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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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麻北洞 Mabuk-dong
Giheunggu-map.png
면적 5.39 km2
인구 31,468명 (2015년 2월 28일)
인구밀도 5,838 명/km2
세대 11,155가구 (2015년 2월 28일)
법정동 마북동
32
295
동주민센터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교동로118번길 16
홈페이지 마북동주민센터

마북동(麻北洞)은 용인시 기흥구에 위치한 이다. 행정동법정동이 일치하며 32개 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용인군 읍내면 지역이었으나 언남리와 함께 용인읍내에 속하게 되므로 '용인읍내' 혹은 '읍내'라 불렀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마곡리와 북동을 합쳐 마북리가 되었다.

1931년에는 용인의 옛 이름을 따라 구성면이라 개칭하였으며, 1996년 3월 1일 용인군용인시로 승격, 2000년 9월 1일 구성면구성읍으로 승격되고, 2005년 10월 31일 기흥읍구성읍이 통합되면서 기흥구로 승격, 구성읍이 4개 으로 분리되면서 생겨났다. 옛날 상마곡 마을에 마운사(麻雲寺)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그 사찰의 중이 마의를 입고 다녔으며, 면 소재지의 '북쪽에 있는 동네'라는 뜻의 '마북리'라고 하였다가 2005년 '리(里)'가 '동(洞)'으로 바뀌었다. 기흥구 북부에 위치한다.

연혁[편집]

위치[편집]

기흥구의 북서부에 위치하며 법화산 자락의 응달길 고개에서 발원하는 마북천단국대학교 운동장과 체육관을 끼고 내려와 하늘마을에서 보정동으로 흘러 남쪽의 탄천으로 흘러든다. 탄천 주위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상마곡 주변에 기업의 연구소가 들어서 있다.

인구[편집]

마북동 성별 연령별 인구 구조[1]

인구구성[편집]

마북동의 인구는 32,533명(2019년 2월 28일 기준, 내국인)으로 용인시 전체 인구의 3.1%를 차지한다. 남자는 15,942명, 여자는 16,591명이다. 외국인은 117명이다. 마북동의 인구 비율은 농촌 지역의 특성이 나타나서 유소년 (15세 미만) 인구 비율은 14.00%로 용인시 전체 16.1%보다 낮으며 노년(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16.70%로 용인시 전체 12.2%보다 높다.[2]

산업별 종사자 현황[편집]

2015년 현재 마북동의 산업 총종사자 수는 9,993명이다. 전문 과학및 기술 서비스업 수가 5,874명으로 가장 비중이 높다. 마북동에는 KCC 중앙연구소와 현대자동차 기술연구소 등 기업의 연구소가 많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교육 서비스업 종사자가 931명, 도매및 소매업는 686명, 숙박 및 음식점업는 644명, 보건업 및 사회복지서비스업는 419명으로 비중이 높다.[3]

유명 문화재[편집]

문화재로는 마북동 석불입상(시지정 향토유적 제52호)과 석탑, 연안부부인전씨(延安府夫人田氏, 조선 성종의 장모이자 중종의 외조모)의 묘소, 1905년, 을사늑약[4] 의 체결을 개탄하여 〈대한 이천만 동포에게 남기는 글〉을 국민들에게 남기고 자결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의 묘소(도지정 기념물 제 18 호) 등이 있는데 민영환의 묘소는 본래 수지구 풍덕천1동 토월마을에 봉분없이 평장되었던 것을 1942년에 후손들이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묘소의 신도비에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친필 제자(題字)와 그가 자결하였을 때 남긴 유서(遺書)도 함께 새겨 놓았다.[5]

화가 장욱진이 살았던 장욱진 가옥(등록문화재 제404호)이 마북동에 있다.

그외의 문화재[편집]

마북동에 있는 법화산 등산길

법화산 자락으로 감싸안은 듯한 마북동의 하늘말(마을)에는 마북동의 고분군으로 알려진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고분과 보정동 요지라는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현재는 단국대학교의 소유부지로 되어 있지만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후기에 조성되었던 고분과 요지로 알려져 있다.

단국대학교 한국민족학연구소가 1996년 5월 27일부터 6월 25일까지 발굴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고분군은 통일신라고려시대 후기로 추정되는 '마북동의 고분군1'과 고려시대 중기로 추정되는 '마북동의 고분군2'로 구분되는데 '마북동의 고분군1'(마북동 2-2번지) 유적석곽묘 7기와 토광묘 2기가 출토되었다.

통일신라 고분은 1·2호 석곽묘였고, 고려 후기시대의 고분은 3~7호 석곽묘와 8·9호 토광묘였다.

'마북동고분군2'(마북동 산46-1번지) 유적은 지표 조사 과정에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완형(完形)의 녹청자반구병(綠靑磁盤口甁) 1점이 수습되면서 발굴되었다. 발굴조사는 경기도박물관에 의하여 1997년 11월 28일부터 12월 30일까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고려시대 석곽묘 4기와 토광묘 4기의 고분과 고려청자를 비롯해 동경(銅鏡) 등의 유물이 다수 확인되었다. (참고로 단국대학교의 정문 앞의 '죽전동 요지(竹田洞 窯址)'와 함께 기숙사가 있는 후문쪽 신축건물 뒤편에서 약 200여m 떨어진 곳에 고려시대의 청자 가마 터로 추정되는 '보정동 요지(寶亭洞 窯址)'가 위치한다. 남쪽에 탄천의 지류가 되고 있는 옥정천이 흐르고, 주변은 택지로 개발되고 있는 상태이다. '보정동요지2'는 단국대학교 신축건물 뒤편에서 약 300m 떨어진 곳의 구릉과 밭에 걸쳐 위치하며 '보정동요지1'과 100여m 떨어져 있다. 지번은 임681일대로 죽전택지개발지구 12지점에 포함되어 있다. 일부 향토문화대전 내용 참조)

또한 이곳에는 윤호의 부인이자 성종의 장모로 후에 중종의 외할머니가 되었던 연안부부인(延安府夫人) 전씨(田氏)를 모신 사당으로 현조사(顯祖祠)가 있다. 현조사는 윤씨의 종가에서 받들어온 사묘(四廟)이다.

묘소가 있는 입구쪽에는 [大小人皆下馬]라고 쓴 하마비(下馬碑)가 있는데 산 아래로 내려오다보면 현조사(顯祖祠)가 나온다. 현조사는 부부인 전씨의 위패를 모신 사묘(四廟)형태의 가묘(家廟)로, 정면 3칸 측면 1칸에 퇴마루를 달았다.

영원부원군 윤호가 신창현감으로 있을 때 부인 전씨가 낳은 딸이 후에 성종의 계비가 된 정현왕후이다. 성종의 비는 본래 칠삭둥이 한명회의 딸이었으나 19살 때 요절하였고,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숙의가 계비가 되었으나 “음험하고 패악하다”는 이유로 폐위, 사사되었다. 그 후 윤호의 딸이 계비가 되어 전씨는 부부인의 작위를 받았다.

교육 시설[편집]

각주[편집]

  1. 마북동 연령별 인구, 용인시 통계바다
  2. 용인시 월별통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용인시청
  3. 2015년 용인시 통계연보 용인시청 통계바다
  4. 우리가 을사조약을 을사늑약이라고 하는 이유는 강제로 맺은 조약이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박탈한 1904년 8월 제1차 한·일 협약(한일협정서)을 맺고는 1905년 11월 일제는 을사늑약(乙巳勒約, 제2차 한일 협약(일본어, 第二次日韓協約), 을사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을사조약, 을사오조약, 을사보호조약이라 부른다)을 맺었다.
  5. “제국의 황혼 '100년 전 우리는' (223) 민영환 자결 후 솟은 血竹”. 조선일보사. 2010년 7월 27일. 2010년 9월 19일에 확인함.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