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노초 고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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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ozzo Gozzol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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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0년 작품 《동방 박사의 행렬》 속 고촐리의 자화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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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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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베노초 디 레세 |
| 출생 | 1421년경 피렌체 공화국, 스칸디치 |
| 사망 | 1497년 10월 4일 (75~76세) 피렌체 공화국, 피스토이아 |
| 직업 | 화가 |
| 성별 | 남성 |
| 사조 | 초기 르네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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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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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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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노초 고촐리(이탈리아어: Benozzo Gozzoli, 1421년경~1497년 10월 4일)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화가로, 본명은 베노초 디 레세(이탈리아어: Benozzo di Lese)이다. 화가 프라 안젤리코의 제자인 고촐리는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의 마기 세례당에 그린 일련의 벽화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화려하고 생동감 있는 행렬을 정교하게 묘사하고, 국제 고딕 양식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이 경당의 프레스코 연작은 사실적인 풍경과 생생한 인물 초상화를 통해 자연에 대한 새로운 르네상스적 관심을 드러낸다. 고촐리는 자신의 세대에서 가장 다작한 프레스코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주로 토스카나에서 활동했지만 움브리아와 로마에서도 작품을 남겼다.[1]
생애
[편집]견습 기간
[편집]고촐리는 약 1421년 피렌체 근처 산틸라리오아콜롬바노라는 마을에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1427년에 인근 피렌체로 이주했다. 16세기 이탈리아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에 따르면, 고촐리는 경력 초기에 프라 안젤리코의 제자이자 조수였다.
고촐리는 피렌체 산마르코 수도원의 숙소 방에 있는 프레스코 장식 작업에서 안젤리코를 도왔다. 이곳에서 확인된 그의 작품으로는 코시모 데 메디치 수도실에 있는 《동방박사의 경배》와, 8번 방의 그리스도 부활 장면 일부인 《무덤 앞의 여인들》이 있다. 많은 초기 르네상스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고촐리도 처음에는 금세공과 회화를 함께 배웠다.
1444년에서 1447년 사이에 그는 피렌체 세례당의 유명한 천국의 문 제작에서 로렌초 기베르티와 협력할 수 있었다.

1447년 5월 23일, 고촐리는 프라 안젤리코와 함께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부름을 받고 바티칸 궁의 한 경당을 장식하기 위해 로마에 있었다. 그러나 이 경당은 나중에 철거되어 당시의 작품은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이후 안젤리코와 함께 움브리아로 가서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산브리지오 성모 예배당의 천장을 장식했다.
그러나 도시의 정치적 문제로 인해 네 구획 중 두 개만 완성했고, 다시 교황 니콜라오 5세의 부름을 받아 1448년 6월까지 바티칸의 니콜리나 예배당에서 작업했다. 고촐리는 이 예배당의 프레스코화 제작에 상당한 기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449년에 제작된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의 성모자 축복상이 고촐리의 작품인지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인지 논란이 있다. 로마에서 그는 산타 마리아 인 아라코엘리 대성당에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프레스코화도 그렸다.
프라 안젤리코와 로렌초 기베르티는 이후 고촐리의 평생 작업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기베르티에게서 정밀한 세부 묘사와 생생한 이야기 전달 방식을 배웠고, 안젤리코에게서는 밝은 색채를 받아들여 이를 프레스코화 기법에 옮겨왔다.[2]
움브리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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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9년, 고촐리는 안젤리코와 결별하고 움브리아로 옮겼다. 나르니의 언덕 마을에는 1450년에 그가 남긴 《수태고지》 작품이 있으며, OPU[S] BENOT[I] DE FLORENT[IA]라는 서명이 있다. 몬테팔코 근처 산 포르투나토 수도원에서는 《성 프란치스, 성 베르나르디노 사이에 있는 성모자》를 비롯해 세 점의 다른 작품을 남겼다. 이 가운데 제대화 《허리띠의 성모》는 현재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고촐리 초기 양식이 안젤리코의 화풍과 가까웠음을 보여준다.
1450년, 고촐리는 몬테팔코 산 프란체스코 수도원으로부터 그의 첫 대규모 독립 작업을 의뢰받았다. 그는 합창단 경당을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장면 세 단으로 채웠고, 단테, 페트라르카, 조토의 초상화와 다양한 액세서리로 예배당을 채웠다. 이 작품들은 1452년에 완성되었으며, 안젤리코의 양식이 여전히 강하지만 곳곳에 좀 더 조토의 영향도 나타난다.[3] 같은 교회의 성 제롬 예배당에는 성모와 성인들, 십자가형 등 다양한 주제를 그린 프레스코도 있다.
고촐리는 아마도 1456년까지 몬테팔코에 머물렀으며, 그 사이 비테르보에서도 잠시 머물렀다. 그는 이 시기에 피에르 안토니오 메차스트리스를 조수로 두었다. 이후 페루자로 옮겨 성모자와 성인들을 그렸으며, 현재 페루자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피렌체로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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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고촐리는 그의 고향 피렌체로 돌아왔는데, 이곳은 15세기 미술의 중심지였다. 1459년에서 1461년 사이, 그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내 동방박사 예배당의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여기서 그는 《동방박사의 행렬》과 《경배하는 천사들》에서 복잡하면서도 섬세한 구성을 완성했으며, 사실적인 자연 묘사와 생생한 인물 초상이 어우러진 화려한 장면을 연출했다. 특히 《동방박사의 행렬》에는 메디치 가문과 그들의 동맹, 동시대의 주요 인물들의 초상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자신을 행렬 속에 그려 넣어 모자 가장자리에 이름을 새겨 넣었다.

동방박사 예배당의 프레스코는 고촐리에게 큰 명성을 안겨주었고, 그에게 새로운 중요한 의뢰들을 보장해주었다. 그중 하나는 피렌체 정결 형제회가 맡긴 제대화로, 원래 산 마르코 수도원에 있었으나 현재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 《천사와 성인들 사이에 앉은 성모자》(1461–1462년 제작)이다.
토스카나에서의 말년
[편집]산지미냐노
[편집]1463년, 고촐리는 흑사병을 피해 산지미냐노로 갔으며, 이곳에 위치한 산지미냐노 산타 마리아 아순타 교회에서 방대한 작업을 진행했다. 가장 두드러진 작품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에 대한 17개 장면을 담은 프레스코화 연작으로, 산타고스티노 교회의 반원형 예배당 전체를 덮고 있다.[4] 같은 교회에서는 ‘성 세바스티아노가 도시를 전염병으로부터 지키는 장면’을 그렸는데, 여기서 그는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전통적 도상과 달리 온전하고 옷을 입은 모습으로 표현했다. 1465년에는 산타 마리아 아순타 교회에서 성 세바스티아노의 순교를 제작했다. 그는 1467년까지 산 지미냐노에 머물며 도시와 주변 지역에서 더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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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년, 고촐리는 피사로 이주하여 그의 가장 방대한 의뢰 작업에 착수했다. 이는 피사의 캄포산토 건물에 그린 구약성서 24장면의 대형 벽화였다. 《노아의 포도주 발명》에서부터 《시바 여왕의 솔로몬 방문》까지를 담았다. 계약서에는 1년에 세 장면을 약 10 두카트에 그리도록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2년에 세 장면 정도의 속도로 진행되었다. 이는 인물과 장식 요소가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에 작업 속도를 감안해 허용된 것으로 보인다.
1470년 1월까지 그는 《노아와 그의 가족》을 완성했고, 이어 《함의 저주》, 《바벨탑 건축》(코시모 데 메디치, 젊은 로렌초, 안젤로 폴리치아노 등의 초상화 포함), 《소돔의 멸망’, 《아브라함의 승리》, 《리베카와 라헬의 결혼》, 《모세의 생애》 등을 제작했다. 캄포 산토의 아만나티 경당에서는 《동방박사의 경배》를 그렸으며, 여기에도 자신의 초상을 넣었다.
이 방대한 양의 작업은, 베노초가 아마도 차노비 마키아벨리의 도움을 받아 진행했으며, 피사에 머무는 동안 제작한 몇몇 다른 그림들(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광》을 포함하여)과 함께 16년간 이어져 1485년에 이르러서야 마무리되었다. 이것이 고촐리의 손에서 나온 작품 가운데 확실하게 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늦은 시점이다. 고촐리는 1497년 피스토이아에서 사망했는데, 역병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78년, 피사 당국은 그를 존경의 표시로 캄포 산토에 무덤을 마련해주었다. 또한 그는 피사에 자신의 집을 두었고, 피렌체에도 집과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5]
기타
[편집]- 화가 프란체스코와 제롤라모, 그리고 알레소 디 베노초는 그의 아들들이며, 여러 작업에서 그를 도왔다.
- 이탈리아의 미술사학자 로베르토 롱기가 ‘소형 인물화의 거장’라고 부른 화가는 미국의 미술사학자 버나드 베런슨이 ‘알룬노 디 베노초’(베노초의 제자)라고 부른 인물과 동일하다. 이 명칭은 화풍상의 근거에 따른 것이다.[6]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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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덤 앞의 여인들》 (1440–1441) – 프레스코화, 산마르코, 피렌체
- 《동방박사의 예배》 (1440–1441) – 프레스코화, 산마르코, 피렌체
- 《천국의 문》 (1444–1447, 로렌초 기베르티와 협업) – 금박 청동 문, 피렌체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
- 마돈나 디 산 브리치오 예배당 (1447, 공동 작업) - 프레스코, 오르비에토 대성당, 오르비에토
- 니콜리나 예배당 (1447–1449, 협업) – 프레스코화, 사도궁, 바티칸 시국
- 《천사들과 함께 있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1447–1450) – 목판에 템페라, 29.2 x 21.6 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 《축복을 베푸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1449) – 나무 받침대 위의 실크에 템페라, 254 x 130 cm,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로마
-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1450) - 패널, 산타마리아 대성당, 로마
- 《성 프란치스코와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사이의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1450) – 프레스코화, 산 포르투나토, 몬테팔코
- 《성 포르투나투스 즉위》 (1450) – 프레스코화, 200 x 110 cm, 산 포르투나토, 몬테팔코
-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1450) – 프레스코화, 250 x 135 cm, 산 포르투나토, 몬테팔코
- 《허리띠의 성모》 (1450–1452) – 패널에 템페라, 133 x 164 cm, 바티칸 박물관, 바티칸 시국
- 《성인들에게 둘러싸인 성모자》 (1452) – 프레스코, 카펠라 디 산 제롤라모, 산 프란체스코, 몬테팔코
- 《안디옥에서 성 제롬의 출발》 (1452) – 프레스코, 카펠라 디 산 제롤라모, 산 프란체스코, 몬테팔코
- 《사자의 발에서 가시를 뽑는 성 제롬》 (1452) – 프레스코, 카펠라 디 산 제롤라모, 산 프란체스코, 몬테팔코
- 《성 프란치스코와 성 베르나르디노, 프라 야코포와 함께 있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1452년경) – 패널에 템페라, 34 x 54 cm, 미술사 박물관, 비엔나
-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세례자 요한, 베드로, 제롬, 바울》 (1456) – 패널에 템페라, 122 x 212 cm, 움브리아 국립미술관, 페루자
- 《동방 박사의 행렬》 (1459-1460) – 프레스코화, 마기 세례당, 메디치 리카르디궁, 피렌체
- 《성모자》 (1460년경) – 패널에 템페라, 84.8 x 50.6 cm, 디트로이트 미술관, 디트로이트
- 《천사와 성인들 사이에 앉은 성모와 아기 예수》 (1461–1462) – 패널에 템페라, 161.9 x 170.2 cm, 런던 국립 미술관
- 《나폴레오네 오르시니를 부활시키는 성 도미니코》(1461) – 패널에 템페라, 25 x 35 cm, 브레라 미술관, 밀라노

- 《시몬 마구스의 몰락》 (1461–1462) – 패널에 템페라, 24 x 35.5 cm, 왕실 소장품, 햄프턴코트궁, 런던
- 《살로메의 춤》 (1461–1462) – 패널에 템페라, 23.8 x 34.3 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워싱턴 D.C.
- 《성 어거스틴의 역사》 (1464-1465) – 프레스코화, 산타고스티노 교회, 산지미냐노
- 《네 명의 전도자》 (1464~1465) – 프레스코, 산타고스티노 교회, 산지미냐노
- 《성도들》 (1464-1465) – 프레스코화, 산타고스티노 교회, 산지미냐노
- 《중재자 성 세바스티아노》 (1464–1466) – 프레스코화, 527 x 248 cm, 산타고스티노 교회, 산지미냐노
- 《성 세바스찬의 순교》 (1465) – 패널에 템페라, 525 x 378 cm, 산지미냐노 산타 마리아 아순타 교회, 산 지미냐노
- 《성 카타리나의 신비로운 결혼》 (1466) – 패널에 템페라, 90 x 50 cm, Palazzo Gazzoli, Pinacoteca Comunale, 테르니
- 《성 안드레아와 프로스페르 사이의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겸손의 성모 ; 1466) – 패널에 템페라, 137 x 138 cm, 무세오 시비코, 산 지미냐노
-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승리》 (1471) – 패널에 템페라, 230 x 102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노아의 술 취함과 빈티지》 (1469–1484) – 프레스코화, 캄포산토, 피사
- 《성모 마리아의 역사, 마돈나 델라 토세의 성막》(1484) – 프레스코화 이전, 베노초 고졸리 디 카스텔피오렌티노 박물관
- 《그리스도의 강하》 (1491) - 십자가에서의 강하》라고도 불린다. 캔버스에 유채, 180 x 300cm cm, 혼 박물관, 피렌체.
각주
[편집]- ↑ Ailsa Turner. "Gozzoli, Benozzo." Grove Art Online. Oxford Art Online. Oxford University Press. Web. 7 June 2016
- ↑ “Benozzo Gozzoli Biography”. 《Olga's Gallery》. 2017년 11월 9일에 확인함.
- ↑ History of the chapel of the Choir of San Francesco, and its frescoes 보관됨 2016-03-04 - 웨이백 머신 with depictions and descriptions of all the scenes.
- ↑ “Apsidal Chapel of Sant'Agostino in San Gimignano, Italy.”. 《Olga's Gallery》. 2017년 11월 9일에 확인함.
- ↑
본 문서에는 현재 퍼블릭 도메인에 속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This has additional references:
- ↑ The Samuel H. Kress Study Collection at the University of Missouri, by Norman E. Land, page 29-33.
출처
[편집]- 데일 켄트, Cosimo de' Medici and the Florentine Renaissanc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0).
- Franco Cardini, The Chapel of the Magi in Palazzo Medici (Firenze: Mandragora, 2001).
- Roger J. Crum, "Roberto Martelli, the Council of Florence, and the Medici Palace Chapel", Zeitschrift & Kunstgeschichte, 59 (1996).
- Benozzo Gozzoli a San Gimignano, a cura di Gerardo de Simone, Cristina Borgioli, exhib. catal. (San Gimignano, Pinacoteca & Museo d’Arte Sacra, 18 June-1 November 2016), Firenze, Giunti, 2016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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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미디어 공용에 베노초 고촐리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 Life of St. Augustine Frescoes with Narrative Explanation
- Museo Benozzo Gozzoli in Castelfiorentino ("BeGo")
- Revue of the BeGO in the Floremtine Museology Review by Giulia Bertelli, Oct. 13, 2017.
- Benozzo Gozzoli at the National Gallery of Art
- (영어) 베노초 고촐리의 작품 - 오픈 라이브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