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유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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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홍릉과 유릉
(南楊州 洪陵과 裕陵)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사적
종목사적 제207호
(1970년 5월 26일 지정)
면적1,211,286m2
시대조선시대
소유문화재청
위치
주소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금곡동)
좌표북위 37° 37′ 55″ 동경 127° 12′ 40″ / 북위 37.63194° 동경 127.21111°  / 37.63194; 127.21111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홍릉(洪陵)과 유릉(裕陵)은 대한민국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능으로 홍릉(洪陵)은 대한제국의 초대황제 고종 광무제명성황후 민씨의 능이며, 유릉(裕陵)은 대한제국 2대 황제 순종 융희제순명효황후 민씨와 순정효황후 윤씨의 능이다.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다.

개요[편집]

조선 왕릉의 정자각(丁字閣)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을 세웠으며, 양쪽으로 문무석을 세워 홍살문까지 기린·코끼리·해태·사자 등의 석수를 세웠는데 중국 명나라 황제능의 제도를 따라 조성된 황제릉이다. 일제강점기에 홍릉은 고종의 인산일[1](1919년)에, 유릉은 순종의 인산일(1926년)에 각각 조성되었다.

조선 왕릉 중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며 순종의 유해가 안장된 유릉은 사실상 조선 왕릉 중 마지막으로 조선왕조 임금의 유해를 모신 왕릉이 되었다. 조선 왕릉은 이렇게해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조선왕조 건국자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시작으로 고종과 순종의 홍유릉까지 연산군묘와 광해군묘를 제외한 모든 조선 임금의 유해들이 능 지위를 받으며 유해가 안장되었다.

능호(명칭)의 유래[편집]

한일 병합 조약(1910년) 이후 일본 제국의 지배에 의해 고종과 순종의 무덤은 황제릉이 될 수 없었는데(왕공가궤범, 제200조), 이때 황실에서 생각해낸 것이 명성황후의 홍릉과 순명효황후의 유릉이었다. 고종의 장례 때는 명성황후의 재궁(梓宮)을 청량리에 있던 구 홍릉(현 홍릉수목원)에서 현 홍릉(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옮겨 합장하였고, 순종의 장례 때에도 순명비(純明妃)의 재궁(梓宮)을 구 유릉(어린이대공원, 능동)에서 현 유릉(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옮겨 합봉하였다.

새로운 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능의 칭호를 가져다 쓰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제로서도 이것을 막을 구실은 없었으며, 능의 이장 문제 또한 이왕직이나 총독부가 관여하지 않는 황실 내의 문제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 문제는 별 탈 없이 처리되었다.

홍릉·유릉 권역내의 묘소들[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인산일(因山日), 조선 시대, 태상왕과 그 비, 왕과 왕비, 왕세자와 그 빈, 왕세손과 그 빈의 장례일 -다음한자사전-
  2. 대한제국 시기 홍릉은 한성부 동부 인창동(仁昌坊) 청량리(현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에 있었다.
  3. 대한제국 시기 유릉은 경기도 양주 용마산 내동(현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에 있었다.
  4. 영왕의 생모 순헌황귀비영휘원(永徽園)은 초장지 홍릉(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소재.
  5. 그러나 이 천장에 대해서는 문화재청이 일방적으로 천장한 것이라 하여 논란이 있다. 고양신문 Archived 2013년 9월 28일 - 웨이백 머신, 경기신문 기사와, 이에 대한 문화재청 해명
  6. 덕혜옹주의 친모, 귀인 복녕당 양씨묘는 고양시 서삼릉 묘역에 소재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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