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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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e: Ruins of the Forum, Looking towards the Capitol (1742년 카날레토작)

로마의 역사 문서는 로마시와 더불어 고대 로마의 문명 역사를 포함한다. 로마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특히 로마 가톨릭교회의 역사에서 그러하며, 로마법은 현대 법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로마의 역사는 다음의 시기들로 구분된다.

  • 로마의 초창기 거주민들과 로물루스의 로마 건국 신화를 포함하는 역사 이전 및 초기 로마 시기
  • 에트루리아 지배기왕정 시기로, 전승에 따르면 로물루스가 일곱 왕 중 최초의 왕이라 한다
  • 왕들이 선출된 원로원 의원들로 대체된 기원전 509년에 시작된 로마 공화정. 이 시기는 로마 영토의 방대한 확대가 특징이었다. 기원전 5세기 기간, 로마는 라티움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기원전 264년부터 146년까지의 포에니 전쟁으로, 고대 로마는 패권국이던 카르타고를 무너트리고, 서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 로마 제국은 공화정 이후에 생겼는데, 공화정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대두, 내전기 종료 후 행해진 모든 조치들, 기원전 27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상대로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약화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로마의 힘은 쇠하였고, 마침내 서기 8세기까지 로마 공국으로서 동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 시기에, 로마는 5-6세기에 수 차례 약탈당하며, 이전 크기의 일부분으로 줄어들었고, 심지어는 일시적으로 인구가 완전히 감소하였다.[1]
  • 중세 로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절연과 교황령의 성립으로 특징지어진다. 교황령은 신생국인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암흑 시대’ 동안, 로마의 인구는 30,000명만큼이나 인구 수가 적을 정도로 떨어졌다. 동서교회의 분열서임권 투쟁의 제한적 성공 이후, 교황령은 중세 성기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지만, 아비뇽 유수서방교회 대분열로, 로마시는 중요성이 줄어들었고, 인구도 20,000명 아래로 떨어졌다. 중세 동안 로마의 완전한 중요성 상실이라는 쇠퇴는, 건설 활동의 부족성과 연관되어, 당시 일부 건축물들은 버려지고 또는 일부는 계속 사용되던 도시 중심부에 있던 상당히 중요한 고대 로마 유적들을 보존시켜주었다.
  • 로마 르네상스는 로마가 피렌체의 미술 및 문화적 영향력의 중심지 역할을 대체해던 15세기에 발생하였다. 로마 르네상스는 1527년에 일어난 도시의 파괴로 급작스럽게 중단되었지만, 교황령은 반종교개혁 열풍 속에서 재기하였고, 근세 기간 번영을 계속했다. 로마는 나폴레옹에게 합병되어 1798년부터 1814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일부로 있었다.
  • 19세기부터 현재까지의 현대사. 로마는 연합군의 이탈리아 침공 이후 포위되었고 수차례 폭격을 받았다. 1943년 8월 14일에 비무장 도시로 선포되었다. 로마는 이탈리아 공화국(1946년 설립)의 수도가 되었다. 440만 명의 인구로(2015년 기준; 도시 경계 안에 290만 명 포함), 이탈리아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이다. 로마는 유럽 연합에서 가장 큰 도시권이며 국제도시로 구분된다.

고대 로마[편집]

고대 문명으로서 로마의 역사에 관한 추가 정보에 대해선, 고대 로마 참조.

로마 타임라인
로마 왕정과 공화정
기원전 753 년 전승에 따르면,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했다고 한다.
기원전 753–509 년 로마 일곱 왕들의 통치기.
기원전 509년 공화정 성립
기원전 390 년 갈리아인들이 로마를 침입. 로마가 약탈됨.
기원전 264–146 년 포에니 전쟁.
기원전 146–44 년 동맹시 전쟁 및 내전기. 마리우스,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등의 부상.
기원전 44 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됨.

초창기 역사[편집]

로마 지역에 인간 거주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는 최소 5,000년 이전에 존재하지만, 훨씬 최근 시기의 표적물 밀집층이 구석기 및 신석기 구역을 알아보게 힘들게 하고 있다.[2] 로마의 오랜 옛날 설립을 나타내는 이러한 증거물들은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관련한 로마의 시초에 관한 전설로 인해 불확실하기도 한다.

로마 건국의 전통적 시기는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에 따르면, 기원전 753-04-21 년이며,[3] 로마와 그 주변 라티움 지역에는 그 이래로 거의 공백기 없이 인간이 거주해왔다. 2014년에 이뤄진 발굴에서 로마의 공식적 건립 연도 이전에 세워진 성벽이 발견되었다.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9세와 8세기 시작 시점으로 추정되는 돌벽과 도자기 조각들을 발견했으며, 기원전 10세기만큼 이른 시기에 팔라티노 언덕에 도달한 인간의 흔적이 존재하였다.[4][5]

산토모보노 유적지는 상고 시기 말 로마의 국가 형성, 기념물 형성, 도시화 등과 관련한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산토모보노 신전은 기원전 7-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로마에 남아있는 신전 중 가장 오래된 신전으로 알려져 있다.[6]

로마 기원 전설[편집]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게 젖을 물리는 카피톨리노 늑대.

로마의 이름에 관한 기원은 로마의 유명한 시조이자 초대 통치자인 전설상의 로물루스의 이름으로 여겨진다.[7] 전쟁 신 마르스의 아들들이자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이아스의 후손들인 로물루스와 그의 쌍둥이 형제 레무스는 버려진 뒤 암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고, 그 뒤에 도시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형제는 말다툼을 하고,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살해한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따 도시에 이름을 붙인다. 로마를 세우고 이름을 붙인 뒤, 그는 구분없이 노예와 자유민 들을 비롯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시민들로 받아들인다.[8] 시민들에게 아내를 제공하기 위해, 로물루스는 인근 부족들을 로마에서 열리는 축제에 초대하여 이 부족들의 젊은 여성들을 납치하였다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로 알려짐). 이 결과로 이어진 사비니족들과 전쟁 이후, 로물루스는 사비니족 왕 티투스 타이투스와 왕위를 공유하였다.[9] 고물루스는 왕의 자문회로서 원로원를 만들기 위해 가장 고귀한 인물들 100명을 선정했다. 그가 파트레스(patres)라고 부르던 이들과, 이들의 후손들은 파트리키 계층이 되었다. 로물루스는 람네스(Ramnes, 로마인을 의미), 티티에스(Tities, 타이투스 왕의 이름에서 땀), 루케레스(Luceres, 에트루리아인) 등 세 개의 켄투리아로 된 기사 계층을 만들었다. 그는 또한 민중을 세 개 쿠리아로 나누었고, 로물루스와 타이투스 간의 전쟁을 종전시키는 걸 중재했던 사비니 여인들 30명의 이름을 따 붙였다. 쿠리아들은 쿠리아 민회의 투표단을 구성하였다.[10]

로마라는 이름에 대한 언어적 뿌리를 찾기 위한 시도들이 이뤄졌다. 용기, 용맹스러움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 ‘로메’(Ῥώμη)의 변형이라는 가능성이 있으며[11] 아마 이 연관성은 어원이 같은 이름을 지닌 쌍둥이 형제를 받아들여 젖을 먹이며 키운 늑대에 대한 이론상 언급과 더불어 ‘젖꼭지’를 뜻하는 어근 ‘룸-‘(*rum-)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로마의 에트루리아어 명칭은 루마(Ruma)인 것으로 보인다.[12] 테베레강의 과거 명칭인 ‘루몬’(Rumon)과도 비교가 된다. 루몬의 어원적 기원은 대부분의 에트루리아어 단어들이 그러듯이 알려져 있지 않다. 토머스 G. 터커의 “Concise Etymological Dictionary of Latin” (1931)에선 이 이름이 *urobsma (예시: urbs, robur)에서 왔을 것이라 가장 유력하게 보았고 그 밖에, 언덕을 뜻하는 *urosma (예시: 산스크리트어 varsman- "고지, 돌출부," 고대 슬라브어 врьхъ "꼭대기, 정상", 러시아어 верх "꼭대기; 위쪽", 리투아니어어 virsus "상부")는 “가능성이 적다”라고 하였다.

도시 형성[편집]

테베레강 남쪽 티레니아해에서 대략 30km 거리에 있는 팔라티노 언덕주변 언덕들에 형성된 목가 취락에서 발전하였다. 퀴리날레 언덕은 또다른 이탈리아어파 화자 민족인 사비니인들의 전진기지였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테베레강은 Z 모양의 곡선을 형성했고 이 곡선 중에 이 있었는데, 이 이점에서 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었다. 이 강과 여울 때문에, 로마는 테베레강 유역으로 이어지는 교통 및 이탈리아반도 서부 지역의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상인들의 교차지점이었다.

고고학 발견물들이 향후 로마에 해당하는 지역에 인근 숲지대에서 거주하던 루케레스족(Lceres)의 지원을 받던 팔라티노 언덕에 루미(Rumi), 퀴라날레 언덕에 티티엔테스(Titientes) 등 기원전 8세기 당시의 요새화 된 취락 두 곳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13] 이 취락들은 기원전 1천년경 이탈리아 평원인 라티움에 존재했던 여러 이탈리아어파족 지역공동체 중 세 곳에 불과했다. 이탈리아족의 기원은 선사시대이며 따라서 정확시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이들의 인도유럽어는 기원전 2천년기 중반 때 동쪽에서 전래하였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여러 로마 역사가들 (포르키우스 카토와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포함)은 자신들의 정보가 그리스 신화상의 설명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로마인 (아보리기네스족의 후손들)의 기원을 그리스인이라 여겼다고 하였다.[14] 특히나 사비니인들은 기습 공격으로 리스타(Lista)라는 도시를 점령했다고 하는 디오니시오스의 기술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 리스타는 아보리기네스족의 모도시라고 여겨졌다.[15]

이탈리아족 상황[편집]

에트루리아 문명의 유적지인 기원전 4세기의 프랑수아 무덤

로마 지역의 이탈리아어 구사 민족들에는 라틴족 (서쪽), 사비니족 (테베레강 상류쪽), 움브리아족 (북동쪽), 삼니움족 (남쪽), 오스키족 외 여러 민족 등이 있었다. 기원전 8세기에, 이들 민족들은 북쪽의 에트루리아인과 남쪽의 그리스인 등 그 외의 주요 민족 집단들과 이탈리아반도를 공유하였다

에트루리아인 [라틴어로 에트루스키(Etrusci) 혹은 투스키(Tusci)]들은 그 흔적이 에트루리아 지역(오늘날 라치오 북부, 토스카나, 움브리아 일부 지역)에 속했던 로마 북쪽에서 확인되었다. 이들은 타르퀴니아, 베이, 볼테라 등의 도시들을 세웠고 전설상의 로마 왕들 일부가 에트루리아 기원을 갖고 있는 것에서 분명히 나타나듯이 로마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역사가들은 에트루리아의 문학 자료, 종교 및 철학 문헌들이 없으며 따라서, 에트루리아 문명에 관하여 알려진 대부분의 것들은 부장품과 무덤에서 발견된 것들에서 비롯한 것이다.[16] 에트루리아인들의 생활 방식은 이따금씩 혼란을 일으키고는 했다. 라틴어처럼, 에트루리아어는 어형 변화가 생기고 그리스화 되어 갔다. 인도유럽인들처럼, 에트루리아인들은 부계 중심이자 가부장제이었다. 이탈리아족들처럼, 호전적이었다. 검투사 경기는 실제로도 에트루리아의 장례 풍습에서 발생한 것이었다.[17][18]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750년과 550년 사이 이탈리아 남부와 더불어 시칠리아섬 동부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지역에 쿠마에, 나폴리, 레조칼라브리아, 크로토네, 시바리스, 타란토 등 여러 식민지들을 세웠다(이탈리아 남부는 후에 로마인들에게 마그나 그라이키아라 불렸다).[19][20]

에트루리아 지배기[편집]

세르비아누스 성벽은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이름에서 이름이 붙여졌으며 로마의 진정한 의미의 첫 성벽이다

기원전 650 년 이후, 에트루리아인들은 이탈리아 내 패권 세력이 되었고 이탈리아 북중부로 세력을 넓혔다. 로마 전승에 따르면 로마는 형제인 레무스와 같이 도시 로마를 세웠다고 전해지는, 전설상의 로물루스를 시작으로 기원전 753년부터 509년까지 일곱 왕의 지배에 있었다고 한다. 일곱 왕 중에 마지막 세 왕들, 즉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등이 (최소한 부분적으로) 에트루리아인이라고 한다 (프리스쿠스는 고대 문헌에서 그리스인 망명자와 에트루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한다.) 이들의 이름은 에트루리아 마을 타르퀴니아를 나타내기도 한다.

리비우스, 플루타르코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 그 외 사람들은. 로마가 초기 몇 세기간 일곱 왕들의 지배를 받았다고 하였다. 바로가 집대성한 로마의 전통 연대기는 이들의 집권 기간을 평균 대략 35년인 243 년으로 책정하였는데, 이 기간은 바르톨트 게오르크 니부어의 저서 이래로 현대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갈리아인들은 기원전 390년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387/6년이라고 한다) 알리아 전투 이후 도시를 약탈할 때 로마의 옛 문헌들의 대다수를 파괴하였고 남은 것들은 시간이 흘러 소실되거나 약탈되어 사라졌다. 로마 왕국에 관한 동시대 기록이 존재하지 않기에, 일곱 왕들에 관한 모든 내용들은 신중히 따져봐야만 한다.[22] 마지막으로 언급된 왕들이 역사적 인물이라 할지라도, 왕들의 목록 역시도 역사적 가치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된다. 일부 역사가들 로마가 대략 한 세기간 에트루리아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고 일부 역사가들에게 믿어진다(이 점에 대해선 논쟁이 진행 중이다). 이 기간에, 테베레강 여울을 없앤 폰스 수블리키우스라는 다리가 세워졌고, 클로아카 막시마 역시도 이때 세워졌으며, 에트루리아인들이 이런 종류의 건축물에 대단한 기술자들이었다라고 전해진다. 문화적, 기술적 관점에서, 에트루리아인들은 분명하게 그리스인들 다음으로 로마의 발달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더욱 남쪽으로 세력을 펼쳤던, 에트루리아인들은 그리스인들과 직접 접촉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그리스 식민지 건설자들과 분쟁에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런 뒤, 에트루리아인들은 쇠퇴를 겪었다. 이를 이용한, 로마는 에트루리아에 반기를 들었고 기원전 500년 무렵에 독립을 얻었다. 또한 로마의 귀족들로 구성된 원로원과 더불어 이런 점은 대부분의 자유민들의 정치적 참여를 보장하고 매년 정무관들을 선출한, 민회들을 기반으로 한 공화정 체제를 택하며 군주제를 폐지하였다.

에트루리아는 로마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남겼다.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인들한테서 신전을 짓는 법을 배웠고, 에트루리아인들은 에트루리아의 신 우니, 멘르바, 티니아 등에서 유노, 미네르바, 유피테르 등 삼신 숭배 풍습을 전수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로마의 발달에 에트루리아인들의 영향력은 보통 과장되는 경향이 있다.[23] 로마는 본질적으로 라틴족 도시였고 완전히 에트루리아 도시가 된 적도 없었다. 또한, 증거물들은 주로 무역을 통해, 남쪽의 그리스 도시들의 영향력을 많이 받았음을 보여주었다.[24]

로마 공화정[편집]

로마 공화정은 전통적으로 기원전 509년에서 27년까지로 친다. 기원전 500년 이후, 로마는 사비니족들의 침입에 맞서 라틴족 도시들과 공동 방어에 가담하였다. 기원전 493년 레길루스호 전투에서 승리한, 로마는 왕정 폐지 후 상실했던 라틴 국가들에 대한 패권을 다시 이룩하였다. 오랜 분쟁 끝에, 이 패권은 로마가 볼스키족아이퀴족을 마침내 제압하던 기원전 393년에 안정화되었다. 기원전 394년에, 또한 위협적이던 인근 지역의 에트루리아 도시 베이를 정복해냈다. 이때부터 에트루리아의 힘은 에트루리아 지역으로 한정되었으며, 로마가 라티움의 지배 도시가 되었다.

또한 카르타고와의 공식 조약이 기원전 6세기 말에 치러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조약은 두 도시의 영향권을 확정짓고 이들 간의 교역을 규정하였다.

로마 국가 구조의 견제와 균형을 나타내는 표.

같은 시기에, 헤라클리데스는 기원전 4세기의 로마가 그리스인 도시라고 하였다.[25]

로마의 초기 적은 볼스키족, 아이퀴족, 에트루리아 부족들 등 인근 구릉 지대에 살던 민족들이었다. 세월이 지나고 군사적 성공이 로마 영토를 늘리면서, 새로운 적수가 나타났다. 가장 난폭하던 이들이 바로 오늘날 이탈리아 북부와 중동부 지역을 포함한 북유럽의 대부분을 호령하던, 느슨한 민족들의 집합체인 갈리아족이었다.

기원전 387년에, 로마는 에트루리아알리아 전투에서 로마군을 성공적으로 격퇴시켰던 브렌누스의 지도하 이탈리아 동부에서 온 세노네스족에 약탈되어 불태워졌다. 여러 같은 시기 기록들은 세노네스족이 에트루리아에서 로마의 외교적 중립을 해친 것에 대해 로마에 보복하기를 바랐다고 제시하였다. 세노네스족은 주변 지역을 해하지 않은 채 로마를 향해 130km를 행군하였고, 약탈을 마친 세노네스족은 로마에서 물러났다.[26] 브렌누스는 얼마 안되어 투스쿨룸에서 독재관 푸리우스 카밀루스에게 패배를 맞보고 만다.[27][28]

이 사건 후, 로마는 성급히 건물들을 재건하였고, 에트루리아를 정복하고 북쪽의 갈리아인들의 영토를 차지하며, 공세에 나섰다. 기원전 345년 이후, 로마는 다른 라틴족들이 있는 남쪽으로 세를 뻗쳤다. 네 번째 공세의 주요 상대는 호전적인 삼니움인들로, 기원전 321년 카우디네 지류 전투에서 로마군을 함정에 빠트려 대패시켰다. 이 결과 및 다른 일시적인 방해 요소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서서히 진격하였다. 기원전 290 년 무렵, 로마는 이탈리아반도의 거의 절반 이상을 통제하에 두었다. 기원전 3세기에, 로마는 마찬가지로 남쪽의 그리스 폴리스들도 세력권 하에 두었다.[29]

로마의 이탈리아 확장을 보여주는 지도.

끊임없는 전쟁 (공화정 시작 지점부터 원수정 때까지, 야누스 신전의 문은 단 두 차례만이 닫혔는데, 이 문이 열려있다는 것은 로마가 전쟁 중임을 뜻했다) 중에, 로마는 플레브스 측이 파트리키 측과의 정치적 평등을 추구하려던, 고대 로마 공화정플레브스 (평민)와 파트리키 (귀족) 간의 정치 투쟁인 계급 갈등이라는, 격렬하면서 매우 큰 사회적 위기에 맞닥뜨려야만 했다. 이 갈등은 로마 공화정의 국가 구조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로마가 인근 두 부족과 전쟁 중에 플레브스들이 모두 도시를 떠나던 기원전 494년에 시작되었다(제1차 플레브스 철수). 이 첫 번째 철수의 결과는 호민관이라는 관직의 개설이었고, 이를 통한 플레브스의 첫 진정한 권력 획득이었다.[30]

제정 시기 로마의 중심부 지도

전승에 따르면, 로마는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이 되었다. 그렇지만, 로마가 대중들의 상상속 거대 도시가 되기까지는 몇 세기가 걸렸다. 기원전 3세기 쯤, 로마는 이탈리아반도의 손꼽히는 도시가 되었다. 로마와 거대 지중해 제국 카르타고 간의 포에니 전쟁 기간 (기원전 264-146년), 로마가 해양 제국의 수도가 됨에 따라, 도시의 규모도 더욱 커졌다. 기원전 2세기를 시작으로, 로마는 이른바 라티푼디움이라 불린, 노예로 운영되는 농장의 대규모 발생으로 인해 선조들의 농지에서 쫓겨난 이탈리아 농부들이 로마로 대규모로 이주함에 따라 대규모 인구 증가를 겪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에 대한 승리는 시칠리아사르데냐 등 이탈리아반도 외 최초의 속주 두 곳을 가져다주었다.[31] 스페인 (히스파니아)의 일부가 넘어간 뒤, 기원전 2세기 시작 시점에 로마는 그리스 세계권의 문제에도 관여되었다. 그때부터 끊임없는 내전에 시달렸고 용병에 의존하던 모든 헬레니즘 왕국들과 그리스 도시국가들 등이 쇠퇴하였다.

로마인들은 대단한 존경심을 갖고 그리스 문명을 대하였다. 그리스인들은 로마를 자신들의 투쟁에 유용한 동맹으로 보았으며, 로마 군단들을 그리스에 개입하도록 불러들이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50년도 안 되어서 그리스 본토 전역이 정복되었다. 로마 군단은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를 기원전 197년과 168년에 두 차례나 무너트렸으며, 기원전 146년에 집정관 루키우스 뭄미우스코린토스를 불태워, 자유로운 그리스의 종말을 알렸다. 같은 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들인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도시 카르타고를 파괴하고,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

그 다음 수년간, 로마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같이 스페인에서 정복 활동을 이어나갔고, 페르가몬 왕국의 마지막 왕이 자신의 왕국을 로마 인민들에게 증여하며 아시아에서 로마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기원전 2세기 말에 아주 거대한 규모의 게르만족 무리, 즉 킴브리족테우토네스족이 론강 건너 이탈리아로 이동하며 또다른 위협이 다가왔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다섯 차례나 집정관직을 연속으로 연임했던 인물로 (총 7번), 기원전 102년과 101년에 결정적 승리를 거뒀다. 그는 또한 로마 군대에 대한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수세기간 변치 않은 채로 유지되었던 뛰어난 개혁을 군에 이뤄냈다.

기원전 마지막 세기의 첫 30여 년간은 공화정의 존재를 위협했던 극심한 내부 문제들로 특징지어진다. 모두 이탈리아 내에서 일어난 로마와 동맹시들 간의 동맹시 전쟁, 그리고 노예전쟁 (노예 봉기)은 심각한 충돌이었고,[32] 로마인들에게 자신들의 동맹과 피통치자들에 대한 정책을 바꾸게끔 하였다.[33] 그때부터 로마는 정복된 민족들에게서 빼앗은 막대한 부(조공, 식량 혹은 인력 즉 노예 등)를 가지고 방대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로마의 동맹들은 자신들이 로마의 편에서 싸우지만, 아직까지 자신들이 시민권자들이 아니고 거의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이들은 전쟁에서 지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요청하던 엇을 얻었고, 서기 1세기가 시작할 무렵에 실제로 이탈리아의 모든 자유민들은 로마 시민권자들이었다.

그러나, 임페리움 로마눔 (로마의 힘)의 성장은 옛 로마 공화정의 체계가 갖고 있는 매년 선출된 정무관들과 권력의 공유 등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문제들, 새로운 요구 사항들을 만들어냈다. 술라의 독재정,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과도한 명령권, 제1차 삼두 정치는 이런 점을 분명히 하였다. 기원전 49년 1월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하고, 로마를 향해 자신의 군단을 데리고 진격하였다. 다음 해에, 그는 경쟁 상대들을 패배시키고, 4년간 로마를 다스렸다. 기원전 44년에 그가 암살당한 뒤, 원로원은 공화정을 다시 세워보고자 했지만, 공화정파의 수장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공화정 설립자의 후손)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이 카이사르의 부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조카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고 만다.

기원전 44–31년 기간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후에 아우구스투스로 알려짐) 간의 권력 다툼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최종적으로, 기원전 31년 9월 2일, 그리스에 있는 곶 악티움이 위치한 바다에서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다. 옥타비아누스가 승자였고, 로마 (및 로마 제국)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다 이 시기를 공화정의 종말이자 원수정의 시작 시기로 여겨진다.[34][35]

로마 제정[편집]

로마 타임라인
로마 제국
기원전 44년 –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제정을 설립.
서기 64년 네로 치세 로마 대화재.
69–96년 플라비우스 왕조. 콜로세움 건설.
3세기 로마 제국의 위기. 카라칼라 욕장아우렐리아누스 성벽 건설.
284–337년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최초의 기독교 바실리카 건설. 밀비우스 다리 전투. 로마의 제국의 수도 역할이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체됨.
395년 서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으로 완전히 분열.
410년 알라리크고트족들이 로마를 약탈함.
455년 가이세리크반달족이 로마를 약탈함.
476년 서방 제국의 멸망과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의 폐위
6세기 고트 전쟁 (535–554년). 고트족이 537년 로마 포위 중에 송수로를 끊어냈는데, 이 행동을 역사가들은 전통적으로 이탈리아의 중세 시대 시작 시점으로 본다[36]
608년 포카스 황제가 판테온교황 보니파시오 4세에게 증여하고, 기독교 교회당으로 전환시킴. 포카스 원주가 세워졌다 (포룸 로마눔에 세워진 마지막 시설물).
630년 쿠리아 율리아 (로마 원로원 해산 이후 빈 건물)가 산타드리아노 알 포로 바실리카로 전환됨.
663년 콘스탄스 2세가 20일간 로마를 방문했는데, 그는 두 세기 동안 로마에 발을 들인 유일한 황제였다. 그는 건축물들의 장식 및 청동상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져가기 위해 때어냈다.
751년 랑고바르드족의 라벤나 관구 정복, 로마 공작령은 비잔티움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754년 프랑크인들과 동맹, ‘로마의 대귀족’이라 선포된 단신왕 피핀이 이탈리아를 공격했다. 교황령 성립.

제정 초기[편집]

공화정 말 무렵, 도시 로마는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는 제국의 수도에 걸맞는 웅장함을 갖췄었다. 이 당시 로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로마의 최고 인구 추정치는 450,000명에서 350만 명에 걸쳐 있는 가운데, 1백에서 2백만 명 추정치가 역사가들에게 가장 일반적이다.[37] 카이사르의 계획 사업을 완성하고 아우구스투스 포룸평화의 제단아우구스투스 자신만의 사업을 더하면서 이 웅장함은 한층 더 커졌다. 그는 “나는 로마를 벽돌의 도시로 인수하여, 대리석의 도시로 남겨준다”(Urbem latericium invenit, marmoream reliquit)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아우구스투스의 후임자들은 도시에 자신들만의 기증 물품들을 추가하며 부분적으로 그의 성공을 모방하려 들었다. 네로 치세인 서기 64년에, 로마 대화재는 도시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으나, 어느 정도는 새로운 개발을 명목으로 사용되었다.[38][39]

로마는 대략 곡물 공급의 15에서 25%를 중앙 정부에서 대주는등, 이 당시에 보조를 받는 도시였다. 교역과 산업 부문은 알렉산드리아 같은 다른 도시들과 비교했을 때 작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는 로마가 거대한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선 제국의 다른 지역들에서부터 상품들을 의존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수요는 로마 정부에서 징수한 세금으로 거의 대부분이 해결되었다. 만일 로마가 이런 지원을 받지 못했다면, 로마는 상당히 작았을 것이다.[40]

갈리에누스 개선문은 3세기 당시 고대 로마의 몇 안 되는 기념물 중 하나로, 세르비우스 성벽의 출입구이었다. 개선문에 있던 쪽문 두 개는 1447년에 파괴되었다.

로마의 인구는 2세기에 절정에 다다른 후 감소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 시절인 2세기 말, 안토니우스 역병은 매일 2,000명의 사망자를 낳았다.[4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80년에 사망하였고, 그의 치세는 ‘오현제’와 팍스 로마나의 마지막 시기였다. 서기 177년부터 공동 재위한 그의 아들 콤모두스가 완전한 황제권을 차지하였는데, 이것이 서방 로마 제국의 점진적인 쇠퇴와 가장 일반적으로 연관지어진다. 로마의 인구는 273년에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이 세워질 쯤 전성기 인구의 한 줌에 불과했다 (이때 로마 인구는 대략 500,000만 명 정도였다). 이 시기에, 로마 귀족 계층의 일부가 도시 폼페이를 파괴한 서기 69년의 베수비오산의 재앙적인 분화가 벌어진 후 로마로 이동했다.

3세기의 위기[편집]

3세기 초를 시작으로, 정세가 변화하였다. ‘3세기의 위기’는 로마 제국을 거의 붕괴시켜낸 재앙과 정치적 문제들이라 정의 내려진다. 야만인들의 침입에 대한 위험과 위협에 대한 새로운 느낌은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결정에서 보여지는데, 그는 둘레가 20km에 가까운 것으로 측정된 길이를 지닌, 거대한 성벽으로 수도 로마를 둘러싸는 사업을 273년에 완료하였다. 로마는 공식적으로 제국의 수도로서 남게 되었지만, 황제들은 그곳에서 시간을 훨씬 덜 보냈다.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정치 개혁으로, 로마는 전통적 행정 수도의 역할을 상실하였다. 시간이 흘러, 서로마 황제들은 밀라노라벤나, 혹은 갈리아 지역의 도시들에서 통치를 했다. 330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노폴리스에 두 번째 수도를 건립하였다.

기독교화[편집]

기독교는 서기 1세기 기간 로마에 알려지게 되었다. 서력기원의 1, 2세기간, 로마 제국 정부는 기독교를 고유의 종교라기보다는 단순히 유대교의 한 분파로 대부분 여겼다. 어떠한 로마 황제도 기독교 신앙이나 교회를 반하는 일반 법령을 발표한 적이 없으며, 기독교를 향한 박해들은 지방 정부의 관료들의 인가하에서 행해졌다.[42] 비티니아의 총독이었던 소 플리니우스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냈던 현존하는 서신에는 플리니우스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와 처벌들이 묘사되어 있으며, 트라야누스는 그에게 기독교인들을 찾으려 들거나 그들에 대한 익명의 비난에 귀 기울여서는 아니되며, 신앙을 철회하기를 거부하는 밝혀진 기독교인들만을 처벌하라며 명확한 반응을 보였다.[43]

수에토니우스는 지니가는 말로 네로의 치세 기간 "새롭고 말썽을 부리는 미신" (superstitionis novae ac maleficae) 집단인 기독교인들에게 처벌이 행해졌다"라고 언급한바 있었다.[44] 그렇지만 그 처벌에 대한 이유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타키투스는 서기 64년에 로마 대화재 이후, 사람들 중 몇몇은 네로가 그에 대한 책임이 있고 기독교인들에게 화재 책임을 돌리려 했다고 하였다.[45] 제국을 혼란시키고 내전 및 네로의 자결로 이끌었던 네로 치세의 유대인들과 전쟁은 이 ‘유대교 부류’의 탄압에 대한 추가적인 이유를 제공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3년부터 311년간 지속된 기독교인들에 대한 가장 극심하고 최후의 대규모 박해를 실시하였다. 기독교는 억압하기에 너무나 퍼져있었고, 313년에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용인이 공식 정책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 (단독 통치: 324–337년)는 최초의 기독교 황제가 되었고, 380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

테오도시오스 1세 치하 때, 전통 신앙들의 신전 방문이 금지되었고,[46] 포로 로마노에 있던 베스타 신전의 영원의 불이 꺼졌으며, 베스타 무녀들은 해산되었고, 조복마술 행위는 처벌받았다. 테오도시우스는 남아있던 전통 신앙을 숭배하던 원로원 의원들의 요청이었던, 원로원 내 승리의 제단 복구를 거부하였다.

로마 제국의 기독교로 개종은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에서 공식적으로 명사되었듯이, 로마 주교 (이후에 교황이라 불림)를 서방 제국의 최고 종교 인사로 만들었다. 로마가 점차 제국 내에서 미미한 역할을 지니는데 그치긴 했으나, 로마는 옛 명성을 유지하였고, 이 시기는 로마 내 건설 활동의 마지막 시기이기도 하였으며 콘스탄티누스의 전임자인 막센티우스는 포룸에 바실리카를 지었고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를 상대로 승리를 한 것을 기념하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세웠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역대 가장 큰 목욕탕을 건설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내에 공식적인 기독교 건축물들의 첫 후원자였다. 그는 교황에게 라테라노 궁전을 기증하였고, 최초의 대규모 바실리카인 구성베드로 성당을 세웠다.

게르만족의 침입과 서로마 제국 멸망[편집]

옛 성베드로 성당의 외각 성벽은 로마 시민들이 존경하던 순교자들의 무덤 바로 너머에 지어졌다.

여전히 로마는 귀족들과 원로원 의원들이 주도하던 전통 신앙의 본거지 중 하나로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로마의 새로운 성벽은 410년 8월 24일에 벌어진 알라리크의 약탈, 455년 6월 2일에 벌어진 게이세리크의 약탈, 심지어는 472년 7월 11일에 일어난 리키메르 장군이 주도한, 임금을 지불받지 못한 로마군 (대부분이 야만인들로 구성)의 약탈을 막지 못했다.[47][48] 410년 약탈 사건은 거의 800년 만에 처음으로 로마가 적들에게 함락된 것이었다. 이전의 로마 약탈은 기원전 387년에 브렌누스라는 자가 이끈 갈리아족들이 벌인 것이었다. 410년 약탈은 서로마 제국의 쇠퇴와 멸망에 대한 상징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당시 베들레헴에 거주하던 히에로니무스는 "온 세상을 차지했던 도시가 점령당했다."라고 기록을 남겼다.[49] 로마의 약탈 소식은 로마 세계 전역에 충격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이 약탈로 인한 피해는 과장된 것일 수도 있다. 적어도 인구 65만 명이었던 로마가 5세기 중엽 무렵에 두 개로 쪼개진 제국의 가장 번성한 도시라는 것을 유지한 것처럼 보여도, 4세기 말부터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였다.[50] 반달족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 점령에 따른 결과로 이 인구가 감소가 크게 가속화되었다. 로마의 많은 거주민들이 5세기 중엽부터 아프리카에서 로마가 곡물을 공급받지 못하자 도시를 떠났다.

6세기가 시작될 때 쯤 로마의 인구는 100,000명보다 적었을 수도 있다. 많은 건축물들이 로마 시민들의 손에 파괴되었는데, 이들은 인접한 신전 및 다른 중요한 건축물들에서 석제를 때어냈고, 개인 용도로 석회를 만들어내기 위해 조각상들을 태워버리기도 하였다. 추가로, 수가 증가하기 시작한 교회당의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예시로, 최초의 성베드로 성당은 버려진 네로의 키르쿠스의 폐기물들로 세워졌다.[51] 이런 건축물들에 대한 카니발리즘은 르네상스 이전까지 로마의 일상적인 특징이었다. 4세기를 시작으로, 석제들 그중에서도 특히 대리석에 대한 약탈을 금지하는 제국의 법령들이 보편화되었으나, 이러한 칙령의 반복의 필요성은 칙령이 효과적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가끔씩 새로운 교회당들이 단순히 초기 이교 신전들을 이용하여 만들어졌으며, 또 어떤 때는 이교의 신이나 숭배 대상을 이에 일치하는 기독교 성인이나 순교자들로 바꾸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로물루스와 레무스 신전이 쌍둥이 성인 코스마와 다미아노의 바실리카가 되었다. 이후에, 로마의 만신전(萬神殿)인 판테온이 모든 기독교 순교자들을 모시는 교회당이 되었다.

동로마 (비잔티움) 회복기[편집]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있는 포르타 산 파올로는 서기 271년과 275년 사이에 지어졌다. 6세기 중엽의 고트 전쟁 중, 로마는 동로마 및 동고트 군대에 몇 차례 포위되었다. 동고트의 토틸라는 이사우리아 수비대의 반역 때문에 549년에 이 성문으로 입성했다.
판테온의 남동쪽 모습
포로 로마노에 마지막으로 세워진 황제 기념물인 포카스 원주.

480년에, 최후의 서로마 황제 율리우스 네포스가 살해당했고 본래 야만족 출신인 로마 장군 오도아케르는 동로마 황제 제논에게 충성을 선언하였다.[52] 콘스탄티노플에 명목상 충성을 맹세하기는 했지만, 오도아케르 그리고 이후에 동고트족들은 저번의 황제들처럼 라벤나의 독립적인 영지에서 사실상 이탈리아를 다스렸다. 한편 방대한 권한들을 빼앗긴지는 오래지만, 로마 원로원은 교황이 일반적으로 원로원 가문에서 나오면서, 로마를 직접 관리하였다. 이 상황은 테오다하드가 친로마 성향의 고트족 여왕 아말라순타를 살해하고 535년에 권력을 찬탈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재위: 527–565년)는 이 상황을 그의 유명한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지휘하는 군대를 이탈리아에 파병하는 구실로 사용하였고, 다음 해인 536년 12월 9일에 로마를 탈환해냈다. 537–538년 동안, 동로마 군대는 동고트 군대를 상대로 1년간의 공방전에서 로마를 성공적으로 사수해냈고, 또한 라벤나도 점령해냈다.[52]

하지만 고트족의 저항이 재개되었고, 546년 12월 17일에 토틸라 지휘하의 동고트족들이 로마를 재점령해내고 약탈을 감행했다.[53] 벨리사리우스는 곧 도시를 되찾았지만, 동고트족들이 549년에 다시 차지하였다. 벨리사리우스를 대신해 나르세스가 파견되었으며, 그는 552년에 동고트에서 로마를 영원히 탈환해냈고,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황폐화한 이른바 고트 전쟁을 종전시켜냈다. 530년대와 540년대 로마 주변 일대의 지속적인 전쟁은 배수 장치가 방치되고 테베레강의 제방이 6세기 후반에 무너져 사라지며 저지대의 대부분이 비위생적인 습지로 변모함에 따라, 대부분이 버려지고 황폐화되는 등 로마를 총체적인 황폐 상태에 놓이게 했다.[54] 여기에, 말라리아가 창궐했다. 한 곳을 제외한 수도교들은 수리되지 못한 채로 있었다. 시칠리아에서 곡물 및 기름 공급이 없자, 로마의 인구는 테베레강 근처와 캄푸스 마르티우스 일대를 중심으로 모인 인구 50,000명 이하로 급감하였고, 식수 공급이 없던 지역들은 버려졌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공공시설물, 수로교, 교각 등 유지를 위한 교부금을 제공했으나, 이 교부금은 최근의 전쟁으로 급격하게 빈곤해징 이탈리아에서 징수된 것으로 항상 충분하지 못했다. 그는 또한 젊은이들이 좀 더 나은 교육을 추구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로마에 남아있던 학자, 연설가, 의사, 변호사 등의 후원자 역할을 칭했다. 전쟁 후에, 로마 원로원이 이론적으로 복구되었으나, 라벤나에 있는 동로마 제국 당국에서 임명되고 책임이 있는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및 다른 관료들의 감독 하에 있었다.

그러나, 교황은 이제 비잔티움 제국 전역에서도 주요한 종교 인사였고, 남아있는 원로원 의원들이나 로마에 있는 동로마 (비잔티움) 지방 관료들보다도 지역 차원에서는 실질적으로 더 권한이 강하였다. 실제로도, 로마 지역의 지방 권력이 교황에게로 이양되었고, 이후 몇 십년이 넘게, 원로원 출신의 귀족 및 로마 내 비잔티움의 행정 기관의 남아있는 영지의 대다수가 교회에 흡수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조카이자 후임자인 유스티누스 2세의 치세 (재위: 565–578년)는 이탈리아의 관점에서의 알보인이 이끄는 랑고바르드족의 침입 (568)이 중요 사건이었다. 베네벤토, 롬바르디아, 피에몬테, 스폴레토, 토스카나 등의 지역들을 점령해내며, 랑고바르드족 침입자들은 비잔티움의 지배력을 라벤나, 나폴리, 로마 및 향후의 베네치아가 되는 지역 등을 포함한 다수의 해안 도시들 인간의 작은 섬들로 효과적으로 제한시켜냈다. 동로마애 지배력이 유지되던 유일한 내륙도시는 페루자로, 끊임없이 위협받던 로마와 라벤나 간의 육상로를 제공했다. 578년 그리고 580년에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기록된 법령의 일부의 전해진 바에 따르면 로마 원로원은 로마를 향해 접근해오는 스폴레토의 파로알도 1세베네벤토조토 등의 공작들에 맞서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재위: 578–582년)의 지원을 요청해야만 했다.

마우리키우스 (재위: 582–602년)는 아우스트라시아의 킬데베르투스 2세 (재위: 575–595년)와 동맹을 맺으며 계속되던 분쟁에 새로운 요소를 더했다. 프랑크인의 왕의 병력이 584년, 585년, 588년, 590년에 랑고바르드족의 영토를 공격했다. 로마는 589년에 일어난 테베레강의 재앙적인 범람, 뒤이은 590년의 역병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었다. 이 역병은 새롭게 선출된 교황 그레고리오 1세 (재임: 590–604년)가 하드리아누스 영묘 옆을 행렬 기도식 중에 지나가던 중에, 전염병이 곧 멈출 것이라는 신호로써 하드리아누스 영묘 위를 맴돌고 불타는 검을 검집에 집어 넣는 천사가 목격되었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로마는 최소한 약탈에서는 안전했다.

하지만 새로운 랑고바르드 왕 아길룰프 (재위: 591 - 616년경)는 가까스로 킬데베르투스와 강화 조약을 맺었고, 영토를 재정비한 다음 592년에 나폴리와 로마에 대한 활동을 재개하였다. 비잔티움 황제가 동방의 국경 지대의 전쟁에 몰입하고 있었고 여러 이어지는 관구장들이 로마를 침입에서 지켜내지 못하면서, 그레고리오 교황이 강화 조약 협상을 시작하는 데 있어서 직접 주도권을 잡았다. 이 협상은 598년 가을에 체결되었고 이후에 마우리키우스가 인지하였으며 그레고리오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유지되었다.

로마 주교의 위치는 황제 자리를 찬탈한 포카스 (재위: 602–610년) 치세 때 더욱 강해졌다. 포카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의 위치에 대한 로마 주교의 지위 우위권을 인정해주었고 심지어는 교황 보니파시오 3세에게 ‘모든 교회의 수장’이라는 선포를 하기도 하였다(607년). 포카스의 치세 때 포로 로마노에 세워진 마지막 황제의 기념물이자 그의 이름이 새겨진 원주의 건립이 있었다. 또한 그는 교황에게 수세기간 닫혀 있던 판테온을 기증했으며, 이로 인해 판테온이 파괴에서 안전했을 것이다.

7세기 기간, 비잔티움 관료들과 제국의 각지에서 온 성직자들의 유입은 로마의 귀족들과 교회 지도자들 모두를 그리스어를 말하게끔 하였다. 성지 순례자들을 이끈 로마의 인구는 90,000명까지 증가했을 수 있다.[55] 678년과 752년 사이 교황 13명 중 11명이 그리스나 시리아계였다.[56] 하지만, 강력한 비잔티움의 문화적 영향력도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의 정치적 조화로 이끌지 못 했다. 단의론에 대한 분쟁 중, 교황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변화하는 신학적 입장을 따르지 않을 경우 자신들이 극심한 압박 (가끔식은 물리적 위력에 이르기까지)에 놓이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653년에, 교황 마르티노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추방되었고, 공개 재판을 치른 후, 크림반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57][58]

그러다, 663년에 로마는 고트 전쟁 이후 콘스탄스 2세 때 2세기 만에 첫 황제의 방문이 있었고, 이는 고트 전쟁 이래로 최악의 재앙이었는데 황제는 사라센들에게 쓸 무기 재료 공급을 위해 건축물 및 조각상 등을 포함 로마의 금속을 떼어냈다. 그러나, 다음 반세기간, 한층 더 강해진 긴장 사태에도 불구하고, 로마와 교황령은 비잔티움의 로마 지배가 계속되는 걸 선호하였는데 부분적으로는 대안이 랑고바르드족의 지배라는 것과, 로마의 식량이 비잔티움 제국 내 교황의 영지, 그중에서도 특히 시칠리아에서 대개 오기 때문이었다.

중세 로마[편집]

로마 타임라인
중세 로마
772년 랑고바르드족이 일시적으로 로마를 정복하나 샤를마뉴가 1년 뒤에 로마를 랑고바르드족들에게서 해방.
800년 샤를마뉴가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
846년 사라센들이 성베드로 대성당을 약탈.
852년 레오 성벽의 건립.
962년 오토 1세교황 요한 12세의 공인으로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
1000년 신성 로마 황제 오토 3세교황 실베스테르 2세.
1084년 노르만인들이 로마를 약탈.
1144년 로마의 코무네 성립.
1300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첫 희년 행사를 거행.
1303년 로마 대학교 설립.
1309년 교황 클레멘스 5세성좌아비뇽으로 옮김
1347년 콜라 디 리엔초가 직접 호민관 자리에 오름.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성좌를 로마로 복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절연과 교황령의 형성[편집]

각주[편집]

  1. Procopius, Gothic War, III.xxii. "In Rome he suffered nothing human to remain, leaving it altogether, in every part, a perfect desert."
  2. Heiken, G., Funiciello, R. and De Rita, D. (2005), The Seven Hills of Rome: A Geological Tour of the Eternal City. Princeton University Press.
  3. Potter, D.S. (2009). 《Rome in the Ancient World: From Romulus to Justinian》. London: Thames & Hudson. 10쪽. ISBN 9780500251522. 
  4. Hooper, John (2014년 4월 13일). “Archaeologists' findings may prove Rome a century older than thought”. 《The Guardian》. 
  5. “Science: Rome: Older Than Ever”. 《Time》. 1960년 11월 21일. 
  6. URBANUS, JASON M. “A Brief Glimpse into Early Rome – Archaeology Magazine”. 《archaeology.org》. 
  7. 리비우스, “로마사” I, 7
  8. 리비우스, “로마사”, 1:8
  9. 리비우스, “로마사”, 1:9–13
  10. 리비우스, “로마사”, 1:8, 13
  11. 예시: 장자크 루소 및 1762년에 쓰인 그의 저서 “사회계약론”, Book IV, Chapter IV에서, 그는 로마라는 말은 그리스어를 기원으로 하며 힘을 뜻한다고 각주를 남겼다. "‘로마’라는 이름이 로물루스에서 전래했다고 말한 저자들도 존재하지만 실은 이는 그리스어이며 힘을 뜻한다."
  12. 불치에 있는 프랑수아 무덤에서 나온 에트루리아어로 Cneve Tarchunies Rumach라 쓰였고, 로마의 ‘그나이우스 타르퀴니우스’라 번역되는, 채색된 그림의 이름에서 추론되었다. http://www.mysteriousetruscans.com/francois.html
  13. Ismarmed.com (2011). “History of Rome (Italy)”. 《ismarmed.com》. 
  14.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 〈Book 1.11〉. 《Roman Antiquities》. 가장 박식한 로마 역사가들 중에에서도 이탈리아 도시들의 ‘기원’에 대해서 집필했던 포르키우스 카토,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및 여러 많은 이들 등은 그들 (아보리기네스족)은 그리스인들로, 이들 중의 일부는 한때 아카이아에 살았었다고 하였으며, 아보리기네스족은 트로이 전쟁 이전에 많은 세대들이 이주하였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역사가들)은 그들이 어느 그리스 부족에 속해있거나 어느 도시들에서 이주하였는지, 시기 혹은 식민지의 지도자가 누구인지, 그들이 모국에 두고 간 재산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결과에 대해 말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 신화를 따르면서, 근거로 어떠한 그리스 역사가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진실은 알 수 없다. 
  15.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 〈Book I.14〉. 《Roman Antiquities》. 앞서 언급되었던 도시는 아보르기네스족의 모도시 리스타에서 24 스타드 거리에 있었으며, 이보다 훨씬 이전에 사비니족은 한밤중에 아미테르눔(Amiternum)에서 출발하여 리스타를 기습 공격으로 차지했었다. 
  16. Larissa Bonfante:Etruscan Inscriptions and Etruscan Religion in The Religion of the Etruscans – University of Texas Press 2006, page 9
  17. 펠릭스 가피오(Félix Gaffiot)의 Dictionnaire Illustré Latin Français에 따르면, 투스키(Tusci)라는 용어는 리비우스, 키케로, 호라티우스로마 공화정 시절의 주요 작가들이 사용한 것이라 한다. 투스키아(Tuscia), 투스쿨라넨시스(Tusculanensis) 등 에트루리아에 대한 다수의 동계어가 발생했다. 투스키는 분명히 에트루리아적인 것들을 지칭하는 주요 용어였지만, 에트루스키 (Etrusci) 및 에트루리아 (Etrūria) 등은 덜 사용되었고, 주로 키케로와 호라티우스 등에게 사용된 것이며 동계어가 부족하였다.
  18. “Online Etymology Dictionary”. Etymonline.com. 2015년 7월 23일에 확인함. 
  19. Guerber, H. A. (2011). “Heritage History eBook Reader”. 《heritage-history.com》. 2011년 10월 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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