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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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정진(奇正鎭, 1798년~1879년)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노사학파의 시조이다. 성리학의 화이론을 바탕으로 위정척사를 주장한 대표적인 위정척사파 선비이다.[1] 본관은 행주, 초명은 금사(金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생애[편집]

1798년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아버지 기재우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1] 기묘사화에서 조광조의 문인이었던 기준(奇遵)이 유배를 가게 되자[2] 그의 형이었던 기진은 광주목으로 기원은 장성군으로 피신하였는데 기진의 아들이 조선 중기 유학자 기대승이다. 기원의 후손들은 대대로 장성군에서 살면서 장성군에 정착한 행주 기씨의 시조가 되었다.[3]

기정진의 아버지 기재우는 4세에 양친을 잃고 큰아버지가 있는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살았다. 기재우는 풍수지리에 심취하여 어머니의 묘를 순창군에 마련한 뒤 계속하여 순창에서 일생을 보냈다.[4] 기정진은 6세에 천연두를 앓아 왼쪽 눈이 실명하였는데[5] 순창에서는 아버지 기재우의 풍수지리 심취와 관련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어려서 집안 하인이 실수로 눈을 다치게 하였는데 한쪽 눈을 다친 아이가 태어나야 집안이 발복한다면서 아버지가 오히려 기뻐하였다는 설화이다.[4]

1815년 양친을 여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행주 기씨가 모여있는 장성으로 이주하였다.[6] 기정진은 어려서 따로 스승을 두지 않았지만 7세에 한시를 짓는 등 천재성을 보였다고 한다.[7]

아버지의 유언에는 관직에 나가지 말라는 당부도 있어서[7] 기정진은 1828년 향시에 합격하고 1831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6] 대과를 치르지는 않았다.[7] 조선 후기 과거를 치르지 않는 이름난 선비에게 관직을 재수하는 유일(遺逸) 관례에 따라 1832년 강릉참봉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관직에 재수되었으나 모두 사임하였고[6] 45세가 되던 1842년 전설사 별제로 임명되었으나 6일 만에 병을 핑계로 사임하였다.[3] 전설사는 병조 소속의 궁중의 각종 의례나 행사에 사용되는 천막, 장막을 관리하던 관청으로[8] 별제(別提)는 종6품 또는 정6품인 관청의 실무자이다.[9] 기정진은 6세에 천연두를 앓은 이후 평생 다양한 병을 앓아 허약하였다. 그가 남긴 시에는 병을 앓아 친구를 만나지도 유람을 가지도 못하는 처지를 한탄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5]

46세가 되던 1843년 《납량사의》(納凉私議, 더위나 식히려고 떠올리는 개인적 생각)를 지어 독자적인 학문의 완성을 보였다. 이후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표적인 논쟁인 사칠논쟁호락논쟁에서 대한 독자적인 입장을 피력하는 한편 제자를 받아 노사학파를 이루게 된다. 노사학파는 기정진 이전까지 뚜렷한 학파 없이 기호학파와 연계되어 있던 호남지역 최초의 독자적 유학 학파였다.[10]

기정진은 18세에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고향인 아치실로 돌아갔으나 오래 머무르지 않았고 장성군의 맥동, 매곡, 탁곡, 여의동 등을 옮겨가며 살았다. 그나마 가장 오래 머무른 곳이 65세부터 13년간 거주한 하사리(지금의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로 노사(蘆沙)라는 아호는 노령산(蘆嶺山) 아래 하사리(下沙里) 사람이라는 뜻이다.[7]

1862년 진주민란의 원인을 삼정의 문란으로 보고 이를 바로잡을 것을 요구하는 상소인 〈임술의책〉(壬戌擬策, 임술년에 고안한 방책)을 지었으나 올리지는 않았다. 이 상소는 아들이 보관하다가 그의 문집 《노사집》에 실려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11] 기정진은 〈임술의책〉에서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는 방법으로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제시하는 각종 폐단을 철폐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2]

1866년 병인양요를 맞아 〈병인소〉로 불리는 상소를 올렸다.[13] 〈병인소〉에서 기정진은 내치를 바로잡고 군비를 강화하면 외적을 물리칠 수 있다며 척화주전론(斥和主戰論, 화친하자는 주장을 물리치고 싸우기를 주장함)[14]을 펼쳐 위정척사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15] 기정진이 〈병인소〉에서 제사한 방법은 미리 조정의 계획을 확정할 것, 외교적 언사를 다듬을 것, 지형을 살피고 군사를 조련할 것 등의 여섯 가지 책략이었고[1] 훗날 육조소(六條疏)라 불리게 된다.[6]

기정진은 호락논쟁과 사칠논쟁의 근간이 되는 이기론에서 철저히 주리론(主理論, 이가 주체가 되고 기는 종속된다는 주장)의 입장을 취했으며 기호학파의 태두인 율곡 이이의 주기론마저 이러한 입장에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년인 80세가 되던 1878년 제자들에게 공개한 《외필》(猥筆, 외람된 글)에서 이이의 주기론을 반박하였고 이는 20세기 초까지 유학자들의 논쟁을 불러왔다.[16]

78세가 되던 1878년 기정진은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로 거처를 옮겼고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878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883년 기정진의 문집인 《노사집》이 간행되었고 1910년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노사의 거처는 1927년 고산서원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고산서원은 1994년 정비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17]

학술과 학파[편집]

기정진은 노사학파의 시조이다. 호남 지역은 기정진 이전에 특별한 학파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기정진의 제자인 노사학파의 문인은 기록된 사람만 6백여 명에 달하는데[7] 이 가운데 대다수는 호남 출신이었다.[10]

기정진은 특별히 학맥을 전수한 스승이 없다.[1] 기정진은 기대승에서 이어지는 기씨 가문의 가학과 김인후의 문인이었던 10대조 기효간 등 선조들의 학문에서 영향을 받아 율곡 이이의 학설을 따르는 기호학파의 영향 아래서 학문을 닦았다.[10] 그러나 당시 기호학파의 최대 논쟁 주제인 호락논쟁에 대해서는 호론과 낙론 모두를 비판하며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하였다.[18] 기정진은 선대의 논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성리학의 근원인 송나라 시기 문헌을 직접 연구하였으며 이일원론의 관점에서 주기론을 주장하였다.[1] 기정진은 이기론의 이(理)와 기(氣)를 대칭적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하여 주종관계로 해석하였다. 그는 오직 이만이 실제하며 기는 파편화된 이의 한 조각이라는 입장을 제시하였다.[10] 기정진의 이러한 학설은 기호학파가 기존에 받아들인 이이의 주리론과도 다를 뿐만 아니라 이와 기가 서로 작용하여 발생한다는 퇴계 이황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19]과도 다른 것이다. 기정진은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본원적 실제인 이가 여럿으로 나뉘어 기로 나타난다는 이일분수(理一分殊)로 표현하였다.[1] 기정진의 이기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퇴계 이황을 이은 영남 유학인 정재학파 역시 이황의 이론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것과 맞물려 20세기 초 새로운 유학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20]

위정척사[편집]

기정진이 〈병인소〉를 올린 이후 그의 문인은 스승을 쫓아 위정척사파가 되었다.[7] 훗날 고산서원이 되는 기정진의 거처 담대헌은 기정진 사후 손자인 기우만이 물려받았다. 기우만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호남 유림의 종가 노릇을 하였고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각 고을에 통문을 돌려 을미의병을 조직하였다. 기우만의 의병은 광주와 나주로 진출하였으나 고종이 파견한 선유사의 명령에 따라 해산하였다. 이후 기후만은 아관파천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활동을 하다가 경술국치 이후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하며 은거하였다.[21]

저서[편집]

기정진의 대표적 저서는 1843년의 《납량사의》(納凉私義), 1878년의 《외필》(猥筆)이 있다. 1883년 사후 발간된 《노사집》(蘆沙集)에 수록된 《답문유편》(答問類編)은 유학자들과의 서신 교환을 묶은 것으로 주요 유학 논쟁에 대한 기정진의 입장이 수록되어 있다.

  • 《납량사의》(納凉私義)
  • 《답문유편》(答問類編)
  • 《외필》(猥筆)
  • 《노사집》(蘆沙集)


관련 문화재[편집]

조선 고종 때의 학자이자, 성리학의 6대가 가운데 한 사람인 노사 기정진(1798∼1876)의 문집과 그의 저서 『답문류편』을 고종 39년(1902)에 목판에 새긴 것으로, 문집은 653매, 『답문류편』은 209매이다.

목판에 새긴 연대는 늦으나 빠진 목판이 없을 뿐 아니라 간행처인 신안사가 조선 후기 경상도 일원의 출판기능을 담당했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간행된 책자가 전하는 것이 없으므로 그 사료사적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999년 7월 5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214호로 지정되었다.

각주[편집]

  1. 순창인물(2) 노사 기정진, 조선 성리학 마지막 거장, 열린순창, 2019년 2월 14일
  2. 기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장성의 인물 노사 기정진, 장성군민신문, 2012년 1월 13일
  4. 기정진 조모 묏자리, 디지털순창문화대전
  5. 박세인, 〈노사 기정진 시에 나타난 애고의 시정〉, 《국학연구론총》, 2018, vol., no.21, pp. 243-268
  6. 기정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 - 조선 성리학의 6대가, 노사 기정진, 전남일보, 2020년 10월 13일
  8. 전설사, 위키실록사전
  9. 별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0. 박학래, 〈노사학파의 지역적 전개양상과 사상적 특성〉, 《국학연구》, 2009, vol., no.15, pp. 157-186
  11. 기정진, 《노사집》권3, 책(策), 임술의책
  12. 유학자들의 강학과 그 공간의 훼절, 우리역사넷
  13. 부호군 기정진이 이양선의 출몰과 관련하여 아뢰다,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고종 3년 8월 16일 임인
  14. 척화주전론, 《교과서 용어해설》, 우리역사넷
  15. 성리학, 몸으로 실천한 철인(哲人)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下, 한국고전번역원
  16. 이항준, 〈외필의 기원〉, 《유학연구》, 2020, vol.51, pp. 129-155
  17. 노사 기정진 선생, 의(義)로운 실천정신 깃든...'장성 고산서원(長城 孤山書院)', 투데이 광주전남, 2021년 10월 17일
  18. 호락논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 이기호발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 간재학파의 심주기론과 한말 주리론의 논쟁, 《신편한국사》, 우리역사넷
  21. 기우만, 율곡학 프로젝트