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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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디 가 문장.

바르디 가(Bardi)는 콤프나 데이 바르디라는 강력한 은행으로 시작한 피렌체의 영향력 있는 가문이다. 14세기에 바르디 가는 잉글랜드의 군주 에드워드 3세에게 900,000 플로린을 빌려줬고, 이 빚을 페루치 가에 빌린 600,000 플로린과 함께 갚지 못하게 되면서, 두 가문 은행의 부도로 이어졌다. 15세기 동안 바르디 가는 여러 중심지에서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존 캐벗을 포함한 아메리카 초기 탐험에 일부 경제 지원 역할을 했었다.[1]

바르디 가의 귀족 지위는 1164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자손들에게 귀족 작위를 물려줄 권리"와 함께 베르니오 백작령을 알베르토 백작에게 넘겨준 이래로 기록되었다.[2] 알베르토 혈통의 마지막 계승자인 마르게리타 여백작은 베르니오를 사위인 피에로 데 바르디(Piero de' Bardi)에게 매각했다. 알베르토 가의 재산은 무겔로가 맞닿은 피렌체에서 22마일 떨어진 성 한 채와 9개의 코무네가 포함되어 있었다. 14세기 기간에 바르디 가는 피렌체 정부가 그들을 위협으로 간주할 만큼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그들은 결국 "피렌체 근처의 요새화 된 성들이 공화국의 위험으로 여겨" 결국 피렌체 정부에 그들의 성을 팔아야 만했다.[2]

1290년대 바르디 가와 페루치 가는 잉글랜드에도 지사를 세웠고 1320년대에는 유럽의 주요 은행가였다. 14세기에 바르디 가와 페루치 가는 금융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엄청나게 부유해졌다.[3] 이 두 가문들은 오늘날 수표라고 알려진 환어음을 상인들에게 제공하여 무역을 촉진시켰다. 이렇게 간단히 만들었던 이유는 한 도시에서 채무자가 지불 한 돈이 다른 도시에 청구서를 제출함으로써 채권자에게 지불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4][5] 1338년에는 피렌체에 80개가 넘는 은행 건물이 생겨났다.[6] 바르디 가는 바르셀로나, 세비야, 마요르카, 파리, 아비뇽, 니스, 마르세이유, 런던, 브뤼허, 콘스탄티노플, 로도스, 키프로스, 예루살렘등에 13개의 지사를 설치했다.[7] 일부 유럽의 강력한 지도자들은 바르디 가에 부채를 지기도 했다. 이것은 은행가의 몰락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8]

1340년대 초 백년전쟁 기간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와의 값비싼 전쟁으로 바빴다. 그는 페루치 가에 600,000 플로린, 바르디 가에 900,000 플로린을 빌렸다. 1345년에 그가 그의 빚을 채무하지 않으며, 두 은행가의 파산으로 이어졌다.[9]

은행업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바르디 가는 이탈리아의 가장 성공한 상인들 중 하나였고 그들의 귀족 지위를 통해 이익을 계속 누렸다. 많은 가문 출신들이 십자군, 교황청 로마 대사, 일부는 기사가 되는 등 중요 직위를 차지했다.[2] 1415년 경 코시모 데 메디치콘테시나 데 바르디의 결혼은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권력을 세우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10] 코시모는 바르디 가에게 1434년에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회복시켜주려던 그들의지지에 보답했다.[11] 1444년 그는 그들에게 세금을 면제해주었다.[11]

은행업 외에도 바르디 가는 "수도사들의 훌륭한 후원자"들이였다. 1317년에 시성프란치스코회 주교 루이즈 드 툴루즈(Louise de Toulouse, 1274년-1297년)는 바르디 가와 가까운 사이였다. 그들은 성 프란치스코에게 봉헌된 채플을 구입했다. 제단 오른쪽에 새로운 큰 채플을 지었고 그것을 루이즈 드 툴루즈에 봉헌했다.[12] 성 프란치스코에 봉헌 된 바르디 채플은 리돌포 데 바르디(Ridolfo de Bardi)에 의해 1310 년경에 세워졌으며, 그 해에 그의 아버지가 죽고 그에게 큰 유산과 바르디 회사를 맡겼다. 라우렌시오와 순교자들, 교황 실베스테르 1세와 고해 신부들에게 헌정된 다른 바르디 가의 채플들도 있었다.

피렌체의 바르디 가 궁정으로는 팔라초 부시니 바르디가 있다.

각주[편집]

출처[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