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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스라투르 전투와 그라블로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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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스라투르 전투와 그라블로트 전투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일부

1886년 피에르-조지스 지니오트가 그린 마르스라투르 전투
날짜1870년 8월 16일8월 18일
장소
결과 프로이센의 승리
교전국
프랑스 제국 프로이센
지휘관
프랑수아 아쉴 바젠
마크 마옹
헬무트 폰 몰트케
콘스탄틴 폰 알펜슬레벤
병력
바젠 휘하의 프랑스군 13만 명 알펜슬레벤 휘하의 3만 명의 기마대
피해 규모
1만 6000명 사상(마르스라투르 전투)
1만 3000명 사상(그라블로트 전투)
총 2만 9000명 사상
1만 6000명 사상(마르스라투르 전투)
2만 명 사상(그라블로트 전투)
총 3만 6000명 사상

마르스라투르 전투와 그라블로트 전투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프랑스프로이센이 전투를 벌여 프로이센이 승리한 전투로 프로이센은 프랑스군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프랑스군을 함정에 빠뜨려 스당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성공했다.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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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위계승 문제와 1870년 7월 7일 엠스 전보 사건으로 1870년 7월 14일프랑스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일어났다. 프로이센은 남독일 국가들을 이끌고 프랑스를 침공했고 프로이센군은 4주 만에 라인 지방에 있던 프랑수아 아쉴 바젠 장군의 프랑스군 13만 명을 메츠 요새에 가두어 놓았다.

마르스라투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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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의 2개 부대를 돌파하지 못한 채 라인 지방의 메츠 요새에 갇혀있던 바젠 장군의 13만 명의 프랑스군은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크 마옹 장군이 바젠을 구하여 구원군을 이끌고 갔으나 오히려 스당 전투에서 패배했다.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에게 패하자 당황해 라인 주둔군이 베르됭으로 후퇴하자 8월 12일 바젠 장군에게 라인군 지휘권을 맡겼다. 그러나 8월 16일 마르스라투르 동쪽의 비옹빌 근처에서 프로이센콘스탄틴 폰 알펜슬레벤 장군이 이끄는 제3군단 3만 명에게 차단당했고 알펜슬레벤 장군은 프랑스군의 1/4 밖에 되지 않는 병력으로도 비옹빌을 점령했다. 이후에 벌어진 마르스라투르 전투는 서유럽 최후의 대규모 기마전 전투로 양측은 각각 1만 6000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그라블로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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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7일 바젠 장군은 메츠 서쪽에서 몇 km 떨어진 성곽 마을 생프리바라몽타뉴그라블로트 사이 남북으로 가로 놓은 언덕까지 군대를 철수시켰다. 프랑스군은 퇴각로인 서쪽을 보고 포진하게 되어 8월 18일 아침까지도 프로이센군은 마르스라투르에서 메츠로 가는 길과 평행하게 배치되어 있어 프랑스군이 자기들의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프랑스군의 배치상태를 안 프로이센군은 방향을 동쪽으로 90도 전환했고 몰트케 장군은 자기의 부대를 정면배치했다. 그러나 바젠의 작전은 안전제일주의였기 때문에 몰트케는 처음 무승부가 될 것 같은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생프라바 주변의 프랑스군은 매복해 있던 프로이센군을 하나하나 찾아내 타격을 주고 밤에 메츠로 후퇴했고 깊은 계곡과 미리 준비해둔 참호 뒤에 포진해 있던 프랑스 남쪽에서 공격해오는 프로이센군을 쳐부수었다. 하지만 바젠은 베르됭으로 가는 길을 뚫기 위해 반격을 하지 않고 밤에 메츠로 철수했다. 그라블로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1만 3000명의 사상자와 프로이센군은 2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프로이센군의 사상자가 더 많았으나 프랑스군을 함정에 빠뜨리는 데에 성공해 9월 1일 스당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