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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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취려(金就礪, 1172년 ~ 1234년 3월 22일(음력 2월 21일[1]))는 고려 후기의 문신, 장군이다. 본관은 언양(彦陽)이며, 예부상서(禮部尙書) 김부(金富)의 아들이다. 충렬왕충선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의 할아버지이다.

고려 고종 때 몽고군에 쫓겨 서북면을 침략한 거란족을 격퇴한 공으로 수태위(守太尉) 중서시랑(中書侍郎) 평장사(平章事) 판이부사(判吏部事) 태사(太師)에 올랐다. 고려 고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생애[편집]

음관로 등용되어 정위(正尉)에 임명된 후 동궁위(東宮衛)를 거쳐 장군(將軍)이 되었다. 1216년(고종 3)에 거란 왕자 금산(金山)·금시(金始)가 대요수국왕(大遼收國王)이라 칭하고 몽골군에게 쫓기어 고려의 서북면으로 쳐들어왔는데, 이들 거란족은 서북면에서 행패를 부리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김취려는 이철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서북면에서 거란족과 교전하여 무찌르고 1218년의 재침때에도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원수(元帥) 조충(趙冲)과 함께 평정하였다. 또한 한순(韓恂) 등이 의주(義州)에서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는 등, 공로가 많아 판병부사 시중까지 되었다.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 김부(金富), 예부상서(禮部尙書)
    • 아들 : 김전(金佺), 태부(太傅)
      • 손자 : 김변(金賆), 태학사(太學士)

김취려가 등장한 작품[편집]

평가[편집]

  • 성미가 곧고 청백하여 군기를 엄정히 하고 부하를 골고루 아끼었으며 싸움에서는 기발한 계교를 많이 꾸며서 큰 공을 세웠다.
  • 1983년 6월 강화도에 사적비가 건립되었다.

전기 자료[편집]

  • 『고려사』 권103, 「열전」16, 김취려
  • 「김취려 묘지명」(김용선 편, 『역주 고려 묘지명 집성 (상)』(개정중판), 한림대학교출판부, 2012)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고려사』 권23, 「세가」23, 고종 21년(1234)에는 5월 21일(기미)에 사망했다고 되어 있지만, 「김취려 묘지명」에는 2월 21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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