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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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7주 전쟁)
독일의 통일, 이탈리아의 통일의 일부

쾨니히그레츠 전투, 게오르크 블라입트로이 작. 유화 캔버스 화, 1869년.
날짜1866년 6월 14일1866년 7월 22일
장소
결과

프로이센 왕국이탈리아 왕국의 승리
프로이센의 하노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헤센 선제후국, 프랑크푸르트, 나사우헤센 대공국의 일부 합병
이탈리아 왕국베네치아 합병
프로이센의 북독일 연방 결성
오스트리아 제국독일 연방으로부터 제외.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바뀜.
교전국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작센 왕국 작센 왕국
바이에른 왕국 바이에른 왕국
바덴 대공국 바덴 대공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하노버 하노버 왕국
나사우 공국 나사우 공국
헤센 대공국
헤센 선제후국
로이스그라이츠
작센마이닝겐
샤움부르크리페 후국 샤움부르크리페 후국

프랑크푸르트 자유시

프로이센 프로이센 왕국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메클렌부르크
올덴부르크 대공국 올덴부르크 대공국
안할트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작센알텐부르크
작센코부르크고타
작센라우렌부르크
리페
슈바르츠부르크-존더샤우젠
발데크
브레멘
함부르크

뤼베크
지휘관

오스트리아 제국 프란츠 요제프 1세
오스트리아 제국 알브레히트 폰 테셴
오스트리아 제국 루트비히 폰 베네덱
작센 왕국 알베르트

바이에른 왕국 루트비히 2세

프로이센 빌헬름 1세
프로이센 오토 폰 비스마르크
프로이센 헬무트 폰 몰트케
이탈리아 왕국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이탈리아 왕국 알폰소 라 마모라

이탈리아 왕국 주세페 가리발디
병력
600,000명의 오스트리아 군과 독일 연합군 500,000명의 프로이센과 독일 연합군
300,000명의 이탈리아 군
피해 규모
오스트리아: 71,000명 이상[1] 37,000명 사망 또는 부상(독일과 이탈리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독일어: Preußisch-Österreichischer Krieg, Deutscher Krieg) 또는 7주 전쟁(Seven Weeks' War)은 소 독일주의로 통일을 추구하던 프로이센과 대 독일주의를 지향하던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조 간에 독일 연방 내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함으로써 독일은 프로이센 중심의 소 독일주의로 통일을 하게 된다. 보오전쟁(普墺戰爭)라고도 한다.

전쟁 준비[편집]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기 전에는 통일 논의에 종지부를 찍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보수파였던 비스마르크의 시각에서 자유주의적 의회 운동으로 독일 통일을 이룰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오스트리아가 단일 독일 국가 건설에 참여할 이유가 없었고, 현상 유지를 바라고 있다는 점은 비스마르크는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를 무력으로 배제해야 했으나, 그 전에 다른 나라들의 방해를 받지 않을 준비가 필요했다. 오스트리아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전략이었다.

첫 번째 계기는 폴란드 봉기였다. 폴란드는 1863년에 의회를 인정받는 등 상당한 자치권을 보장받았지만, 급진파는 완전 독립을 요구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러시아가 폴란드 봉기를 진압하자 비스마르크는 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여 프로이센의 군비 확충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를 받아내었다.

두 번째 계기는 덴마크와의 국경 분쟁이었다. 1863년 11월, 덴마크 의회는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킨 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을 덴마크가 합병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두 지역 모두 독일 연방에 속해 있었으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동맹을 맺고, 덴마크를 공격하여 승리했다. 이 결과 슐레스비히는 프로이센이,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가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비스마르크는 국내의 반발 세력을 물리치고, 오스트리아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미 프로이센은 관세 동맹을 통해 경제적으로 독일 남부의 연방들을 오스트리아의 영향권에서 제외시켰다.

비아리츠 회담과 이탈리아와의 군사동맹[편집]

대(對)오스트리아 전쟁을 위해서는 프랑스가 중립을 지켜야할 필요가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비아리츠 회담에서 친 프랑스적 발언과 함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에게 룩셈부르크벨기에 영토를 양도할 것을 약속하여 프랑스의 중립 선언을 유도하였다. 이 회담은 나중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불씨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 무렵 프랑스는 멕시코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어서 유럽 대륙의 일에 크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처지였다.

프랑스와의 중립 약속을 확보하고서도 비스마르크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좀 더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는 오스트리아군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이에 따라 베네치아를 확보하지 못해 오스트리아에 대한 감정이 안좋은 이탈리아를 끌어들이게 된다. 지지부진하던 협상은 나폴레옹 3세의 중재로 3개월 이내에 프로이센이 전쟁을 일으키면, 이탈리아는 즉각 양면전을 벌이기로하고 대신 베네치아를 이탈리아가 차지하기로 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센과 이탈리아와의 군사동맹은 1866년 4월 6일에 체결되었다. 전쟁은 이로부터 3개월 후에 시작되었다.

당시 국제상황[편집]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관계를 소원하게 했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관계를 단절시키기 위해 독일 내 프랑스어 사용 지역의 프랑스의 영향력을 인정하였다. 이는 프랑스의 지지를 얻어냈고, 이탈리아와 동맹으로 오스트리아는 주위 국가들로부터 고립되었다.

경과[편집]

뒷 이야기[편집]

승리에 취한 프로이센 군부는 빈으로 진격을 주장했고, 빌헬름 1세도 이것을 바랐다. 오랫동안 오스트리아에 억눌려왔던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빈에서 승리의 퍼레이드를 벌이길 원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생각은 달랐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에 굴욕감을 주어서는 안되며, 나중에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할 때 최소한 중립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의 자존심을 지켜주어 복수심을 갖지 않게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황태자의 도움과 사표 위협으로 이를 관철시킨다. 대프랑스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역할을 미리 내다본 것이다.

의의[편집]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전쟁이 미친 결과는 대단히 컸다. 독일 연방의 두 강국이었던 양국 간의 전쟁이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남으로써 향후 독일의 제패권은 프로이센에게 넘어갔다. 이는 18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대결 구도가 완전히 종결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독일 내에서 영향권을 발휘할 수 없었으며 독일 지역 내에 갖고 있던 영토도 대부분 빼앗겼다. 프로이센은 하노버 왕국, 헤센 선제후국 전체와, 프랑크푸르트, 슐레스비히 공국, 홀슈타인 공국, 나사우 공국의 일부 영토를 차지하였다. 이탈리아 왕국은 조약대로 베네치아를 오스트리아로부터 얻었다.

오스트리아의 독일 연방 퇴출으로 인해 독일 연방은 자연스럽게 붕괴되었다. 이를 대신해 프로이센을 주축으로 하는 북독일 연방이 새로 설립되었다. 바이에른 왕국을 비롯한 남부 독일 지역은 여전히 프로이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각주[편집]

  1. 1867년의 오스트리아 군사 백서에 의하면 북군 62,789명과 남군 8,470명이 전사, 부상, 실종되었다. Referenced e.g. in Světozor,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