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 민주 항쟁
부마민주항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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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79년 10월 16일 ~ 20일 | ||
지역 | 부산시, 경상남도 마산시 | ||
원인 | 박정희의 유신 정권 독재 | ||
종류 | 항의, 시위 | ||
결과 | 시위 진압, 10·26 사태에 영향 | ||
시위 당사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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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인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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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 | |||
체포자수 | 1,058명 | ||
구금자수 | 125명 |
부마 민주 항쟁(釜馬民主抗爭, 영어: Bu-Ma Democratic Protests)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현재의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마산시 (현 소재지 : 창원시)에서 유신 체제에 대항한 시위가 일어난 것을 말한다. 10월 16일에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의 구호와 함께 시위를 시작했다. 다음날인 17일부터 시민 계층으로 확산된 것을 시작으로 해서, 18일과 19일에는 마산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됐다.[1]
당시 박정희 유신정권은 10월 18일 오전 12시를 기해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66명을 군사 재판에 회부했으며, 10월 20일 오전 12시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을 출동시킨 후 민간인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부마민주화운동, 부·마항쟁, 부마항쟁, 부마사태라고도 한다.
배경
[편집]1978년 12월에 실시된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는 합리적인 금권, 관권선거에 영향이 크게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권 민주공화당은 야당인 신민당에 지지율에서 패배했다. 다만 농촌에 유리한 선거제도로 인해 의석은 더 얻었다. 그 후 민주화 시위가 널리 퍼지면서 당시 민주 인사들에 대한 연행과 투옥 등 탄압 강도가 강화됐다.[2] 같은 해 8월에 YH무역주식회사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점거 농성으로 집권 공화당은 야당인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했다.[3] 이는 곧 야당 국회의원 전원 의원직 사퇴로 이어졌다. 같은 해 9월 전국에서 대학생들의 시위가 확대됐다. 한편 김영삼의 발언을 문제삼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처분을 받고 감금한 것에 대한 반발이 부마항쟁을 작용케 했다는 견해도 있다.
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남민전이나 학생이 주축이 된 데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지에서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160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 시민입니다. 그리고 데모 양상을 보니까 데모하는 사람들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또 사이다나 콜라를 갖다 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 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사태입니다. 주로 그 사람들의 구호를 보니까, 체제에 대한 반대, 조세에 대한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 이런 것이 작용해서, 경찰서 11개를 불질러 버리고, 경찰 차량을 10여 대 파괴하고 불지르고, 이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4]
—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현지를 시찰한 뒤 당시 상황에 대해 내린 결론
- 1979년 5월 3일 – 신민당 전당대회. 온건파 이철승 패배. 강경파 김영삼이 대표로 당선.
- 1979년 8월 11일 – YH사건 발생.
- 1979년 9월 16일 – 김영삼 미국 뉴욕타임즈와 인터뷰 미국의 결단을 요구[6]
- 1979년 10월 4일 – 여당인 공화당이 날치기로 신민당 대표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
- 1979년 10월 16일 – 부마민주항쟁 발생. 부산대학교 학생 5,000여 명이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단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시위. 저녁에 시내로 진출
- 1979년 10월 17일 – 저녁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가 지속적으로 확산, 충무파출소 · 한국방송공사(KBS) · 서구청 · 부산세무서 등이 파괴, 경찰차량 전소 내지 파손
- 1979년 10월 18일 – 정부, 0시를 기해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투입해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 시민을 폭행하던 3공수여단 군인에게 항의한 부산동부경찰서 경위가 거리에서 집단 폭행을 당함.[7]
- 1979년 10월 19일 – 마산 지역에서 마산대학교[8]와 경남대학교 학생 시위, 민주공화당사·파출소·방송국 타격
- 1979년 10월 20일 – 근로자, 고등학생 시위 합세. 마산에 위수령 선포
- 1979년 10월 23일 – 부산 마산 통금 환원이 서서히 평온을 되찾았다.[9]
- 1979년 10월 26일 오전 12시 – 부산지역 계엄군 철수[10]
- 1979년 10월 26일 – 박정희 대통령 사망(10·26 사건)
영향
[편집]이 사건은 긴급조치로 유지되던 유신체제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이러한 항쟁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항쟁에 영향을 주었다.[11]
이후
[편집]부마민주항쟁을 기리는 부산민주공원이 부산광역시에 조성되었고, 창원시에도 이를 기리는 기념비가 설치되었다.
2014년 10월 13일 부마항쟁 진상규명·보상위원회가 공식으로 출범하였다.[12][13]
2015년 5월 18일에는 관련 법안이 통과되었다.[14] 그러나 위원 선정의 공정성과 활동 방안에 대해서 비판을 받고 있다.[15]
2019년 9월 17일에 10.16 부마민주항쟁이 공식적으로 국가기념일로 지정된다.[16]
시위 진압을 위한 계엄령 선포
[편집]부마민주항쟁 현장으로 공수부대 출동은 차지철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17]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도 10월 18일 부산에 와서 계엄사령관과 진압작전 계획을 검토하였다.
참고 문헌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http://www.buma.go.kr/subpage.php?p=m31
- ↑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참조
- ↑ http://www.yonhapnews.co.kr/photos/1990000000.html?cid=PYH20151122012700013
-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3권, 258-259쪽
- ↑ 두피디아
-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 ↑ 《1부 부마를 보았다》. 창사60주년 특집 기억하라 1979 2부작. 부산MBC. 2019년 4월 22일.
- ↑ 지금은 창원대학교로 개명되었고, 현재의 마산대학교와 다르다.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020년 3월 6일에 확인함.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020년 3월 6일에 확인함.
- ↑ 한홍구 (2001년 2월 14일). “단 한번도 왕의 목을 치지 못한…”. 《한겨레21》 (제346호). 2007년 12월 22일에 확인함.
-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7182411
- ↑ http://www.buma.go.kr/
- ↑ “부마 민주 항쟁관련자의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
- ↑ “꺼지지 않는 부마항쟁 진실 논란과 과제”. 한겨레신문. 2019년 10월 19일.
- ↑ “10.16 부마민주항쟁이 공식적으로 국가기념일로 지정됐습니다”. 《대통령기록관》. 행정안전부. 2019년 9월 17일.
- ↑ “[부마항쟁②] 대규모 민주투쟁 …‘유신체제 막을 내리다’”. 시사ON. 2019년 10월 16일.
외부 링크
[편집]-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홈페이지
- 부마항쟁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 KBS부산 부마민주항쟁 40년 KBS 특별기획 1979,부마 - 유튜브 2019-11-13
- 부산MBC 창사60주년 특집 기억하라 1979 2부작
- 1부 부마를 보았다 - 유튜브 2019-04-22
- 2부 잊혀진 영웅들 - 유튜브 2019-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