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쇼 진고의 난
| 덴쇼 진고의 난 | ||||||||
|---|---|---|---|---|---|---|---|---|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일부 | ||||||||
1582년 9월 고노 모리마사가 고호조군을 이긴 미사카토게(御坂峠)의 현재 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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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전국 | ||||||||
| 우에스기씨 | ||||||||
| 지휘관 | ||||||||
| 병력 | ||||||||
| 65,000명 | 11,800명~11,900명 | 모름 | ||||||
덴쇼 진고의 난(일본어: 天正壬午の乱)은 1582년 6월 5일부터 10월 29일까지 다케다씨가 장악했던 옛 봉지를 둘러싸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호조 우지마사,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대립한 사건이다. 일본에서는 이를 간단하게 진고의 난(壬午の乱) 또는 진고의 역(壬午の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덴쇼는 당대 일본 천황이었던 오기마치 천황의 연호에서 유래한 것이고, 진고는 사건이 발생한 임오년인 1582년을 가리킨다. 전쟁은 1582년 오다 노부나가의 고슈 정벌 이후 다케다씨가 패권을 잃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한 이후, 우에스기씨와 고호조씨가 각각 다케다씨의 가신들이 다스리던 영지를 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냄으로써 전쟁이 발발했다.[1]
전쟁 기간 동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케다씨의 영지였던 가이국과 시나노국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우에야스씨는 또한 이에야스가 호조씨와 영지를 맞대고 있던 우쓰노미야씨, 유키씨, 사타케씨와 접촉하여 고호조씨를 위협하게 되면서 1582년 10월 29일 고호조씨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휴전 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전쟁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83년 3월 덴쇼 진고 기청문을 통해 다케다씨의 가신들과 병사들을 완전히 도쿠가와군에 편입하는 한편, 이들을 도쿠가와군의 가신들에게 다시 분배하였다. 1584년까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옛 다케다씨 영지에서 자신들에게 굴복하지 않은 가문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한편 이에야스가 받아들인 다케다의 옛 가신들과 병사들은 이후 158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대립할 때 큰 도움을 주었다.[2]
배경
[편집]다케다-도쿠가와 대립
[편집]도쿠가와씨는 1560년대 다케다씨와 동맹을 맺고 이마가와씨를 토벌했지만, 다케다씨가 약속을 어기고 도토미국의 여러 성을 정복하면서 다케다씨와의 동맹을 깨고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가신으로 받아들였다.[3] 1571년 10월 다케다 신겐이 오다-도쿠가와 연합과의 동맹을 깨고 교토로 진군할 때 도쿠가와군은 오다 지원군의 장수들과 자기 가신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다케다군에 응전했으나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다케다군에게 패배하였다.[4] 1573년 다케다 신겐의 급사 이후에도 도쿠가와군은 다케다군으로부터 잃어버린 영지를 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다케다군과 국지전을 벌였고, 다케다 가쓰요리 역시 도쿠가와군이 지배하고 있던 미카와국과 오쿠미가와 지역으로 군대를 파견했다.[5] 다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대패하여 다케다군은 기세를 잃게 되었다.[6]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가시노 전투 이후 오다 노부나가는 이시야마 전투로 잇코 잇키와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케다씨를 공격할 수 없었다.[7]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호조씨의 수장 호조 우지마사와 연합해 1580년부터 다케다씨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1581년 다카텐진성을 빼앗긴 다케다 가쓰요리는 결국 1582년 3월 11일 덴모쿠산 전투에서 패배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7]
혼노지의 변
[편집]1582년 고슈 정벌 이후 옛 다케다 영지를 통치한 오다의 가신은 같은 해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간토 오토리츠기야쿠"(関東御取次役)로 임명받은 다키가와 가즈마스였다.[a] 가즈마스가 오토리츠기야쿠를 임명받았을 때 그의 임무는 간토 8개 주와 가이국 및 시나노국의 옛 다케다 가신들을 통합하고 무사시국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는 고호조씨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10]
그러나 1582년 6월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고, 이에 따라 오다 정권의 지휘 계통이 붕괴되면서, 다키가와 가즈마사의 오토리츠기야쿠 임무도 공백 상태가 되었다. 《조모 고전기》에 따르면, 가즈마스는 노부나가의 사망을 5일 뒤에 알았고, 자신의 중신들을 모아 "우리는 상방(上方)으로 달려가 오다 노부카쓰와 노부타카 두 공을 지켜야 하며, 미쓰히데와 일전을 벌여 먼저 세상을 떠난 주군의 큰 은혜에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틈을 타 내 목을 베어 호조에게 항복할 선물로 삼으려는 자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싸움을 걸어라. 나는 호조군과 결전을 벌이고, 승패에 관계없이 상방으로 향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11]
우에스기 가케가쓰도 다케다씨의 영지를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나, 당시 우에스기씨는 우에스기 겐신의 죽음으로 인한 내분이 지속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12] 미카와에 영지를 둔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1582년 다케다씨의 옛 가신들을 설득하는 작업을 하고 노부나가의 죽음 이후 벌어진 혼돈의 상황을 수습할 것을 지시했다.[13]
전쟁
[편집]6월
[편집]도쿠가와 이에야스는 6월 초부터 호조씨와 영유권 다툼이 있던 분쟁 지역으로 침입했다.[14] 동시에 고호조군 역시 도쿠가와군이 가이국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55,000명의 군대를 파견해 우스이를 거쳐 시나노국으로 침입했다.[15] 한편 우에스기군을 지원하기 위해 사나다 마사유키는 누마타성을 점령했다.[16] 도쿠가와군은 총 8,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군을 둘로 나누어 사카이 다다쓰구와 오가사와라 노부미네에게 시나노국을 평정하게 하고 이에야스 자신은 가이국을 평정하기로 했다.[14] 시나노국으로 진출한 도쿠가와군은 이미 고호조군과 동맹을 맺은 다케다 옛 가신 스와 요리타다의 저항을 받았다.[17] 고호조군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다다쓰구와 노부미네는 철수했고 고호조군 43,000명이 그들을 추격했지만 바바 노부하루의 옛 가신이었던 오카베 마사쓰나의 지원 덕분에 다다쓰구는 무사히 도쿠가와 본진에 도착할 수 있었다.[18]

도토미국에서 숨어서 지내던 다케다씨의 옛 가신인 오리이 쓰구마사와 요네쿠라 다다쓰구에게 가이국의 사무라이들에게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원하도록 지시했다.[19] 이에야스는 뒤이어 다케다 신겐의 뛰어난 장수이자 다케다 이십사장 중 한 명이었던 소네 마사타다에게 병사 500명을 붙여 엔리지 지역으로 파견했고, 마사타다는 고호조군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소네 마사타다는 6월 12일 오카베 마사쓰나[20], 그리고 이에야스의 중신 오스가 야스타카와 합류했다.[21] 같은 날 요다 노부시게는 이에야스의 명령에 따라 사쿠현을 침입해 옛 다케다 가문에 남아있던 3,000명을 모아왔다.[22] 6월 13일 이와도노성을 점령한 고호조군은 호시나씨의 지원을 받으며 북상했고,[23] 6월 16일부터 19일까지 고호조군은 가나가와 전투에서 다키가와 가즈마스를 격파했다. 6월 말까지 고호조군은 사나다씨가 점령한 지역을 제외한 옛 다케다 영지 대부분을 정복했다.[18] 이에야스는 고호조군의 진격에 맞서 6월 28일 가신 오쿠보 다다요, 혼다 히로타카, 이시카와 야스미치를 증원군과 같이 파견했다.[23] 우에스기 가문 역시 사네다 가문 및 오가사와라씨의 지원을 받고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영지를 인정받은 기소 요시마사의 군대를 격퇴시켰다.[24] 오가사와라 도세쓰사이의 행동에 반대하던 다른 오가사와라 씨족은 사다요시에게 집결해 이에야스에게 복종을 맹세했다.[25] 6월 24일 우에스기군은 북시나노로 진격해 나가누마성을 점령했다.[26]
세 가문의 전쟁이 격화되는 동안,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쓰히데가 패배하면서 오와리국의 상황은 안정되었다.[27] 또한 기요스 회의 이후 양분된 오다 가신들은 6월 10일부터 11일까지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승리한 하시바 히데요시를 중심으로 봉합하고 있었다.[28]
7월
[편집]1582년 7월 오다 가문은 다키가와 가즈마스가 가나자와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하시바 히데요시는 7월 7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오다 가문의 신하로서 고호조군과 우에스기군을 물리치고 가이국과 시나노국을 평정할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29] 이에야스는 7월 호조 우지나오의 부대와 맞서기 위해 고후 지역에 군대를 파견했다. 핫토리 한조가 가쓰야마성, 미나구치성, 고토히라야마성을 장악하고 가이국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감시했다.[30] 이 무렵 이에야스는 옛 다케다 가신이었던 이치조 노부타쓰, 야마가타 마사카게, 하라 마사타네를 섬긴 여러 사무라이와 다이묘들을 포섭할 수 있었다.[31]
사나다씨는 7월 9일 우에스기씨에서 고호조씨로 모시는 주군을 갈아탔다.[26] 사나다 마사유키는 고즈케국에 여러 요새 시설을 지음으로서 고호조군이 그곳에 주둔할 수 있도록 했다.[18] 7월 12일 우지나오가 이끄는 고호조군이 우스이관을 통과하여 노부시게가 이들과 공방을 벌였으나 노부시게는 고모로성을 버리고 방어하기 쉬운 요새로 퇴각했다.[32] 한편 7월 16일 사다요시는 후카시성을 공격해 도세쓰타이와 히데마사에게 항복을 요구했다.[33] 7월 19일 호조 우지마사는 도쿠가와군을 물리치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 우에스기씨와 휴전을 합의했다.[18] 이 무렵 고호조군의 진출에 옛 다케다 소속 다이묘들의 반대 투쟁이 더욱 심해졌다. 이즈국의 오가사와라 분가는 고호조군과 맞서 싸우다 패배했고,[34] 에노시타씨는 사카구치 전투에서 고호조군 분견대를 격파하기도 했다.[35]
8월
[편집]
1582년 8월 6일 이에야스가 이끄는 도쿠가와군의 본대 8,000명이 와카미코성에 주둔하던 고호조군 본대 약 50,000명과 맞닥뜨렸다.[36][37] 일본에서 '와카미코 전투'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북쪽의 신푸성과 노미성에 도열해 방어를 강화했고, 양측은 이 지역에서 수 차례 전투를 벌였는데 병력이 훨씬 적은 도쿠가와군이 고호조군을 묶어두는데 성공했다.[38] 교전 와중에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고호조군에게 속한 성을 공격하였고 마쓰다이라 이에타다는 고호조군의 보급을 방해했다.[39]
와카미코 전투 직후 이에야스군은 사토미씨의 사토미 요시요리가 이끄는 10,000명의 병력을 지원받은 고호조군과 구로코촌에서 전투를 벌였다.[40][41] 호조 우지마사는 호조 우지타다가 이끄는 10,000명의 분견대를 구로마카 주변으로 이동시켜 도쿠가와군을 포위한 뒤 섬멸하려고 했지만, 이에야스는 고호조군의 계획을 알고 미즈노 가쓰나리와 도리이 모토타다에게 2,000명의 군대로 고호조군을 막게 했다.[42] 가쓰나리와 모토타다는 고호조군의 분견대를 막는데 성공했다.[42] 한편 우지나오의 부대는 가쓰나리와 야스사다 미야케의 공격으로 혼돈에 빠졌고, 우지카츠가 이를 본 뒤 군대를 파견해 우지타다를 구출하러 갔지만 가쓰나리와 미야케는 우지타다의 부대도 격퇴했다. 가쓰나리와 미야케의 담대한 공격으로 도쿠가와군은 고호조군의 돌파를 막을 수 있었고,[42] 가쓰나리는 모토타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무작정 돌격했음에도 전공을 인정받게 되었다.[43] 8월 12일 도쿠가와군이 고호조군을 상대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면서 기소 요시마사, 요다 노부시게, 호시나 마사나오 같은 옛 다케다 가신들이 이에야스에게 복종을 맹세했다.[44]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에 화답해 시바타 야스타다를 노부시게 휘하에 두게 했다.[45] 한편 핫토리 한조가 이끄는 이가국 쪽의 도쿠가와 분견대는 시나노국의 사쿠현을 침입했다.[46]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와카미코 전투(일본어: 若神子合戦)와 구로코마 전투(일본어: 黒駒合戦)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전반적인 형세는 도쿠가와군에게 불리했다. 고호조군에 맞서는 다이묘들이 점점 늘어났지만 이들은 앞으로의 전쟁 상황이 어떻게 될 지 몰랐고, 가이국에서 유일하게 활동 중이었던 노부시게는 고호조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었다. 노부시게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접근했고, 마사유키는 이에 호응해 야자와 츠나요리를 누마타성에 배치하고 그의 아들 사나다 노부유키를 이와비츠성에 파견해 상황을 지켜보며 이에야스와 노부시게와 결탁하기 시작했다.[18]
1582년 가을
[편집]1582년 9월 초부터 핫토리 한조는 고호조군이 점령한 시시쿠성을 공격해 점령했고,[46][47] 뒤이어 폭우를 틈타 이즈국의 사노고야성을 점령했다. 같은 달 고노 모리마사가 이끄는 옛 다케다 가신들이 미사카토게(御坂峠)에서 고호조군을 격파하였다.[48]
약 한 달 뒤인 1582년 10월 19일부터 사나다 마사유키는 공개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마사유키는 호조 우지나오의 부관인 네즈 마사쓰나를 공격하는 한편, 이에야스의 지시에 따라 고모로 일대에서 노부시게를 도와 고호조군에 저항하였다.[49] 역사학자들은 다양한 사서를 바탕으로 고호조군이 마사유키의 배신을 10월 초에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49] 마사유키의 배신에 대응해 고호조군 사령관 후지타 우지쿠니는 누마타성을 점령하려고 했지만 마사유키의 방어로 실패하고 말았다.[50] 10월 21일 도쿠가와군은 모치즈키성을 점령했고 호조군은 이에 대응해 호조 쓰나나리를 불러들이는 한편 뉴도 우라도에게 이와비츠성을 공략하라고 지시했다.[18] 이에 마사유키와 노부시게는 고모로성과 도모노성 사이의 연락을 끊어버렸다.[18] 10월 24일에는 이에야스가 마사나오에게 이나현의 절반을 하사하는 슈인조를 발행하여 다카토성에 주둔하던 나이토씨의 항복을 받아냈다. 10월 26일 마사유키의 군대의 지원을 받은 도쿠가와군은 아시다성을 점령했고 노부시게는 우치야마성을 점령해 고호조군의 후방을 차단했다.[18] 마사유키와 도쿠가와군은 우스이관을 장악한 뒤 이와무라타성까지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18]
휴전 협정
[편집]고호조군은 1582년 6월에 획득했던 영토를 대부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책략으로 인해 우쓰노미야씨, 사타케씨, 유키씨와 같은 도호쿠 지방 다이묘들의 침공을 받을 위협에 놓였다.[15] 이에야스가 전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고 사나다 마사유키가 도쿠가와에게 넘어가자 고호조씨는 이에야스와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51] 고호조씨는 협상 대표로 호조 우지노부를 파견했고, 도쿠가와씨는 이이 나오마사를 대표로 파견했다.[52][53] 1582년 10월부터 고호조씨와 도쿠가와씨의 전쟁을 중재해오던 하시바 히데요시, 그리고 오다씨 대표로 파견된 오다 노부카쓰와 오다 노부타카 역시 협정 체결을 지지했다.[54]
휴전 협정 이후 사나다 마사유키의 동생 사나다 노부타다는 이에야스로부터 5,000석의 영지를 받았고,[55] 오카베 마사쓰나는 가이국과 시나노국 사이의 7,600석 영지를 받았다.[20] 고호조씨와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이에야스는 여러 가신을 파견해 시나노국과 가이국의 평정에 나섰고,[56] 실질적으로 전쟁은 1583년 2월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57]
전쟁 이후
[편집]도쿠가와씨의 가이·시나노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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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쇼 진고의 난이 끝났을 때,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진영은 도쿠가와씨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로 확보한 영지에 남아있는 다케다 병사들, 가신들, 그리고 가신들의 일족들까지 모두 모아두고 기청문을 발표했는데, 이를 덴쇼 진고 기청문이라고 한다.[58] 이 기청문 작성에 참여한 인물들에는 사나다 마사유키, 사나다 노부타다, 오가사와라 노부미네, 야마가타 마사카게, 기소 요시마사와 같은 옛 다케다씨의 명장들도 있었고, 가이와 시나노에 남아있었던 쓰치야씨, 고마이씨 등도 포함되었다. 기청문은 옛 다케다 가신들의 영지와 병사들을 도쿠가와씨 가신들에게 다시 분배하는 역할도 했다.[59] 기청문 작성 이후에도 이에야스에게 복종하지 않는 다이묘들이 남아 있었다. 1583년 2월 도쿠가와군은 오가사와라 사다요시의 항복을 받아냈고,[57] 뒤이어 도모노씨가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60] 1584년 4월 1일에는 야시로 히데마사도 이에야스에게 복종했다.[61] 하지만 이에야스와 갈등이 심해지던 사나다 마사유키는 1585년 이에야스에 복종을 거부하고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넘어가 사실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하가 되었다.[62]
이에야스는 이와 더불어 하치오지센닌도신(八王子千人同心)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옛 다케다 가신들을 관리하였다. 1582년 설립될 당시에는 총 250명이 모집되었지만, 1590년 이에야스가 간토로 영지를 옮길 때에는 그 수가 500명으로 증가했고, 그 수가 1,000명으로 늘어난 후에는 하치오지성을 방어하는 군인이 되었다. 이들은 이에야스의 심복 역할을 했지만 이에야스 사후에도 도쿠가와씨에게 충성을 맹세했다.[63]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이후 158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었던 이시카와 가즈마사와 덴쇼 진고의 난 이후 이에야스의 편이 된 오가사와라 사다요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복종하였다.[64][65] 이에야스는 옛 다케다 가신들을 새로운 세력으로 포섭하고 군에도 옛 다케다 장군들을 배치하는 대대적인 개혁을 펼쳤다.[66] 이에야스는 다케다 신겐의 병법과 무기를 하마마쓰성에 보관하고 가이국에 다케다 가신이었던 나루세 마사카즈와 오카베 마사쓰나를 파견했다.[66] 또한 이에야스는 가이국과 시나노국에서 병사들을 징집한 뒤 새로 편성된 부대를 이이 나오마사, 혼다 다다카쓰,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에게 맡겼다.[66] 한편, 이시카와 가즈마사의 배신에 가이 및 시나노의 다른 다이묘들은 가족들을 이에야스에게 보내면서 충성을 맹세했다.[67]
고호조-도쿠가와 동맹
[편집]1582년 전쟁이 끝날 당시, 호조 우지마사는 고즈케국을 이에야스에게 할양하면서 전쟁을 끝냈다. 곧 1585년 도쿠가와씨와 고호조씨는 사나다 마사유키의 배반으로 인해 우에스기씨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동맹을 맺게 되었다. 1586년 호조 우지마사는 사나다 마사유키가 점령한 성을 공격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68]
우에스기씨
[편집]같이 보기
[편집]출처
[편집]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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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本城郭大系 第8巻』신인물종래사,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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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주
[편집]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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