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대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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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대공습
영국 본토 항공전의 일부

런던 상공에 조색기구들이 떠 있다.
날짜1940년 9월 7일 – 1941년 5월 21일[2][a]
장소
결과 독일의 전략적 패배[1]
교전국
영국의 기 영국 나치 독일의 기 나치 독일
지휘관

윈스턴 처칠
휴 다우딩
프레더릭 파일
오웬 튜더 보이드

레슬리 고사지

아돌프 히틀러
헤르만 괴링
후고 슈페를레
알베르트 케셀링

한스 예쇼네크
피해 규모
사망자: 민간인 40,000[4]–43,000 여명[5]
부상자: 46,000여명
부상자 수는 139,000여명 정도로 높게 잡히기도 한다.[5]
항공기 승조원 3,363 명
항공기 2,265 대
(1940년 여름 –1941년 5월까지)[6]

영국 대공습(영어: the Blitz 더 블리츠[*])이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1940년에서 1941년에 거쳐 독일 공군영국에 가한 일련의 폭격 및 공습을 영국 측에서 일컬은 말이다. 영국의 주요 도시가 모두 전격폭격의 대상이 되었지만, 보통 "전격폭격"이라 하면 그 중 가장 유명한 런던 대공습(London Blitz)을 말한다. 아돌프 히틀러헤르만 괴링영국 왕립 공군을 궤멸시키고 영국에 상륙(바다사자 작전)하려 했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이 와중 독일 공군이 런던오폭하자 영국 측도 베를린을 보복 폭격했고, 이에 히틀러와 괴링은 민간에 대한 폭격으로 전술을 바꾸었다.

1940년 9월 7일에서 1941년 5월 21일 사이에 영국의 주요 도시 16곳에 최소 100 임페리얼 톤(미터 톤의 111.6% 배) 이상의 고폭탄이 투하되었다. 267일간 런던은 71회, 버밍엄, 리버풀, 플리머스는 8회, 브리스틀은 6회, 글래스고는 5회, 사우스햄턴은 4회, 포츠머스은 3회, 나머지 8개 도시도 최소 1회 이상의 대형 폭격을 겪었다.[2]

배경[편집]

루프트바페와 전략폭격[편집]

1920~30년대 줄리오 두에빌리 미첼 등의 공군전술 이론가들은 육지전과 해전을 치를 필요 없이 공군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7] 당시만 해도 폭격기는 항상 이겨내며,[8]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특히 야간일 수록 더하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산업시설과 정부기관, 산업시설, 통신시설을 파괴함으로써, 상대가 전쟁에 나설 수단을 빼앗게 된다. 민간 폭격은 사기를 꺾고 남은 공장만으로 생산 저하를 유발한다. 대중의 여론이 고려되는 민주주의 국가일수록 특히 취약할 것으로 보았다. 이런 종말론적 견해를 두고 영국 왕립공군미국 육군 항공단이 적극 수용하는가 하면, 영국 왕립공군 폭격사령부는 적국의 민간 수행의지는 물론 통신과 산업까지 파괴한다는 정책을 내세웠다.[9]

한편 독일의 경우 국방군 공군 (루프트바페)은 전략폭격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했다. 공군최고사령부 (OKL)가 산업시설이나 시가지를 대상으로 한 폭격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적국의 생산을 방해하고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면서 전선에서의 힘의 균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다만 사령부는 공군력만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독일 공군이 민간 전략폭격을 공식 정책으로 채택한 것은 1942년에 이르러서였다.[10]

핵심 산업시설과 교통 중심지는 전면차단을 위해 대상으로 삼을 만한 군사표적이었다. 민간인이 직접 대상이 될 수는 없지만, 생산시설 붕괴는 적국의 사기와 전쟁의지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1930년대 독일 법학자들은 국제법상으로 허용될 폭격 유형에 대한 지침을 신중하게 마련했다. 민간인을 향한 직격이 "테러 폭격"으로 배제되는가 하면, 민간인 대량 사상과 시민 사기저하로 이어질 핵심 전쟁시설을 공격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명되었다.[11]

발터 베버

나치당이 집권하고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독일 군사학계에서는 전략폭격의 역할을 두고 논쟁을 벌였는데, 일각에서는 영미권의 경향을 따라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12] 1935~1936년 국방군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발터 베버 장군은 전략폭격과 그에 걸맞는 항공전력 구축을 힘써 역설해온 대표적인 인물로, 비록 작전, 전술적인 면에서 항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지만, 항공 전략에 관한 다섯가지 요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 바 있다.

  1. 적의 기지와 전투기 공장을 폭격하여 공군력을 파괴하고, 조국의 표적을 공격하는 적군기를 타도하기 위함.
  2. 병력 이동과 보급에 필수적인 철도와 도로망, 그 중에서도 다리와 터널을 파괴하여, 적의 대규모 지상군이 중대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
  3. 적의 진격을 방해하고 지상작전에 적극 참여함으로서, 무장부대나 자동화부대처럼 철도에 얽매이지 않은 부대 편성 운영을 지원하기 위함.
  4. 해군 기지를 공격하고, 조국의 해군기지를 수호하며, 해상전투에 적극 참여하는 등의 해상작전을 지원하기 위함.
  5. 군수공장의 생산을 중단시켜 적군을 마비시키기 위함.[13]

각주[편집]

내용주
  1. While agreeing with Roberts on the start of the first phase (7 September 1940), Stansky dates the end as 10 May 1941[3]
참조주
  1. Hooton 1997, 42쪽.
  2. Roberts 2011, start of chapter 3.
  3. Stansky 2007, 3쪽.
  4. Richards 1954, p. 217.
  5. Dear and Foot 2005, p. 109.
  6. Hooton 2010, p. 89.
  7. Cox and Grey 2002, p. xvii.
  8. 영국의 스탠리 볼드윈이 1932년 영국 의회 연설에서 쓴 문구로 전략폭격기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9. Montgomery-Hyde 1976, p. 137.
  10. Corum 1997, p. 7.
  11. Corum 1997, p. 240
  12. Corum 1997, pp. 238–41.
  13. Corum 1997, p. 138.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