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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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풍자 잡지 《클라데라다취》의 1875년판에 실린 《베를린과 로마 사이》. 왼쪽 인물은 비스마르크이며, 오른쪽 인물은 교황이다.

문화투쟁(Kulturkampf, culture struggle)은 1871년에서 1878년에 걸쳐 프로이센로마 가톨릭교회의 역할과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프로이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주도 아래 계획된 독일의 정책이다.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가톨릭 신자들은 자체적으로 정당(독일 중앙당)을 만들어 대항했으며, 결국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반 가톨릭 정책을 철회하였다.

전개 과정[편집]

문화투쟁은 1871년 7월 8일 프로이센 문화성의 가톨릭과가 폐지되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 12일 제국의회는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에 대한 정부의 감독을 강화하고 국가 질서를 위해하는 성직자들의 언동도 금지시킨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872년에는 프로이센학교 관리법에 의한 교회의 교육활동 금지, 예수회법에 의한 전교활동의 규제 등의 법이 통과됐다. 1872년, 프로이센의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된 반가톨릭 성향의 국민자유당 소속 팔크(Adalbert Falk, 1827-1900)는 교회 관할로 있던 모든 학교 교육을 국가의 감독 하에 두어 성직자들의 학교 감독권을 박탈하였다. 4월 7일, 예수회 수도사들의 활동을 금지하는 법령이 발효되면서, 이들의 체류권도 제한받게 되었다. 여러 명의 주교들과 수백 명의 신부들이 감옥에 갇히고, 많은 신학교들은 폐쇄되었다.

5월법[편집]

1873년 비스마르크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국가에 귀속시키기 위한 5월법을 선포했다. 이법을 통해 프로이센내 가톨릭 성직자들의 교육과 임용은 모두 국가의 통제하에 이루어지게 되었고 병자의 간호를 직무로 하는 가톨릭 수녀들을 제외한 예수회등 모든 수도회 활동도 금지되었다. 그와 더불어 수도원들의 재산도 압수되었다. 예수회의 해산에 이어 종교재판소 사법권에 대한 규제도 행해져 교회의 제반 권리를 대폭 축소하는 억압정책이 이루어졌다. 이 5월법은 1878년 비스마르크가 교황청과 화해하면서 폐기됐다.[1]

가톨릭 교회의 반발[편집]

가톨릭 교회는 문화투쟁에 맞서 독일 중앙당(젠트룸Zentrumspartei : 훗날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을 도운 보수주의 가톨릭 정당)을 결성하고 불복종운동이나 반정부 출판활동 등을 전개하며 비스마르크의 가톨릭 탄압에 맞섰다.

뮌스터(Münster)와 파더본(Paderborn)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 교인들이 가톨릭 주교들을 자신들의 집에 숨겨주거나 그들의 도피를 도와주고, 제국 정부에 대한 반발로 가톨릭 행진과 순례 등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프랑스와의 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날(1870년)을 기념하는 제국의 “세당 기념일(Sedanstag, 10월2일)”은 등한시하고 교황 비오 9세가 교황으로 등극한 “비오 축일(Piusfest, 6월16일)”을 지키기도 했다. 문화투쟁 기간 동안에 라인란트(Rheinland) 지역 내 가톨릭 신문의 수가 30개에서 65개로 증가하였고 구독자도 약 7만 명에서 17만 명으로 늘어나는 등 가톨릭 언론매체가 급성장하였고, 가톨릭 박해 정책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가톨릭 단체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정부와 가톨릭과 화해[편집]

로마 가톨릭교회의 저항에 부딪힌 비스마르크1874년 총선서 가톨릭 정당인 독일 중앙당(젠트룸)이 약진하자 결국 백기를 들고 교황청과 화해를 모색했다. 1887년 일부 5월법을 완화하고 이 법을 발의한 프로이센의 교회문제 담당장관 겸 교육장관 팔크를 파면함으로써 로마 가톨릭교회와 독일 정부간 화해가 성립됐다.[2]

각주[편집]

  1. 박현숙《독일제국의 국가와 교회의 관계:비스마르크의 문화투쟁91871년 문화투쟁을 중심으로》(신학논단 69집)
  2. 박현숙《독일제국의 국가와 교회의 관계:비스마르크의 문화투쟁91871년 문화투쟁을 중심으로》(신학논단 69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