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18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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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金弘集
Kim Hong-Jip.jpg
출생 1842년
조선 경상도 경주
사망 1896년 2월 11일 (55세)
조선 한성부에서 아관파천 사건 때 타살됨.
필명 아명(兒名)은 김굉집(金宏集)이고 자(字)는 경능(敬能)이며 아호(雅號)는 도원(道園)·이정학재(以政學齋)이고 시호는 충헌(忠獻)
직업 문관, 총리대신, 문필가
국적 조선 조선
소속 前 조선국 총리대신
학력 1867년 진사시 합격
1868년 알성문과 급제
활동기간 1867년 ~ 1896년
장르 저술, 문필
부모 아버지 김영작(金永爵)
어머니 창녕 성씨 부인(昌寧 成氏 夫人)
친지 이시영(사위)
배우자 남양 홍씨 부인
자녀 슬하 1남 1녀
종교 유교(성리학)

김홍집(金弘集, 1842년 ~ 1896년 2월 11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 정치가이다. 자(字)는 경능(敬能), 호는 도원(道園)·이정학재(以政學齋), 시호는 충헌(忠獻), 본관은 경주이다.

1880년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을 방문한 뒤, 신문물을 견학하고 돌아와 개화, 개항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한편으로 위정척사파 계열 인사들도 중용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으나 급진 개화파로 몰렸고,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진압 후 우의정, 좌의정 등으로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그 뒤 1896년 관제 개정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끌어들인 일본측의 지원으로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총리대신 재직 중 신분제 폐지, 단발령 등을 강행하는 한편, 함께 일본의 도움으로 개혁, 개방을 단행한 뒤에는 친일파로 몰려 아관파천 때 친러파의 군인들에게 살해당하였다.

원래 이름은 김홍집(金弘集)이었으나, 청 고종(高宗) 건륭황제의 휘가 ‘홍력’(弘歷)이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김굉집(金宏集)으로 가운데 자(字)를 바꾸었다.[1] 조선말기의 문신이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은 그의 사위였다. 박규수, 오경석, 강위의 문인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1842년 이조참판을 지내고 의정부영의정추증김영작(金永爵)과 정부인 성씨(成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의정부좌의정을 지낸 김명원의 후손으로,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의 친정아버지인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5대손이었다. 증조부 김효대공조판서를 지냈고, 종조부 김사목의정부좌의정을 지냈다. 어머니 성씨는 우계 성혼(牛溪成渾)의 후손이다.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인 환재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나중에는 시인 강위(姜瑋)의 문하에도 출입하면서 글과 시를 배웠다. 뒤이어 오경석(吳慶錫)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1867년 정시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성균관 재생 시절 성적이 우수하여 바로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초기 활동[편집]

1868년(고종 5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1873년에는 권지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승문원부정자, 승문원박사를 겸직하고, 승정원가주서가 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으로 사퇴했다. 1870년 다시 어머니 창녕성씨의 상을 당하여 다시 3년상을 더 치뤘다.

1875년에는 부사과를 거쳐 흥양현감으로 나갔다가 1877년 사과(司果)를 역임했다. 1878년 이후 호조참의, 공조참의, 병조참의, 예조참의를 두루 지냈다. 그 뒤 광양 현감(光陽縣監)을 거쳐서 1880년 예조 참의로서 제2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58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 제국을 다녀왔다. 귀국 이후, 서양 근대의 기술적 성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일본의 문물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조사시찰단의 일본 파견을 상주하게 하였다.

일본 유람[편집]

1880년 여름 그는 윤웅렬(尹雄烈), 이용숙(李容肅), 지석영(池錫永) 등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김홍집 일행은 1880년 7월 일본 기선 〈지토세 마루〉 편으로 부산항을 통해 도쿄로 도착했다. 도쿄 체재 1개월 동안 이들은 일본 정부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일본의 근대화된 모습을 두루 살폈다. 그런 한편 일본의 감언이설과 유혹에 빠져들어 친일파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들은 수신사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일본 정부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바, 인천을 개항장으로 지정토록 하고, 일본 공사의 한성부 주재 등이 필요하다고 본국 정부에 품신하는 등 일본의 주구 노릇을 하기에 이르렀다.[2] 한편 일본의 철도와 위생상태, 증기 기관차자동차의 운용 등을 본 김홍집과 일행은 충격을 받았다.

김홍집은 귀국한 뒤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과 정관응(鄭觀應)의 《이언 (易言)》을 소개하여 개화 정책을 적극 추진케 한 공으로 예조 참판에 승진했으나, 개화를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배척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책을 소개한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개화파의 지지를 받았지만 유학자 중심의 척사위정파(斥邪衛正派)의 심한 반발을 받아 부득이 자리를 물러났다. 그러나 곧 고종명성황후의 신임으로 통리기무아문의 통상사당상(通商司堂上)으로 복직했다. 그는 조선책략이언을 소개하며 조선은 미국, 청국, 일본 등과 손을 잡고 세계발전의 대열에 참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당시 유생들과 지역의 유림들은 그가 흉악한 모의를 꾸민다며 규탄하였다.

귀국과 정치 활동[편집]

외교, 개화파 활동[편집]

1882년 구미 열강의 통상 요구와 임오군란의 뒤처리 등 복잡한 문제에 부딪친 조선 정부에 다시 기용되었다. 전권대신 이유원(李裕元)의 부관으로서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맺는 데 앞장서는 등 여러 나라와 수호조약(한미(韓美)·한영(韓英)·한독(韓獨) 등) 등을 맺을 때 유효적절한 수완을 발휘하여 ‘비오는 날의 나막신’에 비유되곤 하였다.[3] 한학에 능통했던 그는 1882년 구미(歐美) 열강의 통상요구에 따른 복잡한 국내문제와 임오군란(壬午軍亂)의 뒷처리 등으로 다시 기용되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과의 수호조약 체결에 전권대신들의 부사(副使)로서 활약하였고, 윤치호를 통역으로 채용하여 번역과 내용해석을 전담했다. 제물포 조약 체결에는 이유원(李裕元)의 부관으로 참여하여 일본측의 요구를 일부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타협하였다. 여러 조약의 체결을 잘 처리한 공으로 경기도 관찰사로 승진되었다.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주사(陳奏使)에 진주사 조영하(趙寧夏)와 함께 진주 부사로 톈진(天津)에 파견되어 흥선대원군의 석방을 교섭하고, 조선 정부의 흥선대원군 석방 운동을 중재하여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을 설득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어 이홍장의 막료인 마건충(馬建忠), 주복(周馥)을 설득하여 무역협정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의정, 조인했다.

1883년 규장각직제학을 거쳐 1884년 지춘추관사, 예조판서, 한성부 판윤, 독판교섭통상사무 등을 지내면서 대외교섭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항상 조선이 발전하려면 선진 외국과 제휴해야 한다는 개화 교류사상의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피력하였다. 그의 개화사상의 특징은, 개화는 필연적으로 실현시켜야 하지만, 급진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점진적 방법만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위정척사파와 지방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맹목적인 반감을 사게 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흥선대원군과도 접촉하며 협력을 요청하였지만 대원군은 그의 협조 요청을 냉소적으로 대하였다.

1884년 예조 판서·한성부 판윤을 역임하였고,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우의정, 좌의정 등으로 전권대신이 되어 한성 조약을 체결한 뒤에 사임하였으며, 판중추부사로 한때 한직에 머물러 있었다. 한편 개항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노론 북학파소론 등을 중용하여 그는 개화파로 몰렸다. 그러나 개항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동시에 최익현의 문인인 박병철(朴炳哲) 등의 노론 위정척사계열 성리학자들을 중용하였다.

한성조약이 성사된 뒤 판중추부사로 밀려났다가 1887년 다시 의정부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위정척사파의 반발과, 지방 유림들의 매국노라는 규탄 여론으로 곧 사직했다. 이후 판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가 1889년에 행수원부유수로 좌천되었다.

제1차 김홍집 내각 조각[편집]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 일본 세력의 침투가 표면화되자 그 힘을 빌어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해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자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청나라군을 끌어들였고, 조선에 침투를 바라던 일본군은 청일 전쟁을 일으키기 며칠 전인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에 경복궁을 습격하고 무기고를 탈취하는 등 김홍집 일파를 지원하였다. 한편 김홍집은 일본 조정과 친하다는 이유로 음력 6월 말부터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고 총리대신이 되어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개혁기구로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대원군을 불러들여 민중의 불만을 완화하고자 하였다.

총리대신으로 그는 악습을 폐지하고 과거제 폐지, 은본위제의 신식화폐제도 채택, 의정부와 궁내부의 관제 시행, 도량형제도의 채택 등의 개혁을 단행했다.

2차 내각 조직과 개혁 활동[편집]

청일 전쟁의 결과 일본이 득세하자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갔던 강력한 친일파 박영효가 입각한 제2차 김홍집, 박영효 연립 내각이 성립되었으며, 이때 군국기무처를 없애고 1차 내각때부터 작성한 초안을 완성, 새로운 법령인 홍범 14조(洪範十四條)를 직접 수립하여 고종으로하여금 발표하게 하였다. 이어 8아문을 7부로 고치고, 지방 8도를 23부로 바꾸고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여 사범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재정난과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과의 대립, 유길준 등의 소극적 협력 등으로 지원 세력이 없어 내각은 곧 와해되고, 박영효가 역모사건으로 일본 망명하고 박정양 내각이 탄생하였다.

생애 후반[편집]

친일 의혹[편집]

법률과 제도를 바꾸고 일본의 변화된 관제와 복식을 조선에 도입하려 했다. 또한 양력의 사용과 우편 제도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설에는 김홍집은 자신이 군국기무처의 총재를 겸임하면서 총재보좌 명목으로 일본 공사관 직원 4~5명을 끌어들여 이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등 친일매국행위에 앞장섰다[4] 는 주장도 있다.

자살 미수[편집]

이어서 들어선 박정양(朴定陽)내각이 열강에 접근하려는 정책을 쓰자, 일본은 이를 경계했고 그는 이 사이 일본측과 접촉하였다. 박정양 내각이 새로 세력을 뻗기 시작한 구미 열강에 친근하려는 정책으로 기울어지자 일본 제국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죽인 후 제3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였다.

10월 8일 왕비가 암살당하자 김홍집은 자결하려 하였다. 때마침 김홍집을 방문했던 유길준은 그럴 필요 없다며 김홍집을 극구 말렸다.

대감 좀 고정하십시오. 대감께서 돌아가신다 해서 모두가 수습된다면 모르지만 왕비는 이미 참변을 당했고 사태는 벌어졌습니다. 우리가 거꾸로 일격을 당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태를 수습하는 데 노력하는 것도 충절이 될 것입니다. 대감께서는 그 뒤에 가서 돌아가셔도 늦지 않으니 제발 좀 고정하시고 심사숙고해주시기 바랍니다.[5]
유공 그대가 말하는 뜻은 다 알아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보전과 개혁을 위하여 모든 굴욕을 참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번 사태만은 절대로 저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세록지신으로 또 일국의 중신된 자가 국모의 참변을 보고 어찌 살아서 폐하와 만백성을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유공의 처지와 다릅니다. 유공은 어떤 난국이라도 극복해서 앞으로 이 나라를 건져야 할 사명이 있지만 내가 할 일은 이제 내 스스로 죽는 일 밖에 없습니다.[5]

유길준은 어렵게 김홍집을 설득하여 자살하려는 것을 말리고 대궐로 데려갔다. 1895년 10월 9일 명성황후 암살사건이 일어난 뒤 김홍집을 수반으로 내각이 개편되었다.

몰락과 최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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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내각에서는 일본의 압력 외에도 단발령(斷髮令)의 강행 등 급격한 개혁을 실시하다가 성리학자들의 반발로 전국적인 의병 봉기와 집회를 야기하였고, 1896년(건양 1년) 러시아의 세력이 증대하여 드디어 아관파천이 일어나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파 내각이 조직되었다. 그와 동시에 김홍집은 많은 대신이 피살될 때 매국 친일당의 두목으로 몰려 광화문에서 친러파 군인들과 군중들에게 살해되었다. 저서로는 '이정학재일록 (以政學齋日錄)'이 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4세였다.

살해된 시신은 광화문 밖에 효수되었고, 시신은 도륙되어 각도로 보내졌으며, 백성들은 수급에 돌을 던졌다 한다. 황현매천야록에 의하면 그의 시신을 씹는 자까지 있었다고 전한다. 그의 가족들에게도 연좌제가 적용되었는데, 이시영에게 시집간 딸 등 이미 출가한 딸들만이 연좌제를 피하였다. 한성부 사저에 있던 부인은 연좌되어 관비로 끌려갈 것을 예상하고 아들을 죽이고 자살하였다.

사후[편집]

그는 개화파가 몰락하면서 역적으로 단죄되었고, 1910년 한일 병합후에는 친일파의 득세를 불러온 역적으로 단죄되어 재평가받지 못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사위 이시영에 의해서 복권 여론이 조성되었고, 1960년대 가서야 개혁 노력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시작되었다.

묘지는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에 안장되었으나 한국전쟁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로 이장하였다.

저서[편집]

  • 이정학재일록 (以政學齋日錄)

가족 관계[편집]

  • 고조부 : 김후연(金後衍)
    • 증조부 : 김효대(金孝大)
      • 조부 : 김사식(金思植)
        • 생부 : 김영작(金永爵, 1802년 - 1868년)
        • 생모 : 창녕 성씨(? - 1870년)
          • 형님 : 김항집(金恒集, 요절)
          • 형님 : 김승집(金升集)
          • 부인 : 남양 홍씨
            • 아들 : 김경희(金敬熙)
            • 장녀 : 경주김씨
            • 사위 : 이시영(李始榮, 1868년 - 1953년)
              • 외손자 : 이규봉(李圭鳳)
              • 외손자 : 이규홍(李圭鴻, ? - 1951년)
              • 외손자 : 이규흥(李圭興)
              • 외손자 : 이규열(李圭烈, ? - 1953년)
              • 외손부 : 서차희(1910년 - ?)
          • 동생 : 김증집(金證集)
      • 외할아버지 : 성재순(成載淳)
        • 장인 : 홍재선(洪在善)

사상과 신념[편집]

그는 항상 조선이 발전하려면 선진 외국과 제휴해야 한다는 개화 교류사상의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피력하였다. 그의 개화사상의 특징은, 개화는 필연적으로 실현시켜야 하지만, 급진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점진적 방법만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평가[편집]

김홍집은 행실이 그가 주장한 바와 엇갈리는 바가 많아서 ‘친일파 애국자’로 표현되곤 한다.[3]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조선을 개혁하려 했던 정치가라는 평가와 함께 일본에 이용당한 친일파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또한 그가 죽기에 앞서 “일국의 총리로 동족 손에 죽는 것은 천명”이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에 책임감 있는 정치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을미사변을 방조한 점과 고종에게 명성황후를 '서인'으로 폐하는 조칙에 서명하도록 한 강요한 점 등은 여전히 그의 정치적 기준에 대한 논란으로 남아있다.

또한 구한말의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3차의 내각을 이끌며 개항과 사회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외세의 도전을 자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실천하기도 전에, 정국의 혼란으로 군중에게 살해되는 비극을 감수해야 했다는 시각도 있다.

함께 보기[편집]

김홍집을 연기한 배우[편집]

참고 자료[편집]

  •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개화정책과 그 반향〉
  • 유영익, 《갑오경장 연구》(일조각, 1990)
  • 정성희, 조선 말기 난세를 살다간 최고의 정치외교가 김홍집, 네이버케스트[6].

각주[편집]

  1. 정교(鄭喬) 저, 조광(趙珖) 편, 《대한계년사 1》(소명출판, 2004년) 93쪽.
  2. 김삼웅 (1995년 7월 1일). 《친일정치 100년사》. 서울: 동풍. 37쪽. ISBN 978-89-86072-03-7. 
  3.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66~67쪽쪽. ISBN 89-7199-036-8. 
  4. 김삼웅 (1995년 7월 1일). 《친일정치 100년사》. 서울: 동풍. 39쪽. ISBN 978-89-86072-03-7. 
  5. 유동준, 《유길준전》 (일조각, 1997) 205
  6. 정성희, 조선 말기 난세를 살다간 최고의 정치외교가 김홍집, 네이버케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