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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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文身, Tattoo)에 대해 설명한다.

개념[편집]

문신은 사람의 피부나 피하조직에 상처를 내고 색깔이 있는 잉크를 진피 속에 집어넣는 것으로 글자나 무늬 또는 그림을 새겨 넣는 것을 말한다. 동양에서의 타투는 먹을 사용한다고 해서 입묵(入墨)이라 불려졌고, 글자나 문양을 새겨 넣는다고해서 자문(刺文)이라 하였다.[1] 타투라는 용어는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의 항해(1768~1771)에 동행한 영국의 박물학자 조세프 뱅크스(Joseph Banks)가 1769년 타히티(Tahiti)의 탐험일기에 기록한 이후 영국과 여타 유럽의 사용권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이 말의 어원은 폴리네시아군도 파히티의 언어 중 ‘tatau’에서 유래된 것으로 ‘치다’라는 뜻이다. 아랍어의 ‘daqq’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tatau’와 ‘daqq’ 는 작은 방망이를 이용하여 그 도구를 때리는 기술을 뜻한다.

최근에는 스티커(Sticker)로 피부 표면에 붙이기도 한다. 이 스티커는 타투 모양과 유사하지만 손에 붙이는 것이라서 불법이 아니다. 잘못하면 알러지도 생길 수 있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보통 몸을 치장하는 목적으로 행해지나 가축에게는 도장을 찍어 상표나 확인용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운동 선수의 경우에는 기선 제압을 위해 문신을 하는 경우가 많다.

타투의 기원과 역사[2][편집]

일반적으로 최초의 타투는 우연에 의해 발생했을 것으로 추측되고있다. 가벼운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재와같은것이 묻은 손으로 상처를 문지르고 난뒤 남은 영구적 자국이 최초의 타투가 되지 않았을까 추정되고있다. 타투의 기원은 5천년 가량 된 냉동 상태의 남자사체 한 구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국경근처의 산에서 발견되면서 5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청동기시대인의 사체 중 가장 그 보존 상태가 좋은 이 냉동인간 몸에는 모두 57개의 타투가 새겨져 남아있었다.

피라미드를 건설했던 이집트의 제 3대, 4대 왕조는 크레타 섬, 스리스 페르시아 보다 먼저 국가로 발전해갔으며 많은 문명과 문화를 향유하였다. 그 중에 문신도 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초기 고고학자들은 타투를 수치스럽게 여긴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태도로 인해, 고대 이집트인들의 타투와 관련된 문서 기록이나 유물, 예술품 등을 사실상 외면해왔다. 그러나 기원전 2000년경의 고대 이집트 11왕조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미라와 세티 1세(재위 B.C1317~B.C1301)의 무덤에서 나온 인형들이 발굴되면서, 예술 형식으로서의 타투를 가늠할 수 있는 계기들이 생겨났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고대 이집트 타투의 흔적으로는 1891년 그리스 중부의 보이오타에 있던 테베에서 고고학자들에의해 한 여성의 미라가 소상(小像)들과 함께 발굴되었다. 이 미라는 11왕조 시키 테베의 여신 하토르(Hathor)를 모시는 여사제였던 아무네트(Amunet)의 미라였다. 이 미라의 몸은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팔과 넓적다리에 평행선의 무늬들이 있었고 배꽃 아래쪽에는 타원형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 타투들은 추상적인 기하학적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형식은 오직 여성들에게만 허용되던 것으로, 아무네트는 종교적 제의와 관련된 사람이었다. 아무네트와 함께 발견된 소상들의 배꼽 아래쪽에도 유사한 타투가 있었다. 이처럼 B.C 2000년경 이집트에서 출토된 미라에서 보여지는 타투의 풍습은 세계의 문신 관습을 전파하는데 공이 컸다.

1948년, 러시아와 중국 국경 북쪽으로 120마일 떨어진 곳에서는 러시아의 고고학자 세르게이 루덴코(Sergei Rudenko)에 의해 여러 개의 무덤, 즉 러시아어로 고분을 뜻하는 '쿠르간(Kurgan)’이 발견되었다. 이 무덤에서 발견된 미라들은 약 24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미라들에는 다양한 동물 형상의 타투가 남아 있었다. 그리핀이나 여러 괴물의 모습을 그린 타투는 마술적 힘을 의하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동물 타투의 경우는 순전히 장식적인 목적으로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 내의 타투 관습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297년에 편찬된 중국 왕조사에서 찾아볼수있다. 이 책에는 ‘일본 남자들은 늙으나 젊으나 모두 얼굴에 타투를 하고, 몸에는 문양들이 장식되어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7세기가되자 일본 통치자들이 중국의 문화 관습을 따르게 되면서 타투도 덩달아 냉대를 받게 되었다. 17세기 초가 되자 타투는 범죄자와 부랑아를 나타내는 표시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18세기에는 당시 도쿄의 명칭이었던 에도의 대중문화와 관련된 그림타투가 유행했다. 18세기 중반에 중국소설 『수호지』가 일본어로 번역되면서 타투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이는 소설 속의 영웅들 대부분이 타투를 했기때문이다. 여러 다양한 화가들이 소설 속의 타투를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수호지』의 일본판 그림책을 만들어냈고 타투이스트들은 그러한 문양들을 복제하여 시술함으로써 타투가 급속히 발전해갔다.

태평양 지역의 문화권에서 타투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있다. 폴리네시아의 타투는 고대 사회의 문신 행위 중 가장 복잡하고 정교한 기술이다. 폴리네시아인들은 영적 능력이나 생명력이 타투를 통해 보여질수있다고 믿었다.

오랫동안 사모아 섬에서 행해진 손으로 타투를 새기는 전통, 일명 ‘타타우(tatau)’는 추장이나 그 보좌역처럼 지명도 있는 가문에서 출생 순서에 맞게 전해지는 신분과 직위를 의미하였다. 젊은 추장이 사춘기에 들어거세되면 행해지는 이러한 타투 의식은 큰 행사였으며, 그가 지도자의 위치에서 지배권을 획득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 타투들은 문화적 전통에 대한 헌신과 인내력을 영원히 찬미하기 위해 새겨졌다. 사모아 섬에 첫발을 들인 유럽인들은 1787년의 프랑스 원정 대원들이었는데, 원주민들을 가까이에서 본 그들은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이곳 사람들은 허벅지에 그림을 그리거나 타투를 새겼다. 이들은 거의 벌거벗고 지내지만, 그 모습은 마치 옷을 입은 것처럼 생각될 정도이다.’

교차 문화로서의 특성을 지닌 타타우의 역사와 사모아 섬의 타투 픙습이 지닌 신화적 기원은 뉴질랜의 이민자 사회에까지 전달되었으며, 이후에는 오클랜드부터 네덜란드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전 세계의 하위문화들로 퍼지게 되었다. 하와이의 원주민들에게도 전통적인 타투 에술이 존재하는데, 이를 ‘카카우(Kakau)’라 한다. 이는 장식이나 신분을 구별하는 의미뿐만아니라 신체적 건강과 영적 행복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도 행해졌다. 남자들은 갈대가 꼬인 모습이나 다른 자연 형상의 모습을 본뜬 복잡한 무늬들로 팔 과 다리 몸통과 얼굴을 장식하였고 여성들은 보통 손이나 손가락 손목에 타투를 새겼으며 가끔은 혀에 새기는 경우도 있었다. 역사상 대다수의 기독교회가 문신 행위를 금지했던 바, 이 지역들 역시 서구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타투라는 독특한 예술 형식이 쇠퇴를 맞이했다.

검은 피부로 인해 색깔이 있는 타투를 하는 것이 어려웠던 아프리카에서는 다른 타투 기술을 개발해 왔는데 몸에 상처를 내는 난절법이다. 이는 피부를 약간 드러내 칼 등의 날카로운 도구로 베어낸 후 특수한 모래나 재로 문지름으로써 커진 상처가 몸 위에서 일정한 무늬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점자처럼 보이기도하는 이러한 무늬들은 지역의 전통을 따르는 경우도 많았다.

한국에서의 타투[3][편집]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타투가 신분을 구별하고 범죄자를 표시하기위해 사용되어왔다. 그 예중 하나가 고려 및 조선시대에 도둑과 노비에게 가해진 형벌이었던 자자(刺字)이다. 특히 조선시대때의 타투는 여러 범죄 유형 중 주로 절도죄를 범한 자를 대상으로 폭넓게 시행되었다. 신체의 손상을 가장 큰 불효요, 수치로 여겼던 사회적 관념하에서, 살갗에 상처를 내고 글자를 새기는 타투는 가장 부끄러운 모욕으로 받아들여졌기때문이다. 조선시대 타투 운영 실태를 보면 태종이전에는 시행되지 않았고, 태종 이후에도 한 차례만 시행되었을 뿐 대부분의 경우에는 면책되기도 하였다. 자자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한 것은 절도범이 자주 창궐한 세종때였다. 세종 25년 양쪽 뺨에 글자를 새기는 경면(黥面)이 실시되었으나, 이듬해 세종 스스로가 너무 잔혹하다고 판단하여 경면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절도가 증가하자 세조(1455~1468) 11년 경면의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었다. 자자형에 사용된 글자도 다양하다. 훔친 물건의 종류와 소재지, 사람의 상해여부에 따라 다양하게 새겨졌는데 일반 절도자들에게는 ‘절도(竊盜)’ 두자를 새겼고, 소나 말을 도적질한 자에게는 ‘도우(盜牛)’ ‘도마(盜馬)’를 자자하였다. 성종이후부터는 경면형이 주류를 이루었고, 연산군때는 도망친 노비가 증가함에따라 도망친 노비를 잡아 남자는 왼쪽 뺨에 ‘도노(盜奴)’를 여자는 오른쪽 뺨에 ‘도비(盜婢)’를 자자하도록 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타투를 금기시하는 경향은 역사적으로 중국, 일본과 같은 주변 국가들의 영향과 유교사회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수있다.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윤리교과서 역할을 해온 효경(孝經)에서의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니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라는 말처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은 털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함부로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 효도의 첫걸음이라는 관념이 남아있었다. 따라서 자신의 몸에 변형을 주는 것을 불경한 태도로 인식하여 이를 금기시했다. 한국에서 현대 타투는 1930년대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점상 타투에서 시작되었다. 점상타투란 팔의 안쪽으로 직경 2~6밀리미터의 크고 작은 점 같은 형태로 살에 먹을 칠한 바늘을 꿰어 피부를 통과시켜 만든 것이다. 이는 함부로 바깥출입을 할수없고, 조기 결혼이나 일부종사를 강요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동변상련의 여성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타투의 형태라고 할수있다. 이후 국내에 미용타투가 도입된 것은 1970년대 말경 중국과 대만을 통해 아무런 체계없이 비위생적으로 시술되기 시작했다. 당시 보사부에서는 미용타투 시술을 못하게 하는 방안으로 이를 의료법에 귀속시켜 버렸다.하지만 현재 타투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위생적으로 시술이 행해지고있다. 현재 많은 대중스타들에게서 타투가 등장하였고,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예술행위이자 문화로 자리잡으면서 타투에 대해서 부정적이던 시각이 긍정적으로 전환되고있다.

타투 스타일[4][편집]

블랙앤그레이

블랙앤그레이는 검정색 잉크만 사용하여 다양한 음영으로 그림을 표현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바늘 하나만 이용하여 시술이 진행된다. 이 타투 스타일은 1970년대와 1980년대 교도소에서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며 그 후에 대중화되었다.

보디슈트

보디슈트는 다른 타투에 비해 광범위한 타투스타일로, 일반적으로 유사한 패턴이나 스타일로 몸 전체를 덮는것이 특징이다.

보르네오타투 스타일

보르네오 고대 부족들 중 일부에 의해 개발된 타투스타일이다. 두개의 막대를 사용하여 작업이 진행된다. 전통적인 보르네오 타투는 주로 잎, 동물, 과일, 나무와 같은 자연에 초점을 두고 디자인을 정한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보르네오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전통적인 문신이 중단되었지만, 최근 젊음 사람들이 보르네오 디자인에 관심을 보이고있다.

올드스쿨

올드스쿨은 전통적인 미국타투스타일로 당시 기술력의 한계로 제한된 색상과 기법을 사용하고 테두리를 검정색으로 굵게 그리는 것이 특징이다. 색상은 일반적으로 노란색, 빨간색, 초록색, 검정색으로 제한되었었다.

뉴스쿨

올드스쿨에서 파생된 타투 스타일로 올드스쿨과 비슷하게 테두리는 검정색으로 굵게 그리지만 타투 기술의 발달로 올드스쿨보다는 좀더 다양한 색상들을 사용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좀더 과장하여 표현한다.

슬리브타투

크고 작은 문신들로 팔 전체를 덮는 스타일이다. 단순히 여러가지의 스타일의 타투로 팔을 덮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된 테마를 가지고 팔 전체를 덮는 것이 특징이다.

세일러타투

선원들에게 인기있었던 타투 스타일이다. 작업방식은 올드스쿨과 비슷하지만 세일러타투는 가슴 양쪽에 제비, 가슴쪽에는 항해선을, 팔에는 불가사리 등을 그리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은 선원이아닌 젊은 사람들사이에서도 인기있는 문신이다.

리얼리티타투

실사를 도안으로 사용한다. 세밀하고 높은 수준의 디테일을 필요로한다.

이레즈미타투

‘이레루(いれる)’와 ‘스미(すみ)’ 를 합친 단어로 ‘이레루’는 넣는다, ‘스미’는 먹물을 뜻한다. 일본의 민담이나 전설에 기초하여 귀신과 신선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나 짐승 또는 자연을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레즈미타투는 일본 야쿠자를 상징하는 징표로 많이 사용되어 일명 야쿠자타투라고도 불린다.

레터링타투

그림을 그리는 것이아닌 글씨를 써넣는 스타일이다.

치카노타투

치카노는 멕시코계 미국 시민을 부르는 말로, 남성은 치카노(Chicano Xicano), 여성은 치카나(Chicana or Xicana)라고 한다. 1920년대와 1930년에 멕시코인들의 미국 이민 초창기에는 주로 멕시코인들을 비하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말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멕시코계인들의 권리를 주장한 ‘치카노운동(The Chicano Movement or Chicano Cilvil Rights Movemont)’을 통해서이다.[5] 비폭력주의였던 치카노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치카노 벽화도 탄생했다. 주로 해골이나 광대, 돈 술, 여성 등 인간의 타락과 희로애락을 담은 치카노 벽화는 타투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치카노타투 디자인에서도 주로 여자나 십자가, 자동차, 돈과 명예들이 함축된 표현이 많이 나타나고있다. 디자인을 대부분 블랙앤그레이로 표현한다.

커버업타투

커버업타투는 흉터나 점 또는 기존의 있던 타투 등을 가리기위해 그 위에 타투를 덮거나 흉터모양에 따라 여러 디자인을 내어 커버하는 타투이다.

타투 부작용[편집]

문신은 피부에 상처를 내고 물감을 넣어 글씨나 그림을 새기는 것이기 때문에 감염 및 알레르기 반응을 비롯한 건강상의 위험이 동반될수있다. 타투이스트는 일회용 도구를 사용하여 작업을 하거나 사용 후에 장비를 멸균하는 등 위생관리를 철저히하여 감염 위험을 줄이려 하고있다. 하지만 위생관리가 되지 않은 타투 도구로 작업을 받을경우 포진, 파상풍, 곰팡이 등의 질병을 유발할수있다. 면역에 의해서도 부작용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타투 잉크가 면역에 맞지 않는 사람의 경우 시술을 받고 난 뒤에 시술부위에 트러블이 생기기도한다. 또한 타투는 상처를 내야하는 시술이기 때문에 시술받고 나면 상처가 벌어진다. 그 사이로 세균이 침투하여 감염될수있다. 시술을 받은뒤에 상처관리를 소홀히 해도 염증, 감염등을 유발할수있기 때문에 시술받은 후 관리를 잘해야한다.

타투 관리법[편집]

타투관리법은 타투작업 직후부터 피부가 아물어서 타투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기간동안 타투에 손상이 가지않고 아물게 하기위해 하는 행동이다.타투아티스트의 실력, 작업스타일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큰 틀에서 올바른 타투관리법은 작업 후 바세린을 발라서 붓기를 최소화 시킨다.보통 삼십분에서 한시간 정도면 열감이나 쓰라림은 사라지고 바로 일상생활에 무리가 없다.타투 작업 부위는 항상 청결하게 유지해야하며 촉촉한 상태를 유지시킨다.비판텐이나 바세린을 보통 많이 사용하며 샤워는 가능하지만 물에 장시간 불리는것은 안된다.보통 타투가 아무는데에는 일주일 가량 걸리며 관리를 소홀히 할 경우 치유되는 기간이 길어지거나 작품에 손상이 갈 수 있다.

문신과 일탈[편집]

과거 대한민국에서는 문신을 한 사람을 삼청교육대에 보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일부 문화권에서는 문신이 일탈로써 여겨진다.

문신은 신체손상에 해당되어 병역법 제86조 위반이 된다[6]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지식백과;문신[1]
  2. 타투의 기원과 역사[2]
  3. 타투의 기원과 역사[3]
  4. tattoo[4]
  5. 지식백과;치카노[5]
  6. 2003도8247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