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웬디러비/연습장: 영국의 기갑부대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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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중후반 세계 최초로 전차를 개발하고 실전투입한 영국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적극적으로 기병부대를 기계화하고 전차 부대를 양산하기 위해 노력했다. 르노 FT-17가 처음 도입한 회전식 포탑과 후방 엔진, 돌출한 무한궤도는 영국의 전차에도 영향을 주어 이후 영국 전차들은 모두 회전포탑, 후방 엔진, 돌출된 무한 궤도를 가지게 되었다. 영국 육군 기병부대의 기계화는 1910년대 말부터 자체적으로 활발히 논의되었고, 1927년 실험 기계화부대가 창립된 이래 약 15년간 지속되었다.[1] 영국 기병 부대의 기계화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전차는 비커스 중형전차 마크 II였다.[2]1929년 말 대공황으로 인해 영국 육군의 기계화에도 제동이 걸렸지만, 1930년대 중반 독일소련이 재무장을 시작하면서 영국도 다시 재무장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대부분의 기병 부대는 기계화되었고, 기마부대 중 전투부대는 1941년 완전히 기계화되었다. 이후 영국은 냉전 시기 NATO의 무기 표준화 작업에 중요한 역할을 한 로열 오디넌스 L7 포를 만들기도 했으며, 영국이 양산한 전차는 영연방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주요 기갑전투차량으로 채택되었다.

배경[편집]

전차의 투입과 개발[편집]

1917년 캉브레 전투 당시 마크 4호 (남성형) 전차가 참호를 넘어가고 있다. 이 전투에서 전차는 그 효용성을 입증했다.

1916년 솜 전투에서 전차가 최초로 실전에 투입된 이후[3], 영국에서는 기관총 군단의 예하부대로 전차연대를 편성했고, 1917년 7월 28일 전차 군단을 설립했다.[4] 1917년 11월 캉브레 전투에서 영국군은 전차 부대를 운용했고,[5] 전차 공격의 효율성이 어느 정도 입증되었다.[6] 전차는 연합군과 독일군 모두가 주장하던 "참호 돌파의 불가능성"을 완전히 종식시켰다. 이후 영국은 참호를 돌파하기 위한 전차를 추가로 여러 개 개발했으며, 마크 IV 전차마크 V 전차, 마크 VIII 전차를 제외하고는 종전으로 실전에 투입되지 못했다.

1917년 프랑스에서 개발한 르노 FT-17의 특징인 회전포탑, 돌출형 무한궤도, 후방 엔진은 이후 영국 전차의 디자인에도 영향을 주었다. 영국이 자체적으로 생산한 전차는 대부분 1918년에 생산이 중단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개발되었던 전차들이 해외에 수출되어 사용되기는 했으나, 영국 본토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르노 전차의 특징을 그대로 따온 전차가 바로 비커스 경전차로, 1921년 개발이 시작된 다음[7] 1923년부터 약 1년간 시험 주행에 들어갔고, 이 전차는 1924년 비커스 중형전차 마크 I로 재명명되었다.

기갑전 이론[편집]

영국군에 기갑전의 이론을 제시한 J. F. C. 풀러.

1916년 기관총 중과에서 시작한 전차 군단이 1917년 캉브레 전투에 투입된 것에는 J. F. C. 풀러의 역할이 컸다. 풀러는 캉브레 전투와 1918년 여름 공세에서 전차 작전 구상에 기여했다. 그가 제시한 1919년 계획은 대량의 전차가 중심이 되는 공격을 중점으로 하고 있었다.[8] 풀러는 기계화 부대가 참호를 돌파한 후 적 본부를 파고드는 전략을 제시했지만,[9] 1919년 계획은 1918년 11월 독일 제국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게 되면서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

또 다른 영국 육군의 군사이론가인 바실 헨리 리델 하트 역시 1920년대 그의 초기 저술에서 기갑전의 중요성에 대해 피력했다. 그러나 하트는 풀러와는 달리 보병과 기계화부대의 합동 전술을 중시했다. 하트는 속도가 빠른 궤도차량으로 병력을 수송시킨 후, 이들 병력이 전차를 더 잘 보호할 수 있는 지역을 선점해야 한다고 설명했다.[10] 하트의 이론은 오늘날 제병협동전술과 상당히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하트의 이론은 영국보다는 나치 독일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11]

1920년대[편집]

영국 육군의 시도[편집]

1920년대 초, 영국 육군은 풀러와 하트 등 수정주의자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기병의 기계화를 추진했다.[12][13] 1920년 솔즈베리 평원에서 기계화부대의 연습이 이루어졌는데, 이를 통해 영국 육군은 궤도차량과 차륜 차량의 이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2] 하지만 전차 군단은 1개의 본부와 4개의 대대로 규모가 축소되었다.[14] 1923년 10월 18일 전차 군단은 조지 5세로부터 "왕립"이라는 칭호를 하사받게 되어 왕립 전차 군단으로 불리게 되었다.[15][4] 같은 시기에 영국 육군에 166대의 비커스 중형전차 마크 1이 인도되었다.[16] 이후 영국 육군은 1927년 5월 1일 실험 기계화부대 (EMF)를 공식적으로 설립해 영국 육군의 기계화에 대한 전반적인 방향을 잡고자 했다.

1920년대에 영국 육군의 기계화 사업은 다른 국가에 비해 빠른 편이었다. 다른 국가들의 상황이 기계화를 시도할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전차와 장갑차 등을 보유할 수 없었으며,[17] 미국의 첫 기갑사단은 1940년 7월 15일에 탄생했다.[18] 1920년대에 프랑스와 미국의 전차부대는 육군 보병 휘하의 편제였다.[16] 러시아의 경우에는 제1차 세계 대전과 뒤이은 내전으로 인해 산업시설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고,[19] 경제적으로도 기갑차량을 양산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나 영국 육군 내부에서도 기병의 기계화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논란의 가장 큰 이유는 영국 계급 사회에 존재하는 보수성을 들 수 있다. 영국 육군이 기병을 기계화할 때, 당시 기병대원들은 상실감을 토로하기도 했다.[20] 1929년 실험 기계화부대가 논란 끝에 폐지되었다.[21] 아울러 1929년 뉴욕발 대공황이 전세계에 영향을 미쳤고 영국 국방부가 공군해군의 개선에 초점을 두면서, 1930년대의 영국 육군의 기계화 사업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새로운 기술들[편집]

1920년대 중반이 되면 현대 전차들에 영향을 주는 신기술들이 많이 개발되었다. 비커스는 OQF 3파운드 포를 개발하였는데, QF 3파운드 비커스 함포가 그 기원이다. 이 포는 1920년대 영국 육군의 기계화를 담당한 마크 I과 마크 II에 탑재되었다. 영국 전차에 더 많은 영향을 준 기술은 존 월터 크리스티가 개발한 크리스티 서스펜션이었다. 크리스티 서스펜션은 각각의 휠에 자체적인 현가장치를 갖추었다. 이는 전차의 험지 주파력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영국 육군의 기갑부대에 크리스티 서스펜션이 도입된 전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30년대 후반이었다.

1930년대[편집]

1939년 4월 양산이 시작된 컨버넌터 전차는 최신 기술을 탑재한 순항전차였다.

유화 정책[편집]

1920년대 불안했던 영국 경제는 대공황 이후 큰 변곡점을 지나게 되었다. 영국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하지만,[22] 영국이 1930년대 군사 및 외교 전략을 유화 정책으로 선회시킨 것은[23] 분명히 영국 육군에도 영향을 미쳤다. 유화 정책은 영국은 19세기 말엽부터 쇠락해가는 자국의 상황을 고려하여 내린 정책이었다.[24]

유화 정책이 지속되고 있었지만, 영국의 국방비는 1924년부터 1934년까지 꾸준히 유지되고 있었다.[25] 문제는 이들 사업의 중심이 영국 공군과 해군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것이었다.[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육군은 1930년대 꾸준히 기병을 기계화시켰다.

꾸준한 발전[편집]

영국 육군은 기갑전 발달에 있어서 전차 교리를 2가지인 순항전차보병전차로 발달시켰다. 이 중 영국 경기병을 대체하는 전차는 순항전차였는데, 빠른 속도와 경장갑을 갖춘 전차였다. 1920년대 후반 기병대의 주력전차였던 비커스 중형전차 마크 II가 구식이 되면서, 크루저 마크 I이 영국 육군에 전반적으로 보급되었다. 1930년대 중후반부터는 영국 순항전차에 크리스티 서스펜션을 장착하여 험지 주파력을 높였고, 엔진 역시 컨버넌트 전차부터 대형 피스톤 엔진을 탑재하면서 속도 역시 증가하게 되었다. 1930년대 영국은 다수의 장갑차와 경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1939년 영국의 기병대 대부분은 기계화되었다.

영국 전차부대의 편제도 2개 사단급 규모로 증가했다. 1937년 11월 영국 제1기갑사단이 신설되었고, 1938년 여름 이집트 기동사단[27]이 설립되었다. 전쟁 직후인 1939년 12월에는 제7기갑사단이 탄생했다.

1940년대[편집]

제2차 세계 대전[편집]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쓰인 처칠 AVRO. 처칠 AVRO는 호바트의 장난감 중 하나였다.

1940년대 영국의 주요 전차 생산은 크게 2가지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자체적으로 영국이 전쟁을 겪으면서 겪은 경험을 전차에 도입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기대여법에 따라 미국으로부터 들여온 무기들을 영국군의 현실에 맞게 변형한 것이었다. 1940년 마틸다 전차를 기본으로 한 조명차를 개발했다. 1942년 디에프 기습의 실패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었다. 1943년 또는 1944년 다가올 상륙 작전에 대비해 영국의 퍼시 호바트 장군은 호바트의 장난감이라 불리는 전차들을 여럿 개발했다. 이 전차들은 땅에 매설된 지뢰를 파괴하거나, 가교를 설치하거나, 화염방사기를 탑재하기도 했다. 또한 크리스티 서스펜션을 도입한 크롬웰 전차는 영국군의 주력이 되었다.

미국의 무기대여법을 통해 개발된 전차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M4 셔먼에 기초한 것이었다. 영국은 무기대여법을 통해 약 17,000대의 셔먼 전차를 공급받았다. 이들 중 대다수는 호바트의 장난감을 개발하는데 사용하거나, 주포를 영국산 포인 17파운더 포로 바꾸었다. 17파운더 포를 장착한 셔먼 전차를 M4 셔먼 파이어플라이라고 부른다. 이 외에도 영국은 상륙 작전에서의 피해를 대비해 수륙양용을 가능하게 한 DD 전차를 개발하기도 했다.[28]


1944년부터 독일에서 티거 전차를 비롯한 강력한 주포와 두꺼운 장갑을 가진 전차들이 양산되어 영국군에 큰 피해를 입히자, 영국군은 기존의 교리와는 달리 순항전차와 보병전차의 개념을 합친 코멧 전차를 개발하였다. 코멧은 영국군이 전쟁 때 생산한 전차 중 가장 성능이 우수한 전차로 평가받고 있다. 1944년 12월에 전쟁에 투입된 코멧 전차는 1945년 영국이 독일을 침공할 때 선봉에 섰다. 이후 코멧 전차는 1940년대 후반 센츄리온 전차의 양산에 영향을 주게 된다.

전후[편집]

1940대 중반부터 영국은 독일에 맞서기 위해 코멧 전차에 기본을 둔 센추리온 전차를 개발했지만, 독일이 항복하면서 센추리온 전차는 실전에 투입되지 못했다. 그러나 센추리온 전차는 이후 영국의 주력 전차가 되었고, 지속적으로 무기와 성능을 개선시켰다. 1948년 이 전차는 17파운더 포에서 20파운더 포로 교체하였고, 마크 3이라는 이름으로 양산되었다.[29] 이 전차는 코멧 전차와 더불어 영국이 참여한 여러 분쟁에 참여했다.

냉전 시기와 그 후[편집]

냉전 시기에 탄생한 군사동맹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소련의 강력한 기갑부대 보유로 영국의 기갑전략도 변화하였다. 일단 1966년 컨커러와 센추리온 전차를 대체한 FV 4201 치프틴이 양산되었고, 보병 및 정찰용 전차인 FV101 스콜피온 전차가 1973년 양산되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서유럽 내에서 오랫동안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무기 체계화 및 표준화 작업에 따라 표준 전차를 양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 때 서유럽 및 미국에서 채택한 대표적인 포가 영국이 생산한 로열 오디넌스 L7으로, 영국 자체 전차인 비커스 MBT와 센츄리온, 서독레오파르트 1, 미국의 M47 패튼M48 패튼 등에 채택되었다. 이후 영국은 3세대 전차인 챌린저 전차를 1984년 양산하기 시작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Willey, David (2018년 5월 15일). 《The Tank Book: The Definitive Visual History of Armoured Vehicles》. 사이언스 북스. 41쪽. 
  2. Willey, David (2018년 5월 15일). 《The Tank Book: The Definitive Visual History of Armoured Vehicles》. 사이언스 북스. 58쪽. 
  3. Forty & Livesey 2012, 20쪽
  4. “PAST TO PRESENT”. 《Royal Tank Regiment》. 2019년 12월 7일에 확인함. 
  5. “1 Royal Tank Regiment History”. Ministry of Defence. 6 March 2014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3 May 2014에 확인함. 
  6. Sheldon 2009, 9–10쪽.
  7. Duncan (1973), p. 2
  8. Fuller (1936) p. 329
  9. Fuller (1936) p321, 334
  10. Bond p. 29
  11. The Editors of Encyclopaedia Britannica (2019년 10월 27일). “Sir Basil Liddell Hart”. 《Britannica》. 2019년 12월 8일에 확인함. 
  12. Edgerton, David (2005년 12월 8일). 〈1〉. 《Warfare State: Britain, 1920-197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쪽. 
  13. French 2000, p. 15
  14. “Between the Wars”. Royal Tank Regiment. 2014년 5월 3일에 확인함. 
  15. Crow, Duncan. British and Commonwealth Armoured Formations 1919-46 (Profile Publications Ltd, Great Bookham, no date), p.2.
  16. Willey, David (2018년 5월 15일). 《The Tank Book: The Definitive Visual History of Armoured Vehicles》. 사이언스 북스. 39쪽. 
  17. Treaty of Versailles, Articles 165, 170, 171, 172, 198 and tables No. II and III.
  18. Worth, Greg (2005). 《1st Armored Division: WWII & Beyond》. Kentucky: Turner Publishing Company. 10쪽. ISBN 1-59652-011-6. 
  19. Sheila Fitzpatrick, The Russian Revolu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4.
  20. Willey, David (2018년 5월 15일). 《The Tank Book: The Definitive Visual History of Armoured Vehicles》. 사이언스 북스. 43쪽. 
  21. Fletcher 1990, 58쪽.
  22. 이, 영석 (2012). 〈1〉. 《양차대전 사이의 영국 경제와 제국》 (학위논문). 영국사학회. 36쪽. 
  23. 조, 용욱 (02-28). 《1920년대와 1930년대 영국의 군사전략과 군비개발정책》 (학위논문). 국민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2019년 12월 21일에 확인함. 
  24. 김, 양규 (2009). 〈2〉. 《유화정책의 개념과 전략적 운용》 (PDF) (학위논문). 2019년 12월 21일에 확인함. 
  25. Alan T. Peacock and Jack Wiseman, The Growth of Public Expenditure in the United Kingdom (London, 1961), Table A-8, p.170
  26. 조, 용욱 (02-28). 《1920년대와 1930년대 영국의 군사전략과 군비개발정책》 (학위논문). 국민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2019년 12월 21일에 확인함. 
  27. “4th Mechanised Brigade: History”. British Army. 2008년 3월 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8. Fletcher (2006), p.34
  29. Willey, David (2018년 5월 15일). 《The Tank Book: The Definitive Visual History of Armoured Vehicles》. 사이언스 북스. 1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