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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크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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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크 (백국) 공국
Grafschaft (Herzogtum) Berg (독일어)
Graafschap (Hertogdom) Berg (네덜란드어)

1101년 ~ 1815년
베르크의 문장
베르크의 문장
국기

1560년경 라인강 하류-베스트팔렌 관구 지도
붉은색 표시가 베르크 공국의 영역
수도
정치
정치체제전제군주제
빌헬름 2세 (초대 공작)
나폴레옹 루이 보나파르트 (대공)
역사
시대 구분중세
 •  로타링기아 왕국에서 분리1101년
 •  마르크 백국과 분할1160년
 •  율리히 백국과 통합1348년
 •  마르크·클레베 공국과 통합1521
 •  팔츠노이부르크 /
팔츠 선제후국과 통합
1609년 / 1690년
 •  프로이센에 할양1815년 6월 9일
인문

베르크 공국(독일어: Grafschaft (Herzogtum) Berg)는 독일 라인란트에 있던 나라로, 처음에는 백작령이었고 나중에는 공작령이 되었다. 수도는 뒤셀도르프였다. 12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신성 로마 제국제후국으로서 존재하였다.

오늘날 독일에는 이 나라의 이름을 따온 베르기셰스란트 (Bergisches Land)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간혹 베르기게스란트(산악 지대, Bergiges Land)라는 이름으로 잘못 표기되기도 한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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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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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로타링기아 왕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집안내력을 지닌 에초넨가의 하위 가문으로서 1101년 베르크 백작가문이 출현했으며, 11세기에는 라인강 하류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으로 부상하였다.

1160년 공국의 영토가 두 부분으로 나뉘어 한 곳은 마르크 백국이 되었으며, 16세기에 다시 본가의 영토로 돌아왔다. 초창기 베르크 백작 가운데 엥엘베르트 1세는 가장 위력이 강했으나 1225년 11월 7일에 암살당했다.[1][2] 1280년에는 궁정을 부퍼강변의 베르크성에서 뒤셀도르프로 이전하였다. 1288년에는 베르크 백작 아돌프 8세보링겐 전투에서 헬러 공국에 대항하여 참전하였으며 승전을 거두었다.

14세기 베르크의 영역은 더욱 커졌다. 1348년에는 율리히 백국이에베르크 백국과 통합되었고,[3] 1380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츨라프 4세가 베르크 백작을 공작으로 승격시켜 율리히베르크 공국이 탄생했다.

영토 상속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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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0년경 율리히클레베베르크 연합 공국 지도

1509년 클레베 공작 요한 3세율리히베르크 공작 빌헬름 4세의 딸 마리아 폰 헬데른과 정략결혼에 나섰다. 당시 마리아는 아버지의 영지인 율리히, 베르크, 라펜스베르크 백국의 상속녀였다. 신성 로마 제국살리카 법전에서는 여성은 남편이나 후견인을 통해서만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기에, 이들 영지도 여성 상속인의 남편에게 넘어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1511년 빌헬름 4세가 사망하면서 율리히베르크 공작 가문은 단절되었고, 각 영지는 클레베 공작 요한 3세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와 함께 요한 3세가 기존에 갖고 있던 영지인 마르크 백국클레베 공국(클레베)도 공동군주국으로 통합되었다. 그 결과로 율리히클레베베르크 연합 공국이 탄생하였으며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작은 쾰른 대주교령뮌스터 주교령을 제외하고 오늘날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상당수 지역을 영토로 확보하게 되었다. 제2대 공작인 빌헬름은 황제 세력과의 견제를 위해 각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고 그레고리력을 도입하는 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새로운 공작 가문 역시 1609년 마지막 공작 요한 빌헬름이 정신이상으로 사망하면서 단절에 이르렀다. 이후 율리히와 베르크, 클레베를 놓고 율리히 계승 전쟁이 벌어졌고 1614년 크산텐 조약이 체결되며 분할되었다.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팔츠노이부르크 백작율리히와 베르크를 자국 영지로 편입했고, 클레베와 마르크는 훗날 프로이센 공작이 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에게 넘어갔다.

비텔스바흐가의 통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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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크를 넘겨받고 첫 공작에 오른 팔츠노이부르크 백작 볼프강 빌헬름바이에른팔츠 선제후국을 통치했던 비텔스바흐가의 일원이었다. 볼프강 빌헬름의 재위기에는 궁정의 중심지를 가끔씩 뒤셀도르프에 두기도 하였다.

30년 전쟁 시기 베르크 일대에는 큰 전투가 없었으나 전쟁의 압박은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4] 전쟁이 끝날 무렵 볼프강 빌헬름은 공국 내 가톨릭 전파에 힘썼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여전히 베르크 공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였고 베르크의 개신교도들을 수호하겠다며 뒤셀도르프 암소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후 몇 년 동안 베르크를 둘러싼 팔츠노이부르크와 브란덴부르크 사이의 긴장은 크게 줄어들었다.

1685년에 팔츠 선제후국을 통치하던 비텔스바흐가의 본가가 단절되자, 노이부르크 가문은 팔츠 선제후국을 물려받고 뒤셀도르프를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선제후 카를 3세 필리프는 뒤셀도르프가 영지에서 세금이 잘 걷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싫어하여 수도를 뒤셀도르프에서 만하임으로 옮겼다. 이후 1777년 팔츠 선제후 카를 테오도어바이에른 선제후국을 물려받을 때까지 역대 선제후는 만하임에 머물렀다.

프랑스 혁명과 베르크 대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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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셀도르프의 공작 궁전 (1798년 로렌츠 얀샤의 동판화). 1872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 중이던 1794년 프랑스가 율리히를 점령하고 1801년에 '쥘리에르' (Juliers)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합병하면서 율리히 공국과 베르크 공국은 분리되었다. 1803년 베르크는 다른 바이에른 영토에서 분리되어 비텔스바흐가의 방계 가문의 통치하에 놓였다.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의 종말과 함께 독일 영토의 재편성 과정에서 베르크는 베르크 대공국이 되었고, 나폴레옹의 처남 조아킴 뮈라의 통치하에 놓였다.[5]

뮈라의 문장은 베르크의 붉은 사자와 클레베 공국의 문장을 합친 것이었다. 문장 속 닻과 지휘봉은 뮈라가 해군 총사령관과 제국 원수를 역임중이었던 점을 반영하였다. 또한 나폴레옹의 누이 카롤린 보나파르트의 남편으로서 제국 독수리 문양을 사용할 권리도 있었다.

1809년 뮈라가 베르크 대공에서 나폴리 국왕으로 추대된 지 1년 후, 나폴레옹의 어린 조카 나폴레옹 루이 보나파르트 (1804년~1831년, 나폴레옹의 형인 홀란트 국왕 루이 보나파르트의 장남)가 베르크 대공이 되었으나, 나폴레옹 루이의 이름으로 프랑스 정부에서 영토를 관리했다. 1813년 나폴레옹의 패배와 그 뒤를 이은 평화 협정으로 베르크 대공국의 짧은 역사는 막을 내렸다. 1815년 빈 회의 이후 베르크는 프로이센 왕국율리히클레베베르크주로 편입되었으며, 1822년 라인 대공국과 통합하여 라인주를 이루었다.

베르크의 통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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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6년 프랑스 지도 제작자 니콜라 상송이 제작한 베르크 공국의 지도.
1812년 베르크 대공국의 영역

에초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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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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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뷔르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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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히(-하임바흐)가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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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펜스베르크와 연합.

율리히(-하임바흐)가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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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펜스베르크와 연합 (1404년~1437년 제외), 1423년 이후 율리히 공국과 연합.

라 마르크가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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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1년 율리히클레베베르크 연합 공국을 이루었다.

비텔스바흐가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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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년 율리히와 함께 팔츠노이부르크로 통합되었으며, 1690년부터 팔츠 선제후국과 연합, 1777년부터 바이에른과도 연합하였다.

프랑스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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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킴 뮈라의 베르크-클레베 대공 문장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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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크의 문장은 파란색 왕관을 쓰고 꼬리가 두 개이며 혀와 발톱을 내민 붉은색 사자를 방패에 담고 있다. 이 사자는 13세기 베르크 작위가 림뷔르흐 가문으로 넘어갔을 때 림뷔르흐 공작의 문장에서 유래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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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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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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