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설인귀서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는 나당전쟁이 벌어지던 신라 문무왕(文武王) 11년(671년) 당(唐)의 행군총관 설인귀가 신라가 백제의 옛 땅에 당이 설치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공격하여 백제의 옛 땅을 점령해 신라령으로 잠식하고, 고구려의 안승의 망명을 받아 들이며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는 것에 대해 항의한 것에 대해서, 신라의 문무왕이 반박하는 내용으로 보낸 답서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답당설총관인귀서(答唐薛摠管仁貴書) 또는 문무왕보서(文武王報書)[주 1]라고도 한다. 청대의 《전당문》(全唐文)에는 '보설인귀서'(報薛仁貴書)라는 제목으로 문무왕이 내린 다른 조서 4통과 함께 실려 있다.[1]
한국의 《삼국사기》(三國史記) 및 《동문선》(東文選)에 설인귀가 보낸 국서와 함께 그 전문이 실려 있으며, 신라와 당나라의 외교 관계 및 나당 전쟁의 전개 양상을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로 꼽히고 있다. 나아가 현존하는 몇 안 되는 신라의 외교 문서(국서)로써 그 가치가 있다.
개요
[편집]신라가 당병을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뒤, 당은 백제와 고구려의 수도에 각각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군현을 설치하고, 신라의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책봉하여 신라를 계림주대도독부라고 부르는 등 삼국 전체의 영토를 그들의 지배하에 두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신라는 이에 맞서 백제와 고구려의 옛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항쟁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고구려 보장왕의 서자로 검모잠 등 고구려 부흥군이 새로이 고구려왕으로 추대한 안승(安勝)을 맞이하여 옛 백제 땅인 금마저(金馬渚)에 사는 것을 허락하고, 웅진도독부에 가담한 옛 백제 땅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석성 전투(石城戰鬪)에서 고구려 유민과 합작하여 당군 3,500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에 당의 행군총관인 설인귀는 신라의 '불충'(不忠)과 '배은'(背恩)을 질책하고 신라를 치겠다는 서신을 보내왔다. 이에 대해 문무왕이 입장 표명 및 당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쓴 것이 《답설인귀서》이다.
《답설인귀서》가 설인귀에게 보내진 직후, 신라는 옛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두고 아찬(阿湌) 진왕(眞王)을 도독(都督)으로 삼았다. 이는 그 지역을 신라가 직접 통치하겠다는 뜻이었다.[2]
또한 그 해 9월에 당의 장군 고간(高侃) 등이 번방(蕃方) 군사 4만을 이끌고 평양(平壤)에 도착하여 요새를 구축하고 대방(帶方, 황해도) 지역을 침공하였으며,[2] 신라는 겨울 10월 6일에 당의 조운선(漕運船) 70여 척을 쳐서 당의 낭장(郎將) 겸이대후(鉗耳大侯)와 병사 1백여 명을 사로잡았다.[2]
원문 및 해석
[편집]《답설인귀서》의 원문은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한국의 《삼국사기》와 《동문선》, 중국의 《전당문》에 그 원문이 실려 있다. 사용된 글자는 조금씩 다르다.
선왕께서 정관(貞觀) 22년(648년)에 중국에 들어가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를 직접 뵙고서 은혜로운 칙명을 받았는데,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끌림을 당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가엽게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玉帛)와 사람들은 나도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平壤) 이남과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 하시고는 계책을 내려 주시고 군사 행동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신라 백성들은 모두 은혜로운 칙명을 듣고서 사람마다 힘을 기르고 집집마다 쓰이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큰 일이 끝나기 전에 문제(文帝)께서 먼저 돌아가시고 지금 황제께서 즉위하셔서 지난날의 은혜를 계속 이어나가셨는데, 자못 인자함을 자주 입어 지난날보다 지나침이 있었습니다. 저희 형제와 아들들이 금인(金印)을 품고 자색 인끈을 달게 되어 영예와 은총의 지극함이 전에 없었던 것이라서 몸이 부스러지고 뼈가 잘게 부셔져도 모두 부리시는데 쓰임이 되기를 바랐으며, 간과 뇌를 들판에 발라서라도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였습니다.현경(顯慶) 5년(660년)에 이르러 성상(聖上)께서는 선왕(先王)의 뜻이 끝나지 않았음을 유감으로 여기시고 지난날에 남겨둔 실마리를 풀고자 배를 띄우고 장수에게 명령하여 수군(水軍)을 크게 일으키셨습니다. 선왕께서는 연세가 많으시고 힘이 쇠약해져서 행군(行軍)을 감당하기 어려웠으나 이전의 은혜를 좇아 생각하셔서 힘써 국경 가까이에 이르러서 저를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대군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동서(東西)가 서로 화합하고 수군과 육군이 모두 나아갔습니다. 수군(水軍)이 겨우 백강(白江) 어귀에 들어섰을 때 육군은 이미 큰 적을 깨뜨려서 양국의 군대가 같이 (백제의) 왕도(王都)에 이르러 함께 한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평정한 뒤에 선왕께서는 드디어 대총관(大摠管) 소정방(蘇定方)과 의논하여 중국 군사 10,000명을 남아 있게 하고 신라도 또한 아우 인태(仁泰)를 보내 군사 7,000명을 이끌고서 함께 웅진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대군이 돌아간 뒤 적신(賊臣)인 복신(福信)이 강의 서쪽에서 일어나 남은 무리들을 모아서 웅진도독부성(熊津都督府城)을 에워싸고 핍박하였는데, 먼저 바깥 성책을 깨뜨려서 군수품을 모두 빼앗아가고 다시 부성(府城)을 공격하여 곧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부성의 가까운 네 곳에 성을 쌓고 둘러싸고 지켰으므로, 이에 부성은 거의 출입할 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포위를 풀고 사방에 있는 적의 성들을 모두 깨뜨려서 먼저 그 위급함을 구하였습니다. 다시 식량을 날라서 마침내 10,000명의 중국 병사들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위기를 벗어나도록 하였으며, 머물러 지키고 있던 굶주린 군사들이 자식을 바꿔서 서로 잡아먹는 일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현경) 6년(661년)에 이르러서는 복신의 무리들이 점점 많아지고 강의 동쪽 땅을 침범하여 빼앗았으므로, 웅진의 중국 군사 1,000명이 적의 무리들을 치러 갔다가 적에게 깨뜨림을 당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싸움에 패한 뒤부터 웅진에서 군사를 요청함이 밤낮 동안 계속되었는데, 신라에는 많은 전염병이 돌아 군사와 말을 징발할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요청하는 것을 어기기 어려워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가서 주류성(周留城)을 포위하였습니다. 적이 (우리)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와서 공격하여 군사와 말을 크게 잃고서 이득 없이 돌아오게 되자 남쪽의 여러 성들이 한꺼번에 모두 배반하여 복신에게 속하였습니다. 복신은 승세를 타고 다시 부성을 에워쌌으므로, 이 때문에 웅진은 길이 끊겨서 소금과 간장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곧 건장한 남자들을 모집하여 몰래 소금을 보내 곤경을 구원하였습니다.
6월에 이르러서 선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는 겨우 끝났으나 상복(喪服)을 벗지도 못하였으므로 (구원 요청에) 응하여 달려갈 수 없었지만, 칙명을 내려 군사를 일으켜 북쪽으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함자도총관(含資道摠管) 유덕민(劉德敏) 등이 이르러서 칙명을 받드니 신라로 하여금 평양에 군량을 실어다가 공급하게 하셨습니다. 이때 웅진에서는 사람을 보내와 부성이 고립되고 위태로운 사정을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유총관이 저와 상의하였는데, 제가 ‘만약 먼저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으로 통하는 길이 끊어질까 두렵다. 만약 웅진으로 가는 길이 끊어진다면 남아 지키던 중국 군사는 곧 적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유총관이 마침내 저와 함께 좇아서 먼저 옹산성(甕山城)을 쳐서 옹산을 빼앗고 곧이어 웅진에 성을 쌓아 웅진으로 가는 길을 개통하게 하였습니다. 12월에 이르러 웅진의 양식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먼저 웅진에 양식을 나르자니 황제의 뜻을 어길까 두렵고, 만약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한다면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까 두려웠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늙고 약한 자를 뽑아 보내 웅진으로 양식을 나르게 하고 건장하고 날랜 군사들은 평양으로 향하도록 하였습니다. 웅진에 양식을 수송하러 간 사람들은 가는 길에 눈을 만나 사람과 말들이 모두 죽어 100명 중 한 명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용삭(龍朔) 2년(662년) 정월에 이르러서 유총관은 신라의 양하도총관(兩河道摠管)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평양으로 군량을 운송하였습니다. 당시는 궂은비가 한 달 이상 이어지고 눈보라가 치는 등 날씨가 몹시 추워서 사람과 말이 얼어 죽었으므로, 가져갔던 군량을 보낼 수 없었습니다. 평양의 대군이 또 돌아가려고 하였고 신라의 병마(兵馬)도 역시 양식이 다 떨어졌으므로 또한 돌아왔습니다.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어 손발이 얼고 상해서 길에서 죽은 사람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행렬이 호로하(瓠瀘河)에 이르자 고구려의 병마가 막 뒤를 쫓아와서 강 언덕에 진을 쳤습니다. 신라 군사들은 피로하고 굶주린 날이 오래되었지만 적이 멀리까지 쫓아올까 두려워서 적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 싸웠는데, 선봉이 잠깐 싸우자 적의 무리가 무너져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습니다. 이 군사들이 집에 도착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웅진부성에서 자주 종자(種子)를 요구하였는데, 그 이전과 이후에 보낸 것이 수만여 섬(石)입니다. 남으로는 웅진으로 나르고 북으로는 평양에 공급하였으니, 조그마한 신라가 두 곳으로 나눠 공급하느라 인력의 피로함이 극에 달하였고 소와 말이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때를 놓쳐 곡식이 잘 익지 못하였습니다. 창고에 쌓아둔 양식은 날라 주느라 모두 써버려서 신라의 백성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지만, 웅진의 중국 군사는 군량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또한 남아 지키던 중국 군사들은 집을 떠나온 지가 오래되어 의복이 풀어 떨어져 몸에 걸칠 만한 온전한 옷이 없었으므로, 신라는 백성들에게 권하고 매겨서 철에 맞는 옷을 지어 보냈습니다. 도호(都護) 유인원(劉仁願)이 멀리서 고립된 성을 지킬 때 사면이 모두 적이어서 항상 백제의 공격과 포위를 당하였는데 늘 신라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10,000명의 중국 군사는 4년 동안 신라의 옷을 입고 신라의 식량을 먹었으니, 유인원 이하의 군사는 뼈와 가죽은 비록 중국 땅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피와 살은 모두 이곳 신라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은혜와 혜택이 비록 끝이 없다 하더라도 신라가 충성을 바친 것 역시 족히 가엽게 여길 만한 것입니다.
용삭 3년(663년)에 이르러서 총관(摠管) 손인사(孫仁師)가 군사를 이끌고 부성을 구원하러 왔는데, 신라의 병마도 또한 나아가 함께 정벌하여 가서 주류성 아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왜(倭)의 수군이 백제를 도우러 와서 왜의 배 1,000척이 백강에 정박해 있고, 백제의 정예 기병이 언덕 위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신라의 용맹한 기병이 중국 군사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군영을 깨뜨리자 주류성에서는 간담이 서늘해져 마침내 곧바로 항복하였습니다. 남쪽이 이미 평정되자 군사를 돌려 북쪽을 정벌하였는데, 임존성(任存城) 한 성만이 헛되이 고집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 군대가 힘을 합하여 함께 하나의 성을 쳤지만 굳게 지키고 대항하였으므로 깨뜨려 얻을 수 없었습니다. 신라가 곧 돌아오려 할 때 두(杜) 대부(大夫)가 ‘칙명에 따르면 평정을 마친 뒤에 함께 모여 맹서의 모임을 가지라고 하였으니, 임존성 한 성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지만 곧바로 함께 맹세를 하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신라는 칙명에 따르면 이미 평정한 뒤에 서로 함께 맹세를 맺으라고 하였는데, 임존성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으므로 이미 평정되었다고 할 수 없다고 여겼고, 또한 백제는 간사하고 속임수가 끝이 없어서 이랬다저랬다 함이 언제나 변하지 않으니, 지금 비록 함께 맹세를 맺는다 하여도 뒷날 반드시 배꼽을 깨물 근심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여, 맹세를 맺는 일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인덕(麟德) 원년(664년)에 이르러 다시 엄한 칙명을 내려 맹세를 맺지 않은 것을 꾸짖었으므로 곧 웅령(熊嶺)에 사람을 보내 제단(祭壇)을 쌓고 함께 서로 맹세하고, 이내 맹세를 맺은 곳을 드디어 두 나라의 경계로 삼았습니다. 모여 맹세한 일은 비록 (신라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감히 칙명을 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취리산(就利山)에 제단을 쌓고 칙사(勅使) 유인원을 맞아 피를 마시고 서로 맹세하여 산과 강으로 서약하였고, 경계를 긋고 푯말을 세워 영원히 국경으로 삼아 백성을 머물러 살게 하고 각각 생업을 꾸려나가도록 하였습니다. 건봉(乾封) 2년(667년)에 이르러서는 대총관 영국공(英國公)이 요동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서 (나는) 한성주(漢城州)에 가서 군사를 보내 국경 가까이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신라 병마가 홀로 쳐들어가서는 안 되었으므로 먼저 간자(間者)를 세 번이나 보내고 배를 계속해서 띄워 대군의 동정을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간자가 돌아와서 모두 '대군이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므로, 우선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길을 뚫고 대군이 이르기를 기다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을 막 깨뜨리려고 할 때 영공이 보낸 강심(江深)이 와서 ‘대총관의 처분을 받들어 신라 병마는 성을 공격할 필요 없이 빨리 평양으로 와서 군량을 공급하고 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행렬이 수곡성(水谷城)에 이르렀을 때 대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신라 병마도 마침내 곧 빠져나왔습니다.
건봉 3년(668년)에 이르러서는 대감(大監) 김보가(金寶嘉)를 보내 바닷길로 들어가 영공(英公)에게 이르렀더니 신라 병마는 평양으로 와서 모이라는 처분을 받아왔습니다. 5월에 유(劉) 우상(右相)이 와서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여 함께 평양으로 갔는데 나도 또한 한성주(漢城州)에 가서 병마를 사열하였습니다. 이때 번방(蕃方, 신라)과 중국의 여러 군대가 모두 사수(蛇水)에 모여 있었는데, 남건(男建)이 군사를 내어 한판의 싸움으로 결판내려고 하였습니다. 신라 병마가 홀로 선봉이 되어 먼저 큰 진영을 깨뜨리니 평양성 안은 강한 기세가 꺾이고 사기가 위축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영공이 신라의 용맹한 기병 500명을 뽑아서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마침내 평양을 깨뜨리고 큰 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에 신라 병사는 모두 '정벌을 시작한 이래 이미 9년이 지나서 사람의 힘이 모두 다하였지만 끝내 두 나라를 평정하였으니 여러 대를 두고 가졌던 오랜 희망이 오늘에야 이루어졌다. 반드시 우리나라는 충성을 다한 것에 대한 은혜를 입을 것이요, 사람들은 힘을 다한 상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영공이 비밀리 '신라는 이전에 군대 동원의 약속을 어겼으니, 또한 그것을 헤아려 정할 것이다.'라고 하자 신라 군사들은 이 말을 듣고 다시 두려움이 더하였습니다. 또한 공을 세운 장군들이 모두 기록되어 이미 당나라에 들어갔는데, 당나라 수도에 도착하자 곧 '지금 신라는 아무도 공이 없다.'고 하여 무릇 군장(軍將)들이 되돌아오니 백성들이 더욱 두려움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열성(卑列城)은 본래 신라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쳐서 빼앗은 지 30여 년 만에 신라가 다시 이 성을 되찾아 백성을 옮기고 관리를 두어 수비하였습니다. 그런데 (당나라가) 이 성을 가져다 고구려에 주었습니다. 또한 신라는 백제를 평정한 때부터 고구려 평정을 끝낼 때까지 충성을 다하고 힘을 바쳐 당나라를 배신하지 않았는데 무슨 죄로 하루아침에 버려지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이와 같이 억울함이 있더라도 끝내 배반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총장(總章) 원년(668년)에 이르러 백제가 함께 맹세했던 곳에서 국경을 옮기고 푯말을 바꿔 농토를 빼앗았으며 우리 노비를 달래고 우리 백성들을 꾀어 자기 나라 안에 감추고서 여러 번 찾아도 마침내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소식을 들으니 '당나라가 배를 수리하는 것은 겉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하지만 실제는 신라를 치려고 하는 것이다.'고 하여,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서 불안해하였습니다. 또한 백제의 여자를 데려다 신라의 한성도독(漢城都督) 박도유(朴都儒)에게 시집을 보내고, 함께 모의하여 몰래 신라의 병기를 훔쳐서 한 주(州)의 땅을 갑자기 치기로 하였는데, 때마침 일이 발각되어 도유의 목을 베어서 꾀하였던 바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함형(咸亨) 원년(670년) 6월에 이르러 고구려가 반역을 꾀하여 중국 관리를 모두 죽였습니다. 신라는 곧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여 먼저 웅진에 '고구려가 이미 반란을 일으켰으니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 그쪽과 우리 쪽은 모두 황제의 신하이니 이치로 보아 마땅히 함께 흉악한 적을 토벌하여야 할 것이다.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모름지기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여야 할 것이므로, 바라건대 관리를 이곳에 보내 함께 계획을 세우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제의 사마(司馬) 예군(禰軍)이 이곳에 와서 함께 의논하여 ‘군사를 일으킨 뒤에는 그쪽과 우리 쪽이 서로 의심할까 걱정되니 마땅히 두 곳의 관인(官人)을 서로 바꾸어서 인질로 삼자’고 하였으므로, 곧 김유돈(金儒敦)과 부성(府城)의 백제 주부(主簿) 수미장귀(首彌長貴) 등을 보내 〔웅진〕부로 향하게 하여 인질 교환을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백제가 비록 인질 교환을 허락하였지만 성 안에서는 병마를 모아 그 성 아래 도착하여 밤이면 와서 공격하였습니다. 7월에 이르러 당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갔던 김흠순(金欽純) 등이 땅의 경계를 그린 것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황하(黃河)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았고 태산(泰山)이 아직 숫돌같이 되지 않았는데, 3~4년 사이에 한 번은 주었다 한 번은 빼앗으니 신라 백성은 모두 본래의 희망을 잃었습니다. 모두 '신라와 백제는 여러 대에 걸친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상황을 보자면 따로 한 나라를 세우고 있으니, 백년 뒤에는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게 먹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신라는 이미 중국의 한 주(州)이므로 두 나라로 나누는 것은 합당치 않다. 바라건대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길이 뒷날의 근심이 없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지난해 9월에 이러한 사실을 모두 기록하여 사신을 보내 아뢰게 하였지만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되돌아왔으므로 다시 사신을 보냈지만 역시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 뒤에는 바람이 차고 파도가 세어 미처 아뢸 수 없었는데, 백제가 거짓을 꾸며 '신라가 배반하였다.'고 아뢰었습니다. 신라는 앞서는 (당나라의) 높은 지위에 있는 신하의 뜻을 잃었고 뒤에는 백제의 참소를 당하여, 나아가고 물러감에 모두 허물을 입게 되어 충성스러운 마음을 펼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중상모략이 날마다 황제의 귀에 들리니 두 마음 없는 충성심을 일찍이 한 번도 알릴 수 없었습니다. 사인(使人) 임윤(琳潤)이 영광스러운 편지를 가지고 이르러서야 총관께서 풍파를 무릅쓰고 멀리 해외에 온 것을 알았습니다. 이치로 보아 마땅히 사신을 보내 교외에서 영접하고 고기와 술을 보내 대접하여야 할 것이지만,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 살기에 예를 다하지 못하고 때에 미처 영접을 못하였으니 부디 괴이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총관이 보내온 편지를 펴서 읽어보니, 전적으로 신라가 이미 배반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본래의 마음이 아니어서 두렵고 놀라울 뿐입니다. 스스로 공로를 헤아린다면 욕된 비방을 받을까 두렵지만 입을 다물고 꾸짖음을 받는다면 또한 불행한 운수에 빠지게 될 것이므로, 지금 억울하고 잘못된 것을 간략히 쓰고 반역한 사실이 없음을 함께 기록하였습니다. 당나라는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일의 근본과 까닭을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곧바로 수만의 무리를 보내 저희 나라를 뒤엎으려고 누선(樓船)들이 푸른 바다에 가득하고 배들이 강어귀에 줄지어 있으면서 저 웅진을 생각하여 신라를 공격하는 것입니까?
오호라! 두 나라를 평정하기 전에는 발자취를 쫓는 부림을 입더니 들에 짐승이 모두 없어지자 오히려 요리하는 이의 습격과 핍박을 받는 꼴이며, 잔악한 적 백제는 오히려 옹치(雍齒)의 상(賞)을 받고 중국을 위하여 죽은 신라는 정공(丁公)의 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태양의 빛이 비록 빛을 비춰주지 않지만 해바라기와 콩잎의 본심은 여전히 해를 향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총관께서는 영웅의 뛰어난 기품을 타고났고 장수와 재상의 높은 자질을 품고 있으며 일곱 가지 덕을 두루 갖추었고 아홉 가지 학문을 섭렵하였으니, 황제의 벌을 집행함에 죄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자의 군대를 출동시키기 전에 먼저 일의 근본과 까닭을 묻는 서신을 보내왔으니, 이에 배반하지 않았음을 감히 말씀드립니다. 바라건대 총관께서는 스스로 살피고 헤아려 글월을 갖추어 황제께 아뢰어 주십시오.
계림주대도독(雞林州大都督)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상주국(上柱國) 신라왕(新羅王) 김법민(金法敏)이 말합니다.
— 《삼국사기》권제7, 신라본기제7, 문무왕
해당 내용은 크게 아홉 문단으로 나눌 수 있다.[3]
- 백제 정벌 후 평양 이남의 땅을 신라에 주겠다는 당 태종의 조칙(詔勅)이 있었다.
-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평정했으나 유민의 반란으로 평양으로 군량미 수송이 어려웠다.
- 신라는 웅진, 평양에 거주하는 당병의 의복과 군량미 공급에 최선을 다하였다.
- 백제의 임존성을 함락하지 못했지만 황제의 칙령에 따라 삽혈맹약을 행하였다.
- 당군이 요동을 공격할 때 간난을 무릅쓰고 신라군을 출병시켰다가 귀국시켰다.
- 평양 함락의 공을 세웠으나 '동원 기일 미엄수를 문책한다'는 소문을 내고, 당군의 반신라적인 조치가 계속되었다.
- 고구려의 모반으로 군사를 출동시키고자 하였으나 웅진에 거주하는 백제군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 '백제의 고토를 백제에게 돌려줄 것'이라는 전언을 듣고도 부당함을 상주하지 못하던 차에, 백제가 퍼뜨린 '신라군이 당에 거역한다'는 헛소문을 듣고 당군이 신라로 출병하려 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 설 총관의 지혜와 덕으로 사리판단하여 이와 같은 사실을 황제께 상주하기 바란다.
연구
[편집]문학적 평가
[편집]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뒤에 신라까지 장악하려는 당에 맞서 벌였던 항쟁이었던 나당전쟁이나 그 전쟁 당시 신라의 왕으로써 전쟁을 이끌었던 인물 가운데 한 명인 문무왕에 대한 평가와 함께 《답설인귀서》 역시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입장에서 "한민족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명문"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4] 다만 이는 민족주의, 국가주의라는 관점에서, 나아가 역사 연구의 입장에서의 평가였지 《답설인귀서》라는 글 자체의 문학적인 평가까지 감안한 것은 아니었다.
민족의식이나 국가의식이라는 정서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문학적인 평가에 대해서, 《답설인귀서》는 태종 무열왕이 당 정관 22년(648년)에 입당(入唐)하여 당 태종을 만난 이래로 문무왕이 《답설인귀서》를 보내는 당 고종 21년/문무왕 11년(671년)까지 20여 년 동안 '사대교린'의 기조 하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간난만고의 과정에서 신라가 활약한 것을 시간 순으로 장황하게 기술하고, 동시에 신라에 대한 오해가 많음을 강변하는 역사 기술 이외의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다[3]는 지적이 있다. 아마 그것은 비단 당에 대한 불만이 극도로 고조되어 있다 하더라도 당과의 전쟁을 자초할 필요가 없었고, 특히 사대관계상 '당의 신하'를 자처하는 신라에서 사대의 대상이 되는 당의 총관에게 보내는 외교문서이니 예의와 격식에 얽매여 격서의 성격을 띠기 곤란했다는 지적이다.[5]
이동근은 《답설인귀서》라는 장문의 글 속에서 굳이 '문학성'을 발견할 수 있는 부분으로 상호간 약속의 파기를 표현한 "몸이 부스러지고 뼈가 잘게 부셔져도 모두 부리시는데 쓰임이 되기를 바랐으며, 간과 뇌를 들판에 발라서라도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였습니다.", 당의 억측과 억지에 대한 신라측의 유감스러움을 표한 "황하(黃河)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았고 태산(泰山)이 아직 숫돌같이 되지 않았는데, 3~4년 사이에 한 번은 주었다 한 번은 빼앗으니 신라 백성은 모두 본래의 희망을 잃었습니다.", "오호라! 두 나라를 평정하기 전에는 발자취를 쫓는 부림을 입더니 들에 짐승이 모두 없어지자 오히려 요리하는 이의 습격과 핍박을 받는 꼴이며, 잔악한 적 백제는 오히려 옹치(雍齒)의 상(賞)을 받고 중국을 위하여 죽은 신라는 정공(丁公)의 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태양의 빛이 비록 빛을 비춰주지 않지만 해바라기와 콩잎의 본심은 여전히 해를 향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라는 구절을 들었다.[6][주 2]
한편 영조 5년(1729년) 영조(英祖)는 희정당에서 있었던 《동국통감》(東國通鑑)에 대한 경연(經筵)에서 《답설인귀서》의 내용을 두고 "겸손하게 사죄하려는 뜻이 없는 듯하다."라고 하였는데, 참석했던 시독관 류엄(柳儼)이 "이때부터 당은 신라에 대해서 회유하려고 할 뿐이었습니다. 밑에서는 위를 섬기는 정성이 없고 대국(大國)은 소국(小國)을 보살피려는 뜻이 없으니 나라가 점점 쇠퇴해 갔던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8]
사료로써의 평가
[편집]역사 자료로써는 신라 당대의 외교 문서로써 현존하는 유물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어 과거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엮으면서 《삼국사기》에 실린 설인귀의 편지와 함께 이 《답설인귀서》를 통해 《삼국사기》 본기의 미흡하거나 불명확한 내용들을 보충, 수정하여 본문을 서술하였다.[9]
신라와 당 사이의 밀약에 대한 언급
[편집]《답설인귀서》의 첫머리에 언급되는 신라의 사신 김춘추(태종 무열왕)과 당 태종의 만남과 그 자리에서 당 태종이 김춘추에게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를 평정하고 나면 평양 이남의 백제 토지는 모두 그대에게 주어 길이 평안하게 하겠다"고 언급한 부분은 삼국통일 이후 신라가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당으로부터 인정받았고, 나아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신라마저 병탄하려 했던 당의 일방적인 약속 파기에 맞서 벌인 전쟁으로 신라측이 당을 몰아내는 전쟁 명분이기도 하였다. 동시에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포기하고 '평양 이남 백제 토지'를 얻는 것으로 그친 점에서 신라의 통일 의지에 한계가 있었다는 지적[10]을 넘어 신라의 삼국통일이 과연 삼국 즉 백제와 고구려를 대상으로 한 '통일'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는지, 신라 스스로 자신들이 백제와 고구려를 통일할 의지가 있기는 했는지[11]에 대한 이의 제기 및 논쟁도 《답설인귀서》의 해당 구절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조선 시대에 《답설인귀서》의 해당 부분을 주목하고 밀약과 관련하여 최초의 '논평'을 남긴 인물은 강재항(姜再恒)이었다.[12] 강재항은 당 태종이 신라에게 '평양 이남 백제 토지'를 주기로 약속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당 고종이 주기로 했던 토지를 신라가 차지한 것에 대해서 마땅히 취하지 말고 복종하여야 했음을 지적[13]하고 있다.
근대 역사학에서 《답설인귀서》를 신라와 당 관계를 살펴 보는 역사적 사료로써 본격적으로 활용한 인물은 일제강점기의 사학자 장도빈(張道斌)이었다. 그는 《국사》(國史)에서 김춘추가 이세민과 협의하여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기로 약속하였다고 하였으며[14] 이어 《조선역사요령》(朝鮮歷史要領)과 《국사강의》(國史講義)에서는 신라와 당이 밀약을 맺게 된 배경까지 분석하여 제시하였다.[15] 장도빈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남북한의 학계 모두 《답설인귀서》의 밀약 관련 기사를 사실로 수용하여 신라 김춘추-당 태종 간 밀약의 배경이나 신라의 대당 관계를 논의하는 기본 자료로 이용하였다. 신라의 옛 백제 땅 점령의 정당성과 나당전쟁의 원인이 당측의 배신에서 연유되었다는[16] 견해는 이후 남한 학계의 나당전쟁 및 삼국통일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인식과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북한 학계에서도 1979년판 《조선전사》에서 밀약을 인정하면서 당의 침략과 '배신행위'를 밝히는 자료로 이해하였다.[17]
이 '밀약'에 대해서 한국 학계와 달리 중국이나 일본 학계에서는 사료로 인용하는 경우도 드물뿐 아니라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중국 학계에서는 문무왕이 설인귀와 주고 받은 서신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인정하면서도, 밀약과 관계된 내용이 중국 자료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이유로 밀약 관련 내용을 문무왕이 자기 변호를 위해 꾸며낸[18]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나아가 김춘추가 당에 사행한 것도 648년이 아닌 647년이며 삼국사기 찬자가 일관성 유지를 위해 개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의 학자 한셩(韓昇)은 문무왕이 설인귀에게 《답설인귀서》를 보낸 671년 시점에서 이미 당 태종도 신라 태종 무열왕도 모두 죽고 없는데 밀약이 있었는지를 문무왕이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지적하고, 문무왕이 《답설인귀서》에서 언급한 당 태종과 김춘추 사이의 밀약을 증명할 아무런 증거가 없고, 애초에 신라-당 양국은 종속 관계로 맺어져 있어서 당 태종과 김춘추가 백제 문제를 가지고 그 과분(瓜分)을 논의할 수는 없으며 당이 백제를 공격한 것도 김춘추의 청병(請兵)보다는 당의 국제 관계 전략에 따라 진행되었던 기미정책의 일환이었을 뿐이라고 하였다.[19][주 3]
《답설인귀서》를 비롯해 《삼국사기》에 실린 나당전쟁 관련 기록을 신뢰할 수 있는지의 문제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의 고유한 기록들이 7세기 중후반 신라-당 관계에 관련한 중국측 문헌 기사의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부분을 보완해 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와 신뢰를 평가할 수 있다는 존 C. 제미슨(John C. Jamieson)의 지적[21]이나 중국측 사료를 보완해 주는 측면에서 답설인귀서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고 문무왕의 회신 또한 사리가 분명한 사실로 인식하는 중국의 역사학자 쑹청유(宋成有)[22]의 견해도 있다.
밀약 내용에 대한 중국 학계의 의문 제기에 대해서 박현숙은 두 통의 서신이 당의 입장에서야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겠지만 신라로서는 중대한 일이었기에 기록으로 남겨 두었던 것으로 보았고, 노태돈은 734년 당이 패강(대동강) 이남 지역을 신라 영토로 인정한 조처를 볼 때 밀약에 관한 기록이 당 조정에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23]고 지적하였다. 주보돈은 《답설인귀서》의 밀약 내용이 구체성을 띤 내용이라는 점, 출사(出師)를 약속하지 않았다면 어떤 다른 명분과 조치가 있어야 하나 그렇지 않다는 점, 신라로서는 '구두 약속'으로 그 후계자들에게 온전히 승계되었을 공산이 크다[24]고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외에 밀약의 내용을 전해 주는 다른 기사가 존재하는가의 여부에 대해, 김진한은 《구당서》에 661년 백제부흥군의 도침과 귀실복신이 당의 유인궤에게 한 발언[주 4]으로
듣자하니 대당(大唐)이 신라와 맹세하기를 '백제의 노소(老少)를 불문하고 모두 죽인 뒤에 나라를 신라에게 준다'고 하였다는데,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찌 싸워서 죽는 것만 하겠는가? 이런 까닭에 무리를 모아 지킬 뿐이다.
— 《구당서》 백제전[25]
라고 운운한 부분을 지적하며 중국 사료에서도 《삼국사기》의 《답설인귀서》에 나오는 밀약의 내용을 뒷받침해 줄 만한 부분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고[26] 반박하였다. 무열왕은 도침과 유인궤의 사이에 사신이 오고 갔음을 알고 있었고, 당 고종의 조서에 따라 김흠을 시켜서 유인궤의 군을 구하게 하였는데 무열왕이 661년 6월에 사망하였음을 고려할 때 도침의 백제 부흥군은 늦어도 661년 3월 이전에 신라와 당이 백제를 점령한 뒤에 그 땅을 모두 신라에게 주겠다는 내용과 같은 성격의 밀약을 맺었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 태종과 김춘추가 맺은 밀약의 내용이 어떻게 해서 백제 부흥군의 귀에까지 들어갔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미 661년 시점에서 당 태종과 김춘추가 맺은 백제 땅 처분에 대한 밀약은 이미 백제 부흥군 지도부도 알고 있었고, 중국의 기록인 《구당서》를 통해 확인된다고 할 수 있다. [주 5]
《답설인귀서》의 저자에 대하여
[편집]일단 문무왕의 이름으로 설인귀에게 보내진 국서이기는 하지만 《답설인귀서》 자체를 문무왕 본인이 지은 것은 아니다. 《답설인귀서》의 실제 집필을 맡은 사람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조선 초기에 편찬된 《동문선》(東文選)의 경우 글을 실을 때 그 작자의 이름을 밝혀 두지만 답당설총관인귀서(答唐薛摠管仁貴書) 즉 《답설인귀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무명씨'(無名氏)라고 하여[29] 그 저자를 알 수 없는 글로 처리하였다.
한국의 일부 언론 및 한국사 교양 서적에서는 신라 태종 무열왕 때의 문장가로 《삼국사기》에 당 태종의 조서를 해석하고 그에 회답하는 표문을 작성하였으며[30] 문무왕이 "문장과 관련된 일을 스스로 맡아서, 편지로 중국 및 고구려, 백제 두 나라에(우리의) 뜻을 잘 전할 수 있었으므로 우호를 맺고 공을 이룰 수 있었다."고 평했던[30] 인물인 강수(强首)를 《답설인귀서》의 저자로 지목하고 있다. 다만 강수가 《답설인귀서》를 지었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물론 이를 확언하는 문헌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각주
[편집]내용주
[편집]- ↑ 《삼국사기》에는 '대왕보서'(大王報書) 즉 '문무왕이 (설인귀에게) 회보한 글'이라고 되어 있다. '대왕'이란 즉 문무왕이다.
- ↑ 글쓰기에서 상대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주관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이미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서 유래한 고사(古事)를 자주 사용한다는 것은 현대 문장론에 입각하면 '창의성이 떨어진다'고 평가되지만, 당시에는 외교 문서와 같은 실용적인 한문 문장이라 해도 단순히 의사 전달에 주력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화려한 명문장을 구사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쓰는 것이었고, 역사적인 '고사'를 사용하는 빈도나 그것을 사용하는 맥락과 비유가 얼마나 적절한가가 문장을 평가하는 기준이자 문장 작성에 있어 하나의 전형이었다.[7]
- ↑ 이러한 '번속의 지위에 불과한 신라가 당과 함께 백제 분할을 논의할 수는 없다'는 한셩의 주장에 대해서 김진한은 자민족 중심의 번속이론을 가지고 마치 신라가 당에 정치적으로 예속된 번속국에 불과하여 밀약을 맺을 자격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으며, 당시 신라와 당의 관계는 형식상 조공과 책봉을 통해 관계가 설정되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철저한 이해관계에 따라 양국 관계가 규정되었고 김춘추의 입당도 대고구려 사행의 실패와 당시 백제의 침략에 따라 곤궁한 처지에 빠진 신라가 난국을 극복하기 위한 대응으로 진행하였음을 지적하였다.[20]
- ↑ 도침이 유인궤에게 사신을 보낸 시점은 661년 3월 이후의 일이다.
- ↑ 당 태종이 백제를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는 한셩의 주장에 대해서도 고구려 원정 시도가 실패로 끝나던 가운데 이에 따른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 속에서 '백제 선공'이라는 전략도 마련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으며[27] 643년 9월 당 태종은 신라에서 온 사신에게 세 가지 계책을 내는 가운데 "백제는 그 나라가 바다의 험한 곳에 있음을 등에 업고 병사와 무기를 대비하지 않고 있으며 남녀가 뒤섞여 혼잡하여 서로 연회하고 모이기만 좋아하는데, 내가 수십, 수백 척의 병선에 갑졸을 싣고 노를 저어 바다를 건너 곧바로 그 나라를 습격하고자 한다"(百濟國負海之險 不修兵械 男女分雜 好相宴聚 我以數十百船 載以甲卒 䘖枚汎海 直襲其地)[28]고 발언하는 등 백제에 대한 선공을 고구려 공격을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 구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 고종 역시 백제, 고구려의 침입에 대한 대책을 요청하는 신라의 왕태자 김법민의 표문에 백제를 향해 "만일 전쟁을 그치지 않는다면 신라의 요청을 받아 들여 도울 것이다"라고 경고하는 등 백제에 대한 군사행동을 벌일 수 있음을 시사하였다.[25]
출처주
[편집]- ↑ 《唐文拾遺》 卷六十八 新羅文武王金法敏
- 1 2 3 《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1년(671년)
- 1 2 이동근 2009, 94쪽
- ↑ 조갑제(2014년) '韓民族의 영혼이 담긴 글,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월간조선》;같은 저자(2016년) 한민족 최고의 전쟁은 통일신라의 대당(對唐) 결전' 《월간조선》
- ↑ 이동근 2009, 94~95쪽
- ↑ 이동근 2009, 95~96쪽
- ↑ 이동근 2009, 91 및 92쪽
- ↑ 《승정원일기》 영조 5년 기유(1729년) 9월 7일(무인)
- ↑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고이(考異)
- ↑ 金相鉉(1987), '新羅 三國統一의 歷史的 意義', 《統一期의 新羅社會 硏究》,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p.408.
- ↑ 김영하(1999), '新羅의 百濟統合戰爭과 體制變化', 《한국고대사연구》16; 김영하(2007), 《新羅 中代社會 硏究》, 일지사, pp. 118-158.
- ↑ 김진한 2014, 257쪽
- ↑ 《立齋遺稿》卷9 雜著 '東史評証', “金春秋入朝 太宗勑麗濟平後 以平壤以南百濟土地幷乞你 咸亨元年 將百濟舊地割還 按平壤以南百濟舊壤 太宗許之於前 高宗割之於後 而又以割據爲罪 羅人有辭矣 其不能取 服宜矣.”
- ↑ 張道斌(1916), 國史; 張道斌(1981), 汕耘 張道斌 全集 卷1, 時事文化社, p. 55.
- ↑ 張道斌(1924), 朝鮮歷史要領, 高麗舘, pp. 42-43.; 張道斌(1952), 國史講義, 國史院; 張道斌(1981), 汕耘 張道斌 全集 卷1, 時事文化社, pp. 439-440.
- ↑ 임병태(1977), '新羅의 三國統一', 《한국사》2, 국사편찬위원회, pp. 525-526
- ↑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편(1979), 《조선전사》4, 과학백과출판사, pp. 227-228, 239.
- ↑ 王小甫(2007), '中韓關係視野下的《三國史記》撰作', 《韓國學論文集》2007-2, pp.1-2.
- ↑ 韓昇(2003), '唐朝對百濟的戰爭: 背景與性質', 《百濟文化》32,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pp. 145-146.
- ↑ 김진한 2014, 265쪽
- ↑ John C. Jamieson(1969), '羅唐同盟의 瓦解-韓中記事 取捨의 比較-', 《歷史學報》44, 역사학회.
- ↑ 宋成有(2012), 中國史籍編纂與 三國史記 , 新羅學國際學術大會論文集 6, pp.183-184
- ↑ 노태돈 2009, 30~31쪽
- ↑ 주보돈(2011), '7世紀 羅唐關係의 始末', 《嶺南學》20,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pp.153-155.
- 1 2 《구당서》 권199상 동이전 백제
- ↑ 김진한 2014, 261~262쪽
- ↑ 孫晉泰(1948), pp. 166-167.; 李基白·李基東(1982), 《韓國史講座-古代篇》, 一潮閣, p. 291. 주보돈(1993), '金春秋의 外交活動과 新羅內政', 《韓國學論集》 20,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소, p. 50.; 노태돈(2009), pp.139-142.
- ↑ 《冊府元龜》 卷991 外臣部36 備禦 第4,
- ↑ 《동문선》권57 서 '답당설총관인귀서'
- 1 2 《삼국사기》권제46, 열전제6, 강수
참고 문헌
[편집]- 김진한 (2014).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에 보이는 신라·당 밀약 기사의 사료적 검토”. 《인문논총》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71 (1).
-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 박현숙 (2002.12). “[명문으로 보는 역사] 「답설인귀서」, 나당전쟁기 신라 외교의 표상”. 《내일을 여는 역사》 (재단법인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10).
- 이동근 (2009). “삼국사기 소재 서독류(書牘類) 일고찰”. 《우리말글》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