897~1970)의 모습이다.

이은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1907년 대한제국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이후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1940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박정희가 군사교육을 받고 있을 당시에는 군부대와 학교를 돌며 태평양 전쟁을 독려하고 있었다.

1945년 일본이 미국에 항복했을 때 그는 제1항공군 사령관이었다.

이은은 일제식민체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져야할 특권계층임에도 불구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6.25전쟁[편집]

출처:네이버 백과사전,윤홍준만듬http://100.naver.com/100.nhn?docid=123386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카이로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은 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8월 9일 뒤늦게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허울뿐인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 13일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고, 8월 22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진주하였다.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에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당국은 남북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기도와 적대정부의 출현만은 절대로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단일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대한 정책을 포기하고, 분단의 고정화라는 기정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유엔은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31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선거감시를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유엔이 결의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는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를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지역을 장악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9월 9일 이른바 '흑백선거'에 의하여 북한지역에 독자적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유엔 총회결의 195 Ⅲ호)임을 결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하였다 6.25때쓰인소총-(출처:내머리다 위키백과야 지우지마)UN,국군-레인필드,스프링필드, M1GARAND.M1CARBIN,M3그리스건 중공,북한군-PPSH43,PPSH41,모신나강-강병준125.241.107.106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23 (KST) 한국 전쟁(韓國戰爭)[3] 또는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조선인민군의 남침으로부터 발발한 전쟁이다.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으로 말미암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휴전 중이지만, 휴전 이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국지적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4]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X7629 천선진

3.정보 활용[편집]

  • 찾은 정보를 학습에 이용해 봅시다.

찾은 정보를 나의 지식에 저장하여 봅시다.[편집]

찾은 정보를 나의 일상 생활에 이용하여 봅시다 .[편집]

4.정보 생성[편집]

아래 제목을 눌러서 여러분이 찾은 내용을 정리해주세요.

사용자:Edudesigner/대한민국의 수립과 발전[편집]

5.정보 공유[편집]

  •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고 더 좋은 정보로 발전하는 것을 정보 공유라고 합니다.
1. 다른 학습자가 생성한 정보를 읽어 봅니다.
2. 다른 학습자가 생성한 정보에서 수정할 부분이 있다면 고쳐봅시다.
3. 공유한 정보에서 나눌 의견이 있다면 사용자 토론 페이지에서 토론을 해봅시다.

학습 평가[편집]

너무 가볍게했다 홍준

<자아평가>

  • 나의 학습을 스스로 평가해 봅시다.

오늘 학습을 통해 새로 알게된 것이나 느낀점은 무엇입니까?[편집]

  • 너무 재있었고 좋았고 너무가볍게 했습니다.홍준
  • 전 이 학습을 통해서 위키백과가 출저도 밝히고 이런걸들이 철저한 홈페이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왕참치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21 (KST)
  • 여러가지의 전쟁, 일어난 일 들을 매우 많이 알게 되었고, 상대방의 글을 고쳐줄 수 있어서 즐거웠다. (박지수)125.241.107.106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24 (KST)
  • 인터넷으로 수업을 받는다는게 설레고,재밌었다Hyeonco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26 (KST)
  • 전 이학습이 곧 미래학습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이트가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박씨)
  • 친구들이랑 같이 해서 재미있었다.Daniel2138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23 (KST)규현
  • 친구들이잘하였도다.(이도현)125.241.107.106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24 (KST)
  • 출처의 중요성을 알앗다(김성현)
  • 전쟁이 나서 속상하고 안타가웠는데 다시이렇게 복구되서 다행이다.!!125.241.107.106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31 (KST)전혜현
  • 우리나라의 이런일이 있다는것을 더욱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DI63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27 (KST)최민선
  • 우리나라에도 큰 반란이 일어나서 신기했다 125.241.107.106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29 (KST)최하영
  • 백성들의 힘이 중요하다-임채웅125.241.107.106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30 (KST)
  • 우리나라가 세워지기까지 힘든 세월이 많았구나 생각했다.Seph10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31 (KST)

내가 찾은 예는 몇 개입니까?[편집]

<동료평가>

  • 학습을 함께 참여한 동료를 평가해 봅시다.

병준이가너무많을올려서 그랬다. 1개(김성현) 1개(백민석)

1개Dohuikim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30 (KST)

학습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편집]

병준이:많은글을 올려서 윤홍준 윤홍준이잘하였도다.왜냐고묻는다면 긴글을쓰며많이참여하고,특히이것을볼때돋보이는것만이홍준이의글이돋보였도다. (이도현황제가)125.241.107.106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23 (KST)

강병준 원래 전쟁에 관심이 많아 더욱더 적극적으로 함 김도은





나는 이도현이라고 결정햇으니라 왜냐하면 이 자는 적극적으로 참여해 참 돋보였기 때문에 도현이를 확정하노라. (알라박이)

홍준이를 추천합니다, 출처를 잘 밣히기 때문이다(김성현) 병준이, 구체적이어서-임채웅125.241.107.106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31 (KST)

학습을 통해 다른 학생에게 도움을 준 학생은 누구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편집]

이도현이다. 왜냐하면 도현이는 내가 모르는것도 알려줘서 내가참 기뻤다(박효범)

  • 홍준입니다. 홍준이는 625전쟁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고 내개 필요한 정보를 적절하게 올려줬다.왕참치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25 (KST)백민석
  • 홍준이, 많이 알게 해주어서-임채웅125.241.107.106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4:32 (KST)

참고사이트[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